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주황색 거짓말

  • 작성일 2022-09-30
  • 조회수 71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주황색 거짓말



권담희




아버지 기일은 알림 설정이 필요 없다. 즈음해서 어김없이 귀남 여사의 전화가 온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의 총기는 초롱초롱하다. 어느 해 여름에도 그랬다. “아부지 제사 때 일찍 올 거지?” 오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오는 거로 못 박는 말투가 내심 못마땅했다. 여름휴가를 늘 아버지 제사에 맞춰 쓰는 것이 좀 아깝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핑계를 댔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급격히 작아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슬쩍 후회되는 순간 버럭, 그녀가 소리를 높였다.
“무슨 즈그 아부지 제사 보러 안 오는 딸도 있나!!”
“아들은 안 와도 괜찮고 딸은 왜 꼭 가야 하는데?”
내 목소리 톤도 올라갔다. 귀남은 항상 이런 식이다. 아들이 못 오는 사정은 다 이해하면서 내게는 꼭 한마디씩 부아 돋우는 소리를 한다. 따따부따 한마디 더 하려고 입술에 바짝 힘을 주고 있는데 다음 그녀 말에 스르륵 맥이 풀렸다.
“딸이라도 와야지. 내가 니는 딸이라고 예쁘게 잘 키웠잖아.”
엄마가? 나를? 문득 어떤 영화의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어이가 없네.’라는.
“사랑을 받아 봐야 사랑도 한다 카드만. 내가 사랑을 못 받아 봐서 느그한테 사랑을 많이 못 주고 키웠다. 그때는 사랑이고 나발이고 먹고 살기도 바빠 아무 여유도 없었고. 그리 바둥바둥 살았는데도 우째 그리 없었는지.” 언젠가 넌지시 이런 고백을 하더니 이번에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오빠 둘에 남동생 둘, 그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제일 위로 언니가 있지만, 일찍부터 도시에 나가 있어 내게는 부재중이었다. 귀한 딸이니 대접 좀 받았을 거로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엄한 아버지는 그저 어려웠고 머리 한 번 묶어 주지 못할 정도로 바쁜 엄마는 언제나 목마름의 대상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일 갔던 엄마가 돌아와서 해 주는 칭찬이 좋아서였다. 처음 한두 번의 칭찬은 점점 당연한 일이 돼 버렸고 집안일은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오빠들과 남동생들에게 밥상 차려 바치는 건 기본이었다. 여자니까 그래야 한다는 엄마 말이 법이었다.
제일 싫었던 건 감자 까기였다. 여름 저녁이면 낮보다 더 활기찬 동네 고샅길을 뚫고 카랑카랑한 엄마 목소리가 제일 먼저 날아왔다. “○○야~ 감자 안 까고 뭐 하노!” 산비탈에 구메농사나 짓는 우리 집은 늘 쌀이 부족했다. 감자와 옥수수가 주식이었던 여름 저녁, 감자 까기는 필수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물가에 앉아 한쪽이 다 닳아 버린 숟가락으로 감자를 까다 보면 이상하게 머릿속이 근질근질했다. 울타리 너머 친구들의 조잘거림에 몸이 달아 조바심이 머리끝으로 올라가서였을까. 용자, 금자, 복자, 논농사를 짓는 집 아이들 노는 소리가 밥 먹으라는 엄마들 목소리를 따라 고샅길을 비워 놓을 즈음에야 조바심도 잦아들었다.
엄마 칭찬을 받으려고 우등상에 글짓기에 여러 상장을 타서 내밀었지만, 상 받기가 특기였던 오빠들한테 밀려 별 소득이 없었다. 엄마의 애정 순위에서 나는 언제나 꼴찌였다. 겨울방학이면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가기도 했다. 머리 한가득 나무를 이고 와 부엌에 부려 놓으면 머리가 납작 눌리고 목이 쑥 들어간 느낌이었다. “엄마, 엄마. 나 거북이 됐나 봐.” 목을 잔뜩 움츠리고 너스레를 떨며 엄마를 바라봤다. 상장 내밀 때는 찬물에 더운물 몇 방울 떨어뜨린 온도라면 이번에는 그 반대 온도의 엄마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름발치에 있던 엄마가 내 눈앞에서 나만 바라봐 주는 것 같았다.


“엄마한테는 딸이 하나 있어야지. 니는 딸이 없어 우짤래?”
아들만 둘 있는 내게 이따금 귀남은 걱정이란 듯 말한다. 딸이라고 뭐 그리 다정하게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새삼 이 새빨간 감성은 무엇인가 싶어 반 진담으로 토를 단 적이 있다.
“내가 딸이 있었어 봐. 절대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걸.”
“뭐 우째 키울 건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게 하고 안아 주고 업어 주고 떠받들어 키울 거야. 엄마처럼 온갖 집안일 다 시키면서 머리 한번 안 묶어 주고 위, 아래로 머시마 넷 치다꺼리하게 하지 않을 거야.”
“아따, 꽃자리 좁은 가시나. 딸도 하나 못 낳는 기 없는 딸 핑계로 즈그 엄마한테 오금 박는 소리 하네.”


동네에서 허리 꼿꼿하기로 유명한 귀남이 몇 년 전부터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며 걷지를 못했다. 원인은 척추협착증이었다. 허리 상태로 봐서 그동안 걸어 다닌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의사가 말했다. 방치한 세월이 너무 길었다. 나이가 있어 수술도 안 된다고 했다. 신경 내려가는 통로가 꽉 막혀 맨 걸음으로는 열 걸음도 채 못 걸었다. 아흔 살 귀남 인생에 처음으로 지팡이와 실버 보행기가 등장했다. 그녀는 보행기를 밀며 날마다 동네를 걷는 운동을 시작했다.
“고등어라고 매루치만 한 게 왔네. 인자 그 집에서 사지 마라.”
“에레이(LA)갈빈가 뭐신가 질겨서 묵도 몬 하겠다.”
“간장게장 이거 순 사기꾼이다. 살이 다 에비(여위다)가지고 간장만 퍼 묵어야 할 판이다.”
하얀 거짓말 따위는 생래적으로 못 하는 그녀의 거친 후기에도 음식이 보약이라고 틈틈이 입맛 돋우는 음식들을 사 보냈고, 보약 중 보약이라는 공진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지난 2월 어느 날 귀남은 별안간 3월부터 꽃밭 매러 갈 거라고 통보해 왔다. 마을 길가나 하천 둑길에 풀을 뽑고 꽃을 심어 가꾸는 노인 일자리 근로를 귀남은 꽃밭 매러 간다고 한다.
“니 사 준 한약 알맹이 꼭꼭 잘 씹어 묵고 해서 나 인자 잘 걸어. 밥도 잘 묵고. 그라고 꽃밭 매는 거 그거 힘 하나도 안 든다.”
힘이 왜 안 드냐고, 그러다 아프면 그땐 엄마 못 일어난다고, 좀 살만하니 한 달 30만 원 그거 욕심나서 그러냐고 나는 펄펄 뛰었다. 그러면서 그 30만 원 내가 주겠다는 말은 못 했다.
“동네 할마시들 다 꽃밭 매러 가고 나면 올 때까지 내 혼자 우두커니 노인정에 앉아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러지. 돈 그까짓 거 벌자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라고 느그 오빠들이나 동생들한테 말하지 마.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니만 알고 있어라. 니는 곱게 키운 내 딸이니까 엄마 마음 알재?”
아, 이 새빨간 거짓말. 그 곱게 키웠다는 딸은 도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냐고 벌 쏘듯 물었다.
“니도 알 낀데. 그 이쁜 딸한테만 내 통장하고 도장 어디 있는지 갈차 줬는데….”
우체국 통장은 여기 있고 농협 통장은 저기 있고 비밀번호는 어디 어디 적어 놨다고 언젠가 내 손을 붙들고 방에 들어가 “니만 알고 있어라. 아무도 모른다.”며 소곤소곤 일러주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이 아파서 정신을 놓거나 죽으면 쓰라고 하면서.


얼마 전 내 통장에 별안간 300만 원이 찍혔다. 이쁜 딸 행방에 대한 답이었을까. 해 준 게 없어 늘 마음에 걸렸다는 그녀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300만 원에 동그라미가 자꾸 덧붙는 기분이었다. 뭐 이 정도면 하얀 거짓말도 아니지만 새빨간 것도 아닌 주황색 거짓말 정도로 쳐 줄게, 농담을 툭 던지니 엄마가 하하 웃었다.













권담희
작가소개 / 권담희

강원도 화천 출생. 2018년 수필문예지 「한국산문」에 『무엇에 쓰는 물건이었을꼬』로 등단. 2020년 근로자문학상 수상. 유튜브 「수필.넷」 채널 운영 중.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