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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 미누엘 푸익>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감옥

  • 작성자 로자르아힘
  • 작성일 2010-03-19
  • 조회수 640

<「거미여인의 키스」 - 미누엘 푸익>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감옥

 

 

 

해독 

동성애자 몰리나와 게릴라 발렌틴. 그 둘은 지금 감옥에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는 이 감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서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영화를 들려준다.

처음 표범여인을 들려줬을 때 발렌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거리도 두지 말고 가까이 오지도 말아」라고 발렌틴은 말한다. 발렌틴은, 같은 남자지만 동성애자이고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몰리나에게 일정한 거리를 둔다. 자유와 혁명을 말하는 발렌틴도 성에 있어서는 차별을 보인다. 그와 달리 몰리나는 자유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여자답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자기보다 좀 더 강해야 하고, 우위를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렌틴의 분석적인 성격은 몰리나가 영화를 들려주는 것을 방해한다. 나치 선전 영화에서는 더더욱 둘의 성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점차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의 편수가 늘어날수록 둘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몰리나가 가석방 될 때 발렌틴이 자신의 계획을 알려줄 정도로 말이다. 몰리나는 게릴라인 발렌틴을 이용해 소장과 접촉해서 게릴라군의 정보를 빼오는 대신 가석방이라는 조건을 받는다. 그러나 소장을 만날 때 마다 정보를 알려주기는커녕 음식을 얻고 끝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정부의 계획으로 몰리나는 가석방 되었지만, 정부의 요원이 미행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극좌파에게 죽임을 당한다.

대화만으로 이뤄진 「거미 여인의 키스」는 그들의 말만으로 그들의 기분과 성격 등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말로, 대화로 그 사람을 알아간다. 그러나 사람의 말에는 모든 게 솔직하게 투영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말하다 멈출 때도 있고 숨길 때도 있다. 이 책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말에 숨겨진 억압적인 면들을 보여주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있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말에는 자주 뜬금없는 곳에서 주석이 붙은 것이 보인다. 아주 짧고, 큰 의미를 읽어내기엔 무리가 있는 말에 주석을 달아 몇 장에 걸쳐 설명한다. 주석의 역할 자체가 설명이기도 하지만, 주석을 섞음으로써 몰리나와 발렌틴이 있는 감옥이라는 장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발렌틴과 몰리나의 말에는 억압된 것들(자유, 성)이 존재한다. 그곳은 그 둘의 감옥이다. 그렇기에 주석이나 말 이외의 설명으로 된 문장은 그들의 이야기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너무 많이 억압 받고 있어서 문명인답게 행동할 수 없는 걸까? 그런데 외부 세계의 적이 우리를 억압할 수 있을까?」

발렌틴의 질문에 몰리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문명인답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이렇게 감옥에 갇혀 고통 받는 것은 분명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인이라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발렌틴이 말하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억압’은 사실 감옥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가고 있는 나라의 체제와, 결혼제도와, 남녀의 이성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고 문명의 산물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발렌틴과 몰리나는 갇힐 수밖에 없는 걸까?

본능적인 충동 요인들을 억누르지 않고는 사회 규범을 준수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p175 주석)

우리는 발렌틴과 몰리나와 같은 충동요인을 억누르면서 사회 규범을 준수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감옥에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다. 특히나 번화한 도시에 감옥이 있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그 많은 감옥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학교에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안양교도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은 본 일이 있지만, 교도소에 가본 일은 없다. 주위가 한적하고 사람이 모이지 않은 곳에 감옥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회악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게 지금의 우리에겐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옥의 존재를 알고 있다. 감옥을 통해 우리는 치안의 안전을 느끼고 바깥세상에서 자유를 확인한다.

「내 마음도 역시 내 동료를 죽인 그 몹쓸 반동 분자들과 같아…… 나도 그들과 똑같은 놈이야. 아주 똑같아」

「네가 그놈들과 같았다면, 넌 여기에 있지 않았을거야」

발렌틴이 자신이 반동 분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자 몰리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그랬다면 발렌틴이 지금 감옥에 있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그렇다면 자유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감옥 밖이 자유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정작 자유는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다면? 몰리나가 말하는 「여기」, 바깥세상이 진짜 감옥인걸까?

동성애자의 사회적 기능은 비판적인 철학자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의 존재는 사회의 억압된 부분의 흔적을 영원히 보여주기 때문이다.(p259 주석)

바깥세상에서의 반동 분자는 몰리나 같은 동성애자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성적 취향은 사회 규범을 위해 감옥에 갇혔는데, 강한 억압의 성격을 가진 감옥은 오히려 바깥세상이 얼마나 불안전한지, 부자연스러운지 보여준다.

몰리나는 스스로 남자를 사랑할 때는 여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들어보면 몰리나 안에 갇혀 있는 여자를 볼 수 있다. ‘가장 해방에 필요한 여성은 모든 남자가 자신들의 마음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여성상’(p260 주석)이라고 말했듯이, 성의 억압을 보여주는 동성애자 몰리나의 안에는 또 다른 감옥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몰리나는 가석방 되었지만 죽고 만다. 극좌파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아니면 몰리나 스스로 죽음을 자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몰리나의 죽음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이 존재하는 곳에는 마치 흉터처럼 그 아픔을 상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렌틴은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마르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발렌틴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 마르타는 바로 발렌틴 안에 있다. 책 중간에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실려 있는데, 한 남자는 해변에 누워있고 거미여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 남자 곁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다. 마르타는 거미여인 몰리나 인 것이다. 그 둘의 대화도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와 겹쳐진다. 충분히 쉬었고 동지와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는 발렌틴의 말에 마르타는 그 동지들의 이름이 제일 듣기 싫었다고 말한다. 발렌틴은 마르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마르타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고, 그녀가 사라질 것 같다고 고백한다. 거미여인은 발렌틴을 안심시킨다. 이것은 짧지만 행복한 꿈이라고.

프로이트는 어떤 것이 현실이고 꿈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꿈꾸는 순간이 현실이고, 깨어나는 순간 꿈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현실이고 옳다고 믿고 있는 이 ‘바깥세상’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꿈에는 많은 억압된 것들이 상징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억압된 것들이 모여 있는 감옥이야 말로 우리들의 꿈, 현실이다.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 어떤 느낌……」

「……」

「나는 없고……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 어떤 느낌. 그 느낌 속에서 발렌틴과 몰리나는 같이 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몰리나는 발렌틴이 될 수 있다. 감옥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면,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감옥도 아니고 바깥세상도 아닌 곳에서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억압했던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을까.

로자르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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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르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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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르아힘
  • 201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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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모든 걸 떠나서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할따름 ㅎㅎ

    • 2010-04-15 22:46:5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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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 몰리나의 죽음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이 존재하는 곳에는 마치 흉터처럼 그 아픔을 상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옥도 아니고 바깥세상도 아닌 곳에서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억압했던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의문을 하며 읽어나가는 독서는 많은 생각들의 근거를 찾아가야 하는 독서와 독후감쓰기 활동이므로 많은 노력이 필요할 듯 하군요. 책의 내용에서 사색의 끈을 이어가는 진지한 독법이 해독의 장점이자 개성이라고 봅니다.

    • 2010-04-05 16:26:27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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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도 이책을 읽었었는데 밑에 주석도 많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책이에요.ㅎㅎ 다 읽고나서 그 안에 나오는 영화도 직접 찾아보고 그랬었던 게 생각이 나네요.

    • 2010-04-04 18:51: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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