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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만 원어치 마음

  • 작성일 2023-05-26
  • 조회수 1,427

이백만 원어치 마음


박이강


이십여 년 만에 언니를 본 것은 아빠의 장례식에서였다. 장례식장은 정릉 끝자락에 위치한 변두리 병원에 가건물처럼 옹색하게 붙어 있었다. 고 김길우의 빈소는 복도 끝 제일 작은 방이었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혼자 상복을 입고 빈소를 지키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선일 터였다.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서성이다 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 찾아온 엄마의 조의금을 꺼냈다. 봉투는 동전 때문에 묵직했다. 조의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던 여자는 몇 초간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가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왔구나. 

내 등 뒤로 얼굴을 떨어뜨린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길어지는 포옹이 어색해 칼칼한 기침이 올라왔다. 혜선은 그제야 내게서 몸을 풀었다. 

아빠한테 인사해. 

묵례를 하고 몇 초를 더 서 있다 나왔다. 어디선가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급하게 혜선에게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했다. 혜선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혜선이 말했다. 

도련님이야. 

도련님? 그게 뭔데?

혜선은 피식 웃더니 남편의 남동생이라고 대답했다. 아. 나는 어색하게 응수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이라는 단어에 혜선의 존재가 새롭게 환기되었다. 나는 왜 혜선이 결혼했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남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첫날만 왔다 갔어. 사정이 있어서. 

혜선이 대답했다. 

돌아가려는 나를 혜선은 극구 말렸다. 결국 떡 몇 조각과 방울토마토가 놓인 탁자에 오렌지 주스를 하나씩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당혹스러웠다.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이 보였다. 한국에서 가져간 사진첩에는 어린 나와 혜선이 같이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있었지만 한 번도 서로 닮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녀의 얇은 눈꺼풀, 눈 아래 밋밋한 광대 그리고 좁은 매부리코에서 아래 인중까지 이어지는 얼굴 중앙의 생김새가 나와 너무나 흡사했다. 십중팔구 아빠의 얼굴을 닮은 거겠지. 

상복 한 벌 더 있는데. 입을래? 

혜선이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명함 있지? 명함 좀 줘. 

차마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아, 나 이 빌딩 알아. 꽃집에서 일할 때 몇 번 배달 간 적 있거든.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혜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멋지다. 그녀는 장례식장 입구까지 따라 나와 나를 배웅했다. 

상 치르고 한번 보자, 혜린아. 

이어 말없이 뒤돌아 걸어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내가 갈게. 너 회사로. 


*


아빠의 부고를 전해 준 사람은 엄마였다. 숙이 이모가 알려 주었다고, 처음에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장례식을 가든 안 가든 그건 너의 결정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고민하다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다음날 엄마는 천 달러를 보내왔다. 환전하자 은행 직원은 백이십삼만이천구백 원을 내주었다. 자투리 금액을 떼기도, 내 돈을 보태 백삼십만 원 정도로 맞춰 봉투에 넣기도 애매했다. 아니 애매하다기보다는 내키지 않았다. 엄마와 죽은 아빠, 그 두 사람의 마지막 교류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천 달러. 나는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길 좋아하던 엄마의 말투를 떠올렸다. 이거 육십 달러짜리 티켓이다. 꼭 재밌게 보고 가야 해. 이거 백 달러도 넘는 외식이야. 꼭 맛있게 다 먹어야 해. 이거 오백 달러짜리 캠프인 거 알지? 꼭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을 하고 와야 해. 맞다. 나와는 꼭 한국말을 썼던 엄마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이라는 표현도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쓴 달러가 내 몸속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 혈관을 타고 돌다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몸에서 돈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아웃풋이 인풋에 미치지 못하는 걸 용납 못 하던 엄마의 그 살뜰한 공식. 궁금했다. 엄마는 조의를 표하는 적절한 액수로 어떻게 천 달러를 생각하게 됐을까. 한때 남편이었던 남자를 향한 연민? 죄책감? 예의? 그렇다면 천 달러의 가치는 있다고 판단한 이 조의를 통해 기대하는 대가는 무엇일까. 인간적 품위? 조금 편안해진 마음? 아니면 덜해진 자신의 회한?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장례식 잘 다녀왔냐고. 조의금은 줬냐고. 언니는 봤냐고. 모습은 어땠느냐고.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궁금하지만 말하지 않는 걸까. 나는 어릴 때 혜선과 같이 산 기억이 희미하지만, 엄마의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오 년이란 시간을 엄마의 자리에서 보살폈던 아이라면 그냥 기억에 묻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옛날도 지금도 엄마는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속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만삭인 상태에서 나의 친부이자 이미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 홀아비였던 아빠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은 오 년만에 끝이 났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헤어졌다. 아빠는 상습적인 음주 진료로 의사 면허가 취소되었고, 엄마는 여러 번 부러진 갈비뼈와 간신히 실명은 면했지만 눈가에 흉한 흉터를 얻었다. 

이혼 후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남해의 한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그 후로 아빠나 언니의 소식을 듣진 못했지만, 엄마가 한두 번 전화번호를 바꿨던 건 기억한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남해보다 더 멀리 떨어진 미국으로 취업 이민에 성공했다. 이후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나 언니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았다. 그들과 연관된 시절이 엄마에겐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기라는 걸 어린 나는 헤아렸던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은 내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나중에는 그 존재조차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의 이름 혜선은 잊히지 않았다. 나와 이름 앞 자가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미국에서 나는 혜린이 아닌 린으로 불렸다. 오래전에 내 이름에선 ‘혜’자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


로비야.

혜선의 문자를 보고 나는 지하 일 층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답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지만, 콘퍼런스콜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십 분 정도가 지나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아직 미팅 안 끝났어.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허겁지겁 카페에 도착하니 구석 자리에 무채색 정물화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혜선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양 이사와 세 명의 직원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제이슨도 있었다. 하필이면. 망설이다 언니에게 다가가자 나를 알아본 양 이사 일행이 아는 체를 하며 눈인사했다. 이어 그들의 눈길은 나와 언니를 번갈아 오갔고 얼굴에는 의구심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웃으며 얼굴을 돌리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마주 앉은 혜선은 딴 사람 같았다. 장례식장에서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머리를 묶고 맨얼굴에 검은 상복을 입은 모습에서 받았던 첫인상이 빗나간 느낌이랄까. 달라진 장소에서 평상복을 입은 모습을 보자 비로소 진짜 혜선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화장 때문인지 얼굴도 좀 달라 보였다. 그녀는 검은색 스커트에 목까지 단추를 채운 쑥색 블라우스를 입고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뭉툭한 코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숱 없는 생머리가 초라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단이 있어 보였다. 결코 내가 친해지고 싶은 부류의 인상은 아니었다. 혜선은 말을 하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는데,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단련한 종류의 미소 같았다. 왠지 거울 속에서 보고 싶지 않은 내 얼굴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혜선이 말했다. 

너무 좋다. 다시 만나니까. 숙이 이모한테 네가 올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덕분에 장례는 잘 치렀어. 넌 무슨 조의금을 그렇게 많이 넣었니.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한 거야? 미국식인가 했다. 

혜선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보낸 돈이라고 설명하려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관두었다. 

정말 반갑다. 항상 혜린이 너를 생각했어. 너 미국 갔다는 얘기 듣고 나 엄청 울었던 거 아니? 궁금했어.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미국 애가 다 됐을까.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혹시 한국말로 얘기를 못 하면 어떡하지. 나 영어 못하는데. 그래도 꼭 다시 만날 거라 믿었어. 네가 한국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연락도 안 했다니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젠 다 괜찮아. 어쨌든 우린 다시 만났고 넌 이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가족이니까. 

가족? 

그럼 가족이 아니면 뭐니. 

뜻밖에도 언니의 용건은 돈이었다.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고, 등록금이라고 했다. 

미안해. 만나자마자 이런 부탁 해서. 솔직히 네가 오해할까 봐 많이 망설였는데, 내 사정이 지금 좀 그렇다. 달라는 게 아니야. 빌려 달라는 거야. 물론 갚으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혼해서 지금까지 내가 번 돈은 모두 아빠 병원비 때문에 진 빚 갚는데 들어가고 있거든. 남편은 그거에 대해서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어. 고맙지. 

장례식에 가기로 한 결정이 이런 상황의 물꼬를 트는 일이었을까. 혜선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느낌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대학 이 학년 때 휴학한 이래 쭉 아빠 병원비를 벌고 병간호하면서 이십 대를 보냈다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지금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이번에 포기하면 영영 학교에 다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너는 미국도 가고 거기서 공부도 하고 그랬지만 나는 뭐니. 

그러고는 어, 얘 표정 좀 봐, 하면서 살갑게 웃었다. 

농담이야. 너라도 잘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혜선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게 점점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쏟아 내는 말들이 듣기에 버겁기도 했지만 얼굴에 그려 넣은 것 같은 미소도, 나를 며칠 못 보다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도 불편했다. 

나는 내 이십 대를 후회하지 않아. 병원에서 참 많이 배웠거든. 세상엔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고. 한때는 아빠를 많이 미워했어. 지긋지긋한 족쇄 같았지.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니까 내가 성인이 돼서 아빠가 아프기 시작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빠가 나를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된 거지, 안 그래? 

혜선은 감회에 잠긴 표정으로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나 혼자 아빠를 돌봤다고 너를 원망하진 않아. 우리 잘못이 아니잖니. 

아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말을 혜선은 어떤 뉘앙스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친근하게 느껴져서 저러는 걸까? 아직 눈을 맞대는 것조차 어색해하는 나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거리감에 저렇게까지 무감할 수 있을까. 자신의 고단했던 지난 세월에 내가 방조자였다는 듯한 말투,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들이대는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게다가 어떻게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기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구나 아빠라니. 내 아빠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양 이사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이사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점심 했어요? 

아, 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신가 보다. 

순간 일행의 눈에 비칠 언니의 모습이 의식되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혜선이 웃으며 말했다. 

네, 제 동생이에요. 

제이슨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단둘이 커피를 마시며 나눴던 서로의 가족 얘기를 떠올리자, 지금 언니라는 사람의 출현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였다. 양 이사가 물었다. 

참, 린, 인도 출국 날짜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네, 알아요. 가야죠. 

몇 마디가 더 오간 후 그가 자리를 뜨자 혜선이 물었다. 

인도? 인도 가니? 

응. 출장. 

이어 이제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하자 혜선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김치야. 얼마 전부터 김치공장에서 일해. 꽃집보다 수입도 낫고 앞으로 학교 다니면 야간 조로 일할 수도 있거든. 아무튼 꼭 좀 부탁할게.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잘 계신다고 하자 혜선은 말했다. 

엄마가 만든 계란찜 진짜 끝내줬는데. 나 계란찜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난다. 

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쇼핑백을 받아 들고 뒤돌아섰다. 연락할게, 하는 혜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


김치가 시었는지 엘리베이터를 타자 쇼핑백에선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한숨이 나왔다. 집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는 이런 크기의 김치통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 김치를 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냉장고가 있는 휴게실로 갔다. 냉장고 속에는 샌드위치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쇼핑백을 통째로 한쪽 구석에 욱여넣었다. 나중에 샌드위치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눈살을 찌푸릴 사람들의 표정이 눈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혜선의 부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냉정한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인색한 사람이? 

대학교 일 학년 때였다. 어느 날 룸메이트는 한참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휙 몸을 돌리고 내게 말했다. 린, 나 지금 암 투병 중인 경찰관을 위해 십 달러 기부했어. 이 아저씨, 사연이 참 딱하네. 너도 기부할래? 그렇게 나는 한 온라인 모금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마침 주급을 받았던 날이라 나도 십 달러를 기부했다. 그 후로 종종 즐겨찾기 목록에 저장해 둔 그 사이트를 찾았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위중한 상태인 다섯 아이의 아빠, 악기가 망가졌지만 새 악기를 사지 못하는 음대 장학생,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이웃의 독거노인, 반려견 치료비가 없는 실직자, 큰 수술을 앞둔 난치병을 앓는 아이… 세상엔 돈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상했다. 그들의 사연을 읽고 있으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요. 너무 힘들어요.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번 학기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됐어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내 사연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만한 이야기가 못 되었다. 종종 나는 사이트에 들어가 구세군 냄비에 지폐 한 장을 넣는 것처럼 마음이 가는 이에게 십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매번 행운을 빌어요, 라고 똑같은 댓글을 달았다. 그럴 때마다 십 달러 치 내 외로움을 덜어 내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그 사이트에서 혜선의 사연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까? 아빠에게 발이 묶였던 혜선의 이십 대를 생각하면 연민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새아빠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였다면 내가 나의 이십 대를 그의 병원비를 벌고 병간호를 하는 데 허비하는 걸 용납했을까. 아닐 것이다. 아니 그는 그렇게 무력한 상태가 될 때까지 자신을 방치해서 남에게 짐이 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가 삶의 모토인 사람이었다. 항상 네 인생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네가 책임져야 한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엄마와 결혼한 이유도 싱글맘인 외국인이 꿋꿋하게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었다고, 너도 엄마처럼 앞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부양자로서 자신의 책임은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임을 자주 강조했다. 자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님께 월세를 내고 살았다는 것도 자랑이었다. 엄마와 결혼하자마자 내가 용돈을 벌게 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항상 목소리가 컸고, 엄마는 웬만해서는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가끔은 견디기 힘들었다. 엄마는 야간 조 수당 때문에 자주 밤에 일했는데, 그때마다 남동생 폴의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침대맡에서 책을 읽어 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는 내가 일이 생겨 베이비시터를 불러야 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그럴 때마다 돈이 아까워 언짢아하는 특유의 표정을 보면 나는 폴을 돌보는 일이 갑자기 하기 싫어지곤 했다. 엄마가 병원 일로 힘들어해도 절대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도 화가 났다. 그가 주장하는 독립성의 이면은 사랑의 허울을 쓴 인색함에 불과한 것 같았다. 물론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돈에 벌벌 떨고 유머 감각도 없고 꽉 막히긴 있지만 엄마만큼이나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럭저럭 원만한 커플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각자 간호사와 수위로 일했고, 둘 다 크게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일요일이면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교회에 갔다. 그들은 십일조에 철저했는데, 주님께서 주신 열 개 중 아홉은 갖고 하나는 감사의 뜻으로 되돌려 드리는 거라고 했다. 그 논리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에 입학하자 새아빠는 누누이 말해왔듯이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 줄 수 있는 형편은 못 된다고 못을 박았다. 학자금 대출을 신청할 땐 주님께 드리는 하나를 왜 나를 위해 쓸 수는 없나 싶어 서운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열심히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다. 가끔은 이 정도면 엄마와 새아빠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홀로서기를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졸업을 앞두고 경영 컨설팅사의 인턴십에 합격했을 때는 비로소 세상에 우뚝 선 기분이었다. 인턴십을 마칠 즈음 한국 지사에 주니어 애널리스트 공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내가 열심히 따랐던 파트너는 흔쾌히 추천장을 써 주었다. 엄마는 내가 직장을 구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예상대로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네 인생이니까. 잘할 거라 믿는다. 이어 힘주어 말했다. 

함부로 남한테 도움받지 말고. 다 빚이 돼서 너한테 돌아오는 거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 아빠랑은 절대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 부탁이야. 

엄마는 나를 위해 그동안 모아 둔 돈이라며 구천 불을 줬다. 새아빠는 모르는 돈이라고 했다. 미국에 미련은 없었다. 유일한 미련은 사랑하는 남동생 폴을 앞으로 자주 볼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한국으로 떠나던 날, 폴은 나를 포옹하며 수없이 뺨에 뽀뽀해 댔다. 

아이 러브 유, 린. 

공항에 도착해서야 폴이 내 배낭 속에 넣어 둔 선물을 발견했다. 폴이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새아빠에게 받은, 그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저금통이었다. 


*


자리로 돌아오자 그사이 양 이사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사내 인트라넷에 올릴 이번 행사 참가기를 내가 써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회사의 글로벌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는 한국 오피스가 처음으로 참여하는 봉사 행사였다. 행사는 인도 첸나이에 있는 대안학교를 찾아가 학교 건물 기공식과 더불어 공사 현장에서 삼 일 동안 인부들과 일하는 일정으로 짜여 있었다. 아시아에서 이곳을 선정하게 된 배경에는 회사가 인도의 타밀나두 주 정부와 맺은 대규모 컨설팅 프로젝트가 결정적이었지만, 어쨌든 취지는 아시아 각국의 직원들이 자비를 들여 봉사 활동을 한다는 데 있었다.

양 이사는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의 리더를 자원했는데, 자신의 팀원 중에서 참가자가 많이 나오길 은근히 기대했다. 나도 가고 싶긴 했지만, 참가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항공료 198만 원이 개인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돈이면 석 달 치 월세를 낼 수 있고, 눈독만 들이고 있는 새 노트북을 살 수도 있으며, 더 보내면 갖고 싶은 핸드백을 장만하거나 집 근처 헬스클럽의 일 년 회원권을 결제할 수도 있었다. 양 이사에게 잘 보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이 기울 즈음, 제이슨이 참가 신청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봉사 활동을 상상하자 숨이 턱턱 차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릴 게 벌써 설렐 지경이었다. 참가기를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인트라넷용 글은 빤하니까. 금세 내 머릿속에는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헬퍼스 하이(Helper’s High). 남을 도울 때 엔도르핀 수치가 올라가고 며칠 또는 몇 주까지 만족감이 지속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첸나이에서 땀을 흘리며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종류의 희열을 느꼈다고, 그러니까 처음으로 헬퍼스 하이를 경험했다고 쓰게 되겠지. 아울러 고객들에게 기업의 영속성을 논하는 경영 컨설턴트의 관점에서 기업의 사회공헌 노력은 크고 작은 리스크를 대비할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우는 동시에 직원의 행복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그럴듯한 관련 통계나 케이스 스터디를 찾아보거나 ESG와 연계해 논리를 끌어내도 될 것이다. 몇몇 표현들은 미리 써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 행사를 통해 남을 돕는 게 나를 돕는 것이라는 진부한 표현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또는 서울로 돌아오던 날, 우리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던 아이들의 눈망울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으로는 이게 어떨까. 뜨거운 햇볕 아래서 소중한 동료애를 확인했던 제이슨, 영미 등과 함께 마셨던 인도 맥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였다. 

강 이사에게 제안에 감사하다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어 곧바로 온라인 신청과 참가비 결제를 마쳤다. 


*


일요일 밤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휴대폰 벨이 울렸다. 혜선의 이름을 확인하자 지난번 부탁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웠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인사말도 없이 혜선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과하려고. 

뭘? 

…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시 물었다. 

뭔데? 

지난번에 너한테 거짓말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히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오백만 원이 필요한 건 내 등록금 때문이 아니야. 남편 변호사 선임비가 급해서 그래. 

변호사? 

재판받게 돼서. 

왜?

성매매 알선 혐의로. 

나도 모르게 지저스 크라이스트,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황당해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혜선은 차분한 목소리로 남편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이 년 동안 일 때문에 지방에서 오피스텔을 얻어 지냈고, 몇 달 비게 된 집을 사정이 딱한 친한 친구에게 쓰게 했는데, 그 친구가 그사이 거기서 일을 벌인 거라는 얘기였다. 

친한 친구라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는 거야? 

옛날에 그런 일을 한 전력이 있다는 건 안대. 하지만 그 친구가 거기서 그럴 줄은 몰랐대. 알았다면 집을 쓰게 했겠니? 

혜선은 남편이 그동안 방황하다 마음을 잡은 지 얼마 안 됐다고, 이번에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참을 토로했다. 

한국에도 국선변호사 제도 같은 거 있을 거 아냐? 

네가 몰라서 그래. 유능한 변호사를 써야 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렇게까지라니? 

혜선은 흥분했다. 

내 마음 같아선 돈으로 해결될 수만 있다면 몇천, 몇억이라도 무슨 짓을 해서든 구하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 능력으론 변호사 선임비를 구하는 게 최선이야. 겨우 오백만 원어치밖에 안 되는 내 마음을 주는 거라고. 

내가 침묵하자 혜선은 거의 사정 조로 애원했다. 

그이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남동생하고 나, 이렇게 딱 둘밖에 없어. 내가 그를 저버리면 그는 정말 이 세상에 아무도 도움받을 사람이 없다고. 그거 아니? 어떤 이들은 인생에서 기회가 별로 없고, 그 기회마저 어그러지면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해. 

나는 국선변호사를 알아보라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너무하구나.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 달라는 건데. 오백만 원을 마련하는 건 너한텐 힘든 일도 아닐 텐데.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까지 매달리겠니? 

화가 났다. 혜선의 눈에는 내가 자신보다 훨씬 나은 입지에서 마냥 근사한 직장인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한국을 떠났다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오기까지 내가 어떤 시간을 거쳐 왔는지 알기나 하고 저러는 걸까? 모든 게 낯설기만 한 미시간의 작은 타운에 내던져졌을 때 내가 얼마나 엄마를 원망했는지, 엄마의 재혼으로 또다시 통째로 바뀐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의 십 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방황의 연속이었는지 알기나 할까. 오백만 원은 내가 미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도 쉽게 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매달 갚고 있는 학자금 대출과 빠듯한 생활비를 안다면 오백만 원이 내가 부담 없이 융통할 수 있는 돈인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잠을 청했지만 너무하다고 말하는 혜선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전화했다. 내가 받지 않자 연락 달라는 문자가 왔다. 같은 내용의 문자가 한 번 더 오고 난 후 더는 연락은 없었다. 


*


첸나이 행사 최종 참여 인원과 작업조가 결정되었다. 한국 오피스에서는 총 여섯 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바랐던 대로 나는 제이슨과 한 팀이 되었다. 양 이사는 출발 전 마지막으로 현지 일정을 점검하자며 고급 일식당에서 팀 런치를 소집했다. 그는 특별 회식비 승인이 나왔다며 가장 비싼 점심 코스를 시키라고 말했다. 점심을 다 먹었을 즈음 누군가가 농담 반 불평 반 양 이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참가비가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덕분에 저는 올해 여름휴가는 물 건너갔어요. 직원이 오지까지 가서 봉사하는데 회사에서 항공료 정도는 좀 내주면 안 되나요. 아니면 성수기를 피해서 잡던가. 

그러자 양 이사가 말했다. 

공짜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을 어떻게 공짜로 할 생각을 하나? 좋은 회사 다니니까 이런 봉사도 하러 가는 거야. 

몇몇이 피식 웃었다. 엄마식의 계산이라면 나는 이제 이백만 원의 가치에 부합하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을 하고 돌아와야 한다. 양 이사는 이어 말했다. 

난 가족을 돕는 건 도움으로 안 쳐.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니까. 생판 모르는 사람을 돕는 거. 그게 진짜 봉사지. 

양 이사는 불만을 제기했던 직원을 빤히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신입 사원의 여름 휴가비와 맞바꾼 봉사 활동이라. 숭고하다. 숭고해. 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자기 돈 쓰는 게 진짜 마음이거든. 누구를 도우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이야. 그걸 못 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하는 거고. 가장 이상적인 건 그 둘을 다 하는 거지. 이번 행사가 바로 그런 거야. 

겨우 오백만 원어치밖에 안 되는 마음을 주는 것뿐이라던 혜선의 말이 생각났다. 자리를 마치며 양 이사는 커피로 건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말했다. 

무엇보다 기분 좋잖아! 내가 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게. 



모르는 전화번호가 뜬 것은 고객 앞에서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받지 못하자 곧 문자가 왔다. 지산병원 응급실입니다. 급히 전화 요망. 회의를 마치고 전화를 걸었다. 낯선 목소리의 나이 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김혜선 씨 보호자 되시죠? 

네? 보호자요?

김혜린 씨 아닌가요? 인사부에 제출한 비상 연락처가 동생 김혜린으로 되어 있는데. 

네? 

언니가 공장에서 쓰러져서 응급실에 와 있어요. 지금 응급치료 마치고 곧 CT 촬영할 건데요. 의사 말이 담낭절제술인가 하는 수술을 빨리 해야 한대요. 수술동의서에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요. 원무과 수납은 급해서 할 수 없이 회사에서 먼저 했고요. 어서 빨리 와 주세요. 

저는 갈 수가 없는데요. 

그럼 언제 오실 건데요? 

못 갑니다. 

네? 

다른 방법은 없나요? 

아니 가족이 못 오시면 어떡합니까? 저희 공장장님이 워낙 깐깐한 양반이라, 멀쩡한 가족 놔두고 왜 회사가 관여하냐고 난리 치실 게 뻔한데. 

죄송합니다. 

아, 그럼 당장 수술은 어떡해요? 제가 대리 사인 해요? 

네.

참, 이 양반 황당하네. 그럼 돈은? 돈은 어떡해요?

알려 주시면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혼란스러웠다. 보호자라니. 난 언제부터 혜선의 회사 비상 연락처에 이름을 올린 걸까? 유전자 일부를 공유했다고 해서 그녀와 나는 가족이 될 수 있는 걸까. 불시에 뒷덜미를 잡혀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사람들 앞에 끌려 나온 기분이 들었다. 이후 남자와 여러 차례 더 문자가 오갔다. 2인실 밖에 입원실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혜선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수술은 잘 받았는지, 몸은 회복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선뜻 연락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혜선에게서 문자가 온 것은 이 주가 지나서였다. 공장에서 배를 잡고 쓰러진 순간부터 수술 후 현재 회복 중인 상태를 설명한 장문의 문자였다. 다행이라고, 잘 회복하라고 짧게 답을 쓰는데 다음 문자가 이어 들어왔다. 

고맙다. 역시 핏줄밖에 없다.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욱하고 치밀었다. 뭔가를 바로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쓰던 문자를 지워 버리고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


인도 출국을 사흘 앞두고 첸나이에 폭동이 일어났다. 봉사 행사는 취소되었다. 양 이사는 올해의 사회 공헌 행사는 아시아를 제외한 미국과 유럽에서만 진행될 것이고, 이번에 참여 신청을 해 준 모두에게 감사와 더불어 내년에 꼭 다시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각자 지불한 항공료는 지정 여행사에서 삼 일 내에 일괄 환불할 거라고 했다. 

이틀이 지나 내 계좌에는 198만 원이 입금되었다. 혜선의 병원비로 빠져나간 금액과 얼추 비슷한 금액이었다. 내 수중을 떠났던 돈이 다시 돌아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차피 받을 생각은 없었던 돈이었지만, 나는 혜선의 문자에 내가 낸 병원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걸 떠올렸다. 나는 혜선에게 이백만 원어치 마음을 준 것일까?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내 계좌번호를 보낸다면 그 마음을 거두는 게 될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모금 사이트에 들어가 사람들의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혜선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트북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첸나이 대안학교를 후원하는 비영리단체 웹사이트를 찾아 198만 원을 송금했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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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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