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 또는 피투성이 존재들을 위한 시 – 정재율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읽고 (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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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
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시인만의 단단하고 확고한 시선이 아름답다. 그런데 이때‘넘어진 이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명료함과 아름다움의 골조를 찾아보기 위하여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파고들어 보자. 피투성(被投性), 피가 범벅이 된 피-투성이가 아니다. 한자 그대로 피被라는 접두사에 던질 투投가 합쳐진 단어, 하이데거가 제시한 표현이자 하나의 개념으로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을 내포한다.‘그곳에-있는''현존재',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성질이 바로 피투성이다. 우리는 자의와 관계 없이 이 세계에 탄생했으므로‘던져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어렵다는 결론’(『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부표」)에 도달해 그냥 살아가기로 한다. 시집 속 「초판본 시집」에서 화자에게 ‘친한 선생님’이 ‘선택당한 거 아니에요? 별 수 없죠 계속 쓸 수 밖에 없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런데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정재율의 시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피투성은 기분 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는 점에 집중해 보자.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아닌, 막연한 불안 말이다. 이를테면 ‘친한 선생님’에게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묻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생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의문을 던지고 한없이 헤매는 과정은 필연적인데, 하이데거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불안을 얻으며 자신의 피투성을 강하게 인식한다고 한다. 던져진 세계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언젠가 ‘그곳’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사실. 실 가닥이 복잡하게 꼬이듯 사고가 전개되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까지 가닿게 된다. 우리가 마주한 아주 무거운 과제이자 언젠가 마주하게 될 현실, 죽음.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행위를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세계에 내던져진, 한 마디로 낳아지고 탄생을 당한 우리는 때때로 넘어진다.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으나, 아마도 하이데거가 강조했듯 굵직한 장애물이자 돌부리가 될 것은 바로 죽음이겠다.
그리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는 죽음과 마주보는 정재율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 넘어진 순간 울음을 터뜨리기보다는 가만히 엎드려 돌부리, 즉 죽음 가까이에 있는 이야기를 듣는 화자들을 알아간다. 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주목할 점은 바로 ‘죽음’에 대한 자세이고, 그 더 나아가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죽음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자세가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화자가 앞서 등장한 표현처럼 '별 수 없'어서, 태어나길 '선택당'했기에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현존재가 지닌 가능성, 마음과 믿음을 손에 굳게 쥐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넘어진 사람을 쓰다듬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휘몰아치는 죽음 속에서 말이다. 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
상주와 대화를 나누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
쿵쿵 울리는 소리에
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줄 아무도 몰랐지만
-「물탱크」 전문
사람들은 자꾸만 죽고, 통곡을 하듯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시신이 발견되는, 무덤과도 같은 ‘물탱크’에 ‘사람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 또한 이야기한다. 「현장 보존선」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죽는’ 것에 대해 말한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나무를 본 적 있다/ 뿌리를 훤히 드러낸 채’라는 연으로 끝맺는 시는, 자신은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지 못하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람들, ‘무성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한없이 가벼이 여겨지며 쉽게 ‘교체’되는 ‘나무’들의 서사를 다룬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화자는 어렴풋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선구적 각오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가 죽은 자리’를 되짚어 보며 ‘신발도 없이 죽는 건’ 서럽겠다고 사유한다. 「생활」의 도입에서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살아 있’냐는 문자를 받게 되는데, 어쩌면 이것은 자신에게 메시지 보내기 기능을 이용하여 되돌아온 자문자답일지도 모른다. 이후 이어지는 ‘TV’ 속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풍경이나 ‘건물이 무너’지는 기사를 마주하기에 화자가 죽음을 느끼기 딱 좋으므로.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시적 상황 속에서도 심히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흐느끼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현장 보존선」의 죽은 ‘그’더러 ‘저 앞 사거리까지만 통화하며 같이 걷기로 하’고, 「종합병원」에서는 죽음이 가득 찬 장소를 뒤로하고 「최초의 잼」에서는 ‘오늘과 내일 먹을 죽을 사러’나선다거나 ‘아침 식사를 거르지 말자’고 약속하며 ‘전쟁’은 묻어두고 ‘앞뒤로 잼을 바’른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피투성을 지닌 존재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피투라는 개념과 함께 기투 企投, 역시 투投로 내던져진 인간의 속성을 이야기하지만 기企, 그러니까 꾀하고 발돋움하며 바라며 인간이 직접 ‘던져’보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기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정재율의 시 「가지는 착하다」의 구절을 살펴보자. 가지로 읽히는 ‘우리’는 ‘식탁 위에서’‘자주 외면’ 당하는 좌절을 겪는다. 그 와중에 화자는 ‘잘 뻗어 있는 가지’를 부러트리는 사람이 되어 자꾸만 죽음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네모난 식탁에서 자주 서’러워진다. 엄밀히 말해 「가지는 착하다」의 화자가 정확히 죽음을 자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숨을 죽이는’ 가지에 자신을 겹치며 어렴풋이 죽음이라는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이것을 일상 속 죽음과 피투성에 대한 자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화자는 나아간다. 그러한 일상과 자각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무기징역’이라며 자신을 사랑하는 기조의 농담과도 같은 진담을 할 줄 알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그’도 살펴볼 수 있다. 기투를 통하여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이렇게 짙은 핏줄처럼 정맥을 흐르는 피투를 기투로 바꾸어 나가면서, 화자는 죽음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고 일상의 풍경처럼 취급한다.
정재율의 피투와 기투 취급법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는「로즈메리」를 읽는 것이 좋겠다.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해의 이미지다. 그러니까, 대놓고 ‘피투성이’ 이미지를 사용하는 시다. 화자는 죽음을 맞이하진 않지만 거의 ‘죽은 사람처럼 축축’하게 호흡한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욕실’에서 자꾸만 운다. 시작부터 등장한 ‘뿌리째’ 무언가를 뽑아낸다는 표현, ‘손목을 찌르자’ 물이 흘러나온다는 대목, ‘손목을 뚫고 자라난 잎’과 ‘서로를 비틀어 지은 죄를 세’고 ‘여름에 숨겨 두었던 그을 꺼내’ 본다는 맥락으로 위와 같은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다. 다소 암울하게 끝나는 「로즈메리」는 불안의 끝에 가닿아 죽음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지는, 4부가 시작되기 전에 실린 두 편의 시를 살펴보면 마치 이어지는 내용처럼 읽히기도 한다. 시집을 읽을 때에는 한 편 한 편에 집중하여 독해하는 것도 바람직하겠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어떠한 맥락에 실렸는지 고려하며 읽는 방법 또한 좋으므로 그러한 방법을 사용해본다. 「여름일기」를 지나 「사슴의 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 모두 「로즈메리」와 유기적으로 읽힌다. 「여름일기」에서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죽은 할머니의 꿈’을 꾸며 ‘할머니는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수 있나요’물으며 죽음에 대한 사유를 내비친다. 마치 「로즈메리」의 배경인 욕실에서 자해를 하다 물속에서 잠든 것만 같다. ‘아름답고 차가운’ ‘한순간’이 지나가고. ‘울지도 않고 잘 참’은 순간 이후에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나를 한참동안 깨’워 국화로 추정되는 ‘흰 꽃’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이미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자신 근처에 머무는 죽음, 피투에 대한 자각 서사다. 그러나 「사슴의 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라는 다소 짧은 시의 배치가 의미 있다. ‘떠난 사람을 너무 좋아해 물가를 평생 맴돈 사슴의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제시하는 것이 마치 욕실, ‘물가’에서 떠난 사람인 할머니를 만난 화자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토록 유연하게 이어지는 시 끝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물속에 얼굴을 묻’어본다. 「로즈메리」에서 ‘손목을 찌르’는 행위와는 다르게 사슴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한 번 더 살아보기 위해 깊은 잠수를 해보는 것이다. 물속에 얼굴을 살포시 넣어보며 살아갈 다짐을 하는 화자로부터 어떤 기투의 조짐이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표제작이자 시집의 두드러지는 표현, ‘산뜻하게’ 또한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죽음을 마주하며 기투하려는 화자의 일부일까? 그건 아닌 것만 같다.‘바디워시’에 적힌 표현에 불과하며, 화자는 ‘멍도 씻겨 내려간다면 하루에 열두 번도 씻을 텐데’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는 ‘죽지 않고 살 순 없을까’(「미약한 세계」) 동시에 고민한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직시하며 다소 무기력하게 사고하는 와중에도 내일을 그려 본다. 애정이 담긴 대상인 ‘언니’의 ‘발톱을 잘라 주’고 ‘피가 나는데도’‘성실하게 서로의 앞머리를 잘라 주’며 단정하게 내일로 나아가길 바란다. 화자는 비록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성실하게’ 그리고 ‘산뜻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런 신호탄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 달려 나가야만 하는 인간, 그리고 무시무시한 결승선처럼 도사리고 있는 죽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자꾸만 넘어진다. 죽음까지 가며 살아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하기 때문이다. 비단 죽음은 삶이라는 레이스 끝자락에만 걸터앉은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우리의 길 곳곳에 돌부리처럼 박혀 있다. 정재율의 시집 속 화자 또한 끊임없이 넘어진다. 「물탱크」 다음으로 오는 시 「투명한 집」에서 ‘영혼이 그곳에 있는데’ ‘귓속에서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앞에 배치된 시에 이어 무언가 망가지고 시들어가는 소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소매를 안으로 넣으면서’ 간다. ‘슬픔이 뭔지도 모르고 그새 자라’ 있는데, ‘끝이 닳아 버린 운동화와 홈이 맞지 않는 문턱들’그리고 온전하지 못해 ‘다 부서지는’‘집’ 또한 ‘자꾸만 모으고 싶어진다’ 진술한다. 모으고 아끼고 사랑하며 피투성으로 범벅이 된, 피투성이 무르팍을 털어내고 걸어간다. 어떻게 이런 끈질긴 기투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음’과 ‘사랑’이라는 시어로 짐작할 수 있다. 「어떤 향은 너무 강렬해서 오래 기억에 남게 되는데」의 경우를 살피면 ‘어떤 것은 줘도 줘도 모자라’다며 ‘냄비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들을 함께’하고자 다짐하고, 「롤러코스터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에서는 ‘장미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그를 위해’ 발을 맞추고 ‘카메라’를 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며 이따금 듣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냐는 물음에 정재율 시집 속 화자들은 사랑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었던 이유, 우리가 세상에 내던져져 불완전하게 확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딛을 수 있는 이유, 그러니까 피투를 기투로 바꾸며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 아닐까. 물론 정재율 시인의 등장 이전부터 강렬한 생의 순간인 죽음과 사랑을 한 몸처럼 묘사하며 시를 전개해 나가는 시인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성 시인들의 시 쓰기 경향에 기댄 해석이 아니다. 정재율 시인이 『현대문학』에서 등단하며 1번으로 발표한 시「축일」을 보면 아직 나누지 못한 사랑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음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장 안에서
그러니까 그때
한참 동안 나가질 못해서
나 자산이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옷장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벽에
혀가 닿았다
우리 집 개는 내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데
겨울 내내 쓴 일기장도 다 숨기지 못했는데
친구들아 내가 만약 죽으면 너희에게 내 만화책을 몽땅 나눠 줄게 그러니 싸우지 마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옷걸이 대신 빗장뼈를 가지고 놀았다
걸 수 있는 건 다 걸자
다행히 바지는 입은 채로
체면 같은 게 있으니까
어두운 천장을 보는 일도 하나의 슬픔이라서
혀에서 니스 맛이 났다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나면 덜 아프대
그러려면 옷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셔츠에서 셔츠로 코트에서 코트로
나는 보조개가 두 개라서
사랑을 두 배로 받은 아이인데
일곱 살 때 생긴 흉터를 아홉 살 때 생긴 거라고
부모님이 우겼다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니?
그래도 밥은 잘 먹잖아요
추문도 없이
언제 들어간 것인지 모를
그러니까 그때
부활절인지도 모르고
옷장 깊은 곳에서 새 양말을 발견했다
-「축일」 전문
‘옷장’에서 나가지 못했다는 도입부부터 그 옷장에서 죽음을 생각하거나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화자를 보면, 아무래도 이 옷장 속에 숨어야 하는 존재로 세상에 던져진 것만 같다. 클로짓(Closeted)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성소수자들을 일컫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 표현으로 시를 읽어본다면 ‘옷걸이 대신 빗장뼈를 가지고’ 노는 화자는 섣불리 자신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어 마음이 들어 있는 옷장 속에서 심장을 감싼 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소수자 또한 이 세상에 날 적부터 ‘나는 성적인 부분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이를 거야!’강하게 다짐하며 태어났을까. 그렇지 않을 테다. 자신도 모르게 ‘옷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살아가며 깨달았을 테고,‘그래도 밥은 잘 먹잖아요’ 대답할 만큼 씩씩하고 당돌한 화자지만 성소수자로서 ‘부모님’과 때로는 마찰을 빚고 ‘추문’을 받기도 할 테다. 이 시를 읽고 ‘언니’가 등장하는 「미약한 세계」와 ‘꿈에서도라도 행복한 가정이고 싶었다’고 진술하는 「최후의 빛」을 다시 읽으면, 역시 화자는 소수자로 내던져져 숨겨야 했던 사랑도 많고 앞으로 나누고 싶은 사랑도 많은 듯 보인다. 쌓아둔 연료가 많은 기체機體를 생각해보자. 어떠한 견고하고 두꺼운 벽, 도저히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러니까 죽음 같은 벽에 부딪혔다고 해고 여전히 남은 연료를 가지고서 앞으로 나아가려 할 테다. 하이데거는 기투라는 개념을 제시했지만 인간은 막연히, 또 무한하게 기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현존재의 한정된 가능성들로 기투를 이어가며, 기투보다 피투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재율 시 속의 화자가 지닌 가능성들은 아무래도 사랑일 테다. 그렇게 넘치는 사랑은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이어진다. 마치 넘어져 우는 아이에게 혼을 내거나 과한 걱정을 하지 않고 아이의 아픔에 공감하며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세상에 내던져져 피투성이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실패해도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사랑만 남은 사랑 시」) ‘모두가 한꺼번에 슬픔을 나누면 그건 그거대로 슬프지 않’다고 (「축복받은 집」) 토닥인다. 우리가 한 번쯤 피투성의 벽에 부딪혀 생각해보았을 ‘세상은 왜 아직도 망하지 않았을까’와 같이 공감이 가는 문장과 함께 ‘서서히 밝아지는 사람’과 ‘내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자보다 고구마를 좋아해」) 피투성, 그리고 피투성이 존재들을 지나치거나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주진 않지만, 자신의 상처이자 조금씩 드러내며 타인을 ‘산뜻하게’ 쓸어내리려는 정재율의 어조는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
한여름이 오기 전 시코쿠에 가고 싶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네가 나에게 말한다 그곳의 숲들은 모두 이어져 있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상을 보고 알 수 있는 거지 사원으로 가는 길이 하나인 거야 나는 너에게 꼭 그러자고 대답한다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아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 그럴 거야 그런 말을 하며 긴 밤을 함께 걸었으니까 여름엔 어떤 곳을 가도 길이 다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너의 말대로 장마가 길어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옥상에서 떨어져 길 한가운데에 빗물을 맞으며 한참 동안 누워있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떠도 매미가 창가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정말 끈질기게 붙어 있다 정말 끈질기게
네가 웃는다 내 손을 꼭 잡는다 너는 이미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옥상엔 대규모 정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네가 사라진 자리엔 안전모를 쓴 인부가 어느새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
잠에서 깨어나 물 한잔을 마신다 창문을 열자 길게 숲길이 이어진다 비구름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소매를 반쯤 접은 인부들이 망치를 들고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원에서 피우는 향냄새를 맡으면서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 전문
이 시는 가히 정재율 시의 진수가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다. 유려하게 ‘여름’이라는 시절을 그려내고 ‘너’와 ‘나’를 배치하여 적당한 깊이와 리듬으로 시적 서사를 전개시킨다. 아마도 피투성이가 된 ‘너’는 ‘앰뷸런스를 타고’가고 ‘시코쿠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너’가 말했듯 우리 모두 엉뚱하고도 진실된 바람이 하나씩 있을 테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의 가능성일지도 모르고, 그저 오래 지녀왔을 꿈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지명으로 읽히는 ‘시코쿠’. 급박한 상황의 ‘앰뷸런스’에서 털어놓는 타국의 이야기에도 화자는 고백하듯 뱉어낸 ‘너’의 마음에 무시하거나 울음 짓지 않는다. 다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정재율 시의 진수가 압축된 것은 정확히 이 문장이다. 정재율의 시는 ‘괜찮’지 않은 피투성 존재에게, 기투하는 존재에게, 그리고 피투성이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존재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주술 같은 언어나 상투적인 대답이 아니다. 진심으로 ‘긴 밤을 함께 걸었으니까’ ‘다 그럴 거’라며 ‘괜찮아질 거’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린 ‘어떤 곳을 가도 길이 다 이어져 있는 것’만 같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이 피투성을 붙잡고 살아가려 한다. ‘정말 끈질기게’ 말이다. ‘향냄새를 맡으’며 죽음에 가까운 피투성이의 몸으로, 또는 피투성의 몸으로 ‘전체가 흔들’려도 살아간다. 그리고 ‘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 뿌리를 내리고 ‘잠에서 깨어나 물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새긴다.
어떤 리듬이 계속 떠오르는 것처럼
물속에서 분명 들었던 음악 같은데
물 밖으로 나왔을 땐
아무도 없다
내가 잘못 들었어
맞아 내가 잘못 들었지
쉽게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바디워시에는 "당신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라고 적혀 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진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자국과 함께
멍도 씻겨 내려간다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씻을 텐데
수증기로 가득하다
넘쳐흘러서 거울에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욕조에 갇혀
손끝이 쭈글쭈글해진 내가
물속에서도 문을 열 수 있다면
입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헹굴 텐데
들어오는 거품을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릴 텐데
두 다리가 붙어 버렸다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
물속에 얼굴을 넣어 본다
물방울들이 다 달라붙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일부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처럼, 얄팍하지 않고 촘촘히 짜인 정재율의 시 세계를 살펴보았다. 표제작의 화자가 마주한 바디워시의 문구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고 싶지만, 그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에 내던져진 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자국과 함께’ ‘멍’을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때로는 ‘욕조에 갇혀’‘쭈글쭈글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재율의 시적 화자들은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 조차 ‘문을 열 수 있다면’과 같이 미래를 생각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상상을 한다.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 오는 결론은 비관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다. 얼굴로 무수한 ‘물방울’을 만져보는 행위로만 이어진다. 앞서 다룬 시들이 대개 물이나 욕실과 관련 있는 것 또한 흥미롭다. 하이데거는 존재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기투하는 행위를 몸을 던진다 표현하였고, 우리는 욕실에 갈 때마다 욕조 속으로, 또는 세면대 속으로 ‘몸과 마음’을 던져보기 때문이다. 온몸이 ‘욕조에 갇’히기도 하고, 갇힌 그 정사각형의 세계 속에서 물과 함께 일렁이며 마음이 ‘불어 버’릴 때까지, 물방울들이 다 ‘달라붙을’ 때까지 버텨보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이어지는 꼭짓점에서 시집 속 화자들이 독자가 책을 덮은 뒤에도 어떻게 살아나갈지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욕조를 찾아가듯 존재 가능성을 향해 몸을 던지고 계속해서 세계를 감각해나갈지도 모른다. 비록 ‘쉽게 인정하게’ 될 때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을어도, ‘아무도 없다’는 현실에 쓰리고 붉은 마음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걸어가게 되어도 말이다. 현존재이기에, 인간이기에 주어지는 정황성이, 그러니 기분이 때때로 돌부리가 될지도 모른다. 화자와 화자 곁의 사람들은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가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시집의 마지막 시 「수영모」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서랍 안에 오래 있었고’-이 또한 벽장과 옷장 즉 클로짓으로 읽힐 수 있겠다.- ‘가끔 뒹굴었고 가끔 외로워서’ 어쩌면 가능성으로 읽히는 ‘물’을 ‘그리’워하는 수영모가 등장하는 시다. 수영모 곁에 ‘모래와 조개껍데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계 상황에서 ‘진심으로 비춰 보면 진심으로 갈수 있다 믿었다’. 화자는 ‘진심으로’ 두 눈에 세상을 비추어 보며 ‘진심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믿었’고, 또 믿는다.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출간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인 정재율의 시집 제목이 『온다는 믿음』이라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로지 죽음처럼 괴로운 상황만이 옷장처럼 서랍처럼 나를 가둘 때. 화자는 가만히 있지 않고 ‘수풀과 나뭇잎을 옆으로 치’우는 능동적 기투를 통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이다. 자꾸만 넘어져도 멈추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헹’군 뒤 ‘들어오는 거품을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릴’ 모습(「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제법 굳고 아름답다.
거센 세계 속의 우리가 피투성 존재라는 인식은 이따금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휘몰아치는 ‘죽음’, 전달할 수 없는 ‘사랑’, 그 속에서 깊은 뿌리를 박고 피어나는 아픔과 그러한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 모두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때 정재율의 시를 찾는다. 말없이 곁으로 다가와 손 내밀어 주는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의 손금. 촘촘한 언어로 직조된 그 손금에 우리의 삶을 맞대어 볼 때마다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전혀 산뜻하지 못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노래를 흥’얼거리듯 시집 속의 시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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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울음도 약이 될 수 있다’본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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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 아이가 넘어져 무르팍이 깨졌다고 하자. 새빨개진 무릎에서는 피와 흙이 뒤섞이고, 통증이 밀려온다. 아이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테다. 이때 보호자는 아이에게 왜 우느냐는 질책은 하지 않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된다. 다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상책이다.* 넘어지고 말았을 때 밀려오는 부끄러움, 다쳤을 때의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 이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이의 몸속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너무 크게 부풀어 올라 흘러넘치거나 딱딱하게 굳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적지도 많지도 않은 반응으로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아이를 돌볼 때만이 아니라 타인을 대할 때에도 필요하다. 타인이 지닌 고유한 감각을 함께 알아가려고 하되 너무 깊이 빠져들거나 겉돌지 않을 것.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하기 위한 철칙일지도 모른다.정재율 시인의 첫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넘어진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말하고자 한다. 민음사 시집 특유의 간결한 만듦새와 옅은 초록빛 포인트,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산뜻하게’하겠다는 시집의 첫인상은 마냥 밝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웃기만 하는 아이처럼. 아직은 어떤 바람도 맞아본 적 없는 유목처럼. 그러나 얇지 않은 두께의 시집을 모두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겹겹의 나이테를 둘러싼 나무와 같다고. 세월과 세월을 조심스레 겹치며 몸집을 불려 온 것만 같다고. 그러한 감상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은 상처 사이를 거닐어 본다. 보통 나이테라는 단어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무가 훈장처럼 견뎌온 시절을 떠올리고, 이는 자연스레 좋은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재율의 시가 껴입은 나이테는 상처와도 같다. 계절마다 다른 속도로, 이따금 느리게 어쩌면 빠르게 자라나며 세포들이 분열한 흔적, 마음에 새겨진 상처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오며 어딘가 ‘터지는 소리’부터 ‘사람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물탱크」) 넘어졌을 때 얻은 상처. 그리고 그 곁으로 살이 ‘산뜻하게’돋아나기 위해, 정재율의 시가 존재한다.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서 죽음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죽음이 시적 화자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를 위해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보호자의 마음처럼, 지금 화자가 있는 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시이자 시집의 첫 시 「물탱크」에서는 도입부부터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장례식장에 들러상주와 대화를 나누고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땅바닥을 하도 쳐서쿵쿵 울리는 소리에몸이 살짝 떠오르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손이 빨갛게 달아오는 것을 보았다그 손으로 악수를 나눈 것까지 다음 날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물탱크가 터지는 소리였다그
- 모모코
- 2024-05-28
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
- 모모코
- 2023-12-31
연말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끝이 세상에 있을까. 연말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반짝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늘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이 과거형이 되었건 현재 진행형이 되었건, 어쩌면 사랑하고 싶다는 미래형이 되었건. 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생각해 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더듬어본다. 나는 줄곧 아주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왔다고 믿어왔으나 나와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그 길은 결코 험하거나 나만이 걷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절망이나 후회보다는 감사와 사랑을 채집하는 시기가 바로 연말일 테다. 나는 올해 열 통이 조금 넘는 편지를 썼고 스무 명이 있는 동아리에서 롤링 페이퍼를 하였고, 내게 문학만이 아니라 올곧은 생의 태도를 알려주신 선생님들께 엽서를 썼고. 사랑하는 Y에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어쩌면 짐이 될 걸 알아서 미안하다는 말 또한 했고. 그렇게 온갖 곳에 내가 받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기 길을 걷고 있는, 내 앞의 아저씨도 올해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했을지 모른다. 방금 지나온 유치원 버스의 아이들은 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았을까.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각자가 꾸려내는 생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히어로와 히로인이다. 나는 그런 개인을 움직이는 힘이 분노나 질투보다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이지만, 올해 내가 미워하는 아이가 1지망 대학을 떨어졌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기적과 같이 정시 최초 합격에 성공하자 눈물이 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랑이 결국 이기는 것 아닌가 싶었고. 우리는 모두 각자 그런 사랑을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일 년의 마지막 페이지. 나는 이 시기에 유난히 장수양 시인의 시집과 싱어송라이터 미츠키의 노래를 반복해서 찾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장수양 시인과 미츠키가 어떤 사랑을 해왔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영화와 시를 사랑하지만, 이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읽어낼 수 없다. 서안나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프레임을 겹쳐 보거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며 백은선 시인의 시편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미 내가 한 번 씹어 넘겨서 소화한 적 있는 작품을 겹쳐 보는 일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노래는 다르다.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재생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두 가지의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리는 순간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그 녹아내린 작품들은 나의 마음속, 한층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어떠한 예술 작품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일이라니. 이토록 기쁠 수 없다. 사실 사랑 시를 쓰는 내가 늘 고민하는 지점이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일 정도로, 이미 멋진 사랑시와 사랑 노래는 넘쳐난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 모모코
- 2023-12-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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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TO 멘토님께. 사실 저번에 단 댓글은 외롭고 떨려서 아무나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달았는데요. 이건 멘토님이 읽어주시면 좋을 듯 해서요. 주절주절 길지만, 읽어주시면 무척 감사드릴 것 같아요. 일단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꼼꼼한 피드백과 함께 응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읽어낸 글과 미츠키-장수양 병렬 독해의 글 등에서 어째서 다른 예술과 시를 엮어서 사유하는지 여쭈어 보신 게 기억에 나요. 그건... 그냥 저의 습관이고 좋아하는 일이라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올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하나의 작품을 깊게 읽는 연습을 올해 봄부터 해보았어요. 의무가 아니라 진짜 재미로 하게 되었어요. 캠프와 그때 사귄 문우들이 원동력이 되어주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단순히 지금까지 제가 알던 것들, 좋아하던 것들과 습관적인 것들로만 독해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새로운 것을 찾아보며 모험하듯 그간 읽지 않았던 비문학도 읽어보고, 알고 계신 선생님들께 조언도 받아가며 학습이라는 걸 해봤네요. 이 글에 쓰인 하이데거의 견해 같은 것도 그렇게 접했고요. 그래서 저는 뭔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과거의 저를 한 단계 돌파했다고 생각했고, 만 18세가 되어 글 작성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저의 나름대로 돌파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역시 그리고... 부족한 게 많다는 걸 느꼈어요. 나무의 이미지, 넘어짐의 일화, 하이데거의 개념, 정재율 시 텍스트... 모두 가져가려 했던 게 아마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름대로 윤리 선생님께 자문도 구해보고 하며 철학적 개념과 죽음에 집중해보았어요. 남겨주신 피드백 정말 도움이 되었거든요. 늘 뭔가 부족한 걸 느끼는데 멘토님께서 그 점을 잘 짚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무튼 결론은, 스무 살이 되어 나름 산뜻하고 도전적인 마음으로 (ㅎㅎ) 오랜만에 작품을 들여다보는 글을 써보았는데, 이게 어떻게 읽힐지 잘 모르겠네요. 글을 올리지 않았던 시간 동안 지녔던 마음 가짐들, 그리고 왜 굳이 이 글의 퇴고본을 올려야 했나... 말씀드려 보았어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저는 다소 위태로웠던 십 대를 지나 이제는 이대로 마음껏 힘껏 써나가면 될 것 같은 믿음을 지닌 스무 살이 되었어요. 말씀처럼 건강한 글쓰기 생활을... 드디어 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곧 유월인데, 멘토님도 행여나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아 음 그리고 트리거워닝 표시 했는데 안 뜨네요...!! 시스템 오류인지 제 기기 문제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체크해서 올렸습니다... ,,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