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 그림자」외 6편
- 작성일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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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왼발을 난간에 걸친다
발끝에 닿은 리듬 오른쪽으로 비틀린다
어디, 잇단음표 하나 부려 두고 온 탓일까?
한 음쯤 밀려가는, 옆구리 한 켠 자꾸만 결리는 스텝
끝이 다물어지지 않는 옆자리 하나
* 피보나치 소수가 무한히 존재하는지는 유명한 미해결 문제다.
카페베네 2층, 혼자 둘이서
골목을 떠올립니다. 설레던 작별
산국 몇 송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뒤꿈치가 가려워지고 그림자, 모서리가 접히던
몇 발작 앞서가던 오후
⁕
등을 맞대면 딱딱해집니다 혼자가 둘인 이유
머그잔에 담긴 카페라떼 한 잔 소주보다 쓴 탓입니다
삼거리 현대슈퍼, 간이의자 한쪽이 기울어지던
잔도 없이 병나발 기울이던, 여자
사내, 입술이 오물거리던 거짓말이라든가······
겨울이라니······
식은 소주가 목젖을 쓸어내리고, 갈변한
목소리
(아, 추워) 어깨를 들썩이며 골목을 돌아 나갑니다
바람 지나갑니다 마른 골목을 들썩이며
접힌 모서리를 들추지만
그림자 속의 그는 그가 아닌, 뒷걸음치고
설레죠, 아니 황홀하죠, 막다른 등을 허공에 기대면
제목도 모르는 노래 몇 소절
⁕
선인장을 키운 적 있어요? 그가 물어 올 것도 같아 물음보다 먼저
노, 해 버린 나는
선인장 몇쯤 말려 버린 여름 어느 페이지를 또
간절히, 찢어 버릴 수도 있어요
하나가 둘이거나 둘이 하나이거나, 가시가 자랍니다
뾰족해진 우리는······
⁕
골목을 사정없이 달립니다 어디라도 도착하겠지요
낯선 곳이면 좋겠습니다
쏟아 버리고 싶은, 오후
블랙커피를 쏟으면 수평선 벌컥, 뒤집어진다
3월 5일, 바다는 그렇게
쏟아졌고
지나가던 바람에 비스듬 몸을 기울여 버린, 창유리마다
제 속을 덜어 내던 방 한 칸쯤 있었지
우린 왜 기울어 쏟아진 집으로 들어갔던지
⁕
왜 우린 다시 바닷가 이 마을로 돌아왔는지······
어두워지면 창 몇몇 환해진다 그 방
바라보지도 못한 채 흘려보낸 저녁 어스름, 우린 서로
가장자리에서 태어나나 봐
움츠린 벽 속에 숨죽이며
난 블랙커피
넌, 새인가 블루베리스무디를 마시고
내가 웃는다
넌, 운다 창을 막 빠져나온 탓일까 제법 검은 춤을 추며
짭조름할 거야 네게 나는
두어 모금 웃음을 쪼는 걸 보면
⁕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신다 가장자릴 일으켜 세우면
내일이 오락가락 얽히는, 우리 마주
식어 가지만
9월 5일, 또 커피를 쏟아 버리고 싶어?
식상하잖아, 제발 춤을 멈춰 봐
네가 또 운다
부리를 테이블 위에 쏟아부으며
토할 뻔했잖아
입술까지 묻어나온 커피 맛, 이리 쓰다
나는 또 블랙커피를······
삽화가 된 휴지통*
머그컵?
휴지통 앞에서 말이 꺾인다
보도블록 한 장쯤, 기울어진 머그잔에 스트로를 꽂아 넣자
뭉그러지는 속엣말 몇 모금
와글시끌, 끌려오는 발바닥 조각들
가로세로들, 콜라주
나 왜 휴지통 앞에 서 있지?
⁕
얼굴 따윈 필요 없어, 뒤통수를 반쯤 기울여 보면 알아
숨은 것들이란 가장자리 쪽으로 기울거든
머그컵을 뒤집는다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음 엎어지고
소프라노, 어제 죽은 여배우의 대사 비스듬히 선다
공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너와 난 어깨를 들썩였잖아, 어슷 햇살이 잘려 나가는 찰나였어
라운드 미드나잇 흐르고
피카소 달리 에른스트 마그리트, 지나가고
머릿속에 엉겨드는 토끼 여우, 이건 뭐! 짐승도 아니고······
비스듬한 것들은 늘 새롭지
저 휴지통 좀 봐, 기울어 있잖아 오늘은 취하지도 않았어
⁕
미술관 앞, 제 발로 걸어 나간 발바닥들 자꾸만 말을 걸어오고
난 머그컵이나 툭툭, 기울이며
* 르네마그리트 <삽화가 된 젊음> 변용.
수요일의 빛깔
오후의 가슴둘레, 바이올렛이다
어깨너머로 햇살 서너 줌 짓물러지고
하늘 바다 돌 파도, 한통속으로 물들어 가면
저녁, 벤치 옆 길목을 서성인다
막 몸속을 통과하는 스펙트럼의 맨 아래
끊어지듯 이어지는 선율들
바람 아니, 바이올린
그래, 이럴 땐 세상에서 가장 긴 혀를 가진 내가 나를 핥는 거야
닿을 수 없는 우듬지가 있었지
내 속에 나 부풀어 오르고
가슴둘레가 왜 이리 꿈틀거리지?
카페베네 2층 창가
맨 아래쪽 옆구리 울렁일 땐 마른 나뭇잎? 흔들린다
둥치마저 꿈틀거리고, 이 몸통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 몸 안쪽을 향해 걸어온다
바스락거리는 것들이란 늘 조금씩 어려운 것이지만
가위를 들고 장미 넝쿨을 자른다 가시들은 손가락을 손등을, 가슴을 찌르기도 하지
잘려 나간 꽃들 흩어지고
저녁의 빛깔 손바닥 위에 올리면
잘린 지문들
바람 사붓대는 길목에서
푸른부전나비 한 마리 오물거리는
바이올렛, 어둠 쪽으로 겹쳐져 가고
내일은 또 어떤 빛깔들, 자라날까?
화요일의 식탁
네가 들어오는 꿈에선 진물이 묻어난다 거즈를 갖다 대면 벌건 물이 스며드는
너는 말라 있다 딱지들 떨어진다 내년엔 너는 조금 더 마를 것이고
색깔이 지워질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초대하지 않는다
⁕
어쩜, 식탁에 놓아둔 꽃 한 송이 피었다
식은 보리차라도 따라 줄까, 돌아보면
너는 봉오리 몇 더 피워 낼까?
빨강, 더 짙어질까?
잎사귀 위로 물방울 흘려 본다 도르르
새 한 마리 날개를 턴다
⁕
구부정히 걸어가 꽃대를 흔든다
오늘 화요일인가? 뒤쪽을 살피면 네 목덜미엔
여름 가고 봄 가고, 동지가 와도
봉오리만 붉었었는데
물을 주다가······
밥은 먹었니? 생각했을 뿐인데······
흠뻑, 마른 너는 머뭇거린다
⁕
물을 자주 주면 물맛만 나잖아요?
물맛들,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래, 안의 혼잣말 흩어지는 식탁이 있지
나, 꽃 떨군 지 오래되었어요
가장자리, 파도가 조금씩 모래를 끌어가고
닿지 못할 먼 곳
끌어당겨 본다
쯧쯧, 식탁의 방식으로만 일어서려는 안쪽, 화요일?
⁕
체온도 때론 버려지는 것인가, 오늘 아침엔
식탁 아래 부스러기인가
아무도 없다 507호
하얀 침대보와 천장에 떠도는 싸늘한 체온뿐
따듯한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화요일인데
⁕
거리가 비워진다 쓰레기봉투를 뒤적이는 고양이 울음소리 날 보채지만
문득 나와 나 사이, 멀고
희미해지고 너는 자꾸
허공으로 풀어지는 목소리의
⁕
아이야, 화요일인데 잘 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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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 관리자
-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리자
- 2023-11-15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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