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만토바의 연인」 외 6편

  • 작성일 2023-03-17
  • 조회수 1,006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조]




만토바의 연인

이윤훈

발끝 아래까지 눈꺼풀 내린 무덤

하룻밤 잠을 자듯 눈 한 번 감은 연인

흰 옥빛 상형문자로

오천 년이 흘렀다


죽어서도 껴안은 채 별의 꿈을 꾸는

여기는 달도 잠든 그들만의 궁전

사랑해, 불꽃 같은 말

어둠의 눈을 켠다


은하 너머 수만 년 더 빛나야 한다고

사랑의 별자리에서 두 눈을 반짝인다

그들을 해독한 아침

죽음조차 환하다


*만토바의 연인: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배경인 만토바에서 서로 껴안은 채 발견된 오천 년 전의 무덤 속 연인






굽은 못을 위한 레퀴엠



한여름 중천에 뜬 태양처럼 직시하라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다


기둥에 대못을 치며 단호하게 외쳤다


미송 속 도사린 옹이를 만났을까

여린 속을 보고 그만, 눈 질끈 감았을까


못 하나 맥을 못 추고 휘어지고 말았다


등 굽은 그림자로 서성이던 아버지

세상의 벽을 끝내 꿰뚫지 못하셨지


조심히 굽은 못을 펴 연장통에 넣었다





현악 4중주, 겨울



# 1 악장 - 예세닌의 시를 읽는 겨울밤


먼발치 숲속 바람 뒷문으로 엿들어요

촛불의 흔들림에 가만 몸을 내맡기고

벽 위에 검은 나비로 너울너울 춤춰요


가끔 소스라치다 촛농을 엎지르며

양초가 빛으로 몸을 바꿔 사라지면

깊숙한 어둠의 관이 나를 삼킬 거예요


재 속의 밑불처럼 슬픔을 다독여요

먼 것은 먼 그대로 그립게 둬야 함을

알기에 차마 한시도 들쑤시지 못해요


외지도록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으로 가

바람의 거친 숨을 터질 듯 들이켜고

부풀어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싶어요


# 2 악장 - 나의 벽지


산마을 절로 외져 고요로 쌓이는 눈

한차례 바람 일던 빈 가슴 분지 위로

온종일 무심하도록 내리고 또 내리고


저마다 제 안으로 들어서는 어스름 속

침묵이 깊어지면 사람도 침향일까

불현듯 산방의 모과 온몸으로 향기다


방 안의 등을 끄고 마주한 바깥 어둠

산짐승 숨은 눈빛 형형히 살아나고

한순간 흰빛을 그며 사라지는 별똥별


꿈 한 폭 스쳐 가는 붓길이 가파르고

벼랑 위 몸을 세운 소나무 가지 끝에

새뜻이 싹튼 초승달 곡옥으로 달린다


# 3 악장 - 폭설


나직한 하늘 한 귀 은사시나무 숲속

긴 활을 휘두르며 숨 가삐 연주하는

바람의 거센 광시곡 잠든 귀를 깨운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 머리를 치켜세워

갈기를 휘날리며 허공으로 뛰어드는

산마루 하얀 수사자 거친 포효 힘차다


온 생을 단 하루로 목숨 다해 살아온 듯

핀 채로 단숨에 뚝, 격정의 목을 꺾어

눈 속에 더욱 짙붉게 타오르는 동백꽃


동박새 온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가고

흰 이마로 해를 맞아 눈부신 저 사자봉

폭설 뒤 찾아온 고요 그지없이 드맑다


# 4 악장 - 횡단


언 눈에 몸을 세워 곧게 선 자작나무

바람이 투명하게 목관악기를 불고

숲 너머 은빛의 달이 싱싱하게 부푼다


고독하여 더 빛나는 늑대의 푸른 눈빛

사람도 여기서는 깨끗한 피의 짐승

눈을 뜬 별들이 멀리 천공의 길을 열고


새벽을 뚫고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갓 태인 첫울음을 눈부시게 터뜨리며

태고의 순결한 불을 목숨마다 붙인다


드넓은 숲을 질러 달리는 흰 늑대들

온몸을 내던진 채 심장 하나만으로

새하얀 세계에 저를 고스란히 맡긴다





암벽 타기



바짝 달라붙어 암벽과 독대하여

외로이 저 자신을 마주하는 이들


돌거울 어둠 속에서

제 얼굴을 꺼낸다


한 줄에 달려 서로 제 목숨 내맡긴 채

눈빛을 나눠 가며 당기고 풀어 주며


타인을 중심에 두고

한 발 한 발 오른다


날빛에 날을 닦아 제 몸처럼 아껴 두고

제 줄을 잘라야 할 가장 고독한 순간


마지막

숨죽인 커터 서슴없이 잡는다


위태해 더 외롭고 외로워 서로 깊은

생사의 경계선을 묵묵히 타는 이들


벼랑 위 뿔을 치켜든

흰 산양을 꿈꾼다





스피노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다



변방의 다락방에 피신한 스피노자

책, 빵을 사기 위해 렌즈를 깎아 가며

세상을 새로이 보는 창을 하나 내었다


흐릿한 뭇별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숨은 풀꽃들도 새뜻이 나타나고

모두가 모습 그대로 눈에 맑게 어렸다


지상 한 모퉁이 길거리 카페에서

안경을 다시 닦아 먼 밖을 보는 아침

고요히 사람들이 다 내게로 와 빛이다





천국의 도시



# 파라다이스 풍경


먼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빛의 포장, 쉽사리 간편하게 일상이 소비되는

온종일 잠들지 않는 파라다이스 편의점


캔 커피 샘이 솟고 컵라면 솥이 끓고 허기진 눈을 끄는 색색의 온갖 식품

은밀히 적나라하게 제 알몸을 보인다


수명이 다하기 전 팔려야 할 상품처럼 쉼 없이 소비되며 넘나드는 허깨비들

천국의 이십사 시간 판토마임 축제다



# 메가시티 동굴


빛의 무릎이 깊이 꺾이는 지하 동굴, 토막 난 잠을 잇는 지하철 밤승객들

때늦은 수화물처럼 종착지를 꿈꾼다


촉수 무딘 일상 속 쉬이 잊고 잊히며 오늘 밤 또 몇몇이 수취인 불명으로

구겨진 지도 위에서 겉돌다가 잠들까


피곤에 움푹 파여 어둠이 깊은 눈들, 시선은 마디마다 꺾이어 끊어지고

꿈에도 사라져 버린 푸른 별과 지평선


핏발 선 눈을 감자 펼쳐진 동굴벽화, 먼 곳을 바라보며 우뚝 선 붉은 들소

뒷발에 온 힘을 둔 채 뿔을 번쩍 쳐든다



# 마리오네트


폭신한 소파에서 휴일을 살찌우며 솜사탕 하루를 또 한 입씩 떼어 물고

무심코 안락한 병을 일상 앓는 사람들


물신이 꾸며 놓은 도심지 금빛 무대, 머리 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쉽사리 목숨의 줄을 내맡긴 채 춤춘다


갖가지 광고 잔치 젖과 꿀이 넘쳐 나고 닿을 듯 말 듯 달린 탐스런 황금사과

날마다 장밋빛 단꿈 채울수록 허기다





부패의 정체



자꾸만 비린내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아무리 킁킁대며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서 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며칠째 생선 한 첨 입에 대지 않았는데, 부엌을 살펴봐도 냉장고를 열어 봐도 자그만 생선 대가리 눈에 띄지 않는데, 비누로 손을 씻고 자리에 돌아와도 가신 듯 가시지 않는 비리고 역한 냄새


날 보는 고양이 눈빛, 내가 심히 수상쩍다

작가소개 / 이윤훈

평택 출생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 관리자
  •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 관리자
  •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리자
  • 2023-11-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