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 작성일 2023-11-15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899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하는 기쁨과, 한편 마음이 숨통을 트는 힐링의 시간은 보너스처럼 주어진다. 스케치도 너무 잘하려고 여백 없이 다 채워나가면 답답하고 은근한 멋이 없다.
그림을 다 완성한 다음 칠판 앞에 나란히 세워놓고 품평회를 하는 시간이 재밌다. 그 사람의 개성이 묻어난다. 섬세하지만 선이 약하고 잔잔한 그림, 다소 거칠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림. 같은 그림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얼굴이 둥근 사람, 갸름한 사람 헤어스타일만 부풀려 빵처럼 커진 사람
아무렴 어떠랴. 각자 제맛이 정답인걸. 그리는 동안 행복하고 하하 호호 웃고 공감하는 시간이 재밌어서 수업이 끝나면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 스케치북 한 권이 손때가 묻으며 어느새 채워져 나간다. 용감한 도전이었고 진전이 느껴져서 좋다.
내게 ‘시인화가님’이라고 동인들이 부른다. 기분이 썩 괜찮다. 이름에 걸맞게 실력을 키워야 할텐데 포기만 하지 않으면 차츰 좋아지리라는 신념으로 버틴다. 미지의 영역을 접해보니 쉬운 건 없다. 시간을 투자하는 노력밖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있듯 늦은 시기란 없다. ‘오늘이 내 인생 최후의 날이다’ 생각하고 오늘을 오로지 충만하게 즐기고 싶다.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고 바로 시작하면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가 열린다.
나이 들수록 행복이라는 개념이 어떤 큰 목표를 세우고 성취에서 맛보는 젊은 날의 행복지수와는 다르게 목표는 작아도 과정에 충실하며 맛보는 ‘소확행’의 소소한 기쁨이 좋다. 동인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쓸쓸한 감정과 외로움도 줄어든다.
염천(炎天) 한가운데 하얀 도화지와 맞서며 우뚝 서기 위해 연필심을 종류별로 1cm 길이로 뾰족하게 깎는다. 연필통에 12자루를 가지런히 일렬횡대로 담는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는 장난감 병사가 작은 총을 겨냥하듯.
네모 혹은 세라비
모임에 가기 위해 광화문 골목길을 바삐 걷는데 회사원들이 사원증 목걸이를 걸고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싱그럽고 활기차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 전해온다. 나의 한때의 시절이 오버랩 된다. 어떤 화려한 목걸이나 액세서리보다 당당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네모반듯한 사원증. 몇 날 며칠 소설을 쓰듯 자소서를 써 지원해도 쓰디쓴 낙방만 맛보는 사람들은 회사원들의 가슴에 훈장처럼 빛나는 사원증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들까?
고층 건물이 밀집한 도심의 풍경은 건축 기술에 놀랐다가도 여유를 찾아보긴 힘들고 빌딩의 그림자마저 서늘하고 치열한 경쟁의 그늘로 비춰진다. 조직 관계에서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매끄럽지 못할 때 상사나 동료들이 주는 스트레스는 가슴을 옥죌 것이다. 풀리지 않는 화와 불안감은 네모난 칸칸의 사무실과 창문과 탁자와 좁은 책상과 엘리베이터와 회의장을 떠돌며 무거운 기운으로 맴돌지도 모른다. 네모반듯한 빌딩을 탈출해 동료들과 식사하며 하하 호호 소탈하게 웃는 발걸음은 한여름의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달콤한 탈출구일 것이다.
예약된 식당에 가느라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마스크를 두고 나왔다가 되돌아갔다 오느라고 조금 늦는다는 옛 직장 동료의 카톡 알림이었다. 자주 다녀서 익숙한 곳은 지리와 교통편을 훤히 알아서 검색해 볼 필요도 없이 자신 있게 나서지만, 낯선 곳에 약속 장소가 정해지면 네모난 휴대폰으로 지름길을 먼저 검색한다. 가장 빠른 코스를 검색해서 따라가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 헤매는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유용하게 쓰인다.
모임에서 퇴직한 직장 선배도 만났다. 퇴직한 후 표정은 부드러워졌다. 산에도 자주 가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기타도 배우고 여유롭게 시간을 다 누리는 듯해도 일을 놓은 자의 쓸쓸함과 미래의 불안감이 왠지 어깨 한쪽에 앉아있는 듯 느껴진다. 그분은 내게 고백했다
“만 65세가 되어서 지하철이 공짜라 ‘지공거사’의 권리를 누리지만 한편으론 65세 이전에는 교통카드를 대면 ‘삑~’ 하고 한번 소리 났던 것이 ‘어르신 교통카드’를 대면 두 번 ‘삑삑~’ 하고 나는 소리가 묘한 감정을 준다고 했다. 그가 보여주는 교통카드에는 왠지 모를 나이 들어감의 쓸쓸함이 네모 한구석에 담겨있는 듯했다. 여운이 오래갔다.
매일 아침 하루가 시작되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 팩에서 우유를 한 컵 따라 마시고 토스트를 구워 버터를 발라 먹는다. 병원이라도 다녀온 날이면 네모난 약봉지를 잘라 약을 먹는다. 현관문을 열고 네모난 신문을 들여와 핫이슈를 따라 읽어나간다. 식사를 마치면 흡인력이 강한 청소기의 네모난 헤드로 거실부터 구석구석 청소해나간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열어보고 빼곡한 네모난 방들을 열어보고 일들을 처리한다.
어디론가 이동할 때 지하철을 이용할 때면 객차 안에서 선풍기 커버, 장갑, 마스크, 만능 공구 등 잡다한 잡동사니를 팔면서 호객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가슴 한가운데에 어르신 교통카드를 목걸이 줄에 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는 경쾌하고 당당함보다는 힘겨움과 서러움이 전해진다. 좀 편히 쉬면서 사셔도 될 나이에 생계를 위해 차갑고 험한 세상 일선에 나선 사람들인 것 같아 보여 마음 한구석에 연민이 생기곤 한다.
네모는 사람들의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신분이자 보증의 플라스틱 카드도 되었다가 고뇌하며 정답을 하나씩 고르고 써나가는 네모의 시험지에는 사람의 앞날이 담겨있다. 봄이면 논물이 찰랑이는 논에 가득 채울 새싹 모종이 모판에 가지런히 심어져 희망을 불러오고 학생들 급식판에는 즐거움과 맛이 담겨있다. 그런가 하면 애경사를 치르고 큰 금액을 계산할 때 지폐를 준비해 가지 않아도 간단하게 신용카드 한 장이면 해결된다.
네모난 보도블록 위를 경쾌하게 걸어가는 회사원들이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발걸음이 좋다. 한편 지하철역에서 오는 차를 무심히 기다리는 노인의 목에 걸린 어르신 교통카드는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무기력감을 준다.
인생은 어차피 네모에서 시작해서 네모를 서성이다 네모로 끝나는 게 아닐까.
산모가 침대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는 자라며 네모난 가족관계증명서에 등재되고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돈이 필요할 땐 현금 자동출금기 앞에서 카드를 넣고 네모 위에 있는 숫자를 눌러서 생활에 필요한 현금을 지폐로 찾는다. 우리는 네모난 빈 도화지에 각자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의 생을 살아간다. 생이 다하는 날 우리는 네모난 틀에 불로 태워져 한 줌 재가 되어 납골당에 안치되거나 네모난 관에 고이 모셔서 영원한 잠을 잔다.
가을 햇살이 발코니 큰 틀의 사각 창문 너머 거실 깊숙이 들어온다. 아파트 단지의 단풍나무들이 곱게 물들었다가 하나, 둘 옷을 벗으며 어디론가 만추의 먼 길을 떠나듯 가벼운 몸으로 돌아간다. 소파에 앉아 오래된 메모 수첩을 들춰보다가 오래된 앨범도 들춰보며 옛 추억에 빠져든다. 색이 바랜 사진마다 과거 한때의 삶이 녹아있다. 거실에 걸린 네모벽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오후를 향해 째깍째깍 쉼 없이 돈다.
그래, 인생은 네모에서 시작해서 네모를 맴돌다 다시 네모로 끝나는 거지. 빛나던 사원증도 어르신 교통카드도 얼마 동안의 유효기한이 있을 뿐이다. ‘네모...네모 ..네모. 모네’의 수련이 매일 아침 새롭게 눈 비비며 깨어나듯 네모 안에 한 생의 꿈이 피었다 진다.
그것은 인생, 네모...세라비(C’est la vie)....
추천 콘텐츠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감정수업 공화순 “언어는 어떤 언어나 고요한 자리에 놓고 위하기만 하는 미술품이 아니다”라고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 생각난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이 말은 문득, 내 언어의 표현에 의문을 가져다준다. 늘 속에 가두고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 숱한 내 감정의 말들이 밖에서 소비되는 대신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딸애의 병원에 동행하여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통증의 정도를 10단계로 나눠 표정과 함께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인가요? 아주 조금, 이 만큼?” 조절 레버를 움직이며 의사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환자에게 묻는다. 과연 통증의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통증의 단계를 몇 단계로 말할 수 있다면 내 감정의 단계도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미처 들었다. 그동안 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많이 감추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은 살아가며 마치 사소한 물건을 쓰듯 언어를 사용한다.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도 감정에 대해선 필요한 만큼 내어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내가 필요에서 내었다가 곧 불필요에서 닫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아, 진짜 화가 나려고 하네.”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말 한마디는 곧장 상대에게서 외려 두 배의 무게를 얹은 한마디로 되돌려 받았다. “야, 너도 화낼 줄 아니?” 그 순간, 속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나를 책망하는 듯했다. 서러웠다. 감정 표현에는 영 서툴지만, 지금까지 글로 대신하지 않았냐고 위무해 봐도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우울해. 음, 지금은 3단계 정도?” 소리 내어 말하곤 피식 웃어버린다. 글을 쓰다 보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다가 가장 근접한 말로 대체할 때가 더러 있다. 지금 내 감정이 꼭 그렇다. 엉거주춤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을까. 또 눈물을 삼키고 참아가며 애써 삭히려 한 적은 또 얼마던가. 그럴 때 누구에게라도 너무 억울하다, 너무 슬프다며 감정을 내어놓았더라면 조금은 후련했을까? 감정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영어로 ‘이모션(emotion)’의 ‘e’는 에너지를 뜻하고 ‘motion’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니 감정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셈이다. 감정의 방향을 잘 잡아준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동안 감정의 동물인 것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성적인 힘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작정하고 감정수업을 해본다. 날이 꾸물대니 우울하군. 전화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으니 조금 외로운 건가? 외로움 2단계! 이 정도는 참아야지. 어쩌면 감정의 표현이 내게 그리 절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눌러 참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 관리자
- 2023-11-1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