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수요와 공급」 외 6편

  • 작성일 2023-03-17
  • 조회수 1,14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수요와 공급

조윤재


시작은 언제나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마당에서 장난감 병아리를 키운다. 진짜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 시대를 산다. 모이를 먹지 않아도 모이를 주고. 보호받을 필요 없어도 천적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러게 유감스럽게도.


마모. 머리가 녹슬어 버린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진짜 인간을 찍어 내는 공장에 일을 했었다. 얼마 전 그 공장은 문을 닫았고, 나는 나사를 사용하는 일을 찾을 수 없어 고민이었다. 나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불완전일 텐데. 만들어내는 사람이 열등하면 인생이 마모되어 버릴 텐데. 웃으며 말이다.


발명

이후에는 생산.


나는 불완전 인간으로 태어나 공장에 가고. 노동시민이 되었으며 부양할 가족이 있었지만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각설하고 모조리 망가져 버렸다. 언제부턴가 마모라는 말은 인간적인 언어가 되었고. 나는 녹슬어 가누어지지도 않는 내 왼팔을 내려다본다.


문은

제대로 열고 닫혀야만

문인데

이 손으로는 도저히

단절될 수밖에 없다.


몇 번 반복해도

최선은 식어 버린다.

궤도를 벗어나 이름조차 탈락해 버린

별의 모습처럼.


마지막 공장을 나선 나는

쓸 수 없게 된 왼팔을 움켜쥐며 굳어 버린다.

장난감 병아리가 울고 있었다.





언컬러풀



빈집에서

빈 우편함을 뒤져 본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망각이 체질이 되고

열린 문

닫힌 사람

꿈과 침실이 이어지고

거실에서 홀로 앉아

전파 끊긴 텔레비전을 보는

나를 보고

침묵과

소원이 이어지고


빈집은 환영을 만들어 낸다.

고장 난 시계를 보며

앞으로 살아 나가야 할

재능을 향해

어리석은 몸을 향해


만들어진 빛


태양을 유실한 곳에 내비치는

만들어진 흰 빛


사념인지

유령인지

꿈과 침실이 이어진 곳

그 중심에서


나는 영문 모를 아침을 먹었다

밖에 나가 우편함을 뒤져 보기도 한다


사람이 없으면 현실이 아닐 것이다

분명 아닐 텐데


혼자 남은 세계는 적절하게 늙어 가고 있었다


적절하게 색이 바래고

적절하게 썩어 가는

그 위에서

나는 무의미하게 표류 중이었다


가능한 빨리

꿈이라는 증거를 찾아야지

시간을 구분할 수 없게 된

땅 위에서


잠자리에 들면서 떠올리는 생각이다


원치 않아도 유지되는 빛이

눈에 밟혔다





유산을 뒤로하며




막을 밟고 일어서면

반쯤 파묻힌 건물이 즐비하다.


끝없는 별들의 나열 속에 사람들은 살았다. 사랑하라고 배웠으나 목은 메말랐다. 모래먼지가 허파에 스며들었다. 삭막함을 사진으로 보면 조금은 아름다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사라짐은 오늘이어서, 사람은 텅 비고 모래 덩어리만이 밑바닥을 걷는 것처럼.


높은 곳을 바라볼수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리들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가. 과거에 흩뿌려져 있던 언어의 씨앗들, 오아시스 없는 노란 풍경들. 빛바랜 두 신발로 으스러질 것 같은 바닥에 몸을 의탁할 때. 어제의 사람들의 노래는 유적처럼 피부에 닿았지.


선생님, 지금 우리가 짊어진 것이야말로 족쇄란 말입니다.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미라인 채로

정오 앞에 누워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사라짐이 즐비한 곳에 별들은 나열되어 있다. 고르게 분포된 마름의 온도. 때로는 틀림의 부산물. 여기에 우리가 살았었고. 여기에 우리가 꾸렸던 것은. 때로는 물질이라고 불렀던 친구였겠지. 지금은 손아귀 사이로 흘러내리는


오늘의 기후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모든 것이 꺼져 버렸다면, 모든 것이 뒤집혔다면, 나만이 의미 없이 앉아 있다면.


해가 다시 기울게 될 즈음,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가지런하게 놓았다.


다시 걷기 시작하면 어제로부터 회신이 왔다.

모든 게 메말라가는 중이라고.





ECHO




믿음을 만지고자 하는 날들을 보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인연을 보았다. 가느다란 빛이 그들 앞에 내려앉고 있다.


머잖아 세계는 잠깐의 암전을 맞았고


이후의 결심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기로 한다.


마른 과일을 씹었다. 머리를 비우고 걸으니 모든 것이 적당하다. 호흡 역시 그렇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기를 마셨다.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 채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곳은 문이 하나뿐이다. 다리가 좀 더 뻗는다. 어떤 독백도 주어지지 않은 채 걷는 기분. 어떤 마른 과일은 아무 맛도 전해지지 않는다. 평화로운 오후다.


나는 더 이상 오늘을 망치지 않는다. 조용한 지붕 아래 전신이 백색으로 물든 사각에 몸은 있다. 오늘은 더 이상 시끄럽지 않다. 내부에서 몸을 웅크린다. 반영구적인 무언으로 조용한 감정.


과거의 연인들을 기억한다.

혹은 변하지 않아 낡아 버린

촉감과

맛과

냄새를 기억한다.

믿음은 그 앞에서 녹아내린다.


내가 비추고 있던 것들

좀 더 화면과 멀어지고


이 공간에서 꿈을 꾸는 것은

동일한 추억만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빛에서 떨어져 나온 태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잠들어도

잠들지 않아도


문은 하나뿐이었다.





스윙



아무도 쓰지 않는 활주로

유령 비행기는 이륙하면서

빛의 일부가 되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투명한 글뭉치가 필요해서


눈이 따갑도록 하늘만 쳐다봤다.


전망대에서 재즈가 연주되면


그건 생명인지

그건 생령인지


포물선을 그리는 비행기 아래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재즈를 연주하며

바람을 맞고


도래하지 않는 색이 사람들을 스쳐 갔다.


수평선 위로 불완전이 악보가 되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비행기를 쫓아간다

종이로 변해 기울게 되는

결말일지라도


아직 계절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순서가 오지 않는다.


재즈는 전망대 아래로 추락한다.

그러는 편이 어울리는 리듬.


그러니 진정성은 탁 트인 천장 아래에서 골몰할 수밖에.


쫓아가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의 육체는


마지막에는 닫힌 활주로 위에 녹아들고


때마침 비행기가 이륙한다.

상승하는 리듬이 어울리겠다.


스윙,

붉어지는 하늘 아래 헛스윙.


투명함은 필요하지만

미래 앞에는 색이 가득 차서


무너져 가는 배경 위에는

유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각이


다음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논픽션




잘린 목은 달빛을 그리워했다. 휴양지로 유명한 강가에서 깃털만큼 하찮은 모습으로 서성였다.


건너편에서

목 있는 사람과

목 있는 사람이

입을 맞춘다.


잘린 목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구겨진다. 잘린 목은 아직 핏기가 돌 정도로 생생하게 움직였지만, 연결되지 못하면 죽었다고들 한다.


시간은 흘러

구름이 조금 개면

달빛이 한 줄 흘러내렸다.


목 있는 사람들은 말했다.

마치 연극 조명 같다고.


잘린 목에게는 마지막 한 마디가 필요했다. 그는 연기를 직업으로 삼던 사람이었다. 감독으로부터 동작이 어색하다며 지적을 받는 사람이었고, 평소에 진실과 농담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유서 깊은 부조화를 회고하면 끝이 없었다.


목 있는 사람들은 떠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주변에 걸친 숲도

강물도

달빛도

이 밤의 전부가 없던 일이 된다.


아무것도 없이

끔찍하구나.


백지상태로 변한


한 무더기의 결함이

버려진 무대를 타고 날아간다.





샌드박스를 구성할 수 없음에 관한



1.


끝까지 실행했다. 내가 납득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벚꽃이 떨어지는 숫자만큼 지구를 만들었다.


2.


대학 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전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도서관 6층에서 사람이 뛰어내렸다고 한다.

같이 학식을 먹던

동기는 그게 너였냐고 묻는다.


나는 언어 대신

사라지는 것으로 대신 보여 줬다.


저런 녀석은 분화구에나 떨어져야.


3.


アオハル는

青春의 새로운 표현법이다.


그 단어가 박제된 플래카드가

내 방 벽에 걸려 있었다.


내가 한 짓은 아니다.


누가 한 짓인지도 생각하기 싫었다.


4.


텔레비전에서는

신이 지구를 빚고 있다.


신의 얼굴이 조부모와 같아서

불편하다.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니

유리컵이 테이블 밑으로 추락한다.


반투명한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컵 안에는 지구가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공간이

나의 현실이


박살 나는 소리 이후

조용해서 소름이 돋았다.


5.


구원은 소통되지 않는 방식으로 빛났다.


동기는 기독교를 믿었고

그곳에서 금기하는 것은 전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퀴어 퍼레이드에 연대한

기독교인은

배교자라 생각하고


천벌이 그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연 신은 무엇인지

어쩌면 신은 정치인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지


그와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6.


그래서 나는

신이 되고 싶었다.


귀신이라도 괜찮았다.


신이라면 지구를 구성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의심하면서

배신하면서


때로는 원망하면서

지구를 구성해도


모든 이들이 관념이라 생각할 테니.


오늘은 신이 되는 꿈을 꿀 생각이었다.


7.


그렇게 アオハル를

조물주가 되는 상상에 낭비하고


벚꽃이 전부 질 동안

만들어졌던 수많은 지구가


내 방에 굴러다니는

귀신같은 꿈을 꾸었었다.


도서관 6층에서 사람이 뛰어내렸고


그 사람이 정말 나였다면

어떻게 생각했겠냐고

동기에게 물었다.


농담을 연기하면서

웃으면서 물었다.

작가소개 / 조윤재

약력: 2020년 <시인동네>로 작품활동시작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 관리자
  • 2023-11-15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 관리자
  • 2023-11-15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리자
  • 2023-11-1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