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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바케트의 <키메라> 단상, 또는 안내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4-09
  • 조회수 915


이따금 그럴 때가 있다. 작품을 보며, 그 작품이 자신에게 숙명처럼 다가온 것 같다고 느낄 때. 만약 본인이 비평가라면, 그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일테지만, 매우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비평가라면 무릇 그것을 글로서 풀어 설명하고, 감흥과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기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평을 한다는 것은 작품을 죽이는 것과 같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을 자신 스스로 해체하고 부수며, 조립해야만한다. 그렇게 되면 종국에 남는 것은 죽어비린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비평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작품을 사랑해서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정확히 하자면, 사랑하는 것을 왜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서 비평을 한다. 그렇기에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숙명적인 작품은 더욱 빨리 죽어야만한다. 내가 죽여야 하는 오늘의 작품은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 <키메라>다. 그러나 윤리가 나를 끌어당길 수록, 나는 필사를 다하여 작품을 죽이지 않을거다. 나는 이 영화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까닭에, 단상과 해석에 안주하는 비평(같지도 않은 비평)을 하려고 한다. 굳이 비평(같지도 않은 비평)을 하는건 이 영화를 본 누군가가 약간의 해석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태양은 항상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말하는 여자친구를 시작으로, 태양을 마주하고 그녀와 껴안으며 끝나는 마지막까지. 영화는 그야말로 수미쌍관이다. 주인공이자 도굴꾼 아르투는 새로운 기회이자 '삶'으로 보여지는 여인 '이탈리아'의 사랑을 거부하고,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는, '죽음'으로 통용되는 전 여자친구 '프리다'를 선택한다. (‘이탈리아’는 아이를 가지고 있고, 보육원을 운영한다. 그녀의 인생은 생기 가득하다. 반면 ‘프리다’는 이미 죽어있는 고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아르투와 프리다가 만나는 장면은 아르투의 죽음에 대한 은유이며, 가장 이상적이고 황홀한 엔딩이다. 동시에 아르투가 이른 새벽 ‘이탈리아’를 떠나는 장면 역시 영화 속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아르투를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이다. 


영화 속에는 두번의 기차 씬이 등장한다. 첫번째는 아르투가 감옥에서 출소하여 자신의 집으로 가는 초반부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은유인 키메라 석상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오는 전철에서이다. 전자의 장면에서 아르투는 한 승객을 보고, 오래된 그림에 나오는 사람을 닮았다고한다. 바로 다음 숏에서 영화는 오래된 이집트 벽화를 보여주며, 승객과 벽화 속 인물을 비교하도록 한다. 클레쇼프효과에 의해 자연스럽게 벽화 속 인물은 승객과 동일시된다. 이 후 벽화가 나오는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누군가의 무덤 속에서다. 

아르투는 이 후 그 승객을 다시 한 번 만난다. 그 장면이 바로 후자(키메라 석상을 던져버리고 오는 전철)의 장면이다. 이 장면이 매우 이상한 것은 초반 열차의 동일한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승객과 초반 열차 속 인물들은, 아르투에게 무작정 자신들의 물건이 어디있냐고 따져 묻는다. 아르투는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당황하며 모른다고 이야기하지만, 승객과 일행들은 거의 확신하다시피 당신이 우리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고 반박한다. 

아르투가 도굴을 할 때마다 유골 속에서 방울, 접시, 그릇 같은 유물들을 훔쳤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승객과 일행들은 아르투가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갔다고 했다. 승객은 벽화를 닮았다. 벽화는 무덤 속에 있다. 즉, 초반 기차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인 것이다. 또는, 아르투가 도굴해낸 묘지의 주인들이다. 그들은 모두 아르투 곁에서 죄책감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꿈처럼 보여지기 쉬운 승객과 일행의 재등장은, 영화 속 가장 소름끼치고 무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파티장에서 깊은 밤 여주인공 '이탈리아'가 홀로 춤추는 장면은 로셀리니나 펠리니, 데 시카 영화들의 최고 장면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일 만큼 시네마틱하다. 그 장면에는 존 포드와 오즈를 능가하는 영혼의 황홀경과 서정이 은연 중 머문다. 주변 모두가 짝을 찾아 춤을 출 때, 홀 몸인 여인 ‘이탈리아’가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은 개인의 확립이자, 그녀의 영혼에 대한 시각화다. 


도굴꾼이란 죽음을 발굴한다는 의미에서 비윤리적인 것인데, 이 영화는 그것을 사유하므로서, 죽음을 끌어안고 인생을 이야기한다. 아르투가 키메라 석상의 머리를 바다에 던져버렸을 때 그것은 곧 예술이 된다.


영화 초반부,'이탈리아'에게서 페데리코 펠리니 <길>의 여주인공 젤소미나가 엿보인다. 임권택 감독의 <화장> 역시 주제적인 측면에서 계속 떠오른다. 임권택이 40년이 지나서야 이룬 경지를 로르바케트는 단 6년만에 도달하고 만 것 아닐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딸 이사벨라의 출연은 시네필들에 매우 감사한 소식이고, 이 영화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은연 중 머문다는 이유에서 이탈리아 시네마의 헌사와도 같다. 이것은 어쩌면, 감독 자신이 이제는 저물어가는 이탈리아 시네마를 일으켜세우겠다는 포부처럼 읽힌다. 로르바케트 하나만으로도 이탈리아 시네마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있다고 본다.


영화의 제목은 키메라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동물의 형상을 한 돌연변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작중 등장하는 키메라 석상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의 복합체인 사람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또는, 그 모든 것들을 내제한 주인공 아르투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또는,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을 은유하는 것 처럼 보인다. 아르투의 친구들은 돈을 얻기 위해, 보석상과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장면은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을 연상케하기 때문이다.


아르투가 도굴을 할 때마다, 정확히는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화면은 위 아래로 전환된다. 반면, 아르투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물웅덩이 속에 무덤이 있다고 밝힐 때, 그곳에는 화려한 화면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물웅덩이에 비춰져서 반사되는 아르투만 존재하고 있다. 매우 정제되어있는 이 장면은, 바로 이전 씬에서 이탈리아를 떠나보내므로 사랑을 상실하고 자연스레 죽음을 택한 아르투에게 초능력은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닌 것을 뜻한다.


이하로, 영화 <키메라>를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단상을 서술해보았다. 비록 허술한 구멍들이 많이 있지만, 본래 영화란 읽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므로 텍스트를 통해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 중에서도 <키메라>처럼 시네마틱한 영화는 더더욱 텍스트로 설명하기 어렵다. 아니, 차라리 설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스크린 위에서만 모든 것이 성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앞서 말했 듯 비평이 아니라,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금의 안내서로 보아주었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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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사랑으로 - 김멜라의 <이응이응>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게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논점도 흐트러지고 가끔씩 일탈도 범하며, 문장이 지저분해서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긴 글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당신이 을 읽지 않으셨다면, 부디 이 글을 읽기 전 멈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을 읽고 머뭇거리던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론이 아닌) 비평은 언제나 타 작품을 베이스로 그려져온 또 다른 하나의 메타예술이라는 점을 알아부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만날 날을 다음으로 기약하며...)비평이란 평론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 이상의) 장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평은, 글을 읽고 있는 나와 작가의 의식이 맞닿는 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평론은, 수학적이고, 작품의 가치 평가를 주로 삼으며 ‘이론’을 주체로 이루어진다.비평에는 감상한다는 즐거움이 있고, 써야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평론에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 대신 내가 그 작품을 모조리 해체하고 해부하여 뼛 속까지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쓰여진 것이 평론이다. 그것에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있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모든 것들을 전부 들춰보고 그 사랑을 끝내려는 행위같은 느낌이 더욱 크다. 그 속에는 오직 ‘작품’을 알고싶다는 매우 일방적인 사랑의 욕망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작품을 상대하는 주체 역시 ‘내가 아닌 이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거짓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설령 평론의 그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타자나 나의 그 무엇 하나 없이는 성립조차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찌보면 진정으로 끌리게되는 것은 언제나 비평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멜라의 은 '나의' 비평에 있어서 가장 부합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 말은 곡해될 가능성이 있다. '나'의 비평이란 것은, 오직 나와 책, 이 두명만이 나눈 매우 사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뜻한다. 또한 은 평론으로서도 매우 좋은 작품이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오직 감각적인 문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서 텍스트로만 받아들여지도록 쓰여졌다는 점이나, 김멜라 작가의 작품들에 결부되어왔던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것으로만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하여 말하기는 한 없이 부족하다.) 본래 김멜라씨의 소설들이 으레 젊은작가상으로 주목받기 훨씬 더 이전부터 관심을 두어왔던 한명의 독자로서 늘 씨의 작품들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자주 드나들던 문학광장에서 이란 작품이 기고된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읽었던 것이 벌써 일년 전이다. 그 일년 사이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했다. 본래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것이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도 막상 말을 섞고 밥상을 함께하고 나면 헤어지기가 매우 꺼려진다. 그건 누군가 떠나고나면 혼자 외로운 고독 속에 남겨져서 겸허히 받아들여야만할 이별이 두려워서거나, 또는 그 공허한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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