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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모를 세계

  • 작성일 2022-10-14
  • 조회수 88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다정 모를 세계




이경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종이상자가 먼저 보인다. 상자는 크기순으로 쌓여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다. 상자마다 종류가 다른 물건이 한두 개씩 들어 있을 것이다. 과하다. 재활용이 가능한 종이상자에 종이테이프를 붙여 두었지만 이건 분명 과대포장이다. 내용물의 부피를 감안하면 모든 물건이 맨 아래 상자 하나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을 텐데.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주문이 처리되고 물건이 포장되어 이런 이상한 형태의 종이상자 탑이 현관 앞에 놓이는 걸까. 그게 궁금한가. 다정은 아주 잠깐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궁금한가.
도어 록을 해제하고 상자를 한 손으로 들어 집 안으로 들인다. 택배상자를 들여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준우는 그런 사람이다. 문밖에 택배상자가 툭 놓이는 소리를 듣고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사람. 상자 안의 식재료가 한 끼의 식사로 완성되어 식탁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관심을 보이는 사람.
다녀왔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 다정은 불과 일이 초 동안 긴장 속에서 기대감을 품는다. 대답이 없기를. 언제부터인가 다정과 준우는 형식적 대화에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 두 마디가 형식적 대화의 대부분이었는데 다정은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예리한 칼로 끝을 잘라 낸 듯 단호한 말투에 어딜 가는지, 어딜 다녀왔는지 묻지 말라는 봉쇄의 의도가 전달되는 느낌이어서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어쩌면 준우가 시작했을까. 최초의 기억은 없지만 아무래도 다정이 먼저였을 것이다. 준우는 그런 간접적인 내색조차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봉쇄라면 준우는 아주 능숙한 사람이니까.
다정의 인사는 단정하고 대답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고요와 빈 소파가 대답이다. 다정에게는 가장 반가운 대답. 준우가 집에 있을 때 고요는 없다. 어떤 음악은 고요를 증폭시키기도 한다지만 준우가 틀어 둔 음악에서 고요를 느껴 본 적은 없다. 딱 이웃에서 항의하기 모호한 정도의 볼륨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준우의 부피, 준우의 온도가 섞인 음악은 다정의 독립된 영역을 지워 버린다.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다정의 머리, 다정의 마음을 침해한다고 할까.
테이프를 뜯어내고 박스 안의 물건들을 꺼낸다. 냉기가 사라져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팩과 물렁해지기 시작한 냉동만두를 냉동실에 넣고, 과일을 냉장실에, 샴푸와 주방세제를 욕실과 싱크대에 정리한다. 탑을 이루었던 종이상자들은 납작하게 접혀 베란다로 옮겨진다. 외출복을 입은 채로 청소기를 꺼낸다. 다정이 꺼낸 무선 청소기 옆에는 그보다 큰 유선 청소기도 놓여 있다. 전선이 중간에서 잘려 나간 그것을 볼 때마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번번이 다음으로 미루어왔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청소기의 전선은 준우가 잘랐다. 소음에 음악 소리가 묻힌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다는데 다정은 듣지 못했다. 듣지 못했는지 듣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다정도 물론 청소기의 소음을 좋아하진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있다. 적어도 한 명 다정이.
청소기를 돌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엎드린 자세로 거실 바닥을 훔칠 때면 준우는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두 발을 들어 올렸다. 다정은 팔을 뻗어 준우의 발이 놓였던 자리와 그 안쪽 소파 밑을 닦아냈다. 소파 밑 깊은 곳까지 팔을 뻗다가 준우의 발에 뒤통수가 부딪힌 날 다정은 걸레를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고 집을 나섰다. 청소기를 소파 밑 벽까지 밀어 넣었다 빼자 흡입구에 먼지 뭉치가 매달려 나온다. 왜 다 빨려 들어가지 않나. 다정은 비닐장갑을 끼고 먼지 뭉치를 떼어 낸다. 준우도 먼지 뭉치인가. 그의 흔적은 왜 흡입구로 빨려 들어가지 않나.
다시 청소기를 켜고 거실을 훑어 나간다. 소파 반대편에 아폴로그 애니버셔리가 버티고 있다. 세계적으로 25대만 생산, 판매했다는 스피커. 다정이 방금 해체한 종이상자 탑과 비슷하게 생긴 스피커 탑은 벽에서 띄워져 양쪽에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스피커의 앞면에서 구십 도 방향의 선을 그린다면 그 선은 정확하게 소파의 가운데, 준우가 늘 앉는 자리에서 만날 것이다. 다정은 청소기로 스피커를 툭툭 건드린다. 스피커 탑은 굳건해서 청소기 흡입구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툭툭에서 쿵쿵으로, 다정은 자신의 몸이 지렛대가 된 듯 점점 더 큰 힘을 가한다. 팔꿈치가 찌릿하다. 6만5천 원짜리 통증을 6억5천짜리 쾌감이 압도하는 순간이다.


팔베개를 한 왼팔이 점점 저려와 깨어났다. 실내는 어둑하다. 다정은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차를 마시다 깜빡 잠이 들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준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소파 옆 탁자에는 마시다 만 캐모마일 티가 식어 있다. 전화를 해 볼까. 다정은 잠시 망설인다. 이 정도는 해야 할까. 자정이 지나도록 연락 없이 들어오지 않는 준우에게 전화 정도는 해야 하는 걸까. 다정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언제였나, 전에, 준우가 새벽녘에 들어왔을 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다정이 고른 말은 늦었네,였다. 평소라면 아무 말이 없거나, 어,라고 한마디하고 말았을 준우가 이렇게 말했다. 이젠 전화도 하지 않잖아. 다정은 옷을 갈아입는 준우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불로 몸을 말고 웅크렸다. 그래서 불만이란 뜻인가. 그래서 마음 편히 늦는다는 뜻인가. 다정은 준우의 말에 그런 의미가 들어 있긴 한 건가 짐작해 보려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보다 더 전에, 그렇게 되기 전에, 다정은 매일 밤 준우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자정이 넘고 한 시, 두 시, 세 시가 되면, 다정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 건지 혹은 못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전화를 했다. 그 시각까지 연락 없이 귀가하지 않는 준우가 문제인지, 몇 번이고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는 자신이 문제인지 다정은 몰랐다. 메시지를 무시하고 전화를 받지 않을 때마다 다정에게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도 그때는 몰랐다. 모래시계의 알갱이가 몇 개씩 일정한 속도로 흘러내리듯 다정에게서도 무언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갔다. 알갱이가 한꺼번에 주르륵 쏟아져 내린 적도 있었다. 어쩌다 전화가 연결이 되고, 술잔 부딪는 소리, 떠드는 소리, 음악 소리 들이 전화기 너머로 왁자하던 때가 아니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백색의 침묵을 뚫고 준우의 말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리던 때. 준우는 화장실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조용한 술집 화장실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받지 말지. 받으라고 건 전화였지만 끊고 나서 다정은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다정은 모텔에서 어떤 전화도 받지 않는다. 메시지만 확인한다. 이건 다정이 정해 둔 규칙에 불과하다. 실제로 다정이 모텔에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온 적은 없다. 다정에게는 전화가 거의 오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스팸 전화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전화기가 울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다정은 자신의 인생에서 여행지의 숙박용 호텔이 아닌 대실용 모텔을 출입할 일이 다시 생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준우의 발에 뒤통수를 부딪치고 걸레를 버린 후 집을 나선 그날 이전까지. 그날 밤 너무 오래 걸어 지친 몸을 쉬려고 들어간 카페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기 전까지는. 바의 한 자리 건너에 앉은 남자가 오래전 조금 알고 지내던 남자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 그랬다.
거짓말이지.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을 믿으란 거야? 지난 세기가 마지막이었다는 걸? 다정은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잠깐 후회했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오랜 기러기 생활 끝에 아내와 아이들을 영영 놓쳐 버렸노라고 담담하게 말했을 때, 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다정도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을 남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자가 믿지 않아 억울한 건 아니었다. 믿음의 공허함을 다정은 충분히 체험했으니까. 믿는다는 건 속는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정도 미래와 희망, 준우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다정은 그 모두에게 속았다. 준우는 속이려 애쓰지 않았다. 다만 침묵하고 회피했을 뿐. 믿고 그 믿음에 배반당한 것은 다정이었다. 결혼생활은 2인극이 아닌 1인극이었고 다정이 배우라면 준우는 관객이었다. 준우의 1인극에 다정은 관객으로 입장하지도 못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결혼 생활의 고비마다 스스로 믿음을 키워 넘기곤 했던 건 다정 자신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믿음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임을 체득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 방법밖에는 몰라서, 믿고 싶어 하는 욕망과 믿겠다는 의지를 결합하고 그것이 해체되지 않도록 가드를 올린 복서처럼 방어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자가 그 말을 믿건 말건, 지난 세기의 어느 겨울밤 준우와의 마지막 정사는 밀린 숙제를 하듯 건성으로 치러졌고, 그 전의 정사는 또 그 일 년 전쯤에, 또 그전에는 다시 일 년 전쯤. 그 무렵의 다정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나면 가슴이 설렜고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 슬리퍼도 꿰지 못한 발로 뛰어가 열어 주었다. 말없이 들어서던 준우의 모습만으로도 애정과 원망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던 시절. 술에 절어 새벽에 들어온 준우가 등을 돌리고 자던 시절이었다. 돌아누운 준우의 등은 너무 넓었고 다정의 자궁에는 소용이 닿지 않는 루프가 들어 있었다. 무지근한 통증과 간간이 비치던 혈흔으로만 존재가 확인되던.
다정은 전화기의 키패드를 열어 2를 길게 누른다. 신호가 간다. 두 번째 울리기 시작할 때 전화를 끊는다. 중요한 것은 통화 여부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예의를 지켰다는 증거가 되니까. 배우자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동일인을 자식으로 공유한 사람에 대한 예의. 생활공동체 혹은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의무 같은 것. 어떤 관계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다정은 알게 되었다.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 관계는 더 이상 불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이미 ‘화’와는 다른 차원에 소속되어 물리적이거나 금전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어떤 언어나 행위도 불화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관계라면 피상적인 배려나 예의로 충분하다는 것을.
어떤 밤, 아직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그 밤, 다정이 인내심의 바닥에 처박혀 거푸 한 전화를 받지 않던 준우가 급기야 전원을 꺼 둔 채 돌아오지 않던 밤에, 다정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아들의 학교에 시험 감독을 가고, 단란한 가정의 지표인 반들거리는 거주 공간과 균형 잡힌 식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야 했다. 그것이 다정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다정은 비유하자면 집을 옮기기 전에는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는 육중한 장롱이나 투 매트 침대였다. 옮겨 간 곳에서도 한 번 자리가 정해지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 자리를 지킬 물건들.
다정은 안방으로 들어와 눕는다. 아침 시간에 요가 수업을 예약해 두었다. 아들에게 할애하던 시간은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아침과 오후, 그리고 밤과 새벽, 대부분의 시간이 오롯이 다정의 것이 된 지금, 아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예상보다 휑했으나 준우에게 닿지 않은 오랜 시간 느껴온 결핍에 비한다면 견딜 만한 것이었고, 적어도 거기에는 아무런 억울함이나 원망이 남지 않았다. 아들의 독립에 대비해 다정은 차곡차곡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 아들은 대학생이 되면서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그 이후 농담으로라도 집으로 다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정은 기숙사로 간 아들이 언젠가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게 되면, 돌아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기대했다. 기대는 어긋났으나 예측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집에서 쓰던 방보다 훨씬 작은 원룸에서 아들은 잘 지냈다. 거창한 요리를 하지는 않는 눈치지만 형편없이 지저분하게 지내지는 않는 듯했다. 외로울까? 아마도. 어쩌면 분명히. 아들의 웃음에는 순전함이 들어 있지 않았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우울과 권태가 웃고 있는 입꼬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이랄까. 아들의 웃음을 보노라면 마치 준우와 자신이 아들의 입술 양쪽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다정은 잠결에도 준우를 기다리지 않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두 시간 간격으로 깨어나고 세 번째에는 다시 잠들지 못한다. 한겨울을 제외하곤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 자는 습관이 언제부터 굳어졌을까.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의 소리에 가만가만 귀를 기울인다.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도 새가 둥지를 트나. 새들의 소리는 준우가 없을 때만 들을 수 있지. 그리고 단지 밖 도로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차 소리도. 누군가 살갑게 통화하는 음성이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온다. 출근길일까, 아침 산책길일까. 혹, 조금은 특별한 일로 외출하는 길일까. 다정은 그런 상상에 서툴다. 기복 없는 생활이 다정을 단조로운 인간으로 단련시킨 결과 다정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상상력의 부재는 타인을 향한 이해의 폭을 형편없이 좁히고 말았고.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는 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누가 말해 주면 좋겠다.
거실이 있는 집을 장만하면서 준우는 거실로 잠자리를 옮겼고 그보다 더 넓은 집에 살 수 있게 되면서는 아예 침실을 분리했다. 자신의 뜻은 아니었으나 다정은 만류하지 않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정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모든 일은 다정의 결정이었으나 그 범주를 벗어나면 다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은 다정 혼자 진행할 수 없었고 아들이나 준우의 협력이 필요한 가족 공동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행 계획 같은 일들.
여행을 간 건가. 잠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준우의 행방이 아니라 준우의 부재 자체이다. 그런 의문보다는 이불의 촉감에 더 집중하기로 한다. 시어서커 원단의 까슬한 침대보를 발바닥으로 문질러 본다. 어제 갔던 모텔의 침대 시트는 스트레치 원단이었다. 종아리에 감기는 침대 시트의 매끈한 촉감 사이로 불쑥 끼어든 거친 느낌에 다정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 찰나의 변화를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루틴을 벗어난 긴장을 쾌락의 연료로 바꾸는 예민함이나 성의는 남자에게도 다정에게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런 긴장은 발생하지 않았다. 각질로 거칠어진 뒤꿈치가 쾌락의 연료나 긴장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돌아누울 때 낙하하듯 늘어지는 젖무덤이나 배와 옆구리의 살처럼 성실하고 공평하게 먹어온 나이의 결과들은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친 뒤꿈치라면 더욱. 다정에게 쾌락이란 견고한 생활의 윤곽선을 잠깐 끊어주는 일 자체였다. 그런데 준우의 뒤꿈치에도 각질이 있을까. 준우의 뒤꿈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정의 기억 어디에도 그런 것은 남아 있지 않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간다. 준우의 음악 대신 햇살이 들어찬 거실의 창밖은 투명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기를 거쳐 우주의 끝까지 보일 듯한 허공 어딘가에 자신이 놓친 시간들이 부유하고 있을까. 이런 상념은 성립되지 않음을 안다. 필요와 효용이 없는 허튼 생각일 뿐이다. 혼자 소파를 차지하고 혀끝으로 느긋하게 느껴 보는 커피 한 모금만 못한 것이다. 다정은 핸드밀로 원두를 갈아 가늘고 긴 물줄기로 드리퍼의 원두 위에 원을 그린다. 커피 알갱이가 베이글처럼 부풀어 오른다.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자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소파의 표면이 눈에 들어온다. 거뭇하게 때가 타고 얇아지고 늘어지기까지 한 가죽과 푹 꺼진 한 사람 분량의 면적.
소파를 살 때 다정은 논현동 가구거리를 며칠이나 훑고 다녔다. 한 올의 흰머리라도 놓칠세라 세심하게 염색약을 바르던 때처럼 한 곳도 허술하게 넘기지 않고 들어가서 육안으로 보고, 만져 보고, 앉아 보았다. 그렇게 들인 소파는 몇 년 동안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준우는 늘 심야에 귀가했고 아들은 학원에서 돌아오면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만 먼저 낡거나 꺼지지 않도록 다정은 소파에 앉을 때마다 자리를 옮겼다. 수시로 닦은 것도 물론이다. 언젠가 어느 휴일에 아들이 핫초콜릿을 흘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정은 아들보다 소파를 먼저 닦았다. 아들은 초콜릿이 남은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밤까지 나오지 않았다. 다정은 피자를 주문해 아들의 방에 넣어 주었으나 다음날 아들이 등교한 후 그 방 휴지통에서 손도 대지 않은 피자 조각들을 발견했다. 휴일마다 골프장에 가던 준우가 그날 집에 있었더라면 아들은 저녁 식탁에 앉았을까. 고기라도 함께 구워 먹다가 아들의 서운함과 자신의 미안함이 연기에 섞여 사라졌을까.
초콜릿을 흘릴 수도 있는 사내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보리색 소파를 들인 자신의 마음을 다정은 이해한다. 용납하지는 않는다. 그때 아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 미숙했던 자신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춘기라는 편리한 단어 속에 아들을 몰아넣고 빗장을 질러버린 자신은 준우가 씌워 버린 틀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것만큼이나 아들에게도 무력했다. 아닌가. 틀은 준우가 씌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나. 틀 같은 건 얄팍한 핑계일 뿐이었을까. 다정은 자신이 왜,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상하지만 그것에 대해 누구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다정 자신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두지 않으려 애쓴 결과이다. 먹고살 만하니까. 그러나 먹고살 만하면 나머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하나. 생활비와 노후가 보장되면 정말 어떤 불만도 허용되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가죽 세정제는 베란다 수납장 구석진 곳에 들어 있었다. 세정제를 듬뿍 묻힌 걸레로 준우가 앉는 자리를 문지른다. 휘핑크림처럼 보얀 빛깔이었다가 이제는 폭우를 머금은 먹구름 색이 되어 버린 소파는 몇 번 문지르기도 전 새까만 때가 묻어나온다. 소파의 색은 변함이 없다. 이 빛깔과 감촉이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더께에 더께를 겹쳐 왔는데 그쯤이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소파의 농담 혹은 조롱일까.
다정의 걸레질에 점점 더 속도가 오른다. 회전근개파열로 한동안 고생했던 어깨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잠을 이루지 못할 통증으로 다정이 울음을 터뜨린 밤 준우는 병원에 가 봐, 라고 말했다. 병원이라면 다섯 군데나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통증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다정이 준우에게 원한 것은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이 아니라, 가 보자는 말, 많이 아프냐는 말, 혹은 단 한 번 어깨에 닿는 손길이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정에게 통증은 지긋지긋하면서도 소중한 무엇이었다. 이를테면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을 뚫고 나온 절규 같은 것. 통증을 떨쳐 내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던 심정이 그때는 절박한 진심이었고 지금은 하찮은 과거가 되었다.
나가? 어제 오후 설거지를 끝낸 다정의 물음에 준우는 답이 없었다. 무응답은 준우의 오랜 응답 방식이다. 나가냐고. 발을 뻗고 등을 구부려 소파 등받이에 기댄 준우의 불룩한 배가 헐렁한 티셔츠 위로 드러났다. 음악에 맞춰 까딱거리는 손가락에 시선이 닿는 순간 다정은 조급증이 났다. 그럼 내가 나가야지. 그렇게 말했던가, 생각했던가. 다녀오겠습니다. 구두에 발을 넣으며 다정은 단정한 발음으로 인사했다. 최근 다정의 인사는 거의 기계음에 수렴하고 있었다. 반드시 준우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소파에, 어쩌면 그 위 벽에 걸린 액자에 대고 한, 어쩌면 그저 공간을 향해 흩어 버린 인사였다. 저녁은? 침묵으로 일관하던 준우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먹고 와. 다정은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물음의 진짜 의미는 다정의 저녁이 아니라 자신의 저녁일 터였다. 저녁을 차리러 올 거냐는. 다정은 먹고 온다고 답함으로써 차려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달한 셈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나간 길이었을까. 돌아오지 않은 지 사흘째다. 다정은 그동안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했다. 오전과 밤. 메시지를 남겨 두기도 했다. 메시지는 다음날에야 읽음으로 표시되었다. 언제였던가, 준우가 이틀 동안 전화조차 불통인 상태로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신 후 연락 두절이라며 준우의 친구가 집으로 전화했을 때 다정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병원이나 경찰에서 안 찾는 걸 보면 별일 없나 보죠. 전화기 너머로 뜨악해진 표정이 느껴졌다. 그는 억지로 한 번 웃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준우는 사흘째에 초췌한 몰골로 귀가해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 그럴 일이 좀 있었다는 말 밖에는. 후에 집으로 온 우편물에서 다정은 음주운전과 구류라는 낱말을 발견했다. 날짜는 그때와 일치했다. 다정이 엉뚱한 오해를 해도 준우는 상관없었던 것일까. 혹은 그런 식으로 하나씩 변명하고 해명하다 보면 원천봉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이번엔 그런 일은 아닐 것이다. 현관 옆 탁자에 자동차 열쇠가 얌전히 얹혀 있다. 준우도 다정도 거의 운전을 하지 않고 지낸다. 차에 설치된 블랙박스에 행선지가 남고 차 안에서 통화한 소리가 남고 그것을 지우면 지운 흔적이 남는다. 그런 것들이 불편하고 싫다. 어떤 흔적을 발견하거나 서로에게 들키는 일이,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는 여지가 곧 고통임을 적어도 다정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뭘까. 출근 부담이 사라졌으니 외박이 길어지는 걸까. 준우라면 그럴 수 있겠지.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신혼의 다정을 남겨 두고 가출하던 사람이니까. 결혼기념일에 저녁 약속을 깨고 나가서 들어오지 않던 사람, 외박한 다음 날 얘기 좀 하자고 들면 다시 주섬주섬 옷을 꿰입고 나가 버리던 사람, 싫어, 한마디로 모든 의무와 약속에서 벗어나 달아나던 사람. 준우는 그런 사람이니까. 준우라면 그럴 수 있지. 다정은 어떤 일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야속함, 분노, 체념, 슬픔의 순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나온 지금 마침내 무관심이라는 좌절에 도달했고 적응했다. 준우가 도달한 곳은 어디일까. 준우의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준우는 왜 그런 준우가 되었을까. 이런 의문은 오직 다정의 것이다. 준우는 자신을 원만한 배우자라고 여기는 듯하다. 생활비를 거르지 않고 입금했고 큰 사고를 친 적은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준우는 이런 생활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일까.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좋아. 다정은 기꺼이 자신만의 평화를 누리기로 한다.
이토록 평화로운 시간을 요가에 내어 줄 이유가 없다. 다정은 매일 아침 가던 요가 수업에 가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자신만의 식탁을 준비한다. 일인분의 식사에 정성을 다한다. 한때 다정의 소박한 꿈은 찌개를 끓이며 준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 끓은 찌개가 식을까 조바심을 내며 시각을 확인하고, 식은 찌개를 데우고, 다시 데우고, 그러는 사이사이 집안 여기저기를 정돈하면서 준우의 차가 들어오나 가끔 베란다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그런 날들은 어느새 식은 찌개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채 서서 공깃밥을 해치우는 날들로 바뀌었다. 냄비에 든 음식이 된장찌개인지 순두부인지 준우는 결코 알지 못하던 날들.
식탁에 놓인 돌 냄비를 무심결에 열어 본 다정은 눈살을 찌푸린다. 방치된 김치찌개에 곰팡이가 슬어 있다. 준우의 것이다. 준우와 식사를 할 때 김치찌개는 언제나 두 가지. 다정의 것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쪽이다. 준우를 위한 김치찌개를 다정은 더 이상 끓이지 않는다. 이게 싫다면 직접 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정의 태도는 준우에게 전달되었고 준우는 돌 냄비에 물과 매실 엑기스만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먹었다. 돌 냄비의 가장자리에 붉은 물감의 농담이 만들어 낸 실루엣처럼 찌개 국물이 말라붙어 있다. 보관에 실패하여 퇴색하고 우그러진 수묵화에서 느껴질 법한 상실감이 냄비에 붙어 있다. 먹고 남은 찌개에 김치를 보충하고, 물을 더 붓고, 매실 엑기스를 더하고, 끼니때마다 그런 식으로 다시 끓인 탓이다. 언젠가 다정은 준우의 찌개에 입을 댔다가 구역질을 했다. 세상의 맛 중에 불결한 맛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런 맛이 아닐까. 밥을 먹다 말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정이 말했다. 버리고 새로 끓이지. 준우가 말했다. 싫어. 장어 소스도 아니고…. 다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식탁에 다시 앉지 않았다.
아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갔었다. 교토의 오래된 초밥집에서 먹은 장어초밥은 유난히 맛있었다. 아들은 장어초밥만 잔뜩 먹었다. 그 집에서는 개업 이래 수십 년째 매일 새벽 장어 소스를 끓인다고 했다. 날마다 새 재료를 기존의 소스에 추가해 끓이면 아무리 오래되어도 최초의 소스가 미량 남아 있는 거라고 요리사가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설명했다. 최초의 소스라고? 1퍼센트? 0.1퍼센트? 0.001퍼센트? 그러고도 최초의 맛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다정은 의아했다.
찌개를 먹을 때 준우는 냄비 가장자리에 바닥을 긁어낸 숟가락을 입술에 대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었다. 그러고는 입 안에 든 밥알과 함께 소리를 내며 씹었다. 입술을 벌린 채로. 입가에 큼직한 고춧가루가 자주 묻었다. 저 남자에게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남자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어떤 재료를 얼마나 넣어 끓이면 그 남자가 저 남자가 되는 걸까. 레시피는 몰라도 끓인 기간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삼십일 년. 준우를 처음 만난 지 삼십일 년째니까. 다정은 해사하고 담백했던 준우가 장어 소스처럼 칙칙하고 걸쭉한 남자로 변한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게 아니라 삼십일 년 동안 꾸준히 칙칙해지고 걸쭉해졌기 때문이다. 녹음을 시작한 건 작년 어느 날이었다. 이미 충분한 수준에 도달한 준우가 더 칙칙하고 걸쭉해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날.
이상했다. 거슬리는 소리는 어째서 음악 소리를 뚫는 걸까. 준우가 내는 생활 소음들은 음악보다 힘이 셌다. 신문을 부스럭거리는 소리,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 소파 가죽이 맨살에 밀리는 소리, 코 고는 소리, 소리, 소리, 소리들…. 그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먹는 소리였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다정의 식도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는데, 어떤 불결함과 천박함을 구체화한 소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바로 이 소리가 아닐까 할 정도였다. 그 생각이 어떻게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식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다정은 옆 의자에 놓인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시간을 측정하는 숫자가 빠르게 바뀌고 그래프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다정의 침샘에서 왕성하게 침이 분비되었다. 마지못해 넘기던 밥알에 찰기가 돌았다. 이제 소리는 식도를 메우는 게 아니라 기계 속으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비로소 편안해지던 그 느낌을 다정은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녹음 파일이 몇 개더라. 한 번도 재생해 보지 않았다. 녹음의 효용은 녹음 행위에 있었으니까. 녹음이 제대로 되었는지, 볼륨은 적당한지, 잡음은 얼마나 섞여 있는지 다정은 관심이 없다. 녹음 자체가 하나의 발명이었다. 파일은 아마 대여섯 개 정도. 그 숫자는 그날로부터 준우와 한 식탁에 앉은 횟수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준우와의 식사를 피하는 데 그만큼 실패했다는 뜻이다.
다정은 곰팡이가 잡힌 김치찌개를 개수대에 쏟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비로소 식사를 할 준비가 되었다. 식탁에 앉자 소파가 눈에 들어온다. 소파는 이제야 원래의 색을 찾는 중이다. 사흘 동안 가죽 세정제를 두 통 쓴 결과다. 늘어진 가죽과 꺼진 쿠션은 회복되지 않는다. 다정은 안다. 아무리 닦아내고 애를 써도 회복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소파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지난 사흘, 다정은 별다른 불안 없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누렸다. 여전히 연락 없는 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신호가 두 번째 울릴 때 끊는 이유는 받지 않는 전화를 오래 잡고 있을 필요가 없는 데다 한편으론 받을까 봐 조바심이 나서이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다정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도 그랬다. 다정의 말을 기다리는 의사 앞에 앉아 도무지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 건지. 어떤 단어를 골라서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 준우로 인해 느낀 깊은 무력감을 그 앞에서 다시 느껴야 했다. 말을 고르고 고르느라 절망하던 중 들은 조언은 명징했다. 안 바뀝니다. 본인이 바뀌어야죠. 이혼이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다정은 울었다. 처음 보는 의사 앞에서 운 것이 수치스럽고 참담해서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그런 모욕감을 안겨 준 준우를 원망했다가 흐느낌이 잦아들 즈음해서는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결혼 전 다정은 다이어리에 그날 알게 된 이런저런 문장을 끄적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문장을 적어 넣었다. 그때는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정도 사랑 때문에 휘청거릴 때가 많았고 그건 주로 가볍고 짧은 동요였지만, 그럼에도 위안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문장들을 써 보곤 했다. 유치함은 강하다. 강해서 오래간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의사 앞에서 펑펑 울다가 불현듯 기억날 정도로.
남자에게는 적당한 말이 쉽게 떠올랐다. 같이 살까? 만날 때마다 묻는 말에는 어디서? 라고 받았고, 아바나 같은 데서라고 말하면 그러지 뭐,라고 대답했다.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남자가 언제? 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고 시기를 언급하지 않은 이상 거짓말이 되지는 않을 거니까. 미래는 꿈꾸지 않는 것이 좋았다. 미래라면 준우와 열렬히 꿈꾸던 때가 있었으나 그 미래가 이런 현재는 아니었다. 미래는 미래로 남아 있을 때만 아름다울 수 있음을 다정은 깨달았다. 이룰 수 있는 미래의 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별로 넓지도 않네. 다정이 중얼거린다. 준우와 마주 앉았을 때는 한없이 견고하고 광활한 식탁이었다. 얼마나 광활했냐면 맞은편의 준우가 아득히 멀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식탁 상판에 섬세한 마블링이 번져 있다. 마블링은 볼 때마다 무늬가 달라진다. 어떤 때는 나뭇가지로 보이고 어떤 땐 구름 같기도, 또 어떤 때는 날갯짓하는 한 마리의 새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의 마블링은 뭐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의 어느 숲 같기도 하다. 다정은 잠깐 호젓한 기분에 젖는다. 오솔길을 따라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듯한 이 기분은 준우가 있었더라면 불가능할 일이다. 오솔길 어딘가에 찌개 국물이 얼룩져 있었을 테니까. 나뭇잎이 무성할 자리에는 휴지조각이 던져져 있었을 테지. 다정은 휴지조각을 조용히 집어 들어 소파 옆 테이블에 가져다 두곤 했다.
빈 의자 위에 둔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잠금 화면의 패턴을 풀고 메시지 알림을 체크한다. 온라인 마켓의 할인 쿠폰 발급 안내, 금융기관에서 보낸 광고 사이에 남자의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음을 발견한다. 남자는 어제도, 그제도 메시지를 보냈다. 다정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평온을 흔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피하고 싶다. 답을 해야 할까. 무어라 답할지 다정은 잘 모르겠다. 굳이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침묵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다, 다시, 그럼 좀 어떠냐고 마음이 바뀐 다정은 흠칫한다. 준우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나. 정말 그런 것이었나. 아내를 방치하고 외면하면서, 그것을 알면서도, 그럼 좀 어떠냐고 합리화한 것이었나.
준우를 잘 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만난 지 일 년이 되고 삼 년이 될 무렵 그런 착각을 했다. 그때는 착각인 줄 몰랐다. 햇수를 거듭할수록 준우는 점점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애초에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다정은 조금씩 실감해 왔다. 남자는 다정을 오해하고 있을까. 적어도 다정이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도, 어떤 그리움도 없다는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을까. 그런데 다정은 정말 준우의 마음을 알게 된 건가. 다정은 그림을 그리듯 대리석 식탁의 마블링을 손끝으로 더듬어 본다. 갑자기 모든 형태가 그저 얼룩에 불과해 보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양일 뿐이다. 애초에 특정한 무언가를 표상하지 않은 무늬일 뿐이므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정은 남자가 보낸 메시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은 다정은 천천히 오래 씹으며 으깨지는 밥알을 음미한다. 은근한 단맛. 이 맛을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단맛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언제였을까. 이 맛을 마지막으로 느껴 본 것이. 소리 때문이었다. 준우의 씹는 소리. 언제부터 거슬리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 소리들. 다정은 밥알을 씹으며 스마트 폰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불러온다. 음성01, 음성02, 음성03… 자동으로 생성된 파일명이 우습다. 그것을 음성이라고 이름 붙이다니. 다정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충분히 씹어 단맛조차 빠진 밥을 삼키고 생각한다. 음성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무어라 해야 마땅한가. 꼭 이름을 붙여야만 할까. 생각에 잠긴 다정은 파일 목록을 하나씩 길게 눌러 모두 선택한다. 하단의 바에 표시된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다정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마침내 오랜 의문이 해소되었다는 듯, 어쩌면 의문은 더 이상 효용이 없다는 듯, 키패드를 띄워 파일명을 바꾸기 시작한다.
아바나01, 아바나02, 아바나03…
다정은 다시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고 느릿느릿 씹으며 아바나 파일 전체를 선택한 뒤 가볍게 하단의 공유버튼을 터치한다. 간단하다.











이경란
작가소개 / 이경란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다.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다섯 개의 예각>,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을 펴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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