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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색깔없는 얼굴_제2회

  • 작성일 2014-06-16
  • 조회수 789

[중편 연재 소설]



색깔 없는 얼굴 (제2회)



이종산






은호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은호는 축구와 단 것을 좋아한다. 어울려 다니는 남자들하고 축구를 자주 한다. 축구를 하면 친구들과 고기를 먹으러 간다. 어떤 날은 집에 일이 있다고 슬쩍 빠져 케이크를 먹으러 간다. 은호는 맛있는 디저트를 파는 가게를 꿰고 있다.
여름휴가 때는 혼자 대만에 갔다고 한다. 얼음 위에 망고와 딸기를 탑처럼 쌓은 빙수를 먹고 왔다고 했다. 은호는 피자헛 매니저로 일하는데 여름휴가가 있다니 꽤 좋은 근무 환경이다. 쉴 수 있는 날을 3일 연속으로 붙여 쓰려고 애를 썼다고 은호가 말했다. 3일이면 휴가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라다. 은호는 좀 모자란 휴일들을 보내며 바쁘게 지낸다.
동네에서 먼 번화가의 케이크 가게로 들어가 혼자 단 것을 먹는 은호. 은호는 카페 유리벽 너머를 보며 마롱케이크나 딸기 롤 케이크, 귀여운 모양의 모찌 같은 것을 먹다가 접시가 비면 접시를 밀어 놓고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편지를 쓴다.
노트에서 뜯어낸 종이들을 세 번 접어 봉투에 넣고 봉투에는 요양병원 주소를 쓴다. 정혜는 일 년 넘게 은호의 편지를 받았고 은호에 대해 말하기 어렵지 않게 됐다. 키가 얼마나 되는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옷은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2년 넘게 사귄 첫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소개로 만난 여자와 잠깐 만났고 그 여자와 좋지 않게 끝난 후로는 특별히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어졌다는 그런 일들은 많이 알고 있다.
“언니는 은호를 믿어?”
정혜가 은호에 대해 얘기할 때 지현은 비웃거나 화를 냈다.
“은호가 하는 말들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야. 특히 나에 대한 마음이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은호가 자기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믿어. 우리가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믿어. 적어도 나는 그 애를 좋아해.”
와플창고 채팅창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정혜는 은호와 밤을 새워 얘기했다. 서로에 대해 묻고 답하고 시답지 않은 얘기부터 크게 받았던 상처까지 털어놓고 나자 참을 수 없이 가까워지고 싶었다. 아침에 은호가 전화를 했고 정혜는 아침밥이 들어올 때까지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2시간이 지나 있었고 폰은 뜨거워져 있었다.
정혜는 은호의 목소리를 처음 듣던 순간과, 은호의 편지가 처음 병실로 들어오고 그것을 뜯어서 단숨에 읽고 며칠 동안 다시 읽던 시간들을 잊지 않을 것이고 정말로 믿음이 깨져버리기 전까지는 믿을 것이다. 누군가가, 당장 지현이나 부모님이나 고모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청혼을 받아들였냐고 물으면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생각해놓은 대답을 할 기회는 아직 없었다. 지현에게 몇 번 전화가 왔지만 매번 때가 좋지 않았다. 자고 있거나 밥을 먹고 있을 때, 너무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한창 중요한 순간에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나중에. 나중에 받자.
정혜는 트렁크를 열어 부재중 전화가 밀린 폰을 넣었다. 트렁크도 노트북만 꺼내놓고 정리를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트렁크를 서랍처럼 쓰고 있었다. 읽을 책 몇 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병원에 기증해서 짐은 많지 않았다. 정혜는 옷 더미 속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커다란 종이봉투에는 은호에게 받은 선물들이 들어 있다. 짧은 편지들, 선물을 싸고 있던 포장지들, 사탕과 초콜릿, 작은 그림, 말린 꽃잎. 남에게는 자질구레한 쓰레기로 보일 것들이었다. 가장 먼저 받은 것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은호가 보낸 소포를 처음 받았을 때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그 느낌은 산책을 나갔던 어떤 날에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요양병원 뒤뜰에는 숲과 이어진 공원이 있었다. 어느 날 재활 치료실에서 정혜는 의사에게 혼자 산책을 나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정혜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 공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깨어난 뒤로 그렇게 혼자서 오래 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걸어가던 중에 해가 떴다. 커다란 해가 떠오르면서 하늘은 붉었다가 환해졌고 보라색 꽃들이 열렸다. 꽃들이 한 송이씩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정혜는 기쁨, 만족감, 깊은 감사함을 느꼈고 잠깐 걸음을 멈춰 서서 짧게 기도했다.
산책이 끝나고 길을 되돌아 나오면서 벅찬 느낌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병실로 들어갔을 때는 다른 감정들도 바싹 말랐다. 정혜는 산책 때 느꼈던 것 같은 황홀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아무런 감동 없이 두 다리로 걸어 다니게 됐다. 두통이 가끔씩 찾아왔고 어떤 단어는 끝내 생각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재활치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단지 밖으로 나가는 날을 미루기 위해 요양원에 머물렀다.
밤이 오지 않을 것처럼 긴 한낮에 정혜는 별 뜻 없이 와플창고에 들어갔다. 몇 년 만에 들어가 본 그 온라인 커뮤니티는 새 글 없이 썰렁했다. 운영자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혜는 최근에 올라온 글들을 읽었다. 최근이라고 해도 마지막 글은 세 달 전에 올라온 것이었고 글이 올라오는 간격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였다. 내용도 회원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거나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네요, 하는 식의 것들이었다.
아는 사람들의 이름도 보였다. 먼 데 있는 사람들. 정혜의 삶에서 지나간 사람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외롭거나 비겁한 사람들은 있었다. 정혜는 그때는 알지 못했던 쓸쓸함을 이제는 이해했고 옛날의 그 작고 엉망이었던 와플창고가 그리워졌다. 그건 금방 잊힐 감상이었고 사람들 하나하나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정혜는 와플창고에 다시 접속했고 그때 은호를 처음 만났다. 정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은호는 유일한 접속자였다.


그리고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병실에서 하는 마지막 통화야.”


정혜는 불안을 억누르며 말했다. 요양병원에서 나가기 전날 밤이었다. 은호는 조용했다. 정혜는 고백하고 싶어졌다.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더 괴로웠던 원망이 네 덕에 반 넘게 씻겨 졌다고, 네가 없었다면 병원에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라고.


정혜는 초라한 마음들을 말하지 않고 은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은호는 별 말 없이 내일 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매일 그랬듯이. 은호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화를 끊으며 내일 봐, 하고 인사한 후로 계속 그 말을 쓰게 됐다. 매일 보는 친근한 관계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은호를 볼 수 있을 날은 없겠지만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누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퇴원을 앞둬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 내일 보자는 은호의 인사가 안심을 주는 대신 불안하게 느껴졌다. 정혜는 밤새 은호를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마지막 통화를 헤아려보며 잠을 설쳤다.


퇴원하는 날 아침, 아마 6시가 조금 넘은 때였을 것이다. 은호에게 전화가 왔다. 은호와 주고받은 문자를 보고 있던 정혜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은호는 예전에 했던 약속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 약속은 은호가 처음 정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정혜가 꺼냈던 말이었다. 지금처럼 지내는 건 좋지만 직접 만나지는 않았으면 했다. 부은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지만 언젠가는 얼굴을 보고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는 것이 더 두려웠다. 지금을 그때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은호가 그 약속을 꺼내자 정혜는 긴장했다. 그 약속을 깨자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관계를 깨려는 것일까. 은호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하고 정혜는 카페에 앉아 은호를 기다리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 순간이 두려운지 기쁜지 알 수 없었다. 피하고 싶은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지금 이 정도가 좋아.” 또렷하게 생각이 정리됐을 때 은호의 말이 들렸다. 그 말은 바로 정혜가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은호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결혼해.” 은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은 그대로야?” 정혜가 물었고 은호의 짧은 대답이 끝나자마자 정혜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대답이 정혜를 아파트에 밀어 넣었다. 정혜는 은호의 선물들이 담긴 종이봉투를 트렁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은 정혜의 손가락에 있었다. 정혜를 아파트로 데려다준 팔다리가 긴 그 남자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정혜에게 전해준 반지였다.


종이봉투와 옷더미가 섞인 트렁크 안에서 전화가 진동했다. 이번에도 지현이었다. 정혜는 트렁크를 닫았다.




2월 첫날 서울의 서쪽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머리는 둔기에 맞아 거의 으스러져 있었고 발등에 나비 그림이 남겨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혼자 살던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가족은 없었고 지방에 떨어져 사는 애인이 있었다. 경찰의 요청에 따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남자는 매우 피로해 보였다. 그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여자가 살해당하기 전날 오후 1시경에 시험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남자는 그날 날짜가 찍힌 KTX 부산행 표를 버렸지만 예매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의 동기들과 교수가 남자가 며칠 동안 학교 안에만 머물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남자가 낸 시험지도 있었다. 풀려난 남자는 경찰서에서 나온 후 휴대폰을 끊고 잠적했다. 남자의 정액이 남아 있던 여자의 시신은 냉동 보관됐다.


보름 후 2월 15일, 한 여자가 더 죽었다. 보름 전에 죽은 여자와 같이 머리에 둔기를 맞은 흔적이 있었고 발등에 나비 그림이 있었다. 한 달 후 3월 15일에 비슷한 수법으로 살해된 피해자가 세 명으로 늘었다. 세 번의 살인은 같은 구역에서 벌어졌다. 그 구역 안에는 다섯 개 동이 있었고 아치를 경계로 동·서가 나뉘어 졌다. 서쪽 끝에는 조선족들이 모여 살았다. 치안이 그리 좋은 동네는 아니지만 집세가 수원 외곽 수준이어서 조선족이 아니라도 사는 사람은 많았다.
첫 번째 살인은 아치 안쪽인 남서쪽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는 북서로 아치 인근이었다. 세 번째는 북동쪽에서 일어났는데 두 번째 살인사건이 난 위치와 같은 위도에 있었고 첫 번째 살인이 있던 위치와는 대각선으로 맞닿아 있었다.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중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다음 살인이 날 장소를 맞추는 놀이가 유행했다. 지도에 먹지를 대고 서울 지역을 베낀 다음 사건이 벌어진 위치 세 곳에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며 다음 사건이 일어날 위치를 추리한다.
삼각형으로 끝날 거라는 답을 내는 애는 없었다. 여자애들은 지도에 다이아몬드나 별을 그렸다. 동남쪽에 점을 찍는 애들도 많았다. 첫 번째 살인이 난 곳과 위도가 같고 세 번째 사건 위치와 경도가 같다. 선을 그으면 첫 번째 살인이 난 곳과 가로로 일직선이 그어지고 세 번째 살인이 난 곳과는 세로로 일직선이 그어지며 두 번째 살인이 난 곳과는 대각선으로 맞닿는 점이다.
동남쪽을 확대한 지도를 가지고 정확한 점의 위치를 찾아 샅샅이 뒤지는 애들도 있었다. 지겨운 수업 시간을 그만큼 빨리 보낼 수 있는 놀이가 없었다. 공책 위에 놓고 하면 잘 들키지도 않았다.
연쇄 살인 사건을 보도한 언론마다 언급한 위도와 경도가 차이가 나서 아무도 정확한 점은 말할 수 없었다. 삶이 지겨운 어떤 남자애가 일주일 동안 선을 긋다가 처음으로 점을 찍었다. 그 점은 행운 아파트에 찍혔다.




3월 21일. 아파트에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났다. 저녁에는 은호에게 전화가 온다. 보통 10분 정도 얘기를 하고 끊는데 병원에 있을 때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서로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하는데 은호가 듣는 쪽일 때가 많았다.
새벽에는 윗집에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혜는 윗집 문에 포스트잇이라도 붙일까 했지만 매번 생각으로 끝났다. 날이 밝으면 윗집은 조용해졌고 그럼 정혜는 간밤의 짜증을 잊었다.
아침에는 시리얼을 먹었다. 시리얼을 먹고 나면 노트북으로 미드를 봤는데 정혜의 취향은 화면이 피로 붉어지는 쪽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 정혜는 CSI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제 그건 옛날 얘기지만. 나체도 좋았다. 정혜는 HBO를 사랑했다.


아파트의 낮은 병원의 낮보다 길었다. 정혜는 아파트 침실에서 덱스터와 한니발을 섭렵했다. 등이 배기면 밖으로 나갔다. 돌아다니면서 걸을 만한 공원을 하나 찾았고 오래되어 보이는 도서관에서 회원 카드도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었다.
정혜는 매일 저녁을 그곳에서 먹었다. 그곳 테이블은 고기 국물에서 나온 기름으로 끈끈했다. 쌀국수와 함께 나오는 접시에는 신선한 숙주가 수북했고 라임 한 조각이 같이 나왔다. 그곳에서 정혜는 같은 사람을 세 번 봤다. 지팡이를 의자에 기대 세워두고 국수를 먹는 나이 든 남자였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키가 작았는데 그 정도로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베트남 음식점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종업원을 아주 정중하게 대해서 눈에 띄었다.
세 번째 봤을 때는 우연히 같이 돌아가게 됐다. 그때 그 나이 든 남자는 레몬색 집업가디건에 분홍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남자 바로 뒤에 계산을 하고 나갔는데 가는 길이 같아서 뒤따라가는 것처럼 됐다. 미행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나온 후로 재밌는 일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몰래 그 남자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즐거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 남자는 행운 아파트로 들어갔다. 복도에 남자의 발소리와 지팡이 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박자. 정혜는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자가 8층을 눌렀다. 정혜는 남자의 산뜻한 가디건을 훔쳐봤다. 가슴에 라코스테 로고가 있었다.


말을 걸까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7층까지 올라가 문이 열렸다. 정혜는 집으로 들어가 천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그 박자의 소리가 들렸다. 지팡이 끝의 고무팁이 바닥에 닿는 소리일 것이다. 남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는 최고급품으로 보였다. 손잡이는 상아가 아니면 양뿔 같았다. 손잡이와 이어진 몸체는 나무였는데 독특하게 칠이 되어 있었다.
정혜는 방으로 가 침대에 앉아서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신경이 온통 위층으로 쏠려서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저녁 여덟 시쯤에 다른 때처럼 은호에게 전화가 왔다. 윗집 사람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까? 정혜는 통화를 하다가 궁금해져서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우리 결혼한 거 맞아?” “오늘도 혼자 있지!” 오 분 정도 통화를 했을 때 너무 바보 같이 떠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끊었다.
정혜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음식을 아무거나 하나 해서 위층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사를 온 인사 겸 소음에 대해 얘기를 할 겸해서 윗집 남자를 만날 생각이었다. 핑계가 아니라 그게 다였다. 다른 목적이 뭐가 있을까? 그 남자가 든 지팡이에 친밀감을 느껴서? 정혜는 그런 비싼 지팡이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저녁 9시 10분에 정혜는 계획대로 했다. 닭튀김이 든 그릇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정혜는 출출함을 느꼈다. 쌀국수를 먹은 건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남자도 때로 야참을 먹을까? 정혜는 야참으로 닭을 몇 조각 튀였고 혼자 먹기에는 많아서 이웃과 나눌 생각이었다. 혹시나 밤중에 튀김을 먹기가 부담스럽다고 한다면 다른 것도 있었다. 대추와 계피를 넣고 끓인 차였다.
정혜는 계피 냄새로 꽉 찬 집에서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굳이 다리를 혹사시킬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엘리베이터가 꺼려졌고 한 층을 다 올라가자 이상한 자신감이 솟았다. 정혜는 804호의 벨을 눌렀다.
벨소리에 문을 연 남자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그릇을 든 하얗고 퉁퉁한 젊은 여자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다가 음식을 나누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안하지만 다이어트 중이라서.”
미안한 투도 아니었고 정중한 투도 아니었다. 정혜는 남자의 말이 진심인지 헤아려 보다가 우선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계피차가 담긴 병을 그 사람에게 건네고 돌아섰다. 병에 쪽지를 붙여놔서 다행이었다. 소음에 대해 주의를 주려는 목적은 달성했다.


돌아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릇을 그대로 들고 돌아오자니 힘이 빠졌다. 부엌에 앉아 그릇을 덮었던 종이를 열고 튀김 조각을 집어 들어 막 한 입 먹으려는데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 고의였다. 망할 노인네! 정혜는 윗집 바닥이 무너져 남자가 식탁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실컷 두드려 봐. 내 귀가 먼저 떨어져 나가는지 당신 팔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지 보자고.
하지만 노인네는 생각보다 힘이 좋았고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정혜는 일어나서 의자를 거꾸로 들고 소리 나는 쪽 천장을 쳤다. 위에서 아래로 울리는 소리에는 리듬감이 있어 듣는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가 계속 되자 정혜는 침대로 뛰어들었다. 위에 사는 예의 없는 인간 때문이 아니라 속에서 치솟는 불같은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화가 날 때면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가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정혜는 이불 속으로 숨었다.


소리는 집요했다. 끊어졌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됐고 두 시간이 넘도록 멈췄다가 요란해지기를 반복했다. 정혜는 이불 속에서 시계를 노려보며 시간을 쟀다. 12:00. 자정에 정혜의 인내심이 멈췄다.
지팡이 연주라도 하는 걸까? 정혜는 이불 속에서 노인을 퇴치할 방법들을 떠올렸다. 방화나 고문 같은 비이성적인 일들을 치우고 나면 별로 좋은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게 낡은 아파트에는 이럴 때 연락할 경비도 없었다. 경찰은 어떨까?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 신고를 해야 할까. 층간 소음 같은 사소한 문제로 경찰이 출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출동을 해도 주의를 한 번 주고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두 시간 넘게 노인의 지팡이 연주를 들어본 바로는 그 인간은 절대 경찰의 주의 정도로 잠잠해질 사람이 아니었다.


새벽 한 시 반에, 거의 한 시간째 멈췄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고의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윗집 사람은 그냥 자기 집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인 3종 경기 훈련 같은 것.
그 훈련을 마치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고가 필요하다. 뉴스가 하나 떠올랐다. 요즘 떠들썩한 살인 사건이었다. 아파트가 있는 동네도 연쇄 살인이 벌어진 구역 안에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는 부녀회가 붙인 주의문도 있었다.
윗집에서는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둔탁하고 소름 끼치는 알 수 없는 소리. 혼자 살고 옷을 깔끔하게 입으며 주로 밤에 움직이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정혜는 할 말을 정리한 뒤 112를 눌렀다. 막상 전화를 하자 차분하게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게 더 신고 내용에 신뢰를 줄 것도 같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두려움 때문인 것처럼 들렸으면 했다. 경찰이 주소를 되물었다. “맞아요. 행운 아파트. 여긴 3동 704호이고 소리가 나는 위층은 804호예요.”
경찰이 바로 갈 것이라고 했다. 정혜는 이불 속에서 경찰을 기다렸다. 소리는 언젠가부터 들리지 않았다. 천장 너머에서 윗집 남자가 아래를 향해 귀를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혜는 숨을 죽였다.




작가소개 / 이종산(소설가)

1988년생. 중장편 『코끼리는 안녕』(문학동네 대학소설상, 2012년 출간).



《글틴 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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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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