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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연극에세이②]대학로에서 처음 만났던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

  • 작성일 2015-03-16
  • 조회수 1,711


[소소한 연극에세이②]



대학로에서 처음 만났던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

- 학창 시절의 순수한 에너지가 그리워지면, 나는 어김없이 소극장으로 간다-



정유정(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교사)






꼬스짜, 난 이제 알아요, 이해해요, - 우리가 무대에서 연기하건 글을 쓰건 상관없이-
우리한테 중요한 건 명예도 광채도 내가 꿈꿨던 것도 아니라, 인내할 줄 아는 거라는 걸.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알고 믿음을 갖는 거죠.
난 믿음이 있어요,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내 본분에 대해 생각하면, 삶도 두렵지 않아요.

- 안톤 체호프, 『갈매기』 중 니나 -


samter



2015년 2월 6일. 첫 담임을 맡았던 설렘과, 첫 수업의 떨림을 함께했던 촬영조명학과 3학년 학생들이 졸업을 했다. 2년 동안 매일같이 보던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그 허전함에 며칠을 아무 것도 못 하고 멍하니 보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하고 기억에 남지만, 89명의 아이들 중 현장에서 조명이나 음향과 관계된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 녀석들과 대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으로 택해서 내가 이미 걸어왔던 길의 언저리를 함께 걷게 될 이들은 특히 더 정이 가고, 오래도록 연락이 닿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리고 문득, 재수를 하며 주말마다 연극을 보려고 대학로로 향했던 순수하고, 열정 넘치던 나의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평일에는 공부를 하고, 주말이면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용돈을 받아서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로는 행정동의 명칭은 아니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5가 79-1번지 이화동 사거리에서 혜화동 132번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가로로 길이 1.55km, 너비 25~40m의 거리를 말한다. 1979년 샘터 사옥으로 지어진 건물 지하에 1984년 처음으로 민간극장인 샘터 파랑새극장이 들어서고, 바탕골소극장, 마로니에극장 등의 소극장들이 생겨나며 지금과 같은 ‘연극과 연극인들’의 대학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의 나에게 대학로는 다양한 장르의 연극을 눈앞에서 보고, 공부와 실기 준비를 위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아지트였다. 언젠가는 나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거의 매주 연극 한 편을 보고, 『별에서 온 그대』에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학림 다방’에서 열심히 공연을 본 느낌을 적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남들 앞에 잘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타인의 눈을 현혹시킬 만한 외모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배우를 직업으로 하겠다는 결심은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부모님께 처음으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실기 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미리 말씀을 드려야지 학원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아주 적극적으로 반대하시다가 마지못해서 그럼, 올 한 해만 도전해 보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하라며 지지해 주셨다. 수능점수는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고, 몇 년을 연극영화과에 가기 위해서 실기 준비를 한 친구들 사이에서 고작 한 달 반을 준비한 입시용 연기는 합격을 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는지 원서를 넣었던 학교 모두 나에게 불합격 통보를 했다.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도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에게 너는 아니라는 통보를 받으니 참으로 힘겨웠다. 부모님과 절대로 연극영화과는 진학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재수를 시작했다. (그래서 연기예술학과에 진학했다. 어찌 되었든 부모님과의 약속은 지킨 것이다. 지금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부모님이다. 자신이 가장 행복한 일을 하면, 주변은 자연스럽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꽤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앞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나 혼자만 전 정류장에 놓고 온 물건을 꼭 찾기 위해서 다시 뒤를 향해서 걸어갔다가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려서 그 다음 행선지로 가야만 한다는 압박감. 이런 두려움 속에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무대 위에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무대에 서 있을 줄도 모르고,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여배우 니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서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음에 너무 와 닿았기 때문일까. 그 시절, 대학로에서 본 작품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연극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다.


희곡으로 읽었을 때는 너무나 지루하고 비극적이었는데, 작가는 왜 이 작품에 ‘희극’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궁금했다. 삶을 애도하기에 늘 검은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마샤, 연극에 대한 꿈을 갖지만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여배우 니나, 니나에게 사랑받고 싶고,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인정받으려고 도전하지만 그 도전에 매번 실패하는 뜨레쁠레프. 배우인 어머니 아르까지나의 남자 친구인 극작가 뜨리고린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니나를 빼앗기고, 마지막까지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희곡을 썼다고 생각한 뜨레쁠레프는 결국 자살한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 했던 한 남자의 자살. 나의 잠재적인 재능을 누군가에게 꼭 인정받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나. 그래서 눈으로만 읽은 희곡 『갈매기』는 나에게 더욱더 처절한 비극으로 다가왔고, 안톤 체호프는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은 마음에 ‘희극’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놓았을 것이라고, 이 작품은 비극임에 틀림없다고 멋대로 규정지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어느 날. 극장에서 본 연극 『갈매기』는 틀림없는 코미디였다. 대사만 보면 삶을 너무나 무겁게 바라보고, 현실을 살아가는 데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늘 죽음을 생각하며 생이 아닌 죽음의 언저리에 더 가까이 있는 듯이 보였던 마샤의 대사는 다른 인물들 사이에 나오니 늘 생뚱맞은 말을 하는 캐릭터로 눈물이 아닌 웃음을 자아냈다. 엇갈린 사랑을 하고, 불륜에 빠져 있는 이들의 대화는 늘 진솔하지 않았다. 그 진솔함이 둘 사이의 관계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는 늘 본질의 주변만 언급한다. 그것은 때로는 말이 될 수 없어 음악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난해했던 대사는 행동과 함께 발화되니 구체적인 것이 되었고, 너무나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대사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입을 통해서 발화되는 순간! 그건, 결코 비극이라 볼 수 없는 코미디가 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연극을 보는 내내 생각났다. 체호프는 마샤를 연기한 자신의 약혼녀 끄니뻬르에게 “오랫동안 슬픔을 지니고 그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자주 생각에 빠져 있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기분이 좋을 때 휘파람을 분다는 것은 어쩜 인간의 표면만 바라본 사람들의 선입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장면 실습 공연으로 『갈매기』를 무대에 올렸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무대 위에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 쉽게 오지 않는다. 교수님이 각자에게 어울리는 배역을 골라 주셨는데 나는 마샤를 맡아서 연기했다. 삶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그녀. “새로운 걱정거리가 모든 과거를 사라지게 할 거예요. 어쨌든, 아시다시피, 변화를 주는 거죠.”라는 대사를 내 삶에 고민거리가 생길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순수한 열정이 그리울 땐 대학로 소극장에 들어가서 연극을 한 편 보고 온다. 누구에게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화의 공간이 필요하고, 나에겐 그곳이 바로 극장이다.


Ps. 이 글을 마감하는 오늘. 졸업한 아이들이 학교에 놀러 왔다. 공강 시간이 너무 긴데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어서 온 녀석. 연기를 전공하겠다고 입시 준비를 하다가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결심했지만 막연한 미래가 두렵기만 한 녀석. 대학 입학도 취업도 모두 관심 없고, 졸업식 이후 백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지만 내년에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녀석. 고3 시절 다수의 영상 공모전에 참가해서 상금을 두둑하게 챙기고, 류승완 감독처럼 충무로를 뒤흔들 고졸 출신 감독의 꿈을 품은 녀석. 아직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이 무지 낯설어서 도시에 나아가 처음 무대에 선 니나처럼 두려움에 떨겠지만, 그 무대 위에서 아르까지나처럼 즐길 수 있는 날이 너희에게도 올 거야. 그리고 너희의 미래를, 꿈을, 희망을, 언제나 응원한다.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 교사)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졸업.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 수료. 고양시 연극협회 소속으로 연극연출 활동하며,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촬영조명학과에서 연극영화 교사로 재직 중.




《글틴 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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