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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여우

  • 작성자 아메리칸불독
  • 작성일 2006-10-09
  • 조회수 96

'1930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페루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詩'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인간과 자연의 合一, 그리고 뒤이은 '인간의 구원'은 과연 가능한가' 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후 쓴 가상의 일기입니다. 글을 다 읽으시고 자유롭게 생각을 남겨주신다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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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 20일 월요일

 붉은 커튼을 조심스러운 손으로 걷고 나니 싱그러운 봄 아침의 햇살이 창가로 들어왔다. 나의 침실, 나의 방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는 어제 쓰다만 시가 적힌 습작 노트가 놓여있었다. 풍부하고 아늑한 우리나라의 분위기, 열심히 산을 오르는 듯한 주가 지수,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주제로 시를 쓰다 잠들었나보다. 어제 일하느라 조금 고단했는지 붉은 머리카락이 약간 빠져서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 폭스는 오늘도 그렇게 푸근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젯밤 꿈에서 나는 또 달과 지구 사이를 헤엄쳐 가며 갓 출고한 차의 시동 소리를 들었을까, 하는 착각이 든다. 알고 보니 건너 있는 집이 나에게서 구매한 차가 부르릉, 하며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언제나 기분 좋은 하루가 계속되고 있다.

 내 나이는 30세, 취직을 한 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번창해 나갈 나이다. 미국 북동부의 평온한 중상류층 마을 안에 묻혀 사는 나에게는 안정적인 직장과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비록 아침 9시에 출근하여 밤 7시에 퇴근하며 매일 10명 정도의 고객들에게 광택 나는 새 자동차를 사도록 유혹하는 직업이 나의 직업인 외판원이지만, 본사의 실적 체크 때에도 걱정 없을 정도로 나는 수많은 상류층 인사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덕분에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경쟁체제 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유연하게 꼬리를 치는 붉은 여우(fox)의 교활한 성격이다. J.S.밀이 말했던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교활함은 언제나 허용되고, 교활한 자가 번 수천 달러의 돈은 고스란히 통장으로 안전하게 입성한다. 나처럼 돈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껏 내가 그려 놓은 전철을 따라오라. 개인주의의 시대인 20세기에서 내가 챙겨야 할 것은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집, 그리고 내가 버는 돈과 나의 직장이다. 다른 우매한 이들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다. 누가 나를 비판하겠는가. 여기 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는데....

 참, 아내의 이름은 도로시다. 아침마다 베드 트레이에 식사를 올려주는 그 성실성과, 나의 현실 감각을 잃지 않도록 신문을 항상 챙겨주는 아내의 따뜻한 마음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내 옆집 문이 어떤 색이며 그 집 안에는 가족이 모두 몇 식구가 사는지, 잔디에 스프링클러는 규칙적으로 돌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단 아내와 나는 그 어떤 부부보다도 금슬이 좋다고 자부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마을 커뮤니티에 지금까지 딱 한 번 출석했다. 우리 부부가 마을 소식에 늦어서 쓰레기를 버리는 요일을 못 듣고 한 달 동안 쓰레기를 길바닥에 방치해 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 내 일이 바빠 그러니 쓰레기 좀 그냥 치워 주면 안 되는 건가?

 교활함에서 즐거움을 얻는 나는 언제나 행복하다. 당신은 무리를 지어 달리는 버팔로로 쉽게 돈을 번 사나이의 이야기를 아는가. 자신을 버팔로 연구가로 소개한 이 청년은 신문에 몇일 몇시 몇분 몇초에 버팔로 떼가 지나갈 것이라는 정보가 담긴 초청장을 1달러에 판다는 공고를 냈다. 만약 그의 예상이 빗나간다면 그 남자는 2달러를 초청장을 산 사람에게 돌려준다고 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예상이 당연히 적중하지 못할 거라며 너도나도 1달러짜리 초청장을 샀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시간과 장소에서 버팔로 떼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는 2달러씩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손해를 전혀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버팔로를 관찰하는 장소로 가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강에서 유일한 뱃사공 노릇을 하며 운임 요금을 일인당 5달러씩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일단 손에 돈이 쥐어져야 마음이 놓이는 이 사회에서 교활함은 최고의 미덕이라는 사실과, 교활한 외판원이 움직이는 이 세상과 나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나도 어느새 구매자의 지갑을 여는 데 샘솟는 즐거움을 느끼는 직업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1928년 11월 3일 화요일

 위도가 높아서 그런지 이곳의 기온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매서운 바람이 빅토리아풍 싱글 스타일의 집 지붕을 휘감고 돌았다. 도로시가 거실 중앙에 있는 난로를 빨갛게 지피고 있었다. 우리 집은 정말 따뜻하고 아늑하다. 저 멀리 부엌에는 추수감사절을 기념할 때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오븐이 놓여 있었고 미시건에 사는 친척을 데려와 같이 식사하기 위한 새하얀 접시들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주석으로 만든 와인 잔, 아늑한 붉은 색 소파와 지난 겨울 알프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썼던 스키 용품이 보였다. 내가 회사에서 받는 돈이 모두 이 물건들을 사게 했다.

 물건들은 모두 세상의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든 기계로부터 태어나 생명을 가지고 내 집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물건들은 친구와도 같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존재다. 어쩌면 나는 이 각각의 상품을 수많은 신들의 형상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내 집에서 나는 이상적인 삶을 찾아가려 노력한다. 물건이라는 신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다. 하지만 세상에 새로운 상품이 끊임없이 등장하면 낡은 신은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나는 새로운 신의 형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집이 완벽한 모습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끊임없이 소비할 뿐이다.

 집안에 있는 모든 상품, 내가 입고 있는 상품이 곧 나를 말해준다. 옛날처럼 내가 옷을 지어 입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롤렉스 시계를 차고 영국제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곧 내가 그만큼의 가치를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으로는 내 교활한 화술을 보여주는 능력도 있겠지만, 이렇게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도 있다.

 돈은 자기의 몸을 바꿀 수 있는 여우와도 같아서 한 번 요술을 부리면 곧 공장에서 갓 찍어낸 물건이 내게로 온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을 집에 한가득 가져다 놓으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른다. 상품과 내가 집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결국 나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고 내가 돈으로 요술을 부릴 때 나는 쾌감을 느낀다.

 나는 집안에 들여놓는 물건을 사기를 좋아하는 반면, 도로시는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자라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질투의 대상이다. 그녀의 방에 살짝 들어가 보니 한쪽 벽을 가득 수놓은 드레스 수십 벌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대 위에는 익숙한 이름의 미국산 보습 크림부터 프랑스제의 조그만 향수병, 그리고 저 멀리 이란에서 가져온 분통까지 있다. 그 분통을 열어보니 두 번도 안 쓴 것 같았다.

 오늘 회사에 출근해서 사장의 부름을 받았다. 궁금한 마음과 약간의 초조한 마음과 함께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니 사장이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기뻤다. 가장 높은 영업실적으로 할당 영역이 뉴욕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이 지루한 일상의 마을을 비롯한 소도시에서 첨벙대는 오리가 아니라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어 마천루의 고향을 배회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내 마음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제 출퇴근 시간이 20분 정도 더 길어지겠지만, 더 일찍 일어나도록 아내에게 부탁하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일종의 승진과도 같아서 월급이 대폭 오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저녁 7시 기쁜 마음으로 도로시에게 이 소식을 알리자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뉴욕으로의 외출 준비 시작. 아내는 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짙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위에 보라색 숄을 걸치고 나왔다. 차고에서 광택 나는 시보레를 끌고 와 아내를 태우고 나는 브로드웨이로 갔다. 참, 내 차도 회사에서 준 차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오늘 가장 짜릿한 하루를 보내고 들뜬 아내는 몇 시간 전 나와 마신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녀를 번쩍 안고 집으로 들어와 도로시를 재우고 이마에 키스한 후 나는 내 방으로 갔다. 차 안에 여러 가전제품이 있는데, 그 중에는 6년 전 스웨덴 출신 학생 만터와 프란텐이 만든 소형 냉장고도 있었다. 그것은 내일 들여놓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를 썼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온 풍요, 소비의 사회에 내가 스며드는 과정, 그리고 그 와중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행복감을 노래했다. 내가 쓴 시는 도로시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나만의 습작 노트에 차곡차곡 기록되어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나를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일이다.  


1928년 11월 19일 목요일

 뉴욕은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였다. 넓은 발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수시로 사람들에게 연락하며 전화를 걸고 받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전에 내가 활동하던 소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는 10명을 만나고 9번 구매 계약을 맺었는데 이제는 10번 부딪쳐도 두세 명 정도 반응할 뿐이다.

 요즘 추운 날씨 탓인지 감기가 들었다. 영업 실적이 전처럼 높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겹친 감기였다. 집에 있는 도로시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내가 몸이 좋지 않으니 따뜻한 닭고기 스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도로시는 좀 더 힘을 내면 우리들이 뉴욕 안에 있는 집도 살 수 있으니 아파도 열심히 일해 실적을 늘릴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

 처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로시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씁쓸한 물음을 머금고 아까 부탁한 닭고기 스프를 생각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도로시는 친구와 함께 도심으로 가서 가구를 구경하러 갔던 것이었다. 돈이 생기면 바로 쓰는 우리 부부의 소비 패턴 때문일까, 아내가 나를 챙겨주는 일을 잊고 또 무언가를 사러 나갔다. 아내는 아침에 나를 챙겨주기 위한 샌드위치는 잘 만드는데, 왜 내가 아플 때에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혹시 잘 나가다 한번 삐거덕거리는 나를 보고 실망하여 돌아선 것은 아닐까?


1928년 11월 28일 토요일

 오늘은 절망적인 날이었다. 사장이 예전처럼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다른 직장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뉴욕 시를 담당하는 세일즈맨이 회사에 4명 정도 있는데, 이들은 항상 최고의 실적을 유지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바로 교체되는 것이 회사의 전통이라는 말이었다. 하긴 우리 회사 차가 워낙 상류 비즈니스맨의 취향에 맞는 것이라 대부분의 매출은 뉴욕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사바사바하여 예전에 맡았던 소도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그 자리는 이미 능력 좋은 신입사원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다시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나는 내가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가 없었다. 집 안에는 아직도 풍요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고, 내가 필요한 물건은 다 찾아 쓸 수 있었다. 인테리어에도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에 집안의 모습만 본다면 그 집 안의 사람이 고풍스런 취향을 가진 상류 계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아직 물신(物神)과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해고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절망감이 쉽게 가라앉았다. 하늘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1929년 9월 13일 월요일

 도로시와 나는 그간 소득이 0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계속 소비의 삶을 즐겼다. 미시건 쪽에 있는 친척과 함께 스키장에 가서 놀고, 오대호 쪽에서 캠핑을 즐겼다. 예전처럼 도시의 쇼핑가로 나가 옷가지를 한 아름 들고 오던 버릇도 고쳐지지 않은 관성으로 남은 채 우리들은 계속 소비했다.

 한편 14년 전부터 여기와는 거의 대척점과도 같이 떨어진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바닷물을 말린 소금을 모아서 영국인들에게 보여준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인도인들은 소비를 최대한 절제한 채 영국 상품 불매 운동 등을 일으켰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청교도 출신 정통 미국 백인들, 그들의 조상들은 불쌍하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으면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 조상들의 후손들이다. 일도 하고 그 대가도 열심히 누리는 삶을 원하지 않는 건가?

 나는 물아일체라는 개념을 물건을 통한 즐거움과 나의 일체로 생각하고 싶다. 붉은 색 소파에 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저 인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생각하는 인간 자신이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어낼 수도 있다는 말을 아시아의 수도사들은 자주 꺼낸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을 통해 종종 들어 왔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속으로만 희열에 차 있는 듯 보인다. 만약 사람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는 명상과 수양일 수가 없다. 반면 물질을 통한 향락과 풍요로움은 언제 어디서나 즐거움을 준다. 같은 ‘외부 세계’이지만 더 능력 있는 외부 세계이다. 돈이 많은 사람, 지성이 가득한 사람,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한 사람, 어느 사람이든 간에 모두에게 웃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술을 부리는 붉은 여우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이 세상의 흐름에 나는 순응하여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소득이 없기 때문에 점점 경제적인 압박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물건을 경매에 내다 팔기도 하고, 신문 광고를 통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도로시는 쉽게 절제를 실천하기가 힘들다. 요즘 들어 느낀 일이지만, 과거의 비상하던 독수리의 모습을 이제는 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낀다.


1929년 11월 17일 수요일

 양복 입은 채권자들과 만나는 일이 잦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구름이 끼었는데, 가끔 비가 오다 말았다 하며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나와 도로시는 지금 뉴욕 근교에 있는 주거 밀집 지역에 살고 있다. 얼마 전에 집을 팔고 우리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으로 온 것이다. 또 알려줄 소식이 있다면 내가 자동차 공장의 생산 라인 7번에 고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업자들이 물밀듯 공장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과거 경력을 밝히고 공장주에게 특별 우대를 받았다.

 자동차를 팔던 사람이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로 다가오긴 하지만, 몇 주 전 10월 24일이던가, 우리나라의 월스트리트 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규모로 폭락한 사건 때문에 지금 나의 초췌한 모습은 일종의 운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로 도입한 포드 시스템의 확산으로 이제 공장의 효율성은 발전할 대로 발전하였고, 나와 같은 노동자는 열심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 된다. 나는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한 마지막 과정인 도장 공정에 소속되어 있는데, 저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차체를 세우고 눈높이에 있는 기계를 이리저리 조작하고 버튼을 눌러서 색을 입히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충분히 할 만하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등 공장에서 요구하는 색깔이 다양하다.

 집에 돌아와 이제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도 때가 끼기 시작한 도로시를 안아주었다. 우리 부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같이 울기도 하였다. 자본주의는 이제 나의 친구에서 괴물로 변했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 그는 이렇게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버렸다. 베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습작 노트를 다시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내가 이만큼이나 시를 썼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내가 시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의 향연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에 사회와 나의 일체감은 어디로 사라져버렸고, 나는 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과 같이 고립되어 버렸다. 과거에 내가 여우같은 교활함으로 얻을 수 있었던 모든 행복감은, 승리의 기쁨은 모두 없어졌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간 분자가 되어 외로운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집안에는 아직 풍요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내가 그 속에서 너무나 빈곤하고 침울했다. 나는 빨간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산란된 금빛으로 저쪽을 비추는 램프가 오늘따라 처량해 보인다. 과연 내가 생활의 일부로 느꼈던 시 쓰는 일은 무엇을 위한 일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물아일체는 항상‘나는 풍요롭다’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 세상과 하나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내가 풍요롭지 않으니 주위의 모든 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1929년 12월 31일 금요일

 ‘부조리’란 이런 것일까. 나는 이제 페인트 색깔을 정하는 버튼 누르기도 지긋지긋했다. 공장이라는 거대한 놈에 나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하도 배가 고파서 생산 라인에서 잠깐 빠져나간 적이 있었다. 20분만 빠져나가서 근처의 샌드위치 파는 아저씨에게 갔다 왔을 뿐이었는데, 내가 없어서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며 공장에서 심한 반발이 들어왔다. 바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비인간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교체 투입될 인력이 없는 이상, 모든 생산 라인에 종사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태만을 부리면 전체의 가동이 멈추게 된다. 나와 내 동료 노동자, 내 동료 노동자의 동료, 이렇게 공장 안에 모든 사람들이 톱니바퀴 얽혀 있듯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이다.

 이틀 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더니 항상 먹는 샌드위치도 위에서 잘 소화를 못 시키게 되었다. 먼지 덩어리를 삼킨 듯 자꾸만 기침이 나왔고 손발은 찬데 머리만 뜨거웠다. 단순한 질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번 연락도 없이 공장에 출근을 안 하니까 다음날에 곧바로 다시 해고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하릴없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일기장을 붙잡고 있다. 시는 쓰기를 그만 둔지 오래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고, 내가 정말 이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밖에 눈이 많이 쌓였다. 세상의 온갖 소음이 눈송이 속에 파묻힌다. 자동차 공장의 끼익 하는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려 안정을 취하고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이다. 한숨을 쉬었다. 지금쯤 누군가는 잘 나가는 외판원으로 윤기 나는 흑마(stallion) 같은 자동차를 타고 돈 많은 구매자들을 만나고 다닐 것이다.

 나는 지금 왜 침대 위에서 블랙커피를 마시며 재즈 음악을 듣고 있는데도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에 시달리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벌고 사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돈을 통해 행복을 얻는 사람인 한, 그 사람이 마냥 시만 쓰려 하면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사람들은 예술적 감성보다는 상품을 통한 자기 치장에 아직도 열중한다. 3년 전보다는 덜하지만.

 사람들이 일만 한다. 일을 못하면 짤리고, 구박 받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된다. 나도 지금 도태된 모양이다. 저기 도로시는 묵묵히 카페트를 청소하고 있다. 내 꼴에 화가 났나보다.


1930년 4월 20일 수요일

 프랑스어로 쓰인 스탕달의‘적과 흑’을 영어로 번역해서 넉 달 후 가져다 달라는 출판사의 압박이 있었다. 전에 외판원으로 근무하면서 프랑스어를 조금 배워 놓은 상태라 마음만 먹으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방에는 흰 종이로 빌딩을 쌓아올렸다. 일을 다시 찾은 것만 해도 고마워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 이 일에 감사하며 기도드렸다.

 내가 번역을 특별히 시작하게 된 이유는 없다. 그런데 아직은 완벽한 번역가라 하기에는 벅차다. 그동안 나는 회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생각해보면 교활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 말로 회유하는 능력, 매출액을 계산하는 능력 등이다. 이건 번역가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문학적 지식이라든가 번역을 위한 유려한 문체를 만드는 언어 능력이 나에게는 부족하다. 과거에 쓴 시는 순전히 내 본능으로 쓴 시이고,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없어서 정말 잘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도로시와 같은 집에서 계속 살아가지만 아내는 내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목이 칼칼했다. 부엌으로 나가니 마침 오후 1시여서 도로시가 나에게 가정식 스테이크를 주었다. “다 되었으니 먹어”라는 말만 하고 도로시는 빨래를 걷으러 갔다. 나한테 자기가 식사를 준비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내가 일을 해서 그런지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지도 않는다. 나를 존중해주는 것인가? 그런데 옛날에 내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도로시를 끌어안고 자던 날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밤이 없다. 어제도 힘든 번역 일에 지쳐 오른 손목이 후들거렸고 내가 정확히 몇 시에 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책상에 엎어져 잤다. 빨간 소파에서 도로시와 내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우리 둘이 있을 때에는 정말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었는데, 지금은 둘이 있어도 형식적인 관계만이 차갑게 남아 있다.

 그동안 내 인생은 숱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스타급 외판원이었던 나 폭스는 교활한 눈빛으로 복스러운 꼬리를 흔들며 여러 고위층 인사들을 농락해 왔다. 하지만 점점 털이 빠지면서 아름다움을 잃어가듯 나는 해고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고 그 후로부터 점점 추락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공장에서 일할 때에는 내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은 때도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그래서 내가 큰 병에 걸렸던 거구나, 하고 되새겨본다.

 이년 동안 나는 세상과 나와의 진정한 합일(合一)은 고사하고 자본주의가 가져온 혼란 속에서 헤매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가장 먼저 도로시와의 사랑을 잃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개인주의의 철창 속에 갇혀 지낸지도 벌써 1년이 조금 넘은 듯하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사회악은 개인주의다. 내 능력이 부족한 탓에 개인주의의 철창 깊은 곳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가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있다. 그렇기에 우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뿌리박힌 개인주의를 뽑아내어야 한다. 그것이 마치 칼 포퍼가 말한 piecemeal social engineering과 같이 가장 점진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정말 우리 마음속에 개인주의를 영원히 보내버릴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지금의 나조차 도로시가 내 물건을 깨뜨리기라도 하면 성을 내며 왜 남의 영역에 간섭이냐며 핀잔을 줄 터인데, 하물며 세상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넉넉한 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나? 힘든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파블로 네루다의‘詩’에서 볼 수 있는 자연과 나의 일체감은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아득하기만 한 추상적 선에 불과하다. 혼자 시를 쓰면서 감흥을 받는 건 좋다. 하지만 화목한 가정과 좋은 친구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두 가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충분한 소득을 벌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 세계에 눈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종의 압박으로 우리를 누르고,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이러한 것들에 참 많은 쇠사슬을 얽으며 살아간다. 지금 우리에게 이상적인 세계는 어딘가 있겠지만,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이다.

 세일즈맨의 위치로 다시 올라서고도 싶지만 지금 나는 번역가가 되었다. 이제 내가 하는 일에 치중해야 할 때다. 그런데 자꾸 문밖에서 걸레질을 치우는 도로시에게 눈길을 옮기는 이유는 뭘까. 자본주의가 굵은 채찍으로 인간들을 생산성 향상의 일터로 내몰 때마다 점점 혐오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신적인 존재로 여겼던 집안의 모든 물건들은 이제 사라지고, 불변할 줄 알았던 것들이 변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혹은 어떤 외부 환경에 의해 극도로 혼란스런 상태에 놓였을 때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 그것은 화려한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오는 어떤 고귀한 보석보다 더 귀한 것. 현상계와 이데아계가 지칭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티끌 하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려고 마음을 먹기 전에 변하지 않는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삶의 자세는 고귀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일 것이다.

 사랑,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물질로 살 수 있는 어떤 상품과도 같은 존재다. 적어도 지금 1930년 미국 사람들이 가진 생각으로는 그렇다. 아니 이제 어느 시점의 미래에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사람이라도 모두 사랑은 물질로 살 것이다. 내일 도로시에게 새로 출시된 보라색 드레스를 선물해 주어야지. 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인가. 꼭 물질의 넉넉함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인가.


내일,

추락한 여우, 초라한 늙은 여우는

다시 그 느린 발걸음으로

싱싱하게 죽은 참새를 물고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암컷을 찾아 떠날 것이다.

아메리칸불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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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의 알맞은 형식의 선택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적인 요소를 줄이고, 줄거리를 잘 엮고, 인물의 성격에 대해 조금더 교정을 보아 이야기글(소설)쪽으로 응모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2006-10-12 20:57:53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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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잘 그려 낸다는 것은 소설이면 소설답게 묘사와 서사를 중심으로 대화와 같은 기법을 통해 정서적으로 공감을 주면 되는 것이고, 주장글이라면 문제점과 대안의 삶을 주장과 논거를 잘 갖춰 제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글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느쪽으로도 아쉬운 방식의 표현이 되었군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품의 줄거리 연결과 인물의 성격, 그가 처한 고난에 대응하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이어서 감동을 주기 힘들고, 또한 주장글로 보기에는 너무 부차적인 정보가 많아 중심적인 메시지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 2006-10-12 20:56:44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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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조금 궁금한 점은 글을 쓰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글의 양식도 그에 어울리게 나온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의 사회에 물신주의에 빠져 사는 삶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생각해 보는 것은 비평글 방식으로도 가능하고, 소설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양식으로 표현해야 더 효과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표현하는 내용을 잘 그려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 2006-10-12 20:53:5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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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물질을 다량 소비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사는 인간의 비극적인 인생을 경계해야 한다는 논지를 일종이 일기형식의 1인칭 소설처럼 써나간 글이로군요. 기다란 분량의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을까요? 그래도 고통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특히 폭스의 삶의 변화를 통해서 느껴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폭스처럼 살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006-10-12 20:50:21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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