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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로게이트- 변화하는 인간의, 불변하는 성질

  • 작성자 泥花
  • 작성일 2009-10-26
  • 조회수 1,300

예전에 어떤 과학서적에서 의료기술과 위생학의 무궁무진한 발달 덕분에 현대의 인간은 진화에 대한 종언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었으면 죽어버렸을 질병에도 현재의 우리는 발달된 의학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살아남기에 '자연도태'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는 진화에 대한 종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인 부분에서만을 말하는 것이고, 미래의 인간은 발달된 과학기술문명을 바탕으로 결국 '싸이보그'라는 새로운 진화체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써로게이트는 엄밀히 따지고보면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가 말하는 싸이보그는 아니지만 인간의 새로운 진화라는 점에서는 분명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흥미롭게 여기고 주목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진화. 어째서 영화 써로게이트에서는 써로게이트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화'를 통해 변화한, 변화하는 인간들에게서 불변성이 내다보이는 것인가. 나는 거기에 영화의 또 다른 메시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모든 것들이 변화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불변성. 그것은 욕망이고 욕구다.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좋은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이고 그 결핍감에서 해방되려는 '욕구'는 태초에 신이 프로그래밍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욕구를 부정하고 저주하는 금욕주의는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악마적인 도덕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금욕주의는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을 탄압하는 독재와 폭력의 변태적 표현일 뿐이다. 욕구에 대한 진정한 초월은 자신을 속이고 부정하는 욕구의 억제가 아니라 자신을 믿고 긍정하는 욕구의 구현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인간의 욕구를 저주하지 않는 긍정적 세계관이 곧 자유와 민주를 선호하는 자유 민주주의 사상의 윤할유이자 메커니즘이다. 이와는 반대로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구(특히 재산욕)를 저주한 금욕주의의 역사 속 실례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구를 집단의 요구에 굴복시킨 노예의 정치사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평등이라는 전체 집단의 요구를 위해서 개인의 권력욕구, 소유욕구, 표현욕구, 비판욕구를 모두 부정하고 저주하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집단의 통제를 실현하려는 억압의, 노예의 가치체계가 바로 공산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창시자 맑스가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욕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인간의 본성을 고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튼간 개인의 욕구를 용납할 수 없는 공산사회는 결국 필연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대체, 대행하는 로봇 써로게이트는 분명 매우 매력적인 물건이다.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않고 헬기에서 떨어져도, 자동차에 치여도, 총에 맞아도 사용자는 죽지 않는다. 무거운 물건도 손쉽게 들 수 있고 전염병도 옮기지 않는다. 외모도, 성별도, 나이도 자기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다. 그래서 써로게이트 진화 사회에서 써로게이트는 인간이 가진 욕구의 실현을 도울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한다. 가령 써로게이트를 통한 생활은 불의의 사고나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을 일이 없기 때문에 안전과 생존을 원하는 인간의 생존욕을 실현시켜주고,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으로서는 여러가지로 효율성이 높은 써로게이트가 성취욕의 촉매로 사용되고, 항상 아름답기를 원하는 인간으로서는 젊고 멋진 모습의 써로게이트를 사용함으로 미적욕구를 충족시킨다. 항상 욕구하는 인류에게 이러한 써로게이트는 진화(evolution)를 넘어 가히 혁명(revolution)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알다시피 써로게이트 사회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음 하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 써로게이트는 의도적으로 욕망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수없이 비춰준다. 클럽에서 서로를 유혹하고 탐닉하는 젊은 남녀 써로게이트들, 한 여성 써로게이트를 강간하려는 두 남성 써로게이트, '잭킹'이라는 전기마약을 즐기는 써로게이트들, 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기 위해 뷰티살롱으로 모여드는 써로게이트들. 써로게이트 상태일 뿐이지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통해서 우리에게 욕구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써로게이트를 통한 욕구의 실현은 과연 진정한 인간 욕구의 실현일까?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써로게이트끼리 섹스를 하고, 스스로의 외모를 가꾸는 게 아니라 써로게이트의 외모를 가꾸고, 자신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써로게이트를 내세워 직장에서 성취하는 것이 진짜 인간 욕구의 실현일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니라 써로게이트가, 써로게이트 때문에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써로게이트 진화 사회가 붕괴한 까닭은 바로 욕구의 억압 때문이다. 일면적으로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별 다를 것이 없고 다만 사회생활을 자신 대신 써로게이트가 대행할 뿐이라고 보여지겠지만 써로게이트는 인간의 욕구를 역으로 이용한 억압의 매개체이다. 국가와 써로게이트 개발 기업간의 미묘한 협착 관계는; 성욕을 이용해 써로게이트 간의 섹스로 100억이 넘는 인류의 개체수를 조정하고, 성취욕을 이용해 초고령 사회 진입으로 감소하는 경제생산활동을 써로게이트를 통한 노동으로 증대시키고, 생존욕 보장과 승부욕을 이용해 써로게이트 대리전으로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이루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욕구를 해결하며 동시에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는 윈-윈 게임은 절대 아니다. 언뜻 보기에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듯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마주침이 없는 차가운 써로게이트 사회에서의 욕구는 축복이 아니라 모두에 대한 중대한 폭력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핵심적 욕구인 '애정'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이 사라지고, 가정이 사라지는 걸 넘어서 같은 인간이지만 써로게이트가 아니라면 고깃덩어리라고 표현하며 인간에 대한 애정마저 사라진 써로게이트 진화 사회.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보인 것이다. 주인공 그리어는 이런 애정이 메말라버린 세상의 진실을 간파했고, 사람들에게 인간 대 인간의 애정을 되찾고 대행로봇이 아닌 스스로를 세상에 내놓아 맞서기를 호소한다. 그래서 그는 바이러스 멸절이 아니라 써로게이트 다운으로 모든 사건을 종결 짓는다.

泥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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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泥花
  • 2009-10-03
데스노트 평론- 국가와 사회, 그리고 "왜?"

개인적으로는 만화가 더 낫다고 생각되지만 아무튼 만화든간 영화든간에 데스노트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냥 엄친아같은 라이토가 멋져 보이는 사람은 제외하고서,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데스노트가 사회 변혁에 있어 참으로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데스노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복잡한 절차를 거칠 것 없이 사람을 바로 죽일 수 있는 도구라는 데 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형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연나라는 그 보복으로 멸망당했지만, 만약 연나라의 태자 단이 데스노트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는 굳이 형가를 고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암살이 실패해 나라를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가 사회의 변혁을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이런 유용한 도구를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였건만 왜 그는 경찰에 쫓겼고, 탐정에게 쫓겼고, 국가에 쫓겼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가졌을 때는 모든 국가와 경찰이 그를 쫓았으나 L에게, 혹은 니아에게 데스노트가 넘어갔을 때는 그들 중 누구도 몰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국가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해답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바로 "국가권력의 통제 범위 안이냐, 바깥이냐?"가 라이토와 L, 니아의 차이점이다. 국가에서 데스노트를 그렇게 찾아 봉인하려는 이유는 데스노트가 단순히 이야기 표면에 드러난대로 살인을 쉽게 하는 도구여서가 아니다. 정의를 위해서도 아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면서, 그 역할은 국가 공권력을 대체할 수도 있는 수단이 바로 데스노트이기 때문이다. 데스노트는 범죄자 처단이라는 국가 공권력의 역할을 혼자서 대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사법적인 측면에서만의 대체수단이지만, 데스노트의 마성에 휩싸인 라이토가 '신'이 되길 원했던 것은 사법을 넘어 그가 행정과 입법이라는 다른 영역까지도 넘보려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실제로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통해 행정과 입법까지 장악하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행정과 입법도 한 개인이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면, 그 때 국가의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 개인이 국가의 권력을 견제없이 행사할 수 있는 수단(데스노트)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 것이며, 데스노트를 찾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국가가 협력했던 것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국가 공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서 국가가 이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까지도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행위는 수도 없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엄청난 살상을 불러일으켰고, 역사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한 시민교육의

  • 泥花
  • 200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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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특히 이 글에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지와 논거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제시하는군요. """"""""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제와 조정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에 대한 논거로 영화의 해당장면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군요. 예시보다 더 쉬운 설명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둡시다.

    • 2009-11-06 10:45:34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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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써로게이트- 변화하는 인간의, 불변하는 성질''''''''이라는 제목 아래 인간의 불변하는 욕망과 기계문명화된 로봇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글을 썼군요.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에 대한 통제와 조정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로 보입니다. 영화를 보고 글로 정리하는 일이 편안한 경험만은 아니터인데 열심히 의견을 제시하여 좋은 영화정보를 알 게 되어 유익한 글이로군요.

    • 2009-11-05 19:14:3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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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다시 봐도 조잡한 글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써로게이트를 인터넷 사회와 현대사회를 결부짓는 진부한 평론은 쓰기 싫기 때문에 수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 2009-10-31 15:06:3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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