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 작성일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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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거니
너의 질문은 항상 엉뚱한 길에서 갈팡질팡해
내 말에 조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거니 말귀가 어두운 거니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커다란 눈의 피리 부는 고양이가 피리를 불고 있는 간판이 보이면 옆 골목으로 길을 따라 치킨 가게가 보인다고
그러니까 정확한 위치를 말을 해, 치킨 가게가 안 보인다니까
짜증 섞인 너의 말에
뭐야! 그럼 이번엔 내 말에 어미 하나라도 툭 떨어져 나갔다는 거니
어느 문맥에서인지 의미가 닿지 못한 마찰음이었어
이럴 땐 치킨 가게 벽에 걸린 그림들은 왜 하나같이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발음에 힘을 주어 강한 마찰이 생겨나고 너의 청력에 닿기 전에 다른 길로 새어버린 말이 각자 다른 골목길을 헤매면서 서로 붕괴를 시작하지
자기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우리는, 뚜렷한 색깔을 연주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 오답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고
그런 다음 감정 없이 서로의 가슴에 성호를 긋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오늘 사용한 불편한 감정은 김빠진 맥주처럼 날려 버리곤 해
그럴 때면 너와 나의 비트박스는 500cc 안에서 참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며 버블처럼 부풀었다 서서히 가라앉지
연필의 춤
멀리서 아프리카 춤이 슬픈 호흡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팔려 간 노예선과 긴 파도, 그런 게 생각나서
불현듯 백지의 나를 끌어당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달의 그림은 시작되었어요
내 몸은 연필의 흑심을 세워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런 첨단의 달빛 스케치도
나의 백지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빛과 어둠으로 세운 촉각이
매일 밤 깨질 듯 위태로운 달빛이 되어 창문을 두드렸어요
달을 그릴 때마다
생각의 더듬이는 허공에서 머물고
몇 분 후 지워질 것들은 얼룩으로만 남아요
그것은 일종의 달에게 버려진 구름 같아서
남아메리카 사탕수수 농장으로 슬픔처럼 몰려들던
최초의 궁리는 끝내
바람에 흩어지는 빗줄기로 너덜너덜해져요
확실한 건 달에게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뾰족한 연필의 춤이었다는 거
그때 연필심은 왜 스스로 검은 춤이 되어 백지 위로
필사의 몸을 던졌을까요
이따금 달이 구름 사이로 몸을 감추는 건 본능일까요
아니면 연필의 춤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백지의 고집일까요
이미 여백이 위험한 백지인 나는
매일 밤 연필을 생각하며 미끄러지듯 춤을 춥니다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할 여백이 있을까요
오늘도 나는 연필을 들고 기우제를 지냅니다
곡선의 웃음
활이 휘어져야 화살은 표적에 닿을 수 있다
나는 그럴 때 꽂힌다는 말을 꽃 피운다로 이해한다
집중은 몰입의 다른 말,
너를 꽃 피우기 위해 나는 한껏 휘어지기로 한다
휘어져야 꽃 피울 수 있으므로
나는 너라는 과녁 안에 들기 위해
내 몸의 곡선에 몰입 중이다
그럴 때 과녁은 차르르르 웃는다
제 몸에 박혀 부르르 떨고 있는 화살이 느껴지는지
휘어지던 활의 곡선이 둥근 과녁의 곡선을 만나 팽팽해진다
우리는 그것을 곡선의 웃음이라고 부른다
속도는 곡선을 좌우하고 곡선은 명중을 좌우한다
나는 너에게로 가기 위해 이만큼의 거리에서
휘어지는 몸의 각도로 새롭게 살의 촉을 장전한다
허공을 뚫고 날아가는 화살촉이 정확히 표적을 향할 때
나는 비로소 팽팽하게 당겼던 활의 시위를 놓고
곡선의 웃음으로 화답한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늘어진 몸을 이끌고 들어온 집
간신히 문지방을 넘으려 할 때 집주인이 내게 방을 빼라고 했다
서슴없이 난발하는 집주인의 횡포에 나는 나에 맞는 답을 드렸다
도대체 이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방을 빼라니요 갑자기?
내겐 방을 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냥 방에서 내 몸을 빼겠습니다
가끔 뺄셈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깔끔하다
말의 힘에 밀려 방에서 빠져나온 몸뚱이 하나 거리를 걷는다
뱀의 꼬리도 한번 되어보지 못한 나는 붕어빵을 먹을 때 꼬리부터 베어 물곤 했는데 거리에는 붕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그 무엇의 꼬리도 되어보지 못한 나는 꼬리부터 어른이 되었다
추위가 물러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봄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든다
어디까지 냄새를 풍기며 흘러갔을 붕어들의 흔적을 찾아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터벅터벅
대낮부터 허기진 바람이 날개를 달고 사방에서 출몰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좁쌀을 뿌리면 비둘기 떼가 마술처럼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다 저 많은 비둘기들의 방은 어디에 있을까?
나를 향한 나의 질문은 항상 난해하고 답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곤란한 질문들을 쏟아내던 어떤 시간들과 어떤 공간들
비둘기처럼 다정한* 당신
이제 방을 좀 빼주시죠
* 조선 말 고종황제의 마지막 왕손 이석이 부른 ‘비둘기집’의 노래가사
어둠보다 힘이 센 몰입은 없다
이곳에서는 커튼이 물이고 관객이 물고기라는 거 알아?
물고기는 물을 떠나려 하지 않지
물고기는 물의 등쌀에 밀려났다가도
다시 또 물살을 따라 거슬러 오거든
몰입보다 힘이 센 끈은 없어
물이 물고기를 밀어내고 있는데 박수갈채라니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크로스오버인데
주연과 조연의 어디쯤이라는 너의 말에 나는 몹시 당황하게 되지
C 구역 4열 1번 좌석에 앉으면 배우를 향한 내 고개가 자꾸 삐딱해져
귀와 눈이 B 구역을 지나 A 구역에서 다시 C 구역으로 되돌아오는 건
내 몸이 연기가 되어 타오르기 때문이야
몰입은 배우의 심장까지도 파먹을 수 있어
그러다 보면 배우의 겨드랑이에서도 유쾌한 슬픔이 돋아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지
어둑한 망막은 바람 속에 투명한 그물을 펼쳐놓은 거미처럼 살아 움직여
어딘가에 검은 눈빛으로 도사리고 있다가 불시에 배우의 표정을 잡아채기도 하지
배우의 눈물이 매혹적일 땐 나는 그 결말을 위해 매일 기도해
세상이 불행의 한 극단으로 밀려나기를
그럴 때마다 진실은 언제나 두 개야
사람들이 말하는 성과 속, 그 너머의 혼돈과 아이러니
어쩌면 나의 이야기인 듯 남의 이야기
막이 끝난 후 배우의 퇴장은 상당히 희극적이었다고 내 몰입의 끝에 짙게 드리워진 검은 커튼은 내게 말하지
내 안에 검은 커튼이 어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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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 관리자
-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리자
- 2023-11-15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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