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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색깔 없는 얼굴_제1회

  • 작성일 2014-05-15
  • 조회수 723

[중편 연재 소설]



색깔 없는 얼굴 (제1회)



이종산






그날 밤 정혜는 와플창고에서 모래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 치여 쓰러졌다. 와플창고는 일종의 인터넷 커뮤니티였는데 어디나 그렇듯 시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였고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서 정혜는 어린 축에 속했고 모래도 그랬다.
와플창고는 커뮤니티 장이 소유한 폐업한 카페였다. 그 사람은 정기모임에 자주 나와 친해진 사람들에게 그 망한 공간을 개방했고 정혜는 삼사 개월 간 거의 매일 그곳에 갔다. 그곳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특히 같은 나이였던 모래와 친해졌는데 사고가 난 날 밤에는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너랑 잔 게 학교에 소문이 다 났어.”
정혜가 말하자 모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랑만 잔 건 아니잖아.”
모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정혜는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밖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고 안으로 향하지도 않는 그런 감정을 정혜는 느껴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일단 바깥으로 나갔다.


모래는 따라 나오지 않았고 다시 들어갈 수도 없어진 정혜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에는 부모님과 동생들과 침대가 있었다. 마지막 것 때문에 정혜는 집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정혜는 침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삼 년간 깨어나지 못했고 깨어난 뒤에는 두통과 실어, 다리 마비가 있었다. 엄마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어줬을 때 정혜는 살아난 것을 실감했다. 섹스 스캔들은 예전에 지나간 일이 되어 있었다. 두통이 좀 나아진 후에 요양원으로 옮겼고 재활치료는 들어갈 때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몇 년 됐어요?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정혜는 십 년은 된 것 같아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도 정혜 씨는 운이 좋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치료하면서 진 빚 때문에 다 나아서 요양원에서 나간다고 해도 걱정인 사람들이 많았다.
정혜의 부모님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소득이 꽤 많았고 부모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재산이 많은 고모가 두세 번 크게 도움을 줬기 때문에 정혜는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경제적인 부담이 없는 요양원 생활. 어떤 사람은 그것을 긴 휴가라고 불렀다.


사고가 났을 때 정혜는 열아홉이었고 병원에서 사 년, 요양원에서 육 년을 보냈다. 나는 운이 좋아. 요양원에서 나가는 날 아침 은호의 청혼을 받고 정혜는 생각했다. 운이 꽤 좋지.


-



1


바깥으로 나가는 날이다. 정혜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지현은 오늘 동우 입학식이 있어 못 온다고 했다. ‘이런 날 미안해. 내가 집까지 같이 가야 되는데.’ 미안하다니. 지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상했다. 사과는 항상 내가 하던 것이었는데. 이제 여기에서 나가면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일이 많아질까?
오래 있던 곳을 떠난다는 감상과 병원에서 나가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하는 막막함이 정혜를 침대에 눌러 앉혔다. 우선 문자에 답부터 하자. ‘미안하긴. 하나밖에 없는 조카 입학식도 못 챙기고 내가 미안하지’ 만나면 다리를 붙잡고 허리에 머리를 비비는 동우. 동우의 둥근 얼굴과 선한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 눈동자는 엄마 쪽 내력이다. 나도 지현이도 그런 눈을 가졌고 우리는 엄마를 닮았다.


지하철역으로 지현이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정혜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도움을 줬던 간호사들과 인사를 하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병원 출구로 나왔을 때는 두려워졌다.
병원 밖의 세상은 어두웠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전날 찾아본 일기예보에서는 다소 쌀쌀하지만 맑을 전망이라고 했다. 전망이라는 말에 담긴 불확실성이 새삼 다가왔다. 괜찮아. 내가 병원에서 못 나갈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있었어. 그 전망은 틀렸고 이제 나는 나갈 거야. 불확실성이 자신을 살렸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정혜는 출구 쪽에 있는 병원 신문을 하나 들었다.
신문지로 머리를 가리고 출구 계단을 내려오는데 출구 앞에서 누군가 정혜를 불렀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병원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대부분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이었다. 정혜는 경계하며 남자를 봤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보다 더 어릴지도 몰라. 정혜는 남자를 살펴봤다. 남자는 키에 비해 팔과 다리가 길었는데 거기에 잘생긴 얼굴을 붙여 놓으니 허술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과 어깨는 단단해 보였지만 팔과 다른 부분은 말라서 소매와 바짓단이 헐렁했다. 긴장이 풀어졌다.


남자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남자가 문을 열어줬고 정혜는 남자가 가져온 차를 타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


남자가 데려다 준 곳은 14층짜리 아파트였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세 명의 뚱보가 들어가면 한 명은 질식할 것처럼 좁았다. “704호입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말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플라스틱이었다. 버튼의 숫자들이 닳아서 희미했다. 정혜는 7을 눌렀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악의 없는 장난을 좋아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끔 꽤 짓궂은 장난을 칠 것 같은 얼굴.


하얀 봉투에 들어 있던 열쇠는 704호의 열쇠구멍에 딱 맞았다. 정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쪽에 잠금장치 두 개가 있었는데 위쪽 것은 묵직한 쇠에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었다. 정혜는 어렵게 두 개의 고리를 맞췄다. 연결된 고리는 단단히 매듭지어진 밧줄처럼 보였다. 정혜는 고리에 검지를 넣어 힘껏 당겼다. 고리는 끄덕도 없었고 손가락 둘째 마디에 빨간 자국이 났다.
정혜는 저린 손가락으로 신발을 잡아서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과 붙은 아담한 거실이 있었고 방은 하나였다. 베란다와 화장실도 있었다. 화장실 벽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정사각형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거울부터 바꿔야겠네. 거울, 샤워기, 변기, 거울보다 작은 창문, 그게 화장실에 있는 전부였다. 바닥 타일은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처음에 화장실을 봐서 다행이었다. 다른 방들도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화장실보다는 나았다. 스무 평정도 될까? 정혜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거실은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평수를 가늠해 봤다. 아직은 남의 집 같았다. 주인이 잠시 집을 비웠고 나는 빈 집을 지키고 있다.
정혜는 기다렸다. 올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연락이라도. 누가 부를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이상한 오기로 오래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정혜는 굳은 몸을 움직였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몽롱했다.
“언니, 어디야?”
지현이었다.
“집.”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구 집인데?”
분명 화를 참는 목소리였다. 쉽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성질도 엄마에게 물려받았다. 외할머니도 그랬다고 했다. 화를 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머리에서부터 불이 붙어서 온몸이 활활 탄다. 착한 눈을 가진 여자로 정혜나 지현을 알던 사람들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혜나 지현은 화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았다. 정혜보다 지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열기를 두려워한다.
둘 사이에서 불을 꺼주던 정우가 달아난 후로(아버지는 정우가 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여자들 때문이라고 믿었다.) 지현은 화를 참기만 했다. 그런 지현이 정혜는 불안했다. 그 안에 얼마나 큰 불씨가 들어 있을까.
“미안해. 친구 집에 왔어.”
“언니, 친구 없잖아.”
정혜는 친구의 이름을 헤아리다가 그만 뒀다. 남은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이 찾아오던 것은 요양원에 들어가고 처음 몇 개월뿐이었다.
“은호 씨 집에 왔어.”
“집이 있는 사람이었어? 굴에 살 줄 알았는데.”
“옆에 동우 있어?”
지현이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지을 때 정혜는 아이의 이름이 수수(水水)가 되길 바랐다. 지현에게는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조금은 진심이었다. 이름에 물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동우는 자주 지현의 화를 누그러지게 했다.
“우리 둘 다 꽁꽁 얼었어.”
“감기 걸리겠어. 얼른 집에 들어가. 얘기는 그 다음에.”
“그래, 나중에 얘기해.”
전화가 차갑게 끊겼다.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정혜는 한숨 돌리고 바닥에 누웠다. 중앙난방인지 바닥이 따뜻했다. 아니면 그 사람이 왔다 간 걸지도 몰라. 정혜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았다.


안이 어둑해져 있었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둠 속에 누워 있으니 허기가 졌다. 병원에서 먹은 아침밥이 마지막 끼니였다. 요양원 이름이 찍힌 플라스틱 식판을 안 봐도 돼서 얼마나 좋은지. 식판은 아이보리 색이었는데 밥을 담기에는 비위가 상하는 색깔이었다. 색이 누리끼리한데 얼마나 오래 쓴 건지 알게 뭐람.
음식은 정혜가 사고로 잃은 것들 중 하나였다. 집에는 가끔 엄마나 아빠의 손님들이 왔는데 손님이 오는 날이 정해지면 정혜는 손님들의 성격이나 입맛을 묻고 그에 맞춰서 무엇을 만들지를 고민했다. 행복한 고민으로 노트가 몇 페이지씩 채워졌다.
손님이 오는 날이 되면 정혜는 잠을 설치다가 새벽 세 시나 네 시에 일어나 음식을 만들 준비를 했다. 전날 밤에 대부분의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손댈 일은 아쉬울 만큼 적었다. 손님이 오는 시간이 점심이든 저녁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저녁식사라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드는 음식을 하면 되니까.
손님을 치르고 나면 정혜는 가벼운 몸살을 앓았다. 엄마는 정혜가 손님들을 위해 고된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정혜가 손님이 오는 날을 알기 전에 미리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주문한 음식들이 들어온 날이 한 번 있었다. 정혜는 전보다 더 심한 몸살이 났고 그 이후로 손님이 올 기미가 보이면 엄마가 통화할 때마다 초조하게 주변을 서성거렸다. 내가 할 거야, 엄마. 다른 사람은 부르지 마.
정혜는 손으로 집어 먹는 음식을 자주 했다. 그런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의 입가와 손은 기름이나 소스로 번들거린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식탁은 시끄러워진다. 정혜는 배를 채우며 목소리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꼈다. 그날의 음식에 따라 고른 술을 내놓으면 끝이었다. 만족스러운 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취한 사람들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소리와 냄새.
손이 근질거렸다. 내가 뭔가를 만들 수 있을까? 요리하는 법을 다 까먹었으면 어쩌지. 정혜는 부엌으로 갔다. 쓸 만한 것이 없었다. 냄비도 프라이팬도 젓가락 하나조차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과 포장을 뜯지 않은 미니 초코바 한 봉지가 있었다.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야. 아직 저녁시간이었다. 정혜는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정문까지는 금방이었다. 정문에는 관리실이 없었다. 아파트에는 세 개 동밖에 없어서 아파트라는 이름이 민망했다. 하지만 경비도 없는 거야?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근처에는 편의점이 두 군데 있었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거라고는 음식 같지도 않은 즉석 식품뿐이다. 낮에 차를 타고 들어오면서 마트를 봤다. 약간 경사진 길을 쭉 내려가면 작지 않은 마트가 있었다.
과일과 채소를 내놓고 팔고 안에는 정육 코너와 해산물 코너가 있는 그런 동네 마트일 것이다. 나온 김에 제대로 장을 보자. 정혜는 쌀쌀한 밤길을 걸어 내려갔다. 가는 길에는 카페 와 코인세탁소, 허름한 호프집이 있었다. 불이 켜진 곳은 그게 다였다. 마트는 기억보다 멀었다.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마트에 들어갔을 때 정혜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트는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넓었다. 급한 대로 중간 크기 냄비 하나와 조미료 몇 가지, 햇반을 바구니에 넣었고 고민하다가 닭도 한 마리 샀다. 다음 날을 생각해 햄 통조림과 참치 통조림, 달걀 한 줄도 샀는데 들고 갈 생각을 해서 거기까지 하고 멈췄다. 집에 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까지는 도저히 들고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짐을 들고 돌아오는 길은 더 멀었다. 정혜는 집에 들어와 장 본 것을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닭을 어떻게 해먹을까. 정혜는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닭튀김도 좋지. 그러다가 식용유를 빼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닭을 조리기에는 냄비가 시원찮고. 역시 삶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았다.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까. 마늘은 샀다. 백숙으로 하자. 정혜는 결정을 내리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정혜는 아직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정혜는 식탁을 짚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정혜는 다리를 내려다봤다. 놀라지 마. 정혜는 생각했다. 여러 번 겪었잖아. 별일 아니야.


-


닭이 좋은 냄새를 내며 익어갔다. 정혜는 식탁에 앉아 좀 전의 마비에 대해 생각했다. 발끝을 까닥거리기도 하고 다리를 폈다 접었다 하기도 했다. 무리를 해서 그럴 것이다. 의사에게 나간 후가 중요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나오자마자 그렇게 다리를 썼으니. 여러 모로 지치는 날이었다. 그럴 수 있다.
하루 만에 다리를 못 쓰게 돼서 병원에 들어갔다면 의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정혜를 담당했던 의사는 부드러워 보이는 얇은 입술을 가진 남자였다. 키가 작고 말랐는데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 같은 타입이었다. 항상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사가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잔소리를 할 때면 정혜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저 의사, 거기도 입술처럼 작고 부들부들할 거야.
다시는 그 잔소리를 듣지 않을 거야. 담배 때문도 아니고 술 때문도 아니고 닭을 삶아 먹으려다가 다리가 망가졌다면 어떤 잔소리를 들었을까 싶어 정혜는 혼자 웃었다. 웃음기가 날아가자 식욕이 식었다. 정혜는 외로웠다. 첫날밤에 부엌에 앉아 다리나 흔들면서 이게 무슨 꼴이야.
정혜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일어날 거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다리가 말을 들었다. 정혜는 천천히 냄비 앞으로 걸어가 뚜껑을 열어봤다. 닭은 충분히 익었다. 식탁에는 조미료 병들이 널려 있고 싱크대에는 닭이 들어 있던 포장 팩 같은 쓰레기들이 그대로 있었다.
치우고 싶지 않아. 어질러진 부엌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혜는 부엌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쉬고 내일 해. 그렇게 말해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챙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혜는 침대에 앉아 다리를 마사지하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자는 것도 중요했다. 충분히 자야 한다. 상태를 보러 오는 간호사도,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 소리도, 할머니들의 끙끙 앓는 소리도 없다. 아무 소리도 없어. 정혜는 그 사실에 깊은 위안을 받았다. 마음이 편안해져서 달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혼자야.
짝이 있는 혼자. 어떻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이불은 가볍고 푹신했다. 침대는 그 사람이 방에 갖춰놓은 유일한 것이다. 배게는 깨끗했다.
침대 시트는 하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고 시트와 톤을 맞춘 빛깔의 나비가 시트 한 가운데에 크게 들어가 있었다. 내가 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기억나진 않지만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불은 아무 무늬 없이 깨끗한 파랑이었다. 정혜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옆에 신랑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정혜는 오늘 아침 병원에서 눈을 뜨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돌이켜보려 했지만 그 사람이 사랑을 고백한 순간까지 가지 못하고 정장을 입은 팔 다리가 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데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꿈은 꾸지 않았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어딘가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찍는 소리였다. 윗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두 숨 쉬고 한 번. 그 정도의 박자. 신경이 곤두섰다. 이 아파트는 방음이 잘 안 되는 구나. 아파트가 낡은 정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겠지.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지 방음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정혜는 핸드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 반. 윗집 사람은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뭘 하고 있는 걸까.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멈출 것 같다가 다시 이어지는 소리. 정혜는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나와 불을 켰다. 침대 맞은편 벽에 바퀴벌레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가운데손가락만 했다. 음침한 검정. 정혜는 곧바로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가 머리까지 이불을 썼다. 저것이 날개가 달린 종은 아니길 바랐다. 얼마 후에 물소리가 들렸고 천장을 두드리던 소리는 끊어졌다.





작가소개 / 이종산(소설가)

1988년생. 중장편 『코끼리의 안녕』(문학동네 대학소설상, 2012년 출간).




《글틴 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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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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