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송희두 필적 감정소에서

  • 작성일 2023-03-24
  • 조회수 1,02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송희두 필적 감정소에서



권여름


갇히고 나서야, 한발 늦었음을 직감했다. 갇혔다는 건 비유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정말 갇혔다. ‘한발 늦었을 땐 빠른 손절도 답이죠.’ 엄마가 하루 종일 틀어 두는 주식 채널 전문가란 사람이 한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손절은 내 선택 영역 바깥에 있다. 손절도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경어에 반말을 섞어 가며 거들먹거리는 그 사람의 애칭은 주식왕자님이었다. 엄마는 최근 쌈짓돈으로 주식을 시작했다. 주식왕자님의 조언으로 약간의 수익을 얻은 뒤, 그를 따랐다. 신봉에 가깝다. 동네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언제부턴가 거실에는 주식왕자님의 ‘초보자를 위한 투자 강의’가 종일 흘러나왔다. 늘 불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주식왕자님의 목소리로 가득 찬 거실로 가고 싶다.

나는 꿈쩍 못하고 어둠 속에서 소장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주먹을 꽉 쥔다. 나는 왜 자꾸만 엉거주춤하는가.


우주 광고사를 뛰쳐나와, 두 번째 아르바이트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법원 거리라는 주소, 필적 감정소라는 지루한 사무실 이름. 그것이 주는 안정감, 아니 안전감. 비슷한 것 같지만 둘은 다르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무뚝뚝한 여자 목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다, 여기.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읊조렸다.

법원 거리에서 올려다본 정도빌딩은 작은 간판들로 촘촘히 덮여 있었다. 일률적인 사이즈를 가진 간판들. 그 안의 빼곡한 이름들마저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뭐 어떤가. 안전한 건 대체로 지루하지 않은가. ‘송희두’라는 이름을 찾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특한 글씨체나 산뜻한 색감을 이용한 간판들 사이에서 유행이 한참 지난 유물처럼 보이던 글자.

‘송희두 필적 감정소’

파랑 바탕에 하얀색 궁서체로 써진 그것을 올려다보다 매무새를 고치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선하리 씨?”

사무실에는 소장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와 사무를 보는 여자 둘 뿐이었다. 장주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나보다는 열 살쯤 많아 보였다. 여자는 무뚝뚝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표정이 온화했다. 마른 중년의 남자는 의자에 거의 파묻힌 채 장주안과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심드렁한 태도에 나는 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잘 찾아왔어.

장주안은 간단한 신상을 묻더니 대뜸 자리에 앉아 수첩을 꺼내라고 했다.

“선하리 씨, 적어 봐요. 전화 응대 매뉴얼인데, 이게 제일 중요해.”

“저… 면접은요?”

“면접? 글씨만 쓸 줄 알면 돼, 우리는.”

내가 어리벙벙해진 사이, 장주안은 소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죠?”

소장이 맞장구를 쳤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 마치 복화술 하는 사람 같았다.

“네, 쓸 줄 알면 됩니다.”

발음은 비교적 선명했다.

“하리 씨, 뭐 해, 적어. 먼저 의뢰 비용 제시하기, 건당 35만 원. 물론 비교 문서 수나 여러 사안에 따라 추가 비용이 생길 수도 있다고 알려 주고, 둘째! 상담은 직접 방문해야 가능하다고 못 박기, 마지막으로 주소 불러 주며 마무리. 이 순서, 오케이?”

장주안의 말을 받아 적는 동안 소장은 일어나 우리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내가 수첩에 필기를 마치자 이번엔 소장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선 양? 미스 선? 선하리 씨?”

“선하리라고 불러 주세요.”

“아깝게 미스 선이야, 왜?”

우주 광고사 사장은 처음 내 이름을 듣자마자 그동안 지겹게 들었던 패턴의 농담을 했다. 미스 선, 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스 진 아니고? 말하며 웃었다. 거기에 더해 광고사 사장은 한 마디 더했다. 문제는 그거였다.

“예쁜데, 왜 선이야. 어디가 부족했던 거야?”

그러면서 빠르게 내 이마부터 발끝까지를, 그러니까 내 몸을 훑었다.

그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뭐 하는 거예요, 훑어본 건가요, 방금? 정도는 해 줬어야 했는데. 그때 그러진 못한 건 순전히 애매모호함 때문이었다. 정말 애매했고, 모호했다. 장주안의 딱 부러지는 전화 응대 매뉴얼처럼 정확한 기준이, 매뉴얼이 있었다면.

불쾌한 직감이 오해이기를 바란 탓도 있었다. 1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처음 해 보는 아르바이트였다. 꾸준하지 못함의 이력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결국 우주 광고사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 심지어 월급도 요구하지 않고, 도망치듯이.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어떤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것 역시 이유를 대라면 좀 애매모호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직감적으로 그곳은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다. 위험한 곳에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손절뿐이었다. 손절도 대안이 될 수 있어요, 존버만이 답이 아니라고. 엄마의 주식왕자님은 그렇게 말했던가.

장주안의 교육이 끝날 때까지 소장은 사무실 구석 상담용 소파에 곧게 앉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키가 크다’라는 말보다는 그냥 ‘길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커다란 헝겊 한 장으로 솜 하나 넣지 않고 만든 인형을 소파에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중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안전해.

“언니라고 해도 되는데?”

장주안은 살갑게 대했다. 회사에서 언니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첫날부터 언니는 좀 오버였다. 그런데 업무 설명을 해 주던 장주안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만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언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주 광고사에서의 손절을 이곳에서 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손절도 습관이요, 익절도 습관이다. 익절은 언제나 옳다!’

엄마가 냉장고에 붙여 놓은 문장을 떠올리며 손을 불끈 쥐었다.

그 불끈 쥔 주먹은 단 3시간도 되지 않아 맥없이 풀렸다. 장주안은 나에게 설명을 마치자마자 부직포 상자에 책상 위 물건들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장주안의 설명은 교육이 아니라 인수인계였다. 나는 만난 지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언니가 되어 버린 그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남자 사장과 단둘이서 일해야 했던 우주 광고사에서와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리 씨, 이 책상 쓰면 돼요.”

장주안은 내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앉아 봐요.”

엉거주춤 서 있는 나의 어깨를 꾹 눌러 의자에 앉혔다. 언니, 나한테 왜 이래요.


첫날의 위기는 다행히 누그러졌다. 우주 광고사 때와는 다른 안전감을 충분히 느낄 만한 곳이었다. 일단 소장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그를 생명 없는 종이 인형처럼 느끼듯, 그도 나를 창문틀에 방치한 다육이 화분 정도로 대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란 바였다. 나는 경계를 풀고 송희두 필적 감정소에서 무려 3주 하고도 이틀을 더 일했다. 3일, 단 3일이면 한 달이 되고, 나는 우주 광고사에서 받지 못한 월급보다 무려 30만 원이 더 되는 돈을 수중에 넣게 된다. 우리 주린이들, 처음 투자하면서 손해 본 건 뭐다? 그렇죠 수업료야, 수업료. 나는 주식왕자님이라 불리는 그의 말을 떠올린다. 마음이 편해진다.


필적 감정소에는 다양한 문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필적 감정소란 데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 단순한 호기심에 걸어 온 전화가 꽤 많았다. 필적 의뢰와 관련 없는 법률 상식을 묻는다든가, 자신의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전화도 걸려왔다. 긴 싸움을 시작하기 전 숨을 고르느라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힌 차분한 목소리들도 종종 있었고. 아주 간간이 문의가 의뢰로 이어졌다.

오늘 아침, 그러니까 월급날을 3일 앞둔 날 오전 9시 정각, 사무실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책상에 붙여 둔 메모를 노려보았다. ‘말 시작하자마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결~~ 의뢰 비용 35만 원, 상담은 직접 와야만 가능, 주소 불러 주기!!’

“저, 거기가 필적 감정소죠.”

30대 정도의 여자 목소리였고, 쑥스러운 사람이 내보이는 옅은 웃음기가 말끝에 묻어 있었다. 뭔가 주저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다루나요?”

호기심에 전화한 것치고 너무 차분한 음색이었고, 그렇다고 소송에 시달린 기색이나 흥분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필적, 그러니까 손 글씨 위조 여부 가리는 게 주 업무고요, 의뢰 비용이 35만 원이고, 상담은 직접 오셔야만 가능합니다, 주소 불러 드릴까요?”

“저… 소장님은 경력이 어떻게 되시죠?”

“20년 넘으셨고, 유학도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직접 오셔야만….”

“아, 네 그럼.”

별말 없이 여자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장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의 책상을 대충 닦았다. 그가 과연 20년 경력의 전문가가 맞을까, 의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유학까지 다녀왔어요, 알아주는 전문가라고!”

장주안은 감정소를 나서며, 문을 잡아 주고 서 있는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가 이 분야의 알아주는 전문가라는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필적 감정과 관련된 책이 꽂힌 서가도 없었다.

“뭐 기계 같은 거 없어요?”

그제 온 손님은 최신 기계 하나 없는 감정소 사무실을 훑어보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소장의 책상에는 명패도 없었다. 책상에 있는 것이라곤 손바닥만 한 액자 하나뿐이었다. 액자에 끼어 있는 것은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고 조악한 글씨가 써진 낡은 미색 종이었다.


‘1955년 10월 8일생. 송희두. 송 송 기쁠 희 머리 두.’


글씨의 첫 획이 모두 심하게 꺾여 있어서 그것들은 마치 머리를 숙인 것처럼 보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획이 흔들리는 손으로 쓴 것처럼 구불구불했다. 글씨 두께도 매우 얇아서 금방이라도 글씨들이 털썩, 쓰러질 기세였다. 나는 언젠가 이 감정소도 갑자기 털썩,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가 폈다.

그런 문제로 치자면 우주 광고사는 탄탄했다. 단골도 많았고, 주문 전화가 잦았다. 처음 그곳을 갔을 때 번듯한 사무실이 아니라 당황하기는 했다. 동시에 그곳이 내 직장이 아닌 아르바이트 장소라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고. 주택가 초입 상가 또와 분식과 호박 부동산 사이였다. 광고사 앞 좁은 공터 작업장에서 반바지에 러닝 차림의 까만 남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간판을 눕혀 놓고 작업 중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커다란 공업용 커터 칼. 그걸 잡고 글씨를 오려 내던 남자가 사장이었다. 마치 돼지고기 한 짝을 눕혀 놓고 발골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두터운 팔뚝에 맺힌 땀방울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울렁거렸다.


여자의 문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좀 희한한 날이긴 했다.

“아가씨, 그거 다됐지?”

뽀빠이 목소리였다.

“그게 아직….”

내 목소리가 작아지자, 그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거 얼마나 걸리는 일이라고 그래! 내 눈꾸녕으로 봐도 답이 바로 나오는데! 나 지금 간다, 아가씨, 어?”

“네?”

“나 시간이 돈인 사람이야, 이 아가씨야!”

전화가 뚝 끊겼다. 부러 큰 소리로 후우, 하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의자에 기대어 숙면 중인 소장에게 찬물을 확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일주일 전 그 남자 의뢰인이요.”

내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가 눈을 떴다.

“감정 의뢰서 지금 당장 받으러 오시겠다고요."

그는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일어나 책상 서랍에 던져둔 남자의 문서를 집어 들었다. 일주일 전에 의뢰받은 걸 지금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일주일 전, 소장의 액자를 무심결에 오래 닦다가 내려 두고 돌아설 때였다. 거칠게 문이 열리고,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보던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딱 벌어진 어깨를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아가씨, 소장님 계시냐?”

그는 대뜸 금테 안경을 벗어젖히며 반말로 내게 물었다. 순간 연예인을 봤다는 신기함은 사라지고 불쾌해졌다. 그때도 졸고 있던 소장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손님이 와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저러니 파리를 날릴 수밖에. 뽀빠이 아저씨는 소장 건너편 소파에 거칠게 앉았다.

“커피와 녹차, 둥굴레 차 이렇게 있어요.”

남자는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류 봉투에서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대답했다.

“아무거나!”

다시 보니 뽀빠이 아저씨를 닮긴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다. 소장이 그를 응대했다.

“어떤 일이신지 천천히 설명을 해 보시죠.”

“이게 내가 쓴 계약서라는 거야.”

남자의 까만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쌍놈의 자식, 생각할수록 열 뻗쳐.”

구겨진 A4용지가 그의 손에서 파닥거렸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거든 이게. 이런 조건에 계약했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어요!”

“그러니까, 이 계약서 본문과 사인이 선생님의 필적과 상이하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하는군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다른 글씨가 필요합니다. 비교 문건이요. 가져오셨어요?”

“아, 그건 미처….”

“선하리 씨 종이랑 펜 좀.”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자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자는 1절을 다 쓰고 소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소장은 한 손을 내밀며, 좀 더 쓰라는 표시를 했다. 남자는 다 식은 둥글레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2절에서 3절까지 썼다. 4절을 이어 쓰려다가 이제 됐다는 소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누가 봐도 다르잖습니까. 예?”

애국가와 계약서의 글씨를 슬쩍 봤는데 내가 봐도 다른 글씨였다. 일단 크기부터 달랐다. 계약서의 글씨는 모음이 크고 획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안쪽으로 많이 들어온 글씨였다. 그에 비해 애국가는 일단 크기가 작았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획이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반듯이 1자로 쭉 뻗은 정돈된 글씨였다. 자신만만한 남자 앞에서 소장은 팔짱을 낀 채로 심드렁하게 앉아, 탁자 위 두 장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살피고 난 뒤에 연락드리지요.”

남자는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면서 감정소 밖으로 나갔다. 그게 일주일 전 일이었다.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온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소장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남자의 계약서와 애국가 종이를 몇 번 번갈아 보았다. 거기까지는 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계약서를 들고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때 좀 알아봐야 했다. 이때 한 발 뗐다면 우스꽝스럽게 갇혀 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냄새를 맡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곧장 백지에 글씨를 썼다.

‘문제 필적과 대조 필적이 동일인의 필적으로 사료됨.’

건네준 자필 감정서를 받아 급히 타이핑하여 프린트 아웃을 하고 직인까지 찍은 뒤, 서류 봉투에 넣었다.

정말 딱 한 시간 만에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소장을 찾지 않고 바로 나에게 손을 뻗었다.

“다 됐지?”

나는 보란 듯 준비한 서류 봉투를 건넸다. 그제야 남자는 소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우, 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남자는 봉투를 열어 의뢰서를 꺼내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못 가 멈추더니, 금테 안경을 머리 위로 젖혀 올린 뒤 나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뭐냐, 아가씨?”

‘아이 씨, 왜 나한테 그래!’

하마터면 소리를 꽥 지를 뻔했다. 소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이리 와 앉으세요, 설명 들으세요.”

남자는 의뢰서가 반쯤 삐져나온 서류 봉투를 탁자에 거칠게 던진 뒤 소파에 앉았다.

“본인인 내가 안 썼다잖아.”

“전문가로서 소견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 기가 막혀서. 어이, 전문가 양반! 설명해봐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어떻게 이 두 글씨가 같은 사람 거냐고, 어?”

“글씨처럼 내 몸과 오래 함께한 것도 없잖아요, 선생님.”

“그래서?”

“물론 한 사람이 쓴 글씨도 조금씩 다를 순 있습니다. 펜 종류, 종이, 그날의 몸 상태, 기온, 또 말하지 못할 여러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글씨는 결국 그 사람이거든요. 선생님이 입으로 펜을 물고 쓰거나 발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 썼대도 저는 선생님의 글씨를 알아볼 수 있어요.”

“전문가 납셨어”

남자의 비아냥거림에도 소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선생님이 제게 써 준 글씨와 이 계약서의 글씨, 그냥 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지요.”

소장은 볼펜으로 글씨를 표시해가며 차분히 설명했다.

“선생님이 제게 써 준 건 모든 음운의 끝이 야무지게 처리되어 있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모음은 구부러져 있고요. 그래요 이런 점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씨 크기도 다르지요. 하지만 글씨 크기는 뭐 마음만 먹으면 혹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소장이 말을 계속 이어 가는 중에도 뽀빠이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소장을 노려봤다.

“그런데 환경이나 상황에 영향을 잘 받지 않는 게 있어요.”

소장은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바로 비율입니다, 비율.”

“아이 씨, 쉽게 말해 보라고.”

“쉽게 말하면 자획 간의 비율이란 말씀입니다. 가령 뚱뚱한 사람이 살을 빼도 비율은 그대로잖아요. 글씨도 몸과 같아요. 바로 글자의 그 비율이 이 두 문서가 거의 일치합니다.”

소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ㅇ자를 쓰는 방향과, ㅇ자와 ㅁ자를 완전히 닫지 않는 것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글자들의 기울기며, ㅎ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거나 하는 독특한 개성이 이 두 문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애국가 1절보다는 2절, 그보다 3절에서 공통점이 더 드러나지요. 글씨 양이 늘어나면 훨씬 더 잘 드러나요.”

“아니, 나 참. 내가 쓴 기억이 없는데 아주 미치고 펄쩍 뛰겠구만.”

소장은 흔들림 없이 자기 할 말을 했다.

“어차피 재판하시면서 법원에 의뢰하셔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양복 재킷을 탁탁 털었다. 수많은 티끌이 쏟아져 소장 쪽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더 말할 거 없고, 이거 환불.”

“선생님, 35만 원은 의뢰 결과에 대한 비용이 아니고, 의뢰 과정에 대한 비용입니다.”

“뭔, 개소리야. 35만 원이 무슨 개새끼 이름인 줄 알어!”

남자는 갑자기 내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눈을 부릅뜨며 으름장을 놓았다.

“야! 경리, 너. 오늘 안으로 송금해. 내 계좌 번호 있지?”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뒤돌아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 호락호락한 놈 아니다, 다치는 수가 있어!”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몸이 떨리는 걸 감출 수 없었다. 무서움 때문인지 불쾌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원망의 눈빛을 한껏 담아 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떡해요?”

“저런 사람들은 다시 안 와. 걱정 마요.”

그때 돌아서야 했다.

뽀빠이가 돌아가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고, 여자가 들어왔다. 예민함이 표정과 몸짓에 흐르는 여자였다. 불쾌한 감정을 다스리기도 전에 새 의뢰인을 맞이하게 되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나와 달리 소장은 환한 얼굴로 고객을 맞이했다. 소파에 앉은 여자는 편지지 같은 걸 꺼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보던 그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좀 이상하게 보이실 수도 있는데….”

여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소장은 친절하게 여자를 다독였다.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혹시, 절 너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음… 그러니까 제가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이런 기사를 발견했어요.”

여자가 인터넷 기사를 캡처한 걸 소장에게 보여 주었다.

“재미있는 수사 상식이라….”

소장은 여자가 건네준 기사의 제목을 조용히 읊조렸다. 소장이 그것을 천천히 살피는 동안 여자는 말을 이었다.

“거기 항목 1 보이시죠. 성폭력, 살인, 특수강도 등 범죄자들의 경우는 글씨가 대부분 불규칙적이란 말이요.”

여자는 소장 앞에 손 글씨로 빼곡한 편지를 내놓았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거든요.”

소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이 사람 글씨가 불규칙한 거예요. 이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좀 걱정이 되는 거죠.”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기분 나빠해야 할 소장은 몸을 어느새 여자 쪽으로 한껏 기울였다. 그의 눈이 저렇게 반짝이는 것을 그동안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보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 달라는 말씀이군요.”

“아, 네. 전문가시니까 오래 글씨를 봐오셨을 테고, 또 이런 곳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글씨도 취급하실 거 아니에요? 특히 사기, 뭐 이런 거요. 그러다 보면 공통적으로 그런 질 나쁜 사람들의 글씨 패턴도 있을 테고요.”

소장은 의뢰인 앞에서 그대로 굳어 편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녹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여긴 그런 거 취급 안 한다고, 소장 대신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여자 앞에 녹차 잔을 내리기도 전에 소장이 입을 열었다.

“한 번 열심히 해 보죠.”

“고맙습니다.”

여자는 처음보다 얼굴이 밝아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변명처럼 한마디 했다.

“저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죠, 최선.”

소장은 편지만 쳐다보면서 네,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자가 돌아가자 소장은 책상에 앉아 편지를 계속 쏘아봤다.

‘문서 감정, 위조문서, 대필, 필적 감정.’

소장의 등 뒤 창문에 궁서체로 붙은 스티커 글자들이 딱했다.

그는 온종일 그 편지만 읽고 또 읽었다. 코끝에 종이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놓고 보다가, 팔을 쭉 뻗고 몸을 뒤로 뺀 채 글씨를 응시하기도 했다.

퇴근이 1시간이나 남았지만, 특별히 일이 없었다. 그냥 앉아 있기도 뭐해서, 이미 깨끗하게 빨아 놓은 손걸레를 화장실에 가져가 빨았다. 그걸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소장은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의자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혀, 거의 눕듯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 오전에 여자가 남기고 간 그 편지를 몽롱한 표정으로 자기 볼에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나머지 한 장을 가슴팍에 두고 꽉 안은 채였다. 마치 그 여자의 몸을 끌어안고 비벼 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고,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직 안 갔어요?”

한 장은 얼굴에 한 장은 가슴팍에 붙인 채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민망한 기색조차 없는 그의 표정을 보자 소름이 쫙 돋았다.


우주 광고사에 적응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문 전화를 받고, 그날그날 들고 나는 돈을 엑셀로 정리하는 일은 금방 숙달되었다. 사무실을 청소하고 커피나 차 따위를 구입하여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남으면 책상에 엎드려 앉아 다이어리를 꾸몄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책상 바깥으로 삐쳐 나온 내 팔꿈치에 걸어가던 사장의 성기가 닿았다. 여름 바지의 얇은 옷감 탓에 그것의 촉감은 내 팔꿈치에 온전히 전달되었다. 좁은 실내에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민망할까 봐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문제는 며칠 후 다시 그 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의도한 것일까. 한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는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항의를 하기에는 뭔가 애매했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엉거주춤했을까. 물론 이유는 있었다. 항의를 하기에 상대가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사장은 내 팔꿈치에 자신의 그것이 닿은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그런 뒤 종이컵에 믹스 커피 두 개를 탈탈 털어 넣고, 찬물을 부어 제대로 녹지도 않은 걸 한 번에 삼켰다. 몇 초 전 일어난 일이었지만, 순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입가에 묻은 젖은 프리마 가루를 두터운 손등으로 쓱 닦고 다시 작업을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정직한 모습으로 땀을 흘리며 커다란 커터 칼로 간판의 글자를 오려 내고 있었다. 공업용 커터 칼은 거대했고, 무서웠다. 월급날을 꼭 일주일을 남겨 두고, 아르바이트 첫날 출근길에 산 다육이 화분을 가방에 넣고 도망치듯 퇴근했다.


퇴근 20분 전이었다. 그리고 3일 중 하루가 지나고 있는 중이었고, 두 번 나오면 월급날이었다. 편지지를 몸에 비벼 대는 변태 같은 모습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남은 이틀이 아까웠다. 창문 너머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창문 앞 소장의 의자에 빗물이 튀는 게 보였지만 부러 못 본 체했다.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감정소 문이 덜컹댔다.

그제야 창문을 닫으려고 움직였다.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빌딩 아래 뽀빠이가 보였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저런 사람은 다시 안 와요.’ 나는 그 말을 믿은 걸까. 아니 믿고 싶었던 건가. 뽀빠이보다 어깨가 더 벌어진 동행인은 벌린 팔을 흔들며 걷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건물 위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무 놀라 문을 세게 닫아 버렸고, 그러는 통해 미니 다육이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나와 소장은 일사불란하게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선하리 씨 이쪽이 사각지대라고.”

소장이 소파에 앉아 내게 손짓을 했지만 나는 내 책상에 앉았다.

쾅쾅쾅 소란스럽게 감정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랐지만, 소장 곁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반투명 유리에 뽀빠이가 얼굴을 갖다 댔고, 그 시각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사각지대는 정말 저 소파뿐이었다.

이토록 어두운 실내에서 변태일지도 모르는 소장과 같은 소파에 앉아 있는 처지가 기가 막혔다. 감정소 문밖에서는 불량한 뽀빠이 둘이 한참 이야기 중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간 거 같죠?”

소장에게 동의를 구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었다.

쾅, 하고 발로 문을 세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소리를 꽥 지를 뻔했다. 잠시 조용해지더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한참을 있다가 창문 슬쩍 열어 아래를 보았다. 두 사람은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정도빌딩 앞 편의점 벤치에 앉아 건물을 노려봤다.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뭐라고 신고를 해야 하나?”

그러게. 그것 역시 애매했다. 빌딩 앞 편의점에 앉아 있다고 신고를 할 것도 아니고.

“일단 조금 기다려 보죠.”

존버만이 답이 아니야. 주식왕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서운 뽀빠이와 친구가 있는 빌딩 밖으로 나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재판할 때 법원에서 감정한다면서요. 좀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장에게 화가 났고, 짜증을 냈다. 다행히 그에겐 커터 칼이 없었다. 그나마 우주 광고사보다는 안전한 곳이 맞는 건가.

“원하는 답만 말하는 건 거짓말이잖아.”

소장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단호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런 뒤에 다시 수그러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만져지고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라 말하겠어? 종이에서 말이야. 술 냄새가 나, 술 냄새. 저 사람 술을 진창 먹고 이 계약서를 쓴 거라고요. 저 사람 말 맞아. 쓴 기억이 없을 거야.”

“예?”

“하지만 기억에 없다고,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 그것 참 얄궂지, 안 그래?”

말을 마치고 다시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무슨 글씨 감정을 코로 해요?”

그를 쏘아봤다.

“유학 다녀온 거.”

내가 유학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뻥이죠?”

말끝에 소장은 화를 내기는커녕 얼굴이 확 피면서 눈을 반짝였다. 소장의 표정이 그렇게 살아 있는 건 처음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게 보였다. 그는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학했던 시절이 내겐 따사로운 시간이었지. 양부모님은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사내놈이 남의 글씨 따위나 들여다보는 걸 공부한다고 속상해하셨어. 내가 입양 가기 전날 보육원 선생님이 내 손에 쥐여 준 쪽지가 있다는 것을 양부모님은 몰랐지. 그 선생님은 보육원 근처 식당 문 앞에서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나와, 배냇저고리 안쪽에 숨겨진 이 쪽지를 발견했지. 십 년 동안, 그 쪽지를 원장에게 넘기지 않고 내 손에 쥐여 준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순간, 벅차오르더군. 내 최초의 흔적이 있다는 게 얼마나 벅차오르던지. 아무튼, 그 글씨 때문이란 걸 모르는 친구들 역시 나의 유학 행에 고개를 갸웃거렸어. 친구들은 너무 뒤떨어진 일이라고 했어. 곧 컴퓨터로 글씨를 쓰는 시대가 도래하는데 필적학 공부라니. 선택을 후회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군. 나도 어떤 확신이 있는 상태에 선택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좀 의기소침했지. 나에게 그토록 희생적이었던 양부모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사실도 괴로웠고. 그럼에도 그게 포기가 안 되더군. 왜 그런 일이 있잖아, 선하리 씨. 논리적인 계산으론 명백히 아닌데 마음과 몸이 자꾸 끌리는 거 말이야.”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손에 몰래 쥐여 준 그 종이 한 장.”

소장은 자신의 책상을 힐끗 보았다.

“1955년 10월 8일, 송 송 기쁠 희 머리 두. 이 글씨를 남긴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것은 나의 부모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잖아. 그렇지 않아요?”

이야기는 점점 알 수 없게 흘러갔다. 나에게 뭔가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았지만, 맞장구쳐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렵게 일본 유학을 가서 배운 스킬이 코로 감정을 하시는 거?”

놀리려는 심사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 의기소침한 심정으로 받은 첫 수업이 ‘필적 심리학’이었지. 첫날 강의를 끝내고 교수가 한마디 더 하더군. 오십을 갓 넘긴 나이에 비해 더 늙어 보이고 마른 여자였지. 머리숱이 별로 없어서, 늘 머리가 젖어 있는 것 같았어. 하얗고 탄력 없는 얼굴 여기저기에 점이 박혀 있고 말이야. 잊지 마세요, 하면서 교탁에 내내 올리던 손을 내리고 구부정한 몸을 쭉 펴며 바로 서더군.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더니 입을 여는 거야. ‘모든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모두의 시선이 다 모였을 때, 그녀는 문장을 마무리했지. ‘몸입니다.’”

소장은 ‘모든 것은 몸입니다.’를 두어 번 더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을 뱉은 순간, 그녀는 유디트 같았어. 클림트가 그린 그 유디트 말이야. 오길 잘했어,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몇 번을 말했지. 그 쪽지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우리 부모의 몸이구나. 내 일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때 나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것을, 그 소리가 세상의 다른 소리를 소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여러 차례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장은 눈치 없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들었다. 말을 끊어야 했다.

“솔직히 좀.”

“응?”

“아까 좀 변태 같았어요. 그 여자 편지 말이에요.”

소장은 내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그거. 잠깐만요.”

이번엔 여자의 편지를 들어 내 손등에 갖다 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것 좀 느껴 봐요, 선하리 씨.”

편지의 뒷면을 내 손등에 살살 문질렀다. 그러니까 이 지점도 약간 애매했는데, 그가 내 손등을 움켜쥐고 편지에 갖다 댔다면 나는 분명 소리라도 질렀을 터였다. 그런데 편지를 내 손등에 대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가 잡은 것이 내 손이 아니고 편지여서 나는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굉장한 필압으로 쓴 편지에요. 글씨가 뒷면에서 느껴질 정도로. 하리 씨도 느껴지죠?”

글자가 오돌토돌 손등에서 느껴졌다.

“글씨체는 달라도 한 글자 한 글자 필압이 같아. 이런 필체를 가진 사람이 원래의 필압으로 쓰면 악필인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예쁜 글씨로 쓰려고 성실한 아이처럼 힘을 꽉 주고 쓴 거죠. 이런 건 만져 봐야 안다고.”

그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글씨체는 물론 불규칙적이야. 그건 맞아. 하지만 글씨체가 바뀌는 지점들에서 아주 긴 시간이 보여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한참 고민한 흔적이 보이더라고.”

그리고는 편지지 한 문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특히 이 문단들 사이에 아주 긴 시간이 보이고. 그다음 문단 사이에서는 밤과 새벽의 경계가,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이 느껴져요. 밤새 웅크리고 편지를 쓰는 한 남자를 나는 이 편지에서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분이 좋아할 만한 결과인 거죠?”

“아! 그 여자분이 작성한 고객 카드 좀 줘 봐요.”

고객 카드는 의뢰를 맡길 때 여자가 작성한 것으로 연락처와 간단한 신상이 적혀 있었다.

“얼마나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내 연락을 기다리겠어. 공적인 문서로 쓰는 건 아니실 테니 간단히 문자로 결과를 드리도록 하죠.”

‘남자분은 온화하고 성실한 분이에요.’

소장은 아주 천천히 문자 메시지를 작성한 뒤 발송했다.

“두 분은 천생연분, 그 여자 결혼할 남자 아주 잘 골랐네요.”

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객 카드를 쓸 때 그 여인 필적을 봤잖아, 내가.”

“그런데요?”

소장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둘 안 맞어, 상극.”

소장이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뭐지, 사이코패스인가. 잠시 열렸던 마음이 확 닫혔다.

나는 이곳에서 소장과 새벽을 맞이할까 봐 무서웠다. 일단 집에 가고 싶었다. 엄마의 주식왕자님 목소리로 가득 채워진 거실이 그리웠다. 소리라도 줄이라고 짜증 내는 일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창문 쪽으로 갔다. 뽀빠이가 있더라도 그냥 나가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캔 커피,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집어 들고 감정소와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저 사람들 갔어요.”

“아! 그래요, 미스 선, 어서 나가 봐요. 고마워요. 내 말을 들어 줘서.”

짐을 챙기며 혹시 뽀빠이든 누구든 내게 행패를 부릴 때를 대비해 여러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렸다. 휴대폰 비밀번호를 풀고, 112를 바로 누를 수 있도록 설정을 해 놓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선하리 씨. 아참, 이거!”

그는 서랍을 열더니 손바닥만 한 엽서를 내게 내밀었다.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워요. 눈치 없게 너무 내 말만 길었네. 미안해요.”

황금빛으로 가득 찬 그림이었다. 엽서 속의 하얗고 긴 얼굴에 새까만 머리를 가진 여자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입은 반쯤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벌린 입 사이로 드러난 하얀 윗니가 조금 천박하게 느껴졌다. 족쇄 같은 두꺼운 금빛 목걸이. 그 목 아래를 본 순간 좀 불쾌했다. 여자는 상체 한쪽을 훤히 드러낸 상태였다. 허연 가슴 위의 분홍빛 유두가 선명했다. 나는 재킷 앞섶을 두 손으로 잡아 꽉 여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야. 클림트의 유디트. 선하리 씨도 알지, 이 그림?”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숄더 백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엽서를 오물이 들러붙은 정류장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월급날을 이틀 앞두고 나는 또 내일 아침, 출근하고 싶지 않다.


“늦었다?”

엄마는 유튜브 주식왕자님 채널 시청 중이었다.

“생방이야, 생방.”

한껏 흥이 오른 엄마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입도 열지 않은 나를 향해 입게 검지를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앳된 20대 목소리의 왕자님이 예의 그 반존대 말투로 열강 중이었고, 곧 환갑을 바라보는 엄마는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 준다면야 나도 저렇게 강의를 듣고 필기를 하고 싶었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대한 디테일한 매뉴얼이 있다면.

주식왕자님은 목소리를 더 높이는 중이었다.

“계속해 봐야 돼. 직접 해 보라고요. 연구도 좀 하고. 나 따라 하지 말고, 쪼옴!”

남자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말 좀 들어, 제발!”

엄마는 수줍은 소녀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가 옆에서 개인 교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까지 한다.

“네, 알겠어요. 왕자님!”

모든 것이 애매하고, 모호한 밤이다.



*소설에 나온 필적 감정 내용은 국내의 필적감정과 관련된 여러 논문을 참고하였습니다.

작가소개 / 권여름

2021년 제1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가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