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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평론- 국가와 사회, 그리고 "왜?"

  • 작성자 泥花
  • 작성일 2009-10-02
  • 조회수 1,626

개인적으로는 만화가 더 낫다고 생각되지만 아무튼 만화든간 영화든간에 데스노트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냥 엄친아같은 라이토가 멋져 보이는 사람은 제외하고서,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데스노트가 사회 변혁에 있어 참으로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데스노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복잡한 절차를 거칠 것 없이 사람을 바로 죽일 수 있는 도구라는 데 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형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연나라는 그 보복으로 멸망당했지만, 만약 연나라의 태자 단이 데스노트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는 굳이 형가를 고용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암살이 실패해 나라를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토가 사회의 변혁을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이런 유용한 도구를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였건만 왜 그는 경찰에 쫓겼고, 탐정에게 쫓겼고, 국가에 쫓겼던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가졌을 때는 모든 국가와 경찰이 그를 쫓았으나 L에게, 혹은 니아에게 데스노트가 넘어갔을 때는 그들 중 누구도 몰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국가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해답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바로 "국가권력의 통제 범위 안이냐, 바깥이냐?"가 라이토와 L, 니아의 차이점이다. 국가에서 데스노트를 그렇게 찾아 봉인하려는 이유는 데스노트가 단순히 이야기 표면에 드러난대로 살인을 쉽게 하는 도구여서가 아니다. 정의를 위해서도 아니다. 궁극적인 이유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지 않으면서, 그 역할은 국가 공권력을 대체할 수도 있는 수단이 바로 데스노트이기 때문이다.

데스노트는 범죄자 처단이라는 국가 공권력의 역할을 혼자서 대신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사법적인 측면에서만의 대체수단이지만, 데스노트의 마성에 휩싸인 라이토가 '신'이 되길 원했던 것은 사법을 넘어 그가 행정과 입법이라는 다른 영역까지도 넘보려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실제로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통해 행정과 입법까지 장악하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행정과 입법도 한 개인이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면, 그 때 국가의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 개인이 국가의 권력을 견제없이 행사할 수 있는 수단(데스노트)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 것이며, 데스노트를 찾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국가가 협력했던 것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국가 공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서 국가가 이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까지도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행위는 수도 없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엄청난 살상을 불러일으켰고, 역사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한 시민교육의 영향 탓인지 사람들은 그 사례들만을 크게 인식하기 때문에 국가의, 사회의 체계가 지지되는 행위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깨어있는 자세라고 생각하는 기류가 존재한다. 하지만 평소에 공기나 물의 중요성을 우리가 크게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의문에서 벗어나 실제로 국가와 사회체계를 무너뜨리고 데스노트처럼 한 개인에 의한 자유로운 권력행사가 가능할 때의 문제점에 대해선 우리가 실제로 체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단순히 사회 체계나 국가 권력행사의 억압성에 대해서만 문제삼으려 들고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사회 체계나 국가 체계는 1~2년에 걸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시민들에게 퍼지기 위해서 적어도 몇 년의 세월이 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려면 다시 몇 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된다. 경찰조직, 군대조직, 교육체계... 몇 년이 걸려서 최적화 된, 혹은 최적화 되어가는 체계를 자주 바꾸는 것에 대한 부작용은 다른 예를 들 것 없이 입시제도 하나만 봐도 충분하다.

군조직에서까지 민주화를 바라기 때문에 계급에 관계없이 명령에 계속 "왜?"가 붙어다니면 인권의 측면에서는 좋을지 모르나, 과연 모든 일에 대해 일일이 따지는 군 조직이 실제로 전쟁이 발생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왜 학생들에게 원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국영수같은 것만 가르치냐고 하나, 학생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기초지식을 가르칠만한 과목과 수단 방법이 몇 십년 이상 고안되어 정착된 것이 현재 교육체계임을 안다면, 그런 체계에 대한 한 순간의 "왜?"는 그 자가 다른 체계를 고안할 수 있는 천재가 아닌 이상 그냥 단순히 한 순간의 "왜?"에만 머무르게 될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한 순간의 "왜?"는 아무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사람들의 불만을 증식시킬 뿐이다.

물론 "왜?"라는 의문까지 가지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민주화 되어서 사회체계의 펀더멘탈적 역할을 마치 공기나 물처럼 가벼이 여기고 있는 사회에서 "왜?"는 "왜?"라는 의문에서 그치거나, 혹은 체계변화의 아이디어에 참고하는 정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왜?"라는 의문 자체를 마치 지식인의 상징인 양 내세워서, 의문을 갖지 않고 사회체계 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타인들을 가르치려고드는 행위와 네오가 매트릭스를 부수려 하는 행위를 동일시하려는 것은 사람들의 오만일 뿐이 아닌가?

泥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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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泥花
  • 2009-10-26
"단기"에 대한 다소 불편한 진실

올해 서기 2009년은 단기로 환산하면 4342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 '단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무엇을 근거로해서 단군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판단하며 또 그것을 환산해 왜 현재가 단기 4341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역사상에서 최초로 단기에 대해 연대환산을 언급한 사람은 고려의 '백문보'이다. 고려사 열전 25권 백문보 편을 살펴보면 且天數循環周而復始 七百年爲一小元積三千六百年爲一大周元 此皇帝王覇理亂興衰之期 吾東方自檀君至今已三千六百年乃爲周元之會 자연의 운수는 순환하며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700년을 한 개의 소원(小元)이라 하고 3600년을 쌓아 한 개의 대주원(大周元)으로 되는바 이것이 황, 왕, 제, 패(皇王帝覇)의 치란 성쇠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니 이것은 한 개의 주원이 되는 시기입니다.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역) 라는 기사가 나와있다. 일단 간략하게 우리나라의 단기 사용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대한제국에서 연호와 함께 단기가 병용되기 시작하여, 해방 직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부터는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단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폐지법령이 선포되어 현재에는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대에 사용하는 단기는 고려시대 백문보가 말한 단기와는 그 연대가 다르다. 현재의 단기연대를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서거정의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을 보면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이가 단군이며 국호는 조선이라 하였는데, 바로 당요 무진년이었다. 라고 나와서, 단군이 요임금 즉위 후인 무진년에 조선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동국통감에서 그 연대를 확정짓기 전에 이미 고려시대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즉위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壇君王儉以唐高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即五十年丁巳 非 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今西京] 始稱朝鮮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평양성(지금의 서경)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직지프로젝트 역) 라고 해서 단군의 즉위를 요임금 즉위 50년 후라고 비정했다. 그러나 주석에서 보시다시피 일연은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사실 요임금 즉위 후 50년이면 일연의 주석대로 정사년이고 이것을 소급해 올라가면 그나마 가장 BC2333년과 가까운 연도가 BC2344년으로 계산되지 완벽히 BC2333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단군 즉위년을 BC2333년으로 확정하게 된 것은 동국통감이 최초인 것이다. 동국통감은 어째서, 무엇을 근거로하여 BC2333년이라고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嘗考 自唐堯元年甲辰 至洪武元年戊申 摠三千七百八十五年 自檀君元年戊辰 至我太祖元年壬申 亦三千七百八十五年 吾東方歷年

  • 泥花
  • 200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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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즘.. 무정부주의였나..

    • 2009-10-12 21:15:2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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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제 글에 반대하는 주장을 생각해보면 극좌나 아나키즘 밖에 없는데, 애초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관념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기에 언급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뭐 그래도 분명 지적하신 부분이 수긍은 가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 2009-10-12 00:08: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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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을 주장할 때는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할 때, 내적 논리체계의 엄정성과, 외적 논리의 적합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내적 논리의 엄정성이 외적 논리의 적합성의 기초가 되므로 매우 신중해야 하겠지만, 글의 내적 논리가 탄탄하다 해도 관점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는 반론에 대한 충분한 대응을 하기 어렵다면 그 글에 대하여 온전히 수긍하고 넘어가기는 힘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에 부족함이 있다하면 정말로 수긍하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글의 내적논리 체계를 세워가는 방법에 대해 보완이 필요함을 밝혔습니다.

    • 2009-10-11 22:42:4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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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근데 사실 이 글이 약간 용두사미형이긴 하지만; 저는 이 글이 이번에 주장원에 뽑히지 못했다는 점이 잘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뭐랄까 제 사견이지만 글 자체로만 본다면 ''단기에 대한 다소 불편한 진실''보다는 이 글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 2009-10-10 23:41:3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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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꿀 건 바꾸더라도 지켜져야할 기본적인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것들이 존중되어야함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진보적 낙관론에 사로잡혀 그 동안 사회에서 누적되어 중요한 위치로 자리잡은 근본적인 체계마저 왜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 진짜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인가 저는 의구스러웠고, 중학생 때 데스노트를 읽자마자 문집만들기 수행평가로 이 글을 썼습니다.

    • 2009-10-10 23:30:3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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