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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태어난거지? - 프랑켄슈

  • 작성자 키요
  • 작성일 2006-03-04
  • 조회수 307

 

나는 왜 태어난거지? -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프랑켄슈타인?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만들어진 존재 - 푸르스름한 피부에 얼굴에는 바늘자국이 있고, 머리에는 나사가 박혀있는 등 의 이미지를 가진'의 이름이 아닌 '만들어진 존재'를 ‘만든자’의 것임을 밝혀둔다. 


액자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꿈을 찾아 떠난 로버트라는 청년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자기장의 비밀을 알고자 탐험을 하고 있던 로버트는 북극으로 가던 도중 한 조난자를 구출한다. 조난자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 배의 선주였던 로버트는 젊은 지식인인 프랑켄슈타인과 금세 친해지게 된다. 이내 서로 신뢰가 쌓이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북극에 오게 된 경위를 털어놓는다. 프랑켄슈타인과 '만들어진 존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 특히 연금술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과거의 연금술사들의 지식을 습득했다. 장성한 후에 대학진학을 위해 도시로 온 프랑켄슈타인은 근대과학 앞에 무너지고 마는 연금술의 실체를 보게 되고, 생물 쪽으로 관심을 돌려 예전처럼 지식의 습득에 열중한다. 우연히 갈루아의 법칙[죽은 개구리에게 전기자극을 가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접하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전기를 이용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 확신에는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인류의 발전을 위함'이라는 숭고한 과학정신도 내재되어 있었다. 몇 년간의 노력끝에 어느 비바람 부는 날, 강력한 번개와 함께 '만들어진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그'?


이제 그 비바람 부는 날 태어난 '만들어진 존재'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고자 했던 프랑켄슈타인의 염원과 달리 '만들어진 존재'는 약 2.5M의 거구에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만들어진 존재'(이하 '그'로 표기)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은 채 '그'를 버려두고 신에게 도전했던 자신의 죄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끔찍한 피조물로부터 도망쳐 버린다.


창조주에게 조차 존재가 부정된 '그'는 무작정 걸었다. 인간들은 '그'의 추악한 외모만으로 '그'의 내면역시 선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진다. '그'는 자신을 인정해주리라 믿었던 한 가족들에게마저 부정 당하자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분출시켜 버린다. '그'의 비극이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이젠 '그'를 잊음으로서 끝난 줄 알았던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복수


'그'는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이기 시작한다. 처음 살해당한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막내동생이었다.

절대적 고독을 느껴왔던 '그'는 두 번째 범죄가 일어나기 전(그가 의도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원인이 되어버렸다.) 프랑켄슈타인 앞에 나타나 자신과 닮은 외모의 반려자를 만들어 주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큰 악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은 그 조건을 거부하고, 결국 그의 소중한 친구와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특히 그의 신부가 결혼 첫 날밤에 살해당하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마저 생명을 잃게 되자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또 다른 형태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추적 끝에 로버트와 만나게 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로버트의 배위에서 죽게된다. '그'역시 창조주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상실했다며 스스로 죽음을 맞겠다는 메세지를 로버트에게 남기고 떠난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한계로 몰아가며 '그'를 추적하는 모습을 보며 책임있는 과학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되새겨야 하는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그'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그'를 없애지도 못했다. '그'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유전자조작에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 유전자조작이 가해진 식품들을 프랑켄슈타인 음식(Frankenstein food)라고 부른다. 바람직한 결과물이 아닌‘인공적인 존재’라는 의미와 함께 ‘인류를 위해’자연법칙을 거슬렀던 프랑켄슈타인박사의 가치를 이중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의 과학자들에게 스스로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윤리적 고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결과를 외면하지 않고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인류의 발전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윤리를 벗어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두가지가 과학자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생물학 분야에서 앞서 신에게 도전했던 과학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나날이 생명과학분야에서 새로운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자기성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끔 한다. 

 

 


'그'!

 

인문학자 죠르즈 귀스도르프는 그의 저서 '말'(La Palole 言語)에서 "명명한다는 것은 무(無)에서 끌어내는 것이고, 존재를 초래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이전에 있던 어떤 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그'는 태어남과 동시에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이 없는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만일 프랑켄슈타인이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면 소설의 전개가 달라질 수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만큼 소설에서도 철저히 ‘그’에게 이름 붙여주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사회속에서 구성원들의 인정받는 자신의 모습을 확립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이름 붙여주기 거부’를 통해 작가는 ‘그’가 분노하는 이유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음을 성공적으로 설득시킨다.


 인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주인공은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에서도 발견된다. 주인공인 헤드윅이 트랜스젠더로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용당한 후 버려지고, 주위의  모습들은 ‘그’가 만들어진 존재로 창조자에게 버림받고, 외면의 추악함으로 인해 겪은 고통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창조주에게 그 분노를 돌렸던 반면, 헤드윅은 노래로 세상을 비판하고, 가발(wig)를 벗어던짐으로서 스스로를 찾는다.

 

 물론 두 존재 사이에는 이름의 유무라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가 존재의 이유에 앞서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좀더 진지한 고민을 했다면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여 존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에 의하면 그는 ‘고립된 자’로서의 자아도 확립되지 않았다. 스스로 존재가치를 찾지 못하자, 창조자에게 그 원인을 전가시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에게 존재가치와 개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ID, 닉네임 등의 또 다른 이름을 짓는 것이 긍정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찾기에 실패한 것은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과 다른 외모 탓이다. 소설 전반을 통해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다.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어느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는 작가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외모만으로 판단하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라면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선이 되어야 한다. 아름답지 못한 것은 악이라고 단정하는 생각이, 선한 것마저 외면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까닭으로 악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절대적 선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 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마치며

그 업적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뽑히는 메리셸리(처녀명 메리고드윈)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소설(SF)의 효시로 불려지기도 한다.[정당한 평가라 함은 그녀가 20즈음이라는 어린 나이에 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는(특히 인형놀이처럼 묘사된 '그'의 제작과정을 보면) 치명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것은 여성이었던 작가가 과학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인정한 까닭일 것이다.    

내년이면 필자도 메리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했던 나이가 된다.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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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넣으려고 하다보니 다소(사실은 많이) 황망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균형잡힌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ㅅ; 

 

키요
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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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요
  • 2006-02-26
서진영님의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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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요
  • 2006-02-26
똘레랑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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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요
  • 200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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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또한 소외 당하는 원인을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아이디 붙이기를 통해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노력의 부족을 비판한 것도 이 독자가 책을 꼼꼼히 읽고 성찰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재미있으니 그냥 스쳐가며 읽기 쉬운 과학환타지 계통의 소설을 매우 찬찬하게 읽고 생각하며 읽는 모습이 매우 보기 좋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은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읽고 싶습니다. 더욱 좋은 글 많이 올리어 여러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 주시길 바랍니다.

    • 2006-03-08 13:59:33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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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특히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의 입장과 피조물인 '그'의 관점을 대비하며 갈등의 원인을 파헤치고, 이름붙이기의 철학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인문학자 죠르즈 귀스도르프의 저서 '말'(La Palole 言語)을 인용하여 "명명한다는 것은 무(無)에서 끌어내는 것이고, 존재를 초래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이 사례와 연관지어 해석해 낸 시도는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비평방법이었습니다.

    • 2006-03-08 13:53:27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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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예를 들면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과 같은 사실주의 계통의 작품도 함께 읽어야 비로소 문학도 제대로 된 문학읽기가 되고, 사회과학 서적도 함께 읽어나가야 합니다. 이 글은 그렇게 좀더 폭넓게 독서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프랑켄슈타인]이라는 책을 읽되 단순히 환타지라는 특성에 몰입되어 읽지 않고, 그 작품에 거리를 두고 이모저모 따져보며 읽는 태도가 매우 바람직하여 칭찬 합니다.

    • 2006-03-08 11:46:25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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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그런데 요즘에는 과학성보다는 상상력이 중심인 환타지계통의 소설이 더욱 많이 읽혀지는 편이지요. 환타지도 그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기에 장려할 문학 갈래인 것은 분명합니다. [헤리포터]류의 소설이 영화나 게임으로까지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보면 문화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장르만 편식하는 독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환타지도 과학소설(SF)까지 고루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여러 경향의 문학작품도 함께 읽어야 하지요.

    • 2006-03-08 11:43:1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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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키요 님의 과학소설(SF) 비평문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과학소설(SF)은 매우 논리적인 구조가 서로 절묘하게 결합되고, 그 기반 위에 작가의 상상력이 나래를 펼치는 특성이 날 나타나는 글인지라 읽는 이에게 과학적 사고력과 상상력을 한꺼번에 증진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문학장르입니다.

    • 2006-03-08 11:39:38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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