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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자기비평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5-23
  • 조회수 607

어렸을 적에는 모든 예술이 결국 회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와 모네, 르누아르의 작품을 눈 앞에서 직접 목격했을 때, 그 생각의 골은 깊어져갔다. 결국 문학이란 마르셀 푸르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전부라고 생각했고, 음악은 드뷔시가, 영화는 큐브릭과 로이 앤더슨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들을 때, 그 어느 것 하나 섬세한 터치가 없는 작품은 전부 폐기물이라고 너무 섣부르고 성급하게 단정 짓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내가 만난 것은 다름아닌 박서보였다. 거의 최초로 본 추상화였던 묘법 No.060728은,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뻔 했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이상하고 별 것 없는 단색화였지만, 그 속에는 필사인지 사족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그래서 지독할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사람의 정신(혼)이 있던 것이었다. 예술 학교에서는 ‘예술’이란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예술’에 관한 건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박서보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고흐와 낭만주의, 양산품에 지나지 않는 앤디 워홀과 현대미술양식, 건축양식만을 늘어놓고, 습작생들이나 만들 모조품들을 만들도록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서보를 몰랐다. 내가 만난 그곳에는, 여지껏 내가 보아왔던 세계를 통째로 갈아엎을 어떠한 것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후, 나는 세상을 다시 보았다. 한동안 추상화에 빠져 있었고, 이우환, 김환기, 김기창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장 마리아, 이베 등의 화가로부터 눈을 땔 수 없었다. 그리고 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다시 경험했다. 그리고 안 사실이 있다.

‘예술에는 끝이 없다.’

문학은 분명 블랑쇼에서 끝났고, 영화는 고다르(혹은 홍상수)에서 끝났으며, 음악은 존 케이지에서 끝났다. 그 찬란한 예술의 시대를 끝낸 이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들의 것을 사유한 이들이다. 블랑쇼는 문학을 사유하는 문학을 했고, 고다르(혹은 홍상수)는 영화를 사유하는 영화를 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을 사유했다. 예술은 언제까지나 존재와 죽음과 삶에 대한 고찰이 아닐 수 없는데, 그들은 그것 전부를 사유하는 방식을 사유하므로서, 끝내 존재의 방식(예술 형식)를 사유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예술의 형식을 끝낸 이들이다. 그러므로 현재 예술가라는 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그 형식 속에서 이미 끝난 일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모든 작품들은 언제나 부족했다. 아무리 대단해도, 또는 세간에서 평가를 높게 받더라도, 그것들을 ‘진보적’이거나 ‘새로운’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제 그 무엇도 ‘예술’이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차가워졌고, 냉대해졌으며, 낙담했다. 본래 나는 ‘글틴’의 ‘소설 게시판’을 주된 무대로 삼고 활동했다. 나만의 확고한 가치관을 세웠다. 그러나 소설을 쓸수록 나 역시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좋은 글을 쓰지 않을 바에야 더 이상의 글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쓴, 마지막 소설> 이후 더 이상의 소설은 없었다. 그때 알았던 것이 바로 비평&감상 게시판이었다. 당시 한창 글틴에 열중하고 있던 난,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으므로 다시 알려고 했다. 한 달 동안 글틴에 대한 나의 단상을 적어놓은 <행복한 글틴일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12월부터 새해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글틴에 들어와 기고되는 모든 글들을 읽었고, 12월 31일 밤에 글을 등록했다. 그러고서는 4일 후 대번에 삭제했다. <행복한 글틴일지>는 존경해 마지않는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의 유작인 <행복한 책읽기>에서 그릇된 것이었다. 존경하는 분의 발꿈치만큼이라도 도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김현 평론가의 글에는, 만약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면, 자신의 타 비평문 못지않게 많은 양의 텍스트로 설명해 가며, 매우 깊고 또 세밀하게 그 이유를 서술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 홀로 생각을 마쳤을 뿐, 세밀하지 않은 양의 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서술된 것보다는 서술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고, 여러 댓글들과 멘토님의 의견을 읽고는, 이 글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해명하는데 반년 걸렸다. 언젠가는 글을 삭제한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조심스러웠어야 했다. 대게 사람들은 행복한 건 건강한 거라고들 말하고는 한다. 행복한 글쓰기 이전에 내가 해야 했던 건 건강한 글쓰기였다. ‘비평’이라고 하면 모두 다 딱딱하고 날카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비평’은 ‘평론/이론’이 아니다. ‘비평’은 ‘나’를 주체로 하고, 나의 단상과 사상을 공유하며 설득을 얻는, 일종의 ‘예술’이자 ‘직설적인 소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 있던 ‘비평’은 주체가 너무 확고한, 무너진 ‘비평’이었다. 그래서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또는 읽는지 생각해 보았다.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건강해야 했다. 결국 난 그것이 하찮고 사사로운 감정이란 것을 알았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사로운 감정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싸우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 오히려 서로를 갉아먹는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내가 글을 쓰고 읽는 건 그냥 그게 좋아서다. 비평을 하는 건 내가 왜 그걸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서다. 단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한 것 뿐이다. 그렇게 보면 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었나…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니깐. 난 비평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설일 수 있어서 좋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렇기에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비집고 들어가 회상하고, 시작하고, 봉합하며, 메꾼다. 우리들이 하고있던 예술은 그런거였던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난 말한다. 예술은 이미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끝나지 않았고,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를 담을 수 있는 예술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그래서 우린 끝나버린 것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 예술은 끝이 없다. 이건 내가 알아낸 일종의 의견 내지는 단견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이걸 받아들이면 그건 비로서 비평이 된다. 그리고, 이미 난 이 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째 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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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에서 진실을 향해

레이 브레드버리가 쓴 의 60주년 영문 개정판 서문을 읽으며 매우 특이한 문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은 우리에게 진실들을 말해주는 거짓이다. (Fiction from Art is a lie that tells us true things, over and over)”처음에는 이 문장을 그냥 지나쳤으나, 책을 읽기에 앞서 그것이 나를 막아서고 있던 것이었다. 평소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픽션이라는 광범위한 예술 형식에 대해서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고 있는 이 문장에 담겨있는 여러 생략들을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그건 단지 픽션과 문학에만 제한된 일이 아니다. 영화, 문화, 음악, 만화, 미술 같은 모든 예술 형식들 역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니다.그것들은 서로를 이루는 것들이 있다. 문학의 경우, 그것은 텍스트의 연쇄로 이루어져있다.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들을 연결한다. 문장과 문장은 서로 연결되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결과, 작가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고, 묘사하고 싶은 것만 묘사하며, 불필요한 이야기는 건너뛴다. 그들은 텍스트를 창조하고, 텍스트를 더했다가 빼기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쇼트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쇼트와 쇼트를 이어붙여서 하나의 씬을 만들고, 씬과 씬을 연결해서 하나의 ‘시네마'를 만들어간다. 음악은 음표와 음표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박자를 만들고, 멜로디를 만든다. 작곡가는 곡의 흐름을 만들어내므로서, 청중의 감각을 조작한다.결국 모든 예술은 완전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왜곡된 현실이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 당대 프랑스 현실을 매우 적나라하고 암울하게 담아낸, 스탕달의 리얼리즘 걸작 을 만일 진정한 리얼리즘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리얼리스틱’한거지, ‘리얼’ 인건 아니다. 속 줄리앙 소렐이 실제 인물도 아닐 뿐 더러, 문학이 당시대 프랑스의 현실을 우리 앞에 데려오지는 않기 때문이다.유명인들이 쓴 자서전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가짜처럼 보인다. 자서전은 형식상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장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서전 역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에는 작가가 몇날 몇칠 몇번 동안 변소에 들렀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또한 그가 겪은 모든 날의 모든 사건과 모든 일, 인물들이 적혀있지도 않다. 그저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아무리 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그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그건 이미 작가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텍스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9시간이란 런닝타임으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영화 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들과 픽션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다.의 감독 클로드 란츠만은, 아우슈비츠에 존재했던 가스실에 대한 증거들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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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빛깔이 잔잔하게 맴도는 서른의 밤. 외국인 애인이 어깨에 기대며 묻는다. … 부담이 뭐야? 나는 머뭇거리고, 장면은 넘어간다. 나는 스스로 되뇌이며 묻는다. 부담. 부담은 뭘까. 애인의 그 목소리가 뇟 속을 휘젓는다. —------------------------------------------------------------------- 고요한 집안. 엄마가 한없이 바닥을 닦고 있다. 이미 깨끗해서, 더는 안 닦아도 될 것 같은데. 이때 엄마가 지우고 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그리 지우고 싶었을까. 장준영 감독의 첫 장편영화 는 엄마가 바닥을 닦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 장면을 오랫동안 관조한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녀가 무엇을, 왜 닦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영화의 고요한 흐름 속에 남는 것은, 그저 바닥을 닦고있는 엄마의 행위뿐이다. 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닦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닦는 몸짓 자체다.는 한 가정의 장녀이자 동성애자인 '연'이, 치매에 걸린 노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 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의 이야기가 극을 이끌어나간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연과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것이다. 속 연의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으며,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요양 간호사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진다. 연은 그런 엄마를 홀로 돌보고 있다. 연에게 도움을 구할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세 자매가 있고, 연은 그중 둘째다. 첫째 ‘정'은 동생들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가족들로부터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장녀의 자리는 연에게 있다. 연이 치매 노모를 돌보고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여튼 영화는 그 가족들이 처참히 부서져서,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맏딸은 미국에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뿐 아니다. ‘네 년이 우리 남편 꼬셨지!’ 같은 치매 증세 속 엄마의 말을 상기해 보면, 남편은 외도까지 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미 무너졌거나, 언제 무너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가족’. 속 가족의 형태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족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연’이다. 동생들은 연이 힘들다고 하는 한마디에 모두 그녀의 집으로 모이고, 서로의 시간을 가진다., 즉, 가족들은 연을 중심으로 흩어지고, 합쳐진다. 어떻게 보면, 연 혼자만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가족들과의 관계를 겨우 봉합하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는 더 이상의 수고를 덜기 위해 엄마를 맡길 요양원을 알아본다.연(장선 배우)의 집에 동생 희(정미영 배우)와 누나 정(양나영 배우), 엄마(양말복 배우)가 모여 점심을 먹고 있다. (연은 치매 엄마에 대한 속사정을 가족들에게 털어놓고,가족들은 그녀의 집으로 모였다. 즉, 연이 힘들다고 하는 한마디에 모두 그녀의 집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이 씬은 연이 현재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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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사랑으로 - 김멜라의 <이응이응>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게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논점도 흐트러지고 가끔씩 일탈도 범하며, 문장이 지저분해서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긴 글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당신이 을 읽지 않으셨다면, 부디 이 글을 읽기 전 멈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을 읽고 머뭇거리던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론이 아닌) 비평은 언제나 타 작품을 베이스로 그려져온 또 다른 하나의 메타예술이라는 점을 알아부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만날 날을 다음으로 기약하며...)비평이란 평론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 이상의) 장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평은, 글을 읽고 있는 나와 작가의 의식이 맞닿는 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평론은, 수학적이고, 작품의 가치 평가를 주로 삼으며 ‘이론’을 주체로 이루어진다.비평에는 감상한다는 즐거움이 있고, 써야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평론에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 대신 내가 그 작품을 모조리 해체하고 해부하여 뼛 속까지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쓰여진 것이 평론이다. 그것에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있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모든 것들을 전부 들춰보고 그 사랑을 끝내려는 행위같은 느낌이 더욱 크다. 그 속에는 오직 ‘작품’을 알고싶다는 매우 일방적인 사랑의 욕망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작품을 상대하는 주체 역시 ‘내가 아닌 이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거짓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설령 평론의 그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타자나 나의 그 무엇 하나 없이는 성립조차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찌보면 진정으로 끌리게되는 것은 언제나 비평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멜라의 은 '나의' 비평에 있어서 가장 부합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 말은 곡해될 가능성이 있다. '나'의 비평이란 것은, 오직 나와 책, 이 두명만이 나눈 매우 사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뜻한다. 또한 은 평론으로서도 매우 좋은 작품이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오직 감각적인 문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서 텍스트로만 받아들여지도록 쓰여졌다는 점이나, 김멜라 작가의 작품들에 결부되어왔던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것으로만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하여 말하기는 한 없이 부족하다.) 본래 김멜라씨의 소설들이 으레 젊은작가상으로 주목받기 훨씬 더 이전부터 관심을 두어왔던 한명의 독자로서 늘 씨의 작품들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자주 드나들던 문학광장에서 이란 작품이 기고된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읽었던 것이 벌써 일년 전이다. 그 일년 사이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했다. 본래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것이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도 막상 말을 섞고 밥상을 함께하고 나면 헤어지기가 매우 꺼려진다. 그건 누군가 떠나고나면 혼자 외로운 고독 속에 남겨져서 겸허히 받아들여야만할 이별이 두려워서거나, 또는 그 공허한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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