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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행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15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잠행

전석순

못 보던 저울이다. 빈 저울은 0에서 벗어난 눈금을 가리키고 있다. 5g과 10g 사이쯤이다. 고르지 못한 바닥 때문인가 싶어 평평한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값은 달라지지 않는다. 식탁은 팔꿈치만 닿았을 뿐인데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내 어딘가 나사가 반쯤 풀린 듯 떨린다. 몇 달 전부터 기필코 바꾼다더니 여태 버텼던 모양이다. 아예 주저앉을 때까지 쓰려나. 혹시 바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일순 걸음이 뒤틀린다. 어쩌면 이 방 전체가 기울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울의 접시를 힘껏 누르자 바늘은 끝까지 한 바퀴 돈다. 손을 떼니 한참 흔들리다가 느릿느릿 멈춘다. 이제 15g에 가까워진다. 뒤쪽에 붙은 레버를 돌려가며 영점을 조절해 보지만 내내 어긋나기만 한다. 번번이 모자라거나 넘친다. 차라리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언니는 저울에 무엇을 재 봤을까.

더러 언니 방에 몰래 들어서곤 했다. 엄마는 잊을 만하면 어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오라고 당부했다. 그새 약봉지가 늘진 않았는지, 형광등이 깨졌거나 김치는 안 떨어졌는지. 겨울이 되면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보고 이왕 간 김에 뜨거운 물도 틀어 보라고 했다. 언젠가는 그동안 새로 산 옷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십여 년 전 산 코트를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건 아닌지. 한 번은 그렇게 궁금하면 엄마가 다녀가라는 말을 뱉으려다 겨우 삼켰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적어도 오십 분쯤… 지하철역에서 나와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또… 녹록지 않은 길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게 언니가 이 방을 구한 이유 중 하나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새로 산듯한 패딩점퍼가 걸려 있고 디자인은 같고 색이 다른 스웨터도 널브러져 있다는 말에 엄마는 안심하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저울에 대해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나의 방문을 매번 질색하는 언니 때문에 단지 입구부터 사뿐사뿐 걸었다. 단지 내 빌라 이름들은 하나같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온전한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드림이나 그린처럼 지나치게 상투적인 게 분명했다. 좀처럼 다른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었다. 언니가 사는 빌라도 마찬가지였다. ‘ㅏ’가 지워져 ‘ㅣ’가 되었고 자음 하나는 통째로 날아갔지만 예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귀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창문으로 집 안 기색부터 살폈다. 가느다랗게 흔들리거나 불빛에 어룽질 때도 있었지만 블라인드는 대개 내려져 있었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땐 숨을 고르고 귀를 바짝 붙였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옆집 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멀리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 사이에 격앙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계속 듣다 보면 둔중한 울음소리도 끼어들었다. 더 가까이 귀를 가져가는 순간 차가운 현관문에 닿아 화들짝 놀랄 때도 많았다. 안에 언니가 있는 게 분명해도 돌아선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그럴듯한 핑계를 마련해 뒀다. 엄마가 가져다 두라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이번에 못 보면 두어 달은 만날 수 없어서, 화장실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안 통하면 지난밤 꿈에 언니가 불러서 온 거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냥 잔소리 좀 듣고 말자는 생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을 때 언니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들키지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돌아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전화를 걸어왔다. 냉장고에 밑반찬을 넣어 뒀거나 나가는 김에 쓰레기통을 비운 날은 눈치챌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도 손을 씻었거나 물을 마신 흔적까지 샅샅이 아는 듯했다. 신경 써서 닦고 정리해 뒀는데도 소용없었다. 혹시 선풍기나 불이라도 켜두고 나왔는지 생각해 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거실까지만 들어가서 휘둘러보고 안방을 기웃거렸던 게 전부일 때도 모르지 않았다. 방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체취로 아는 건가 싶기까지 했다.

내가 네 언닌데 모를 수 있니.

이어서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앞으론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 이후로도 환절기나 생일이 가까워졌을 무렵, 예고 없이 폭우가 몰아치면 들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혼자 사는 게 맞는지 확인해 보라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훑어 보라고 했다. 화분은 없었지만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고 하니 이제는 이파리가 무성해서 집에 해가 들지 않을까 봐 걱정인 듯했다. 끝에 가선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전화하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왔던 건 크리스마스였을 것이다. 그때도 별다른 건 없었다. 책장이 좀 비어 보였고 온풍기를 새로 산 게 전부였다. 엄마는 그동안 분명 놓친 게 있었을 거라고 했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럴 만한 건 없었다. 겨우 멀티탭을 켜 놓고 나갔던 날을 기억해 냈을 뿐이었다. 엄마는 어쩐지 내가 무딘 탓에 언니가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화분과 책을 내다 버리고 추위를 타고 깜빡깜빡하는 걸 알고도 무심했다고. 그러자 뒤늦게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꺼림칙해졌다. 그땐 분명 대수롭지 않게 넘길만한 것들이었지만 이제 와선 결정적인 단서로 보였다.

그새 약이 는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어디냐고 물으면 종종 병원에 있다거나 가는 길이라고 했을 때도 있었지만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매장용이라고 써진 컵을 보고선 멈칫한다. 언니가 한동안 마감 타임에 일했던 카페의 컵이었다. 어떤 식으로 그만두게 되었는지 떠올려 봤지만 마땅한 기억은 없다. 수납장에서 가정용 CCTV를 발견했을 때도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포장이 벗겨져 있어 슬쩍 열어 보니 모형이었다. 뒷면에 양면테이프가 있어서 어디든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악해 보이진 않았지만 가벼워서 들어보면 금세 들통날 것 같았다. 언니는 열어만 보고 다시 넣어둔 듯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받아서 확인한 다음 설치할 자리를 가늠하다가 포기했을 과정을 되짚어 봤지만 짐작은 정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계속 걸음을 옮긴다. 냉장고에 치킨집 쿠폰이 두 장 더 붙어 있다. 시선을 넓혀 싱크대를 들여다본다. 오래된 나무 도마에는 흠집 사이사이 곰팡이가 피어 있다. 국자 손잡이는 반쯤 부러져 쥘 때마다 놓치지 않으려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듯하다. 실리콘 주걱은 흐물흐물해서 도저히 밥을 뜰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냄비에는 규격이 맞지 않은 뚜껑이 덮여 있어 발이라도 구르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다. 가스레인지에는 찌개 국물이 그대로 눌어붙어 암호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세미는 오랫동안 폭풍을 견뎌 온 잎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축 늘어져 있다. 한 걸음 물러서자 시큼한 냄새가 몰려든다. 모든 게 언니가 간절하게 보내는 신호로 읽히다가 어느 순간 사방으로 흐트러진다.

그새 저울 눈금이 달라진 것 같다. 괜히 어깨가 뻐근해지는 기분이다. 집안에서 무언가 내내 언니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5g과 10g 사이에서 언제부턴가 15g의 무게로. 그러자 언니를 얼마간 이해할 수도 있을 듯싶다. 일하던 카페에서 컵을 가져왔던, 모형으로라도 CCTV를 사야만 했던 언니를. 숨기고 망설이고 돌아섰던, 정확하지 않은 저울도 버리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내버려 두던 언니를. 오지 말라면서도 그동안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던 언니를.


또 언니 일이야?

점심은 따로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 팀장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정을 전하던 끝에 불쑥 저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순간 언젠가 팀장이 아쉬운 소리 해 봐야 여기선 약점으로만 잡힌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괜한 말을 한 듯해 입술을 깨물었다. 난처해질 때마다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팀장은 고치라고 주의를 줬지만 잘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도 턱을 괴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라거나 말할 땐 머리를 긁적이지 말라는 것처럼. 그전까진 몰랐던 버릇이라 처음에는 다른 사람 얘기인 줄만 알았다.

왜 자꾸 너한테만 힘든 일이 생길까.

상냥한 말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 깊숙이 서려 있었다. 다들 그만한 일은 품고 사니까 하소연 좀 그만하라는 듯. 한편으론 상황이 아니라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지적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면지를 쓰라거나 적당히 티 안 날 정도로만 일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점심시간을 자꾸 개인 시간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해. 난 계약 기간 끝나도 자기랑 쭉 보고 싶어. 알지?

순전히 나한테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계약 종료 날 짐을 쌀 때 팀장은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두어 달 있다 정식으로 출근할 텐데 너무 꼼꼼하게 싸진 말라고. 무거운 건 두고 가면 맡아 두겠다고. 그러자 그동안 받았던 주의나 지적이 일순 훌륭한 조언으로 바뀌었다. 서류가 통과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동안 나와 상관없다는 듯 모르는 척해 왔던 소문도 상기됐다.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

면접에선 예상했던 질문이 순서만 바꿔 거의 그대로 나왔다. 업무 계획서에 있는 내용을 물을 땐 면접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몹시 흡족하다는 표정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업무 계획서에는 먼저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을 보강하는 방안을 썼다. 그럼 부모님도 동행할 테니 이삼십 대 중심에서 벗어나 폭넓은 연령대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또 건의 사항에 자필로 답하면 경직된 이미지도 변화할 듯했다. 야간 개장에 맞춰 루미나리에를 설치하는 방향에 대해서 말할 땐 나도 모르게 한껏 들떠 있었다. 진부한 인상도 개선하고 볼품없어지는 정원 탓에 방문객이 뜸한 겨울철까지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한 번 보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간만 달리해서 봐도 새로우니까요.

면접관 얼굴이 환해졌다. 간간이 연한 웃음소리까지 곁들여졌다. 언니에게 새 옷이 많이 생겼다거나 약은 줄었고 전에 보낸 김치는 바닥을 보인다고 할 때 엄마가 내보였을, 잘살고 있다고 안심했을 얼굴처럼.

결과 발표 전 주말 아르바이트부터 미리 정리했다. 정식으로 들어가면 병행하기 어려울 터였다. 사장도 방학 전에 그만둬야 여유 있게 새로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축하 인사와 함께 전해졌던 아쉬운 표정과는 달리 사장은 그날 저녁 바로 모집 공고를 올리겠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올리지 않은 채 뭉그적거려 몇 번 더 확인해야 했다. 공고가 나간 후 겨우 몇 사람이 찾아왔지만 사장은 번번이 선을 그었다. 인상이 좋지 않아 께름칙하다거나 어눌하고 야무지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그럴수록 나는 연락해 온 구직자에게 감시할 목적이 의심되는 CCTV를 두고 보완이 잘 되어있는 가게라고 강조했다. 그러다 보면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는 단골손님을 두고도 가족처럼 친근한 태도라고 바꿔 말했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면서도 한쪽에서는 요령껏 알아듣고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전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여기서 일하다가 잘 돼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당장 관리비에 공과금까지 빠듯했지만 첫 월급날까지는 무사히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기세를 해결하고 나자 다음에는 가스비와 핸드폰 요금이 나란히 버티고 있었다. 겨우 떼어 놓으니 이제 보험료만 남았다. 보험료는 일하고 있을 땐 별거 아니었지만 수입이 없으니 온몸을 짓밟는 것처럼 크게만 느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보험 서류는 망친 편지처럼 구겨져 있다. 그해 나와 언니는 같은 상품에 가입했다. ‘완전’인가 ‘완벽’이 들어가는 긴 이름의 상품이었다. 자꾸 되뇌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쪽이 든든해졌다. 말이 계약직이지 정규직이나 다름없이 일하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그땐 그게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계속 계약을 연장해 준다는 뜻이었다는 걸 몰랐다. 특별한 사정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손쉽게 나타났다. 회사는 매번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실수한 이의 일상에는 틈이 생기지 않았지만 아래 직원들은 달랐다. 커피 믹스나 난방 시간을 줄여야 했고 개인이 가져와 쓰던 가습기까지 규제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회사는 당장 다음 달을 알 수 없을 만큼 휘청거렸다. 그 와중에 사람까지 챙길 여력은 없었다. 눈치껏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전까지도 매번 임시직으로만 일해 왔다. 그래서 어쩐지 나는 내 인생에서도 임시로 잠깐 파견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더 유능한 인재가 나타나 더 싸게 일할 수 있다고 하면 군말 없이 물러서야 하는. 보험에 가입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마지못해 전한 형편이었지만 아저씨의 생각은 달랐다. 도리어 그러니까 더더욱 보험이 필요한 거라고 항변했다.

늘 예상치 못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한 게 사람 일 아니겠냐. 목돈 들어갈 때 울고 불며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

이어서 적정 보험료는 월급의 10%밖에 안 되니 그까짓 거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아저씨는 엄마에게 내가 일자리를 구했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월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고 달려온 게 분명했다. 앞에 대기업 이름이 붙긴 했지만 처지는 영 딴판이었다. 회장이나 미화원이나 회사에서 일하는 건 같은 것처럼. 그때 엄마는 아저씨가 실적을 올려야 계속 버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기억에 없었지만 우리한테 참 잘해 주던 아저씨라고도 덧붙였다. 꼬박꼬박 빠져나가던, 갱신 때마다 야금야금 오르던 보험료도 잊고 지냈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지금 그 상품은 단종돼서 말이다, …약관을 찾아야 봐야 할 것 같은데….

파리라도 한 마리 앉은 듯 성가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언니는 용케 보험료를 밀리지 않았고 보장 게시일도 훌쩍 지나있었다. 내가 겨우 떠듬거리며 한도나 보상 같은 얘길 꺼내면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와 목소리가 끊겼다. 다시 언니가 처음 병원에 갔던 날을 되새기면서 검사 내용을 전하다 보면 무뚝뚝한 목소리가 아저씨를 급히 불러냈다. 그때마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활달한 목소리로 파격적인 조건이라 벌써 인기 상품이라고, 내년이면 상황이 달라지니까 어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질감이었다. 그래도 망설임이 가시지 않자 아저씨는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이거 나도 가입했어. 딸 같은 너네한테 설마 해가 되는 걸 권하겠니. 언젠가 고맙다고 할 날이 올 거야.

그날이 이 순간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아저씨가 전해 준 서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토너 절약 모드로 인쇄한 듯 흐릿한데다가 글씨가 너무 작았다. 그사이 갱신과 함께 20년 납 100세 만기라는 글씨가 빼곡했다. 계약하던 날 도장을 찍던 언니의 눈은 그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연하게 질린 얼굴이 잔상처럼 오래 남았다. 언니를 힐끔거리던 아저씨는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전했다.

이제 100세까지 사는 시대니까.

나는 그보다 20년 동안 납부해야 한다는 쪽이 신경 쓰였다. 까마득한 백 살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 매달 통장에서 정확하게 빠져나갈 보험료가 훨씬 생생했다.

아저씨는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그었다. 그 자리가 환히 빛났다.

이건 터졌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장이야. 지금은 막혔을 뿐이라며.

아저씨가 의자에 깊숙이 들어앉자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도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레토르트 식품 포장지에 있는, 실제와는 다소 다를 수도 있는 조리 예나 여행사에서 보여 준 완벽한 일정 밑에 붙은 ‘해당 일정은 현지 사정상 달라질 수 있습니다’를 말하듯이. 같은 단어라도 뒤에 붙은 말에 따라 범위가 달랐다. 언니의 보험은 범위가 좁았다. 그 안에 들어가려면 지금보다 두세 단계쯤 더 나빠져야만 했다.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서류를 보니 더 나쁜 경우가 수두룩했다.

애초에 더 좋은 거로 가입시켜 주시지 그러셨어요.

원망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원망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비싸지니까. 보험료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땐 그게 최선이었단다.

특약으로 들어가 있는 질병 후유 장해는 50%부터 보장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언니가 당연히 절반쯤, 어쩌면 대부분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약관에서 정한 기준은 섬세하고도 명확했다. 걸을 순 있는지, 밥은 먹는지, 배변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옷은 혼자서도 잘 갈아입는지 집요하게 따지더니 그 정도로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했다. 팀장에게도 내 사정은 힘들다고 말할 정도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중대하다는 것도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증명이 필요했다. 치료에 대한 보장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을 구분해 뒀는데 언니가 받는 치료가 어느 쪽인지 알기 어려웠다.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있긴 한데 어떤 기준에서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무는 대신 서류 한쪽 끝은 구겼다.

그래도 터지지 않고 막히기만 해서 다행이네. 보험금이야 탈 일이 안 생길수록 좋지. 안 그러니?

한결 누그러든 목소리였다. 나를 보자마자 내내 뻣뻣했던 표정도 부드럽게 일렁였다.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 있던 나도 다행이라 여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저씨가 다행이라 여기는 건 전혀 다른 쪽인 것만 같았다. 문득 아저씨도 진짜 이 상품에 가입했는지 궁금했다.

서류를 정리해 책상에 탁탁 두드리던 아저씨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아저씨를 향해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프린터 좀 아껴 쓰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순간 아저씨는 중심을 잃더니 나를 잡고 허청거렸다. 서로 허둥지둥하는 동안 놓친 서류가 뒤섞였다. 나는 아저씨와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서류를 주웠다. 순간 아저씨가 막 들어 올린 낱장을 빼앗듯 낚아챘다. 형광펜으로 칠하지 않은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여기 2대 질병 치료비는 뭐예요?

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아저씨는 옆 사람이 몇 번이나 힐끔거리다가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서리에 맺힌 물방울은 여전하다. 얼룩덜룩했던 벽지는 이제 그을린 듯 거뭇하다. 그대로 두면 벽면 전체로 번질 듯하다. 물기로 퉁퉁 불었던 벽지를 여러 번 닦아 낸 탓에 군데군데 벗겨져 안까지 드러난 자리도 있다.

언니와 처음 방을 보러 왔을 땐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분주했다. 나는 화장실과 싱크대를 보기로 했고 언니는 전체적인 구조와 함께 채광을 살피기로 했다. 물을 틀어 수압을 확인하고 재빨리 깨진 타일은 없는지 보는 동안 언니는 창문을 열어 보고 종종걸음으로 다용도실을 둘러봤다. 나름대로 주도면밀하게 관찰했지만 가장자리 구석까지 눈여겨보지 못했다. 눈길에 닿았더라도 새로 도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수압은 적당했고 타일이 깨진 자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언니도 괜찮다는 듯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쯤 집주인은 거들먹거리며 으스댔다.

요즘 세입자가 새로 들어온다고 도배해 주는 집이 흔치 않죠.

밑에 받쳐 둔 걸레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다. 언니는 밖에서 들어오자마자 걸레부터 갈았을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니 오래 묵은 곰팡내가 어슬렁거린다. 불현듯 언니가 집을 비웠던 시간이 얼마쯤인지 떠올려 본다. 언젠가 연락을 받고 온 집주인은 건성으로 힐끗대더니 제때 환기를 안 하고 살아서 집안이 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언니는 한겨울에도 틈틈이 창문을 열어 뒀고 물을 끓이거나 샤워할 때도 신중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건물을 지을 때 단열재가 제대로 쓰이지 않은 듯했다. 그 말에 집주인은 세입자의 집 관리 의무를 들먹이며 엄포를 놨다.

계속 이러면 나갈 때 새로 도배를 해 놓고 나가야 해요.

어쩐지 전 세입자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했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도 새로 도배된 방을 볼 듯했다. 이번에는 언니가 해 놓은 도배를. 결과 발표일에 걸려 온 팀장의 전화에도 비슷한 생각에 맴돌았다. 너무 많이 연습한 듯, 어쩌면 정해진 대사를 읊는 듯한 목소리였다. 결과가 나와서 전화했다는 말만 듣고 섣불리 감사 인사부터 건넸다. 끝에 이게 다 팀장님 덕분이라는 말까진 하지 말 걸 그랬다. 좋은 얘기는 꼬지 않고 곧이곧대로 들으라던 팀장이었다. 지적은 변명 없이 받아들인 다음 고치고 칭찬은 괜히 겸손한 척 부정하지 말고 떳떳하게 인정하라고 했다. 그래야 사회에서 사람들이 얕잡아 보지 않는다고.

고맙긴 뭘, 하긴 어떻게 보면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진 걸 수도 있으니까.

대체 어떤 각도로 봐야 좋은 기회로 보이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오며 가며 가끔 놀러 오라는 인사에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문득 팀장님을 회사 밖이나 새벽에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팀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달리 보면 새로울 수도 있으니까.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그게 나는 아니었지만.

언니도 나처럼 끝내 잠자코 있었다. 집주인이 언성을 높이자 고개까지 숙였다. 재계약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년 전 목돈을 마련해 보증금을 올려 준 데다가 그땐 순순히 도배까지 해 놓고 나간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이번엔 계약 조건을 그대로 유지할 거라는 기대가 있는 듯했다. 어쩌면 어물쩍 날짜를 넘겨 묵시적 갱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언니가 그만큼 이 방이 맘에 들기 때문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새로 구해도 더 나을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사비와 중개 수수료까지 계산하면 계속 머무는 게 나았다.

만료일을 앞두고 집주인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아 나에게로 연락해 왔다. 딱 저번만큼 보증금을 올린 서류를 준비해 언니의 방에서 보기로 했다. 부동산에서 뵙는 거 아니냐고 묻자 집주인 목소리가 서글서글해졌다.

겨우 요만큼 올리는데 수수료 아깝게 그럴 거 뭐 있어요. 서로 다 아는 처지에. 저번에도 그랬는데.

집주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헛갈린다. 보증금을 올려서라도 언니가 재계약을 하고 싶을지. 혹시 그 정도까진 아닐지. 언니는 방에 잠깐 머물렀던 나도 어렵지 않게 알아냈지만 나는 언니가 몇 년 동안 지낸 방에 있으면서도 언니를 모르겠다.

깍듯한 인사를 건넨 남자는 반듯한 인상이었다. 머리는 짧게 올려 깎았고 중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갓 다린 듯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낡긴 했지만 구두는 깨끗했고 온몸에 단단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어디에 함부로 앉거나 기대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울어진 바닥에도 영점 조절이 어렵지 않은 저울 같았다.

빳빳한 명함에서 손해 사정 뒤에 붙은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얼굴을 봤다.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듯한 인상이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목소리를 보냈다.

들어가실까요.

접수대에 언니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니 모니터에 고정되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관계냐고 물어서 동생이라고 대답했다. 거짓말도 아닌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시선이 어깨 너머 남자에게 가닿았다. 거리를 두던 남자가 쭈뼛거리며 내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어딘가 짓이겨진 표정이었다.

같이 오신 거세요?

남자가 명함을 건네자 알았다는 듯 돌아서서 서류를 찾았다. 멀뚱멀뚱 있으니 뒤에 있던 여자가 슬쩍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서둘러 비켜서는 바람에 비틀거리다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새 남자는 아까만큼 멀어져 있었다. 언니가 다녔던 병원은 환자들로 복작거렸다. 대기실에 남은 빈자리가 하나뿐이었다. 남자와 서로 앉으라고 실랑이하는 사이 어기적거리던 노파가 자리를 잡았다. 구석에 서 있으려는데 그쪽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둘러보니 대개 점퍼나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이었다. 그 틈에 낀 남자와 나는 한눈에 도드라져 보일 듯했다.

집 근처 병원을 두고 언니가 멀리 나온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거나 누군가 소개해 준 건 아닐까. 이걸 두고도 괜한 트집이 잡히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어쩌면 혼자 사는 것도 중대한 결격사유가 될지도 몰랐다. 이미 보험 가입 전 언니의 건강검진 기록도 샅샅이 훑은 후였다. 정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거나 일 년 사이 급격히 달라진 수치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전에 어디 아팠던 적이 있진 않았냐는 질문에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언니의 병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조금씩, 그러니까 보험 가입 전부터 있었던 게 아니냐고 따져 묻는 것처럼 들렸다.

그날 아저씨가 가져왔던 건 언니가 아니라 엉뚱한 여자의 서류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막히지도 터지지도 않아 다행인, 하지만 나중에 터지지 않고 막히기만 하면 보험금을 탈 수 없는 여자였다. 언니는 질병 후유 장해와는 달리 2대 질병에는 해당 사항이 있었다. 사과할 줄 알았던 아저씨가 전했던 말은 다소 엉뚱했다.

같이 입사했던 사람 중 여기 남은 이제 나 하나뿐이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사과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며칠 후 아저씨는 이 일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고 했다. 그래야 나중에 떳떳하고 엄마와도 얼굴 붉힐 일이 없을 거라고. 그땐 그게 낯선 남자와 함께 언니를 진료했던 의사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몰랐다. 아저씨는 남자를 우리와 상관없는 제삼자라고 불렀다. 그만큼 객관적으로 판단할 거라고도 덧붙였다.

의사는 얼굴 근육을 거의 쓰지 않는 듯 표정이 비어 있었다. 최근에 찍은 언니 검사 사진을 보며 같은 얘기를 세 번째 하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사진이 계속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한쪽이 순식간에 뿌예졌다가 중간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환해졌다. 얽혀 있던 무늬가 떨어져 나와 뭉개지기도 했다. 어디를 봐도 언니를 짐작할 수 없었다. 혼자 와서 사진을 찍고 결과를 들었을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질병분류 번호를 따질 때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달라졌다. 자세도 한쪽으로 치우쳤다. 앞에 붙은 알파벳에는 동의했지만 뒤에 붙은 숫자에 대해서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의사는 확언에 가까웠지만 남자가 계속 가능성이나 여지를 이어 붙이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어쩌면 언니가 퇴원한 후에 계속 봐야 할 의사일지도 모르는데 얘기가 더 길어지면 나중에 곤란할 것이었다. 마침 밖에서 할아버지가 고함을 쳤다.

젊은 사람들이 병원 전세 냈나.

목소리는 닫혀 있는 문을 뚫고 날아와 귓가에 꽂혔다. 그제야 남자는 다시 처음 만났을 때의 목소리와 자세로 돌아와 성큼 물러섰다. 남자가 의사와 깍듯한 인사를 나누자 꽉 조여 있던 내 몸이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진료실에서 나와보니 대기실은 더 북적였다. 남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내게 한 말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무슨 대답이라도 전하려는데 남자가 내 쪽으로 자세를 틀었다.

평일 낮에 계속 시간 내기 불편하시죠? 저 혼자 다녀도 되는데.

괜찮아요. 시간 많아요.

그래도 제가 죄송해서….

의견 충돌을 조정하고 합의하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고 옆에서 벌을 서는 듯한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른 의미가 빤히 숨어 있는데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팀장에게서 아무런 기색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남자는 걸음을 이어 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물러진 듯한 걸음이었다. 목소리도 사뭇 다르게 들렸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기에 시간이 자유로우세요?


팀장 전화를 끊자마자 아르바이트부터 떠올랐다. 사장의 축하 인사와 아쉬운 표정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미 방학도 막바지였다. 마지막으로 왔던 학생을 두고 사장은 음침해 보이고 경력이 없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나는 차분해 보여서 호감 가는 인상이라고 애써 둘러댔다. 그래도 사장은 내키지 않는 듯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처음 하는 사람이 요령 피우지 않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잖아요.

거기에 출근 날짜를 다시 한번 못 박았다. 그날부턴 정말 나올 수 없다고. 사장은 한숨 끝에 어쩔 수 없다며 가게를 나섰다. 그사이 학생에게 연락했을까. 아직 안 했다면 내가 계속한다고 할까. 그보단 계속할 수도 있을 것 같다거나 요즘 사람 구하기 어려우면 제가 몇 달만이라도 더 해 본다고 하는 게 나을까. 결심을 굳히고 나서 심호흡까지 여러 번 한 후에야 핸드폰을 들 수 있었다. 그때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동의하고 선택해 주셔야 저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남자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의료 자문을 통해 질병분류 번호를 확인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보험급 지급 여부도 빠르게 결정될 수 있다고. 언뜻 면접 때 했던 말이 입안을 휘저었다. 한 번 보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간만 달리해서 봐도 새로울 수 있으니까요. 남자는 한 사람 말만 듣는 것보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그사이 서류를 떼서 부지런히 보내야 했다. 의무 기록서 날짜를 잘못 얘기해주었거나 필요한 판독 소견서가 달라져 같은 병원을 서너 번씩 들르기도 했다. 올해뿐만 아니라 작년 기록도 있어야 한다거나 처음 받은 소견이 중요하다고 했다가 나중엔 가장 최근에 받은 게 의미 있다는 식이었다. 틈틈이 남자가 병원에 들를 때도 따라다녀서 피로해지기 시작한 터라 빠르게 결정될 거라는 얘기가 유난히 산뜻하게 들렸다.

이제 남자가 권하는 두 개의 병원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낯선 이름이었고 다른 병원은 지방이긴 했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했다. 남자는 둘 다 권위 있는 병원이니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정하라고 했다. 좀처럼 대답을 못 내놓자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규모나 위치부터 수상 기록까지. 남자는 병원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느 쪽이 질병 분류 번호의 마지막 숫자를 어떤 식으로 결정할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버틴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선뜻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어려우시면 제가 정해 드릴까요?

남자가 정해 준 병원과 그렇지 않은 병원의 사이에서 도리어 고민은 더 꼬였다. 우연히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더 그랬다. 병원에서 만났던 날 헤어지고 나서 전해 주지 못한 서류가 있어 부랴부랴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통화 중이었다. 서류만 건네주고 가려고 가까이 다가섰을 때 목소리는 내 몸에 들러붙을 것처럼 끈적거렸다. 이달에도 지적당할 것 같아. ‘이달에도’라는 건 평소에도 남자의 업무 평가가 형편없다는 뜻이었다. 무슨 기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이번엔 더욱더 맹렬하게 달려들지 않을까. 아르바이트 가게 사장이라면 야멸차게 남자를 쓰지 않으려 하겠지만 나는 다를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보다 미래를 내다봐야 하지 않겠냐고 물을지도 몰랐다. 남자의 뒷말은 오랫동안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다들 사정이야 딱하지. 그렇지만 나도….

결국 나는 하나를 골랐다. 남자는 애써 감정을 덜어 낸 듯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말 붙일 틈도 없이 끊었다. 그게 내게 유리한 선택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달도 지난달과 다를 바 없이 지적받을 거란 예상으로 생긴 근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자의 권유를 무시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벽지 및 바닥 훼손은 계약 만료 시 임차인이 완벽하게 원상 복구한다.

집주인은 별거 없는 서류니까 여기만 확인하면 된다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시선이 닿기도 전 강조하려는 것처럼 식탁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린다. 식탁이 조금 더 기울어진 듯하다. 관리비를 명시하고 혼자 산다는 조건이 포함된 특약 사항 마지막에 추가된 조항은 선명하다. 서로 다 아는 처지라며 주고받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조항의 내용은 꼿꼿하고 억세기까지 하다. 언니는 건물 안에 반려동물은 안 된다는 조항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이삿날 밤부터 건물 안에 개 짖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더니 여기저기 퍼졌다고 했다. 누군가 조항을 어긴 게 분명했다. 다음날 집주인에게 연락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짐작을 한참 벗어났다. 개를 키우고 있는 건 집주인이었다. 다른 개와 만나면 경계심에 사나워지는, 예민한 개였다.

몇 번 읽어 보니 애매한 표현으로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원인과 위치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아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 망가질 벽지까지 오롯이 언니 책임이 될 것이다. 매일 햇빛이 닿아 빛바랜 벽지까지도. 이를테면 보장 범위가 가장 넓은 조항인 셈이다. 책임진다는 말 대신 원상 복구라는 구체적인 표현에도 눈길이 간다. 게다가 완벽하다는 건 기준이 모호해 해석하기 나름이다.

빗겨 선 집주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낸다.

뭐든 정확한 게 좋은 거니까요. 괜히 쓸데없이 다툴 일도 없고.

여러 번 공들여서 쓴 게 분명하다. 수정하는 동안 지나쳤을 문장이 궁금해진다. 처음에는 ‘곰팡이로 인한’이 들어갔다가 그럼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요구할 명목이 없으니 삭제했을지도 모른다. ‘주방과 화장실 사이 벽’으로 한정했다가 곰팡이는 어디든 생길 수 있으니 전체로 확장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는 훼손에 대한 코드도 세밀하게 구분하고 그에 따른 금액까지 명시할 것 같다. 그럼 물가 상승률을 반영해 매년 관리비를 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집주인이 준비해온 계약서 안에는 보증금뿐만 아니라 월세까지 따져 묻기 어려울 만큼 합리적인 범주 안에서 상승해있었다. 이만하면 주변 시세와 두고 봐도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다. 언니가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얼마 전 생각지도 못하게 회사 앞을 지날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팀장과 마주쳐서 오며 가며 놀러 온 사람처럼, 놀러 오란다고 진짜 온 사람처럼 보일까 봐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건너편에서 펄럭이는 현수막이 보였다. 바람이 잦아들자 알록달록한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구연동화 체험 모집. 면접 때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을 언급했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호응하던 면접관이 예시를 들어 보라고 했을 때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준비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당황했지만 늦지 않게 또박또박 말했다. 장난감 대여였던 것도 같았고 동화책과 관련된 무언가였던 기억도 스쳤다.

계약서를 읽는 동안 집주인은 방을 둘러본다. 무심한 걸음으로 건성건성 지나치는 듯하지만 갑자기 멈춰서서 자세를 낮추거나 고개를 기울일 땐 괜히 뭔가 들킨 듯한 기분이 든다. 특약에 은근슬쩍 바닥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장판이 눌린 자국도 신경이 쓰인다. 언니가 오랫동안 한자리에 놓여 있었던 책장을 옮기는 바람에 생긴 자국이다.

그게 언니가 재계약에 대해 던지는 힌트였을까.

내가 언니 방을 재계약해야 할지 물었을 때 엄마는 이미 오래전 멸종한 동물을 본 것처럼 표정이 이지러졌다. 한참 만에 계약을 연장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던 나는 좋은 선택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당장 짐을 빼서 옮길 만한 데도 마땅찮지만 계약 기간 동안 월세만 나갈 수도 있었다. 이어지는 엄마의 말에 다시 고민해 보자고 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언니에게 돌아올 방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목소리를 되새기며 도장을 꾹 눌러 찍는다. 이제껏 장미빌라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정미빌라였다. 그때 집주인이 외출 모드로 있던 보일러를 켠다. 베란다에 있던 보일러가 그르렁대면서 방을 집어삼킬 듯 울어 댄다. 방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이 줄곧 선득했다.

사람이 있으면 보일러를 켜야죠. 가스비 아끼려다 보일러 망가지면 배보다 배꼽이 커요.

어쩐지 미리 넣어 두지 못해 아쉬운 특약 사항처럼 들린다. 이제껏 나는 언니 방에 들어서면서 한 번도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오래 머물지도 않았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내가 들어와 있을 때도 외출 상태여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돌아온 언니가 이번에는 미약하게 도는 온기로도 나의 방문을 알 것도 같았다. 언젠가 언니는 방에 들어와서도 보일러를 계속 외출 모드로 둔다고 했다. 씻고 나면 다음 날 출근 때문에 금방 자야 했고 일어나면 몰아치듯 나가기 바빴으니까. 방이 데워지기도 전에 잠들었고 아침에는 훈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때 내가 그럼 차라리 끄고 다니라고 대꾸했더니 언니가 말했다.

그럼 한파에 보일러가 얼어서 안 돼. 보일러한테 나는 아예 떠난 게 아니라 곧 올 거라고 해 줘야지.

어르고 달래는 말투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도 메아리처럼 도톰한 웃음을 내보냈다. 그때 뭐든 물었다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꺼내 놓았을지도 몰랐다.

시계를 보니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사장은 헛기침 끝에 호기롭게 전했던 내 말을 받아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양해를 구해야 할지 사과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 해야 할지 따져보다가 시간은 사장님 편하실 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제야 겨우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한창 바쁜 시간대에 배치됐지만 시급을 낮출 수도 있다는 얘기까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그러니 지각까지 하면 곤란하다. 언니 속옷이랑 세면도구에 수건까지 챙겨 나서려면 촉박하다. 택시를 탄다고 해도 마냥 여유로운 편이 아니다. 그 와중에 화장실까지 열어 보는 집주인은 느긋하기만 하다. 가만히 두면 휘어진 수건걸이까지 입에 올릴 것 같다. 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집주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자 재빠르게 집주인 손에 계약서를 쥐여 준다. 떠밀리듯 인사까지 건네자 집주인은 느릿느릿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는다.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뭘 두고 간 듯 돌아서서 힐끔거린다.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도 전화벨은 끊이지 않는다. 팀장이다.

…그니까 자기가 나와 주면 안 될까.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아직 일 못 구했지? 아니, 구했어도 일단 와. 와서 얘기해.

나긋나긋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잔뜩 가시가 돋쳐 있다. 나 때문이 아닐 텐데도, 또 나한테 화내 봐야 이젠 아무 상관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괜히 움츠러든다. 주눅 든 목소리를 기울어졌다는 신호 읽었는지 대화에 돌연 생기가 돈다. 당장 맡아 줬으면 하는 일은 구연동화 프로그램이 아니라 야간 개관이다. 팀장은 얼마간 의기양양해진다. 임시직이긴 하지만 파격적인 제안이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나중에 나한테 분명 고맙다고 할 거라고.

전화를 끊고 보일러를 완전히 껐다가 다시 외출 모드로 둔다. 보일러가 잠잠해지자 방 전체가 서서히 가라앉는 듯하다. 언니는 이번에도 내가 들렸다는 걸 쉽게 눈치챌까. 오늘 밤에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와 언닌데 어찌 모를 수 있냐고 할 것만 같다. 한편으론 어쩐지 오랫동안 나의 방문을 모를 듯하다. 불을 끄고 흐트러진 매트까지 바로잡고 나서야 현관 쪽으로 나선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아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올 거면 빨리 오라는 팀장이나 벌써 지각하면 곤란하다는 사장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보험 심사 결과다. 메시지를 두세 번 읽고 나니 헛웃음이 나면서 몸이 가뿐해진다. 계약서처럼 명확한 기준에 맞춰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객관적인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자꾸 으깨지기만 한다. 남자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길 바랐을지 궁금하다.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제 어디로 갈지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성큼성큼 이어 가는 걸음 사이 아까 봤던 저울이 눈에 띈다. 언제부턴가 바늘은 0에 가 있다.


작가소개 / 전석순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전의자」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1년 장편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로 오늘의작가상을 받았다. 장편소설로 『거의 모든 거짓말』, 중편소설로 『밤이 아홉이라도』, 소설집으로 『모피방』이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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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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