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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친구가 준 위로의 칡떡」 외 1편

  • 작성일 2022-09-30
  • 조회수 67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초등학교 친구가 준 위로의 칡떡



이상권




출간을 앞둔 책에 들어갈 탱화를 촬영하기 위해 경북 상주에 있는 어느 절에 들렀다가 근처 산 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불러냈다. 초등학교 친구인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대 초였으니까, 우리는 3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서 마주하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첫 마디가, “너 많이 사람 되었다!”였다. 그때는 전체적으로 어설픈 촌놈의 영상이었다면 지금은 작가로서 살아온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딱 보면 예술가 같다고 평해 주었다. 고마웠다. 나이 들면서 느끼는 맛이란, 가끔씩 오래된 인연들을 마주했을 때 내가 살아온 이력을 이런 식으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때 묘하게도 나는 단맛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우리 고향마을보다 더 촌구석으로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는 닳고 닳은 똥삽 같은 농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울타리가 쫑쫑하게 솟아올라 단아하게 얼굴을 내민 흰 접시꽃 같은 근사한 사람이 되어 있다고 농을 쳤다. 그녀는 다소 거친 손만 빼고는 전혀 농촌의 아낙 같지 않았다. 차림새도 제법 세련되었다. 나는 그녀가 우리 어머니처럼 늙어 가지 않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 고마워. 어떻게 나를 기억하고 연락했을까? 내가 하도 깊은 산골에 사니까, 어린 시절 친구들하고는 아무하고도 연락이 안 돼. 가끔은 보고 싶기도 한데…… 어디 가서 밥 먹을까? 배고프지? 뭐 좋아해?”
그녀는 절 주차장에다 세워 놓은 낡은 SUV 차량 쪽으로 앞서가면서 말했다. 나는 사는 집이 어디쯤 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가 내 눈을 피하는가 싶더니 이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왜? 나 사는 꼬락서니가 궁금해서 그렇지? 촌구석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혹시 소랑 같이 외양간에서 자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알았어. 우리 집으로 가자. 너만 불편하지 않다면 괜찮아. 집에 남편밖에 없거든. 애들은 다들 커서 객지로 나갔지. 야아, 우리도 벌써 그렇게 나이 들었다. 한창 살아갈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고, 더 큰 도시로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니 아니, 밥은 근처 식당에서 먹고 너희 집 가서 차 한 잔 마시면 어떨까, 해서.”
그녀는 잠깐 어디론가 통화를 하더니 자기 남편이 날 보고 싶어 한다면서 히히히 웃었다. 이렇게 오래된 옛 동무가 찾아왔는데 번거롭다는 이유만으로 맛없는 식당 밥을 대접하려고 한 자신이 잘못이라고 하면서.
“오늘은 나이 든 것이 오히려 좋다. 너랑 만나는 것도 편안하고, 또 이렇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좋아. 만약 젊어서 만났다면 이럴 수가 있겠니? 아니 30대나 40대에 만났다고 해도, 남편을 의식하고 어디 맘대로 집에 데려갈 생각하겠어? 그때는 시어머니도 계셨거든. 근데 이젠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어 버렸어. 그게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유롭기도 하구나!”
나는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애써 왼손으로 입술을 꼭 누르고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어 주었다. 게다가 자꾸만 머리가 아파서 가만히 있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녀는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자신에게 장학금을 넉넉하게 안겨 주는 지방대학을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런 대학에 가서 적응하지 못했고 휴학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더니, 내가 군대에서 돌아올 무렵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집갔다는 희미한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작년에 우연히 고향에 갔다가 그녀의 동생을 만났고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 오히려 이렇게 한적하면서도 깊은 산골짜기를 달리는 눈맛이 좋겠지만, 길이 거칠고 차가 없을 때를 생각한다면 이런 곳은 해만 떨어지면 인적이 드물어지고 온갖 야생동물들이 판을 치는 그야말로 신화가 바들거리는 땅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오기는 했지만 이런 골짜기로 접어들 때 꼭 유배 오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남편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건강 때문에 교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시집살이를 하면서 살았다.
“친구야, 난 고향에서 살 때도 일은 별로 안 했어. 근데 여기 와서 한 백만 년 살았을 만큼의 일을 다 해 버렸어. 나도 내가 그렇게 일 잘하는 농군이 될 줄은 몰랐어. 근데 어째? 남편은 아프고, 애들은 셋이나 퍼질러 놨으니. 게다가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날 만나서 아프다고 해 대니! 3년 전에 그런 시어머니가 95세의 나이로 그 질긴 숨결을 내려놓자 이상하게도 허탈해지면서 우울증이 밀려오더라. 한 세대가 끝났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그런 생각 하니까 아무런 의욕이 생기질 않아서…… 하하하, 그만두자! 저기가 우리 집이야. 정미조 노래에 나오는 개여울 옆에 있는 집!”
그녀의 집은 이 근처에서 가장 맑은 물이 우려져 나오는 개여울 옆에 앉아 있었지만, 제비들도 쉽게 날아들지 않을 정도로 처마가 낮고 늙은 몰골이었다. 그런 집에서 머리를 삭발한 소년 같은 키 작은 남자가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남편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은 목공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차를 가지고 나왔다. 달맞이꽃 차였다. 저녁은 남편이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오늘 밤은 무조건 묵어가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그것이 이 집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그녀가 따라주는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소년 같은 남편이 무엇인가를 들고 왔다. 저녁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우선 이것으로 요기를 하라고 했다. 콩고물이 묻혀 있는 것이 인절미 같았는데 먹어 보니 칡 맛이 났다.
“어, 이게 남아 있었네? 그래, 칡떡이야. 사흘 전에 우리 결혼기념일이었거든. 그때 남편이 이것으로 케이크도 만들고 떡도 만들었어. 우리 집은 요새 남편이 모든 요리를 다 해. 아까도 살짝 언급했지만, 시어머니 돌아가시자마자 뭔가 팽팽했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으면서 우울증이 밀려왔고…… 부끄럽게도 나 죽으려고 두 번이나…… 근데 그 목숨이 쉽게 안 끊어지더라. 남편이 그러더라. 죽으려고 하지 말고, 잃어버린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내가 세계여행이라고 했더니, 그것 하래. 이제 다 해 주겠다고. 그리고 농사에 아등바등하지 말고, 돈에 아등바등하지 말고 살자고. 근데 흙냄새 맡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렇게 아등바등해야 살 수 있어. 논밭에다 심어 놓은 온갖 곡식들 때문에 어디 하루도 편안하게 쉴 수가 없어. 그게 농사꾼의 운명이야. 그러자 남편이 논밭을 거의 다 팔아 버렸어. 처음엔 돈 때문에 불안했지만 살다 보니 돈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겠더라고. 일단 집이 있고, 먹고살 걱정은 없으니까. 지금은 읍내로 나가 독서 모임도 하고, 글쓰기 공부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그래. 남편은 우리 집을 짓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 중이야. 요즘은 우리 전통음식에 푹 빠져서 날마다 풀을 뜯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이 칡떡도 남편이 직접 만든 거야. 이게 경상도 전통음식이래. 칡가루를 쌀가루랑 섞어서 찐 다음 콩고물에 묻힌 거야. 맛이 독특할 거야.”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알면서도 뭐라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칡떡만 먹었다. 배고프기도 했고 유달리 떡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그 떡이 잘 맞기도 했지만, 그걸 먹으면 먹을수록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떡이 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뇌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사흘째 집에서 나와 있었다.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도 여유가 없어지고 자꾸만 쫓기는 것 같은 삶이 되풀이되면서 내가 힘들어하자, 아내가 바람 좀 쐬고 오라 하여 겸사겸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걸 다 먹었네! 이따가 밥은 어떻게 먹으려고?”
“괜찮아. 요새 소화도 안 되고 입맛도 없는데, 이건 한없이 먹겠다. 남편 솜씨가 대단하네. 아무튼 너 보러 오길 잘했네. 실은 나도 요새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거든.”
그녀가 슬그머니 덩굴처럼 가늘게 야윈 손을 뻗어 와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사 온 집에서 가져온 가랍떡






아래 아랫집에 새로 이사 온 세 가족이 우리 마당으로 들어섰다. 우리 세 가족도 마당에 있는 야외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린 딸을 앞세운 그들은 우리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호박잎에 덮여 있는 접시를 내밀었다.
“저희는 이 동네로 이사 온 김덕수, 윤혜나, 김유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자기 이름을 크게 말하는 경우도 처음이라 우리는 체면 가리지 않고 웃어 댄 다음,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내 이름을 크게 말했다. 차례로 아내와 딸도 일어났고, 마당 가에서 짖어 대던 개도 우리가 소개하였다.
“저희 집 짓는 동안 많이 불편하셨죠? 불편한 것 너그럽게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 이 동네에 들어와서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집으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이건 저희가 장만한 떡입니다. 이것이 저희들 마음입니다.”
허, 보면 볼수록 경우가 밝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 근처에 새집이 네 동이나 들어섰지만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다가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집을 짓기 시작할 때만 주인들이 와서 곧 공사를 시작할 테니 편의를 봐 달라고 하면서 화장지 한 상자 내밀면 끝이었다. 그때부터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온갖 공사 차량들이 전쟁터처럼 질주하여도 항의 한 번 할 수 없었고, 공사장 차 때문에 아이가 사나흘에 한 번꼴로 지각을 해 대도 누구 하나 사과하는 법이 없었고, 인부들이 우리 집 마당가에 와서 노상방뇨를 해 대고 담배꽁초나 온갖 쓰레기를 마구 던져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새집에 이사 들어온 그들은 다음날부터 온갖 외부손님들을 불러 대서 왁자지껄 잔치를 벌였지만 정작 이웃들에게는 시루떡 하나 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을 지을 때 그 엄청난 먼지와 소음을 감당해야만 했던 이웃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포에 맞아도 끄떡없을 것 같은 콘크리트 담장을 쌓아 놓고 보안업체 감시카메라를 사방에다 매달아 놓고는 이웃들을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아래 아랫집에 새집이 들어설 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지금까지 집을 지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젊었다. 정확한 나이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무리 넉넉하게 쳐주어도 사십이 넘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두 내외가 고급 외제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부터 정서적으로 나하고는 멀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뜻밖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가려고 하는 것을 아내가 차 한잔하고 가시라고 붙잡았다. 그들은 마당에서 가족이 차 마시는 풍경이 참 아름답다고 하면서, 자신들도 이런 풍경을 꿈꾸고 이사를 왔다고 하였다. 아내는 이렇게 호박잎이 덮인 떡을 받아 보는 것도 처음이라면서 다시 고맙다고 하였다. 우리는 당연히 시장에서 사 온 시루떡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시장에서 사 온 시루떡을 사다가 이웃들에게 돌렸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요즘 누가 집에서 시루떡을 하겠는가. 어어, 그런데 호박잎을 들어내자 눈에 들어온 약간 붉은 빛을 머금은 떡은 딱 보기에도 생김새가 제각각이고 서툴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우린 시장에서 온 떡이 아닙니다!”하고 떡들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떡을 보는 순간 아내랑 내 입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거 집에서 한 떡이군요?”
아내가 물었다. 남자가 대답했다.
“예, 이웃들에게 드리는 첫 음식을 시장에서 사다가 드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만들기로 했습니다. 저희 장모님한테 배운 겁니다. 모양새는 볼품없어도 맛은 괜찮습니다.”
나는 너무 감동적이라서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고, 그들의 얼굴을 슬그머니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들이 젊은 나이에 이 비싼 곳에다 어떻게 땅을 사고 집을 짓게 되었는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이 나보다 살아온 세월의 길이는 짧지만 부끄럽게도 나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감히 누가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이웃들에게 드리는 첫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드리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으랴? 새삼 그들이 다시 보였다.
“와아, 이거 진짜 맛있다! 약간 옥수수 냄새도 나고, 이게 무슨 떡이에요? 색깔을 보니 수수로 만든 것 같은데…….”
아내가 내 입에도 떡을 넣어 주었다. 떡은 소똥구리가 만든 소똥 경단 모양도 있었고, 개떡처럼 동그랗고 납작하게 만들어진 것도 있었고, 적당히 동그랗게 말아진 것도 있었다.
“저희 친정엄마가 떡 만드는 걸 좋아하시죠. 그래서 어떤 떡을 만들었으면 좋겠냐고 했더니 이 떡을 말씀하시더라고요. 옛날에는 떡이라는 것이 모든 음식의 결정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상님께 제사를 모시거나 특정 신에게 고사를 지낼 때도 떡이 빠지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고기는 빠져도 되지만 떡이 빠져서는 안 된답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혹은 특정 신이나 다 밥을 먹어야 산답니다. 밥이 곧 떡인 거죠. 밥을 보기 좋게, 더 맛있게,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게 만든 게 떡인 셈이지요. 이사 와서 떡을 돌리는 것도, 이런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면서 열심히 잘살아 보자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이건 우리나라 전통 떡이랍니다. 이름은 가랍떡이라고 하는데, 가랍떡이 되려면 가랑잎 즉 참나무 잎으로 떡을 싸서 쪄야 해요. 그러니까 가랑잎떡이라는 말이 발음하기 쉽게 가랍떡이라고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가랑잎을 딸 수가 없어서 우리 집 아래에 옥수수가 많길래 그걸 밭 주인에게 좀 뜯어 가겠다고 했더니, 옥수수도 다 땄으니 맘껏 따 가라고 하더라고요. 이 떡은 옥수수잎으로 싸서 찐 거예요. 수수를 물에 불려 놨다가 가루를 만든 다음 그걸 익반죽하여 적당한 떡 모양을 만들어요. 손에 달라붙지 않아서 만드는 것도 간단해요. 그걸 옥수수잎으로 싸서 쪄 내면 끝이죠. 여기에다 콩가루를 묻히기도 해요. 그러면 콩가루 맛이 수수의 약간 떫은맛을 흡수하면서 인절미처럼 맛이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붉은색이 보이도록 콩가루를 묻히지 않았어요. 붉은 떡은 재액을 막아 준다고 하더라고요. 친정엄마가 이사 떡이니까 콩가루를 묻히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친정엄마는 이 떡도 가랍떡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옥수수잎 떡이라고 불러요. 재료가 간단하면서도 볼품도 있고 맛이 좋아요. 가랑잎으로 싸서 찌면 가랑잎 잎맥 무늬가 떡에 그대로 새겨지기도 하고요. 가랑잎의 단맛이 배기도 합니다. 옥수수잎도 단맛이 있어서 괜찮더라고요.”
“와아, 근사하네요? 그러니까 이게 옥수수잎으로 싸서 쪄 낸 것이군요? 떡에 옥수수이파리 냄새가 살짝 배 있네요. 수수랑 옥수수잎이 궁합이 잘 맞네요. 시루떡하고 견주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떡인데요. 더구나 이걸 옥수수잎에 싸서 찐다고 하니까, 상상의 여백도 있어서 좋았을 것 같아요.”
“예, 맞아요. 옥수수잎으로 싸서 찌는 그 맛이지요? 재밌어요. 소꿉놀이 같기도 하고요. 이게 막 쪄 냈을 때는 보기도 좋고 지금보다 훨씬 맛있어요. 수수는 식으면 금방 굳어 버리잖아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 떡을 준비하면서도 걱정했거든요. 이게 얘들 장난도 아니고, 더구나 나이가 드신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 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한 수 배웠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새집에서 고사를 지내겠다는 말도 하였다. 고사라고 해서 판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가족들이 만든 떡이랑 몇 가지 음식을 더 해서 차려 놓고, 집짓기 전에 그 땅에서 살았던 들풀이나 곤충들 같은 여러 생명체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전하고, 이웃들이랑 한판 즐겁게 놀아 보자는 자리라고 웃었다.
‘그래, 때로는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더니 저분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최근에 이 동네로 이사 온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나이가 든 분들이다. 그들은 이웃을 자기네 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떡을 먹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나부터 마음의 문을 열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떡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귀한 씨앗 하나를 땅에다 심은 기분이었다.
아내가 그들을 배웅하면서 다시금 고맙다고 말했다. 코스모스꽃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내는 다른 것은 부럽지 않지만 저렇게 땅 냄새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아이를 데리고 이런 곳으로 나온 그들의 용기가 부럽고, 이웃들에게 들꽃처럼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그들의 마음만큼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권
작가소개 / 이상권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용인에서 살고 있다. 최근에 소설 <시간여행 가이드 하얀 고양이>를 출간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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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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