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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음악 피디를 만나다

  • 작성일 2012-04-10
  • 조회수 1,683

 

김형민 음악 피디를 만나다

 

일시 : 2012. 2. 25(토)

장소 : 강남구 삼성동

참여 : 서기원, 원해솔, 이지형, 차경주

 

 

 

 

  이 글을 클릭한 글틴은 지금 무엇에 ‘도전’하고 있나요?

  오늘 만날 사람들, 오늘 할 일이 기대돼 지난밤 잠자리에서 즐겁게 일어났나요?

  이 순간 내일을 기다리고 있나요?

 

  이번 글틴 인터뷰 탐험대 주인공은 ATC미디어(음악 중심 콘텐츠 기업) 대표 김형민 피디입니다. 김피디와 비슷한 직업을 염두하고 있는 서기원, 원해솔, 이지형, 차경주 학생이 강남구 삼성동 KFC에서 늦겨울 주말 낮을 함께 보냈습니다.

  2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한꺼번에 듣고 많은 걸 깨달은 시간”(서기원)이 됐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내게 맞는 길일까?”(차경주) 고민이 생긴다면, 일단 경험해 보는 게 최선임을 알게 된 자리였고, 묵묵히 준비하고 도전하면 본인이 꿈꾸던 길에 닿을 수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며칠 전 미리 김피디에게 직업적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보내는(이지형) 등 참가자들의 사전 열의도 강했습니다.

  김피디가 글틴들을 만나기 전 미리 준비한 얘깃거리는 “매일 도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인터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글틴들도, 자신의 도전을 돌아보고 또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현장 글틴, 김형민 피디의 대화 현장을 공개합니다.

 

 

  “구하면 얻지 못할 게 없다. 젊은 사람들은 이 점을 잘 모르고 감이 열려 입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희망은 산과 같다. 저쪽에서는 기다리고, 단단히 마음먹고 떠난 사람들은 모두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글틴과 김형민 피디의 ‘도전하는 방법’에 대한 질의응답

 

  글틴(경주) : 전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 직업이나, 피디에 대해 알고 싶어서 오게 됐어요.

 

  글틴(기원) : 글틴에서 시를 쓰고 있고, 문학 담당 기자가 되고 싶어서 취재를 경험하려고 왔어요.

 

  글틴(지형) : 엔터테인먼트학과, 연예매니지먼트학과를 졸업하고 기획사로 직업을 알아보고 있어요. 구체적인 조언을 얻고 싶어요.

 

  ● 형민 : 전 김형민이라고 하구요. (웃음) 음악 관련해서 아직도 도전하고 있어요.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도전이란 걸 하고 있고, 그 얘기를 같이 해 보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여러분들 꿈과 제 경험이 공통될 만한 것들 위주로 얘기해 줄게요. 만나서 반가워요.

 

  글틴 :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 김형민 : 현재는 ATC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어요. 음악중심의 창조기업이거든요.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첫 번째가 음악을 만드는 일이라면 두 번째가 음악에 관련된 영상을 만드는 일, 음악에 관련된 서비스나 행사, 온라인 기획 홍보를 하고 있어요.

  요새는 주로 페이스북을 이용해서 뉴미디어적인 마케팅을 해요. 글로벌 마케팅이라고 해서 K-POP을 세계 한류 팬들에게 알리는 일이죠. 가수 공연 쪽으로는 계속 협업을 해야 되니까 관련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고요. 말씀 드린 것들이 다 달라 보여도 비슷하게 연관이 돼요. 융합, 컨버전스에요. 따로 떨어뜨릴 수 없어요.

  20대 중반 이후로 작곡가라는 꿈이 있었고, 작곡가 직업으로 한 80여 곡 발표를 했는데 히트한 곡이 없었어요. 히트하는 가수들과 작업은 많이 해 봤죠.

  세상에 나와 보니 어릴 적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었거든요. 제가 20대 때 아르바이트를 한 스무 번 넘게 했어요. 학비랑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아르바이트로 많이 해 봤어요. 그러면서 지금 창업이란 걸 하게 된 거예요. 회사 직원이 10명 정도고요. 일단은 음악, 뉴미디어 쪽 한류 콘텐츠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어요.

 

  글틴 :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 김형민 : 간략히 말씀드리면 작년에는 신인가수들의 데뷔 프로모션들을 진행해 왔어요. 가수들이 많은데, 신인가수들을 알리려면 이슈가 필요하잖아요? 절 찾아오는 기업들, 음반사 이슈를 기획해요. 가령 포털 사이트에 그 가수 뉴스가 얼마나 노출될 수 있는가 고민하죠. 포털 사이트는 언론사가 아니기 때문에, 클릭률이 많이 올라갈 것을 예상해서 실어 주거든요. 거기에 맞게 기획을 해요. 주어진 자원이라고 하면, 가수들의 능력이라든가 외모 등 고객 특이사항을 고려해요. 뮤직비디오 진행하고, 음반 쪽으로는 걸그룹을 맡아 일했고, HOT 장우혁 씨 음반 기획을 했어요. 그리고 일본에 연수를 다녀 왔어요. 한국콘텐츠진흥원, 정부 지원을 받고. ‘K팝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 일본 관계자들 만나 공부하고 왔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새로 나오는 음악 서비스가 오픈 돼서(2012년 2월 22일 정식 오픈) 알리고 있는데요. ‘리슨미’라는 최초 SNS 음악 서비스예요. 뉴미디어 음악 서비스니깐, 음악에 대한 기획도 필요하고, 거기에 대한 언론 홍보도 진행해요. 가수와 계속 작업도 하고 있고요.

 

  글틴 : 어릴 때 생각했던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건가요?

 

  ● 김형민 : 사실 그 시절 정했던 거와는 굉장히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 음악을 많이 듣고 가사를 쓰고 글을 끄적거렸어요. 공부는 고2 끝날 때쯤 하고, 고1 초반엔 많이 안 했어요. 굉장히 혼란의 시기였거든요. 의지가 확고하지 못했고 열심히 놀았어요. 영어와 국어, 문학을 좋아했고 수학을 안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문과였는데 대학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어요. 입학 당시에 컴퓨터 공학과가 대세가 돼 있었어요. 저도 뭐할 지 모르고 부모님 기대도 있고 굉장히 집도 보수적이고…… 그래서 컴퓨터 공학과를 갔어요. 가보니 컴퓨터 공학이 어렵고 안 맞기도 했는데, 제가 선택한 거고, 제게 주어진 거니깐 감사하며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대학 때는 IT 기업, 음반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송국에서 직원으로 일을 했어요. 20대 중반 후로는 작곡가가 꿈이었고, 초반에는 음악 방송국 피디였어요. 스물세 살 때 엠넷에 들어가서, 일을 해봤어요. 방송 일이 몸에 맞기도 했고, 음악을 제일 첫 번째로 하고 싶긴 했지만 경로도 몰랐어요. 음악을 만들고 있었는데 음악으로 자리를 잡을 자신은 없었거든요. 음악 방송을 일로 하고, 취미로 음악을 해보겠단 맘이 있었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렇게 지냈어요.

 

  글틴(지형) : 현재의 음반 프로듀서가 되기까지 어떤 공부를 하셨어요?

 

  ● 김형민 : 제가 01학번으로 당시 컴퓨터 공학이 대세여서 갔어요. 학교 가서 미디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열심히 안 했어요. 스무 살 때 레코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거든요. 상아 레코드라는 곳에서 일했어요. 당시에는 유명하던 회사예요. 음악에 뜻이 불타 올랐어요. 원래는 고등학교 때 밴드도 하고 그랬거든요. 멋있어 보이려고 했죠. 보컬이었어요. 목소리 큰 놈이 보컬 했어요. 그러다 레코드 회사 가서 유명하셨던 분 작업실에 들어가 시다를 했어요. 보조라고 하죠. 그때 작업실이 경기도 광주였어요. 지금은 가기 편한데 그때는 어려워서 학교 오전 수업 몰아놓고 듣고, 오후에 거기 가서 음악을 배웠어요. 그때 했던 게 형들이 작업할 때 청소하고 계란 부쳐 갖다 주고 커피 주고 어깨 너머로 음악을 배운 거예요. 지금은 학원이 굉장히 많은데, 10년 전만 해도 별로 없었어요. 음악을 ‘아! 이렇게 하는구나’ 보고 나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신문배달도 하고요.

  레코드 회사여서 사람들을 알게 되고 연습곡들을 백 여 곡 만들어 보고 그랬죠. 그런데 굉장히 좌절했어요. 내가 들어도 좋지 않았어요.

  스물셋에는 방송 송출직을 했어요. 음악은 취미였고 음악피디를 하고 싶어서 엠넷을 겪어봤죠. 들어가서 테이프 정리하고 방송 기술직으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 음악을 해야 되고 학교도 다녀야 하니까 국내 벤처기업 인터넷 방송 뜰 때라서 그쪽으로 가서 일을 했어요. 아침부터 저녁 일하고 저녁에 야간 수업을 듣고 밤에 음악 작업을 했죠. 원래 잠이 없어서 4~5 시간 자고 그랬어요. 그러다 스물여섯 좀 지나서 기회가 왔어요 쥬얼리 ‘원모어타임’ 앨범에 참여했거든요. 그 앨범이 워낙 잘 돼서 타이틀곡을 만들진 않았지만 ‘이제 됐구나. 나도 유명해지는구나’ 생각했어요. 그 때 신사동 호랭이 씨도 같이 그 앨범으로 데뷔했어요. 지금 저는 전문 작곡가 일을 안 하는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성공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한편으론 능력이 부족하다고 좌절도 했어요. ‘브라운아이드걸스’라든가 데뷔했던 그룹들에게 데모 만들어서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됐어요. 1년 동안 혼자 수십 곡들을 만들어서 들려 줬는데 다 안 됐어요. 그래서 좌절하고 ‘난 음악이 안 되나?’ 그러면서 음악 프로듀서가 되려고 조그만 회사에 졸업하고 들어갔어요.

  입사하고 한 일년 동안 저예산 음원들, 디지털 싱글을 만들다가 제가 기획했던 게 아이폰녀(아이폰을 이용해 비욘세, 레이디가가의 노래를 불러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끈 여성, 외국에서는 애플녀, 우리나라에서는 아이폰녀로 알려짐. 현재 가수로 활동 중) 기억이 나실 지 모르겠는데, 아이폰 처음 나왔을 때 저희 회사 연습생인 가수(김여희)가 한달 내내 검색어 1위를 했어요. 남들 안 하는 기획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당시 주목을 받았고 CNN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그때 이후로 잘 돼서 창업을 해서 음악을 하고 있고, 뉴미디어 관련 음악 기획 의뢰를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은 콘텐츠 기업이긴 한데 제작, 홍보뿐 아니라 총괄적인 진행을 다 하죠. 음악시장이 현재 굉장히 어렵거든요. 저희 회사 포인트는 사람들의 관심 분야를 콘텐츠와 융합하는 거예요.

 

  글틴 : 회사 만들 때 도와준 사람이나 창업을 해야겠다 결정한 순간이 있나요?

 

  ● 김형민 :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창업할 때 힘든 거는 누구나 다 힘들죠. 가지고 있던 거 처분하고 용기낼 수 있었던 게 결국엔 사람이었거든요. 저희 회사 핵심 멤버가 셋이었는데, 저희가 통으로 나왔어요. 우리 셋이라면 할 수 있겠다 하는 끈끈한 믿음이 있었어요. 어떻게 일을 따와야 할 지도 모르고 돈도 없었는데 일단 사람을 믿었어요. 동지가 없으면 험난한 세상에 살아가기가 어려워요.

 

  글틴 :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예요?

 

  ● 김형민 : 가장 힘들 때는…… 항상 ‘지금’이 가장 힘들어요. 돈 얘기를 하자면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하니깐 월 몇 천씩 내야 된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빡빡하잖아요. 그런데 간단해요. 내가 가지지 않고 잘 벌어서 나눠주고 나는 이걸 키운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거든요. 10대 때는 그때가 가장 힘들다 싶었고, 20대 초반엔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싶어서 힘들었어요. 20대 후반에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잘 하는 게 아닌 거 같아서 힘들었어요. 그런데 서른이 넘고 나서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어요. 많이는 아니지만 정부 지원금도 받았었어요. 이제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 운용 그런 것보다 음악 콘텐츠 기업, 영상 콘텐츠 기업으로 살아남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열심히 할 수 있지만 다음 비전을 찾는 게 힘이 들어요. 좁게 봐서는 회사 열 명이지만 넓게 보면 다른 회사들이 연관돼있고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글틴 : 인생을 통틀어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사람은 누구예요?

 

  ● 김형민 :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몇 명을 꼽을 수 있을 텐데 10대 때는 팝 가수들이고 이십 대 초반에는 뮤비 감독이고 이십 대 중반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어요. 이십 대 후반에는 아예 음악계 뛰어들었다 보니까 일을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어요. 동종업계에 해당되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지금 현재는 일단 아버지예요. 돌아가신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어요. 20대 계속 밖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에 대한 미안함이 있죠. 힘들기도 하고요. 정확히 답을 못 드린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리면 특별히 사람 영향은 아닌 것 같고 시점이 중요해요. 이십 대에 일본 자전거 여행을 갔어요. 쫙 달릴 수 있는 일본 국도를 자전거 타고 갔다 살아 돌아오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잘 사는 친구들 유럽 여행갈 때 자전거를 들고 배를 타고 일본에 다녀왔거든요.

 

  글틴 : ‘믿는 대로 흐른다’는 좌우명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 김형민 : 음악을 만들면서 주얼리 음반에 참여하고는 바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 했잖아요. 잘 안 되고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그때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니까 대학 전산센터에서 낮에 일을 하고 밤에 음악을 만들 때였어요. 아르바이트만 스무 개 넘게 했어요. 종합적으로 갖가지 직업을 하면서 밤에 음악을 만들었는데 음악에 지쳐갈 때였어요. 나 음악을 못하나 보다 하고 있었죠. 부끄러운 얘긴데 음악을 만드는 재미가 없어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TV를 틀었는데, 모 신인 가수의 데뷔 무대를 봤어요. 그 순간 저도 남자니까 TV 속 여자 가수가 굉장히 좋았는데 노래가 너무 안 좋은 거예요.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 같다고 확 꽂혔어요. 가수가 누군지 좀 있다 얘기해 줄게요. 그 전엔 바로 음악을 때려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가수가 너무 내 이상형인 거예요. 빨리 성공하면 저 사람이랑 만날 거 같아요. 음악을 주려고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친구들이 “야. 너 요즘 뭐하냐?’ 그러면 “곡 주고 싶어서” 그러면서 곡 작업만 했어요. 미친 듯이 몰두했죠.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하고 작업을 했어요. 사람들이 ‘쟤 이상하다’고 ‘외모와 안 어울리게 이상하게 귀여운 노래 만든다’고 그랬어요.

  그 그룹이 카라였어요. 제가 TV로 본 게 카라 데뷔할 때였거든요. 친구들한테 ‘올해 가기 전에 꼭 곡 팔 거야’라고 하면서, 최대한 사람들한테 DSP(카라 소속사) 아는 사람 없냐고 물었죠.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그 해 12월 29일에 전화가 왔어요. 카라를 사람들이 잘 모를 때였어요. DSP에서 작가님과 작업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때 엄청 희열감을 느꼈어요. 힘든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자신감을 얻었어요. 물론 지금은 그때 멤버가 바뀌면서 기획했던 게 날라갔지만요. 그게 갑자기 기억이 나요. 카라 멤버 한 명 좌우명이 ‘믿는 대로 흐른다’였어요. 나도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거고요. DSP에서 전화가 왔잖아요? 좌우명으로 삼았어요. 그리고 그 좌우명 따라서, 음악 창조 기업으로 온 거죠.

  이제는 흐르는 대로 믿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는데요. 절 보는 사람들이 가끔 되게 빨리 자리잡은 거 같다고 그래요. 어깨의 짐이 느껴지겠다 그러죠. 내가 총대를 메고 앞으로 가고 팀원들 따라오고 있는데, 세상이 믿는 대로 흐르지 않는 일들이 많잖아요? 내가 믿고 있는 게 힘들어지는 거예요. 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게 맞다 믿어야 되는 건지 고민은 하고 있어요. 어쨌든 원래 좌우명은 아까 말한 아이돌 그룹과 에피소드가 있었고요. 이 얘기는 글틴에서 처음 하는 거예요. TV 속 가수 때문에 포기하려던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거죠.

 

  글틴 : 앨범 기획하실 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 김형민 :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게 1번입니다. 아까 살짝 얘기했는데 유튜브 녀 조회수가 천만이에요. 일본에 진출했어요. 지금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 당시에는 아이폰이 전세계 대세가 될 때여서 기획과 맞물려서 인기를 얻었어요.

 

  글틴(경주) : 전 피디가 되는 게 꿈인데요. 나중에 다큐멘터리로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싶은데, 처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그런 걸 바로 못 만들잖아요? 나이 서른인 제가 존경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 분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가던 길을 포기했어요. 저는 그 선배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고민이에요. 김형민 피디님은 십 년 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 생각했어요?

 

  ● 김형민 : 먼저 마지막 질문 답변을 드리면 이 모습일 거라고는 정말 0.1%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10년 전에는 혼란의 시기였거든요. 그리고 저도 경주 씨 같은 상황을 겪었어요. 현실과 타협해 오던 부분들이 있죠. 제가 어릴 적에 왜 음악방송 피디가 되고 싶었는가 하면 음악으로 자리를 잡을 자신이 없었거든요. 단순히 음악 방송 일을 하고 싶단 마음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만 할 때였어요. 하고 싶으면 방송피디가 어떻게 하는지 봐야 될 거 아니에요? 공채 공비를 하려면 몇 년 투자를 해서 토익도 해야 되고 뭐도 해야 되는데 단순히 거기에 투자하기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눈으로 봐야겠다 싶어서 정말 돈을 조금 받고 휴학하고 방송국 들어가서 계약직 파견직으로 일했어요. 그때 느꼈던 게 피디들은 정말 찌들어 있더라고요. 1년 동안 깨달은 게 저걸 버티는 것보다 음악 꿈이 더 크다는 거였어요. 방송 쪽 취업은 부모님에게 나쁜 놈이 되기 싫어서였고 돈 벌어야 되고 누구는 어디 갔다는데 하는 나약한 마음이 있어서였어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가 봤더니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정말 컸어요. 방송 피디를 선택하진 않았는데 나중에 또다시 스물여섯 살 때 방송국 공채 붙었는데 안 갔어요.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잖아요? 가장 나약한 마음이 ‘아! 음악을 해야 되나?’ 그런 거였고, 자신 없어 일본으로 자전거 타고 여행간 거였어요.

 

  글틴 : 창업을 하신 뒤 포기하고 싶다거나 그런 순간이 있나요?

 

  ● 김형민 : 많이 있습니다. 내가 우려하는 게 창업을 하든 프리랜서를 하든 결정을 본인이 해야 돼요. 그 결정이 하루에 한 50가지가 되면 사소한 것도 일의 순서를 정해서 일을 배분해야 돼요. 직접 해야죠. 약속시간을 정하고, 어떤 일들을 골라 올지, 어떤 일에 투자할지, 이런 게 하루 50가지인데 지쳐요. 그럴 때 가장 힘들어요. 전문화되고 힘든 분야에서 창업을 하든 프리랜서를 하든 결정하는 게 굉장히 힘들 거예요. 아무도 정해주지 않아요. 초중고 때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고 어떻게 할지는 교육이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해야 하는데 책상에 앉아 있었어요. 10대 때 해 봤으면 좋을 걸 20대 때 해 봤어요.

  부모님도 보수적이세요. 십 년이 지나서 지금 응원해 주시는데 빨리 가정을 꾸리라는 압박이 들어오죠. 힘든 점은 그런 거예요. 불효자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엄마친구아들은 어딜 가고 뭘 했는데 그런 얘길 듣죠.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정말 하고 싶습니다” 그랬어요. 스물 후반부터는 돈을 조금씩 부모님한테 드리고 그랬어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죠. 20대 때 너무 많은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안정감이 내 나이 또래보다 늦게 왔고 너무 많이 고생을 했어요.

  지금도 음악 쪽이나 영상 쪽을 하려고 절 찾아오는 동생들한테 결론적으로 물어보는 게 있어요. “부모님이 되게 싫어하시는데 불효를 하면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물어요. 그걸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아버지 얘기 살짝 드렸지만 지금은 조금 해 드릴 수 있는데 돌아가셔서 할 수가 없네요. 그게 되게 후회가 돼요. 양립할 수 없는 걸 수도 있어요. 내 꿈과 아들로서 딸로서 해 드릴 수 있는 게 제 현실과 한국 현실 상 힘들어요. 말이라도 잘 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글틴(지형) : 저는 음악 사이트 아르바이트 해보고 실용 음악 학원 사무보조, 연예기획사일,공연일, OBS 조연출도 하면서 기획사 지원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 제가 더 배워야 하거나 경력을 쌓는다면 어떤 게 좋을까요?

 

  ● 김형민 : 저희 회사 이름이 ATC미디어인데요.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기획사잖아요? 연예인을 만드는 곳이에요. 제가 미디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연예인을 별로 안 좋아하고 연예인을 만들 기획이나 콘텐츠가 저한테는 별로 없어요. 연예인을 키울 생각이 없거든요. 연예 매니지먼트는 제가 하는 일과 조금 달라요. 연예인이라고 하면 쉽게 말해 가수, 모델, 연기자 그 쪽과 연결되고 저는 앨범 제작, 기획을 맡죠. ANR이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ANR 파트가 PD보다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이 분야 취직 관련해서는, 따로 이메일 주시면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큰 기획사로 들어가는 게 좋긴 한데 사람을 잘 안 뽑아요. 일반적인 작은 기획사 가면 앨범 기획 하기가 어렵고요. 왜냐하면 연예인 만들 생각을 하지 앨범 기획은 안 하거든요. 좋아하는 음악과 관련된 곳에 들어가시면 즐겁게 일할 수 있어요. 메일 주시면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인터뷰를 끝내며 

 

  ● 김형민 :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글을 쓰고 싶어하는 분, 방송 일을 하고 싶어하는 분, 이 쪽 분야를 지망하는 분들을 만나게 됐네요. 확실한 꿈이 있는 분들이라 되게 반갑고요. 제일 처음에 했던 얘기가 계속 도전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계속 도전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5:5(좋아하는 것: 참아야 하는 것)로 생각해야 돼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하는 일들이 있거든요. 돈이든 사람이든 뭘 하고 있을 때 이 비율 만족도가 5:5가 안 될 때가 너무나 많아요. 음악시장이 굉장히 안 좋아요. 9:1이면 일을 위해서 전 기꺼이 할 텐데, 그렇진 않아요.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윌 스미스 나오는 영화 ‘행복을 찾아서’를 재미있게 봤는데요. 항상 본인한테 여쭤봐야 돼요. 1을 하기 위해선 9도 해야 되거든요. 힘들어요. 즐겁다고 생각해서 시작해도 계속 도전해야 해요. 사람이 되게 간사하기 때문에 90%를 어쩔 수 없이 하고 10%는 아껴놓아요. 그랬을 때 사람이 또 굉장히 나약해서 이 10%도 미워질 때가 있어요. 도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인가? 지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건 뭐 음악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많이 그럴 거예요. 제가 영상 쪽으로 뮤직비디오 진행하고 단편 영화 출품도 하는데요. 일본 유바리 영화제 갔다가 친한 영상팀들한테 들어보면, 만들고 싶은 영상이 있지만 95%는 재미없는 광고나 다른 허술한 거를 억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요.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앞뒤가 전도되는 상항이 많이 생겨요. 그랬을 때 저는 아까 얘기한 ‘믿는 대로 흐른다’가 굉장히 힘이 됐어요. ‘믿는다’라는 단어에는 ‘이걸 믿어야지’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힘이 생겨요.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에 묻어서 나오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지금 ATC미디어 회사를 차렸는데 이건 무의식적으로 꿈꿔 왔던 거예요. 음악도 하고 영상도 하고 15년 전에 그런 생각을 계속 해왔던 거예요. 그저 잊고 살았던 거죠. 현실이 빡빡하니까요. 그래도 믿어왔던 거죠.

  ‘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만들고 있구나. 굉장히 행복해’

  그렇게 흘러온 거 같아요. 전 여행 하고 걷는 걸 좋아해요. 취미는 안 가본 길을 걷는 거예요. 그런 여행을 다닐 때 이런 저런 꿈을 꿨어요. 그 당시에는 망상이었어요. 지금은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절에 현실적으로 9:1로 참고 해왔던 여러 가지 일을 지금 합쳐서 문화콘텐츠 기업으로 일하고 있는 거예요.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말씀은 9:1일지라도 9가 날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정답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은 지금 하고 싶은 일 있으니까 뭘 해야 되는지 고민을 하지 마시고 뭘 하고 싶은지 고민을 하는 게 좋을 거 같고요.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지 마시고 나가서 보세요. 방법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 어떻게라도 비집고 들어가면 길이 있을 거예요.

  모르는 길 가면 돌아갈 때가 있어요. 막다른 길 나올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는 길을 가거나 운전해서 차를 타고 가면 바로 갈 수 있는데 모르는 길을 간 거잖아요. 꿈을 찾아가는 건 모르는 길을 가는 거거든요. 안 가보면 모르잖아요? 당연히 돌아가는 거예요. 일단 가보고 막다른 길을 열 번 찾아가면 그쯤 되면 쿨하게 아닌가 보다 돌아설 때가 있어요. 그렇게 돌아가다가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방법을 찾게 돼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도 저는 제가 가는 길이 이 끝이 막다른 길일 거라고 가끔 생각을 해요. 돌아설 수 있잖아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가진 모든 게 한 방에 날라갈 수 있다는 거죠. 내가 만든 경력, 이런 것들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우리 작가들한테 영상, 음악, 글 하라고 투자하고 있어요. 하고 싶어서 하지만 막다른 길을 보고 이게 아닌 거 같아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고 막다른 길이 나타날 거라고 해서 안 갈 수 없잖아요? 막다른 길인지 아닌지 구분을 해야죠. 뒤돌아가는 게 힘들긴 한데, 그런 도전이나 시행착오가 많아지면 마음은 아플지언정 ‘좋군. 그런가보군’하는 여유가 생겨요. 돌아설 수 있을 때가 좋기도 하고요. 또 시간이 지나면 이걸 하기 위해서 들인 90%가 아깝지 않아요. 세상 사는 게 이것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왔다갔다 하면서 자세한 예들을 알려드리지 못해서 안타깝네요. 계속적으로 도전을 해보세요. 포기도 용기라는 걸 기억하시고, 포기한 만큼 얻어진다는 것도 알게 될 거예요. 아무튼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고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요.

  나중에 또 만나요. 메일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제 모든 영혼과 스케줄은 구글에 중속돼 있는 사람이에요. (웃음)

 

 

p.s. 이번 글틴 인터뷰 탐방 김형민 피디는 짧은 만남에서도 강하게 도전 의지를 전한 분이었답니다.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글틴들이라도, 그 기분을 함께 느끼길 바랍니다. 더 궁금한 게 있는 분들, 미디어 관련 분야를 지망하는 이들은 메일을 주시면 김피디에게 전달하거나 제가 아는 선에서 답메일 발송할게요.

 

 

정리 : 변인숙 baram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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