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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연(공연기획자), 강병원(극작가), 후지모토 미호(문화마케터)를 만나다

  • 작성일 2011-06-01
  • 조회수 872

 

[네 꿈을 펼쳐라 시즌 2─글틴 인터뷰 탐험대]

 

박서연(공연기획자), 강병원(극작가), 그리고

후지모토 미호(문화마케터)를 만나다

 

 

 

 

인터뷰이 소개

 

박서연 : 공연 기획자, 문화 콘텐츠 회사 ‘라이브’ 대표. 알랭드 보통, 오쿠다 히데오, 이미나를 좋아함. ‘120세까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기’, ‘10년에 직업 10가지 직업 경험해보기’ 등이 꿈. 아일랜드 음악 영화 ‘원스’를 보고 감명을 받아 사랑·꿈·음악을 소재로 ‘내 새끼’(작품)를 가져보고자 독립해 현재 뜻이 맞는 친구 강병원·후지모토 미호와 회사를 내고 공동의 목표인 ‘창작하면서 더불어 행복하기’를 꿈꾸고 있다. 성시경·신승훈·김형석 등 콘서트를 기획, 홍보했다. 현재 ‘라이브’에서 ‘라이브’라는 시나리오를 완성, 공연을 준비 중이다.

 

강병원 :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악극 ‘모란이 꽃피는 시장’, 뮤지컬 ‘총각네 야채가게’, ‘위험한 커브’, 영화 ‘풀빵 엄마’, ‘회초리’ 등을 만들었다. 현재 ‘라이브’에서 채소 오케스트라, 매직컬, 연극 ‘임대아파트’ 등을 준비 중이다.

 

후지모토 미호 : CJ 엔터테인먼트 해외투자배급팀, 아시아 브릿지 컨텐츠 해외사업팀에서 팀장으로 일했다. 신승훈, 옥주현, 안전지대, 이문세 등 일본 공연 코디네이션으로 활동,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 대본 및 방송 등 여러 편 통·번역 진행, 현재 라이브의 콘텐츠 해외마케팅을 담당한다.

  


▶ 사진(위) 정면, 좌로부터 강병원 님,후지모토 미호 님, 박서연 님

▶ 사진(아래) 좌로부터 강병원, 후지모토 미호, 열아(글틴, 필명), 초극세사녀(글틴, 필명), 박서연

 

인터뷰 전문

 

‘네 꿈을 펼쳐라 시즌 2─글틴 인터뷰 탐험’(이하 ‘네꿈’) 이번 첫 인터뷰 미션 수행자는 ‘초극세사녀’(유가연)과 ‘열아’(이지원)입니다. 각기 대전과 춘천에 살고 있는 이들은, ‘네꿈’을 진행하고자 5월 21일 토요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났습니다.

열아홉 살 동갑내기이며 서로 취미와 꿈이 비슷한 바람에, 둘은 만나자마자 단번에 친해졌지요. 평소 책· 영화· 음악 등 각종 예술매체를 좋아하는 두 소녀는 작가·기획자·기자·CEO 등 여러 직업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딱 한 가지로 좁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것들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초극세사녀는 틈틈이 신문사의 학생 기자로 일했고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를 취합해왔어요. 열아 역시 지역 방송국에서 학생 아나운서로 일하며 SF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여자 노홍철’이라는 별명으로도 통했을 정도로, 매사 적극적이라고 합니다. 초극세사녀, 열아 둘 다 진지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까닭에 인터넷 검색으로 ‘글틴’도 알게 됐다고 하는데요. “고등학교 졸업 전에 너무 늦게 알게 돼 아쉽다”고 속상해 했습니다. 현재 초극세사녀는 국문학 관련 전공을 꿈꾸고 있고, 열아는 미디어아트나 경영 관련 등 다양한 전공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꿈 많고 부지런한 고3 글틴 학생들이 몸소 참가한 ‘네꿈2’ 인터뷰!

우연이었을까요? 이 둘은 자신들과 똑 닮은, 너무도 비슷한 성격의 인터뷰이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미래에 하고 싶은 것도, 현재 하고 있는 것도 셀 수 없이 많은, 대학로 문화계 종사자들이었죠. 박서연·후지모토 미호·강병원 씨가 그 주인공이에요. 셋은 대학로에서 ‘라이브’라는 회사를 함께 만들고 서로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열아와 초극세사녀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양 셋을 만나자마자 속 깊은 대화를 이끌어갔어요. 2시간 넘게 수다를 떨고 대학로에서 저녁식사도 함께 하면서 고3의 추억을 만들었답니다.

극작가·문화기획자·문화마케팅 일을 하려면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까요? 문학소녀 열아와 초극세사녀와 함께 그들의 꿈 얘기를 들어봅시다.

 

▶ 좌로부터 열아, 초극세사녀

유가연(초극세사녀) : 대전에 살고 있고, 문학과 음악을 다양하게 좋아하는 유가연이라고 합니다.

 

이지원(열아) : 멀티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이지원입니다. 미국에서 열한 살 때까지 자랐고, 지금은 춘천에 살아요. 계속 시골에 살아서 유명인을 만난 적은 없어요.

 

박서연 : 저도 부산에서 살았는데, 서울 올라오고 나서 직업인으로서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난 거죠. 유명인으로 만났다기보다는요. (웃음)

 

글틴(이지원, 유가연) : ‘라이브’ 회사는 세 분이 함께 일하잖아요. 원래 서로 알던 사이인 거예요?

 

박서연 : 제가 창작뮤지컬 ‘총각네 야채가게’ 공연할 때, 기획 일을 했어요. 그때 각색하고 연출하던 강병원 작가를 만났던 게 인연이 됐어요. 후지모토 미호는 신승훈씨 회사에서 일하다 이 분이 해외 사업팀장이라서 만났고요. 첫 번째 회사, 두 번째 회사 둘 다 회사에서 만난 거네요.

 

강병원 : 전 서울예대 극작과를 나왔어요. 이런 저런 일을 했는데, 사회 나와서 치이고 치이다가 ‘중심을 갖고 해야겠다’는 다짐에 지금 ‘라이브’인 콘텐츠 회사를 만들었어요. 좋은 사람들끼리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에는 ‘누가 만들어주거나, 만들어질 것이다. 투자를 해 줄 것이다’ 믿고 막연히 기다렸는데, 그렇게 일이 되기는 쉽지 않아요. 작은 거라도 하나씩 만들어가기 위해서 ‘라이브’라는 회사를 하게 됐어요.

 

박서연 : 대학로 계시는 분들은 함께 일할 때 정말 순수하시고 행복하게 일을 하는 게 좋더라고요. 사실 사회생활 하면 갑과 을이 존재하고 ‘아! 이건 아닌데…’ 하는 불합리한 일이 많이 발생하거든요. 횡포라고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을이 창작자라든가 개인 개인이 많아요. 그게 참 안타까웠는데, 배우나 연출가 분들 만나면서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먹는다’는 걸 느꼈어요. 음악이나 콘서트를 너무 좋아해서 일을 시작하게 됐던 거고, ‘같이 해서 행복하고 독립하게 된다면 이렇게 살아야지’ 꿈꾸던 지점들이 이 분들과 맞았던 거죠.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더불어서 행복해야지’라는 생각에 내 창작활동을 하려고 대학로에 왔어요.

 

후지모토 미호 : 저 같은 경우에는 중심에서 일을 하는 역할이 아니라, 주로 일본 업무를 맡고 있어요. 이 두 분은 ‘자기 것을 만들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만, 저는 조금 달라요. 한국에 남편이 있고 제 계획도 있고 다른 일도 같이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회사에서는 직원이잖아요. 시키는 것만 하면 되고 주인 의식을 갖기 힘든데, 여기서는 즐겁고 “작가님! 이 공연 빨리 일본 갖고 가요. 기획서 일본에 갖고 갈 거 없어요?” 그렇게 조르죠. 다른 회사에서는 원래 있던 콘텐츠에 내가 투입되고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건데,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내가 찾아서 하니까 즐거워요. 해외 업무의 실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요.

 

글틴(이지원, 유가연) : ‘라이브’ 회사의 진정한 목적은 꿈인데, 같은 꿈을 꾸셔서 행복할 것 같아요. 그 꿈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 꿈을 이뤄가는 과정 좀 알려주세요.

 

서연 : 중학교 때 콘서트 보고 우연히 임권택 감독님 ‘서편제’ 영화인들 관계된 자리에 간 적이 있어요. ‘내 세계는 지금 이것밖에 없는데, 더 넓은 세계가 있구나’ 느꼈죠. 그리고 공연을 하는 사람들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부터 여기저기 일하려고 알아봤는데, 부산에 있어서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다가 김형석 작곡가님이 새로 가수 성시경 씨를 투입하고 음반 사업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구인 광고를 어느 날 문득 새벽 2시에 본 거예요. 비품 구입· 사무보조로 일 하는 사람 뽑는다는 그랬는데, 읽고서는 그냥 바로 ‘올라가서 저 일을 하자’ 달려갔어요. 뭔가 계산을 한 게 아니라, 두근거림이 좋았던 거죠. ‘이 회사에서 꿈이 실현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바로 새벽 첫 차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거든요. 회사 직접 가서 이력서를 내밀었는데 사장님이 ‘너 참 당돌하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이력서 내고 서울역으로 돌아가는데, 전화가 왔어요.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라는 거예요. 뛸 듯이 기뻤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딪쳐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았거든요.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문득 내 새끼(자기 창작물)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때가 왔어요. ‘원스’ 아일랜드 영화를 볼 때였는데, 나같이 평범하고 아무 것도 없는 친구도 뭔가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열정을 품었지만 불안했던 날들을 계속 일기로 써놓고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하고 나눠도 재미있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내 또래 친구들이 위로나 희망을 꿈꿀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원스’ 영화 만들었던 사람들도 전문 프로듀서나 배우가 아니에요. 6mm 카메라로 찍어서 자기네들 다큐처럼 만든 거잖아요. ‘원스’처럼 음악, 꿈, 사랑을 주제로 나의 얘기를 써보자 막연히 생각했어요.

작곡가, 가수, 작가 등 자기 창작물을 가지는 분들과 일하면서 많이 보고 배우고 대화하면서 행복했죠. 그 분들이 만든 1차 콘텐츠를 가지고 저는 2차적으로 홍보마케팅을 주로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아, 나도 내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이미나 작가의 글을 보면서 느꼈는데요. 박학다식하다거나 판타스틱하진 않아도 글을 읽는 동안 소소한 일상들과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공감이 되고 위로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강병원 작가가 저랑 같이 OST를 만들고 작사도 하게 되면서, ‘네가 글을 써봐야지 자기 작품 만드는 희열이나 그 느낌을 안다’고 응원해줬어요. 나름 혼자만의 변명을 대면서 꿈만 꾸고 안 하던 일을, 40~50장 분량으로 대본화했어요. 생각한 걸 쭉 밀고 나가지 못하던 와중에 옆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쓰라는 응원을 받다 보니 쓰게 된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또 깨달았어요. 조만간 공연으로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 ‘라이브’ 만드는 게 현재 꿈이고 그걸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후지모토 미호 : 저는 꿈을 바라면서 여기까지 온 케이스는 아니에요.

어머니가 한국 분이라 한국에서 공부를 하게 됐어요.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니까 아르바이트로 KBS 2TV ‘무한지대’, ‘주주클럽’, ‘VJ특공대’ 등에서 알바를 했는데요. 일본 가서 촬영해오면, 편집할 때 번역 작가· 번역 감독을 맡았어요. 제가 엔터테인먼트(이하 엔터) 쪽에서 일한 첫 번째 일이에요. 그게 너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공부를 하면서 배울 수 있잖아요? 그때는 한국말을 잘 못 했으니까요. 고민은 했지만 ‘한 번 해봐라’ 지인이 권유해서 하게 됐어요. 그 일은 학교 공부를 하면서 알바로 가끔씩 하던 거였죠.

그런데 내 이름 ‘후지모토 미호’가 방송 크레딧에 나올 때 너무 좋아서 비디오에 녹화해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그랬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한국어를 몰라서, ‘후지모토 미호’를 못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로 영어로도 꼭 넣어달라고 그랬어요. 지금도 영화 볼 때라도 크레딧은 끝까지 다 봐요. 저렇게 많은 사람이 고생해서 만들었구나 공감하는 거죠.

저는 원래는 이쪽이 전공이 아니라, 의류학과를 나왔어요. 옷이나 꾸미는 건 다 좋아해요. 한복에 관심이 많아요. 일본에서는 일문과를 다녔고, 한국 와서는 입학하기 전에 한복 만들 학교를 찾아봤어요. ‘이 학과 들어가면 한복 만들 수 있느냐?’ 물어봤던 거죠. 한복 수업을 하는 곳이 있었어요. 한양대학교였어요. 그래서 지원했어요.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서 복식사 공부도 하고 만들어보기도 하고 상품 기획하고 그랬죠. 교양 과목으로 한국어 공부도 많이 하고, 의류 쪽이 꿈이라고 생각했으니깐 관련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대학교 재학 중에 기업 인턴으로 지원하게 됐는데, 1순위에 홈쇼핑을 썼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엔터 쪽으로 가게 됐어요.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해서 엔터 쪽에서 절 뽑은 거예요. 영화 해외 투자 배급팀이었어요. 영화도 잘 모르고, 연예인도 잘 모르고, 이름도 진짜 못 외웠어요. 거기서 고생 많이 했죠. 제가 대본을 읽고 시놉시스를 써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어 오타가 나잖아요. 그러면 많이 혼나고, 혼나서 고마운 게 ‘더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했죠. 그래서 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거예요.

원래는 의류업계에 가고 싶었는데, 엔터 관련 일들이 업이 돼버렸어요. 심지어 신승훈 씨도 몰랐어요. 신승훈 씨 기획사에서 교육사업이 있어서 거기 지원서를 내서 면접 보는데 저한테 ‘정말 몰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진짜 몰랐거든요. 제 친언니는 신승훈 씨를 알았는데 신승훈 씨 한국 활동 할 때 일본에 있었고 일본 활동할 때 한국 있었거든요. 제가 조용필 씨는 좋아해요. 거기서 또 얼떨결에 엔터 일을 하게 됐어요. 일본어를 하니깐 일을 맡긴 거죠.

그래도 계속 즐겁게 일했어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날 필요로 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대표님도 믿어주시고 출장도 데리고 다니고, 그런 게 좋았어요. 계속 엔터 일 하면서, 음반사업 팀에서 박서연 대표를 만나 여기로 오게 된 거죠.

다시 꿈 얘기로 돌아가면, 제가 하는 일들이 꿈을 꿔서 했던 일들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내 길이다 싶어요. 얼마 전에는 걸그룹 카라 사무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6월부터 카라 일도 맡게 돼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해서 내가 만족해서 하는 것도 중요하더라고요. 저는 외국인으로서 여기서 살잖아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자신감을 갖고 꾸준히 하려고 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찾아지더라고요. 여러분도 그런 일을 찾으면 좋겠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하고 싶던 일은 헤어랑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어요. 내 얼굴에 화장하고 친구 얼굴에도 막 그려주고 그랬어요. 커피숍에서 일하고 싶어서 커피숍에서 알바도 했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찾아다니며 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30대에서 또 다시 물어요. ‘내가 뭐 했지?’ 그러면 친구들이 ‘너는 오너를 할 수 있게 됐고, 너밖에 못하는 일을 하게 된 거야’ 얘기는 해주지만, 내 만족이 안 되면 계속해서 찾고 또 다른 것들을 하게 되잖아요.

 

서연 : 미호는 취미활동으로 꽃꽂이 하고 발레도 해요. 다 잘 해요. (웃음)

 




후지모토
미호 : 저는 서른이 되어도 하고 싶은 게 더 많아 지는 거예요. 그런데 체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가정이 생기니까 나만 하고 싶은 일을 내 멋대로 할 수가 없어요.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은 정말 많아요. 할 수 있으면 다 경험한다고 해도, 그래도 좋아하는 거 딱 하나를 결정 못할 거예요. 일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하다 보면 그 많던 일 중에서 점점 자신감이 붙는 일이 있어요. 열심히 할 수 있고, 자신도 만족하고, 남도 인정해주는 일이죠. 그 분야로 전문가가 되고 나머지로는 취미로 만족하는 나이가 돼요. 그래도 꿈은 꼭 꿔야 돼요. 자기랑 맞는지 안 맞는지 구별할 수 있으니까요.

 



강병원 : 전 예전에 단편 영화 찍고 연출을 했는데, 학교 다니면서 영화과 학생들하고 친해서 조감독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감독 일보다는 작가 일을 하는 게 더 재미있었어요. 감독은 사람들에게 치이고 그러는 게 컨트롤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나중에 내공이 쌓이면 감독도 하고 싶다 생각했죠. 그렇다고 글을 아주 잘 쓰는 건 아니지만 글 쓰는 일을 더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써요.

요즘 주력해서 쓰고 있는 게 대안학교 얘기하고 다문화 가족 얘기예요.

저는 사실 스물두 살 전까지 꿈이 없었어요. ‘꿈이 뭐니?’ 누가 물으면 별 생각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그랬죠. 고등학교 때 성적 맞춰서 4년제 대학을 갔는데 맞지도 않아서, 몰래 재수 삼수를 하고 있었어요. 신방과를 가려고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대학 소개 서적을 보다가. ‘서울예전 여기는 어떤 애들이 가는 걸까?’ 친구한테 말했는데 ‘너 같은 애들 못 가’ 그러는 거예요. ‘쳇! 너 내가 합격하면 어떡할래?’ 그랬죠. 그 때 보니 문창과는 120명 뽑고, 극작과 80명 뽑는 거예요. ‘문창과가 확률이 높겠네’ 친구가 또 그래요. 그래서 일부러 극작과를 넣었어요. 내기를 했거든요. 소원 들어주기, 내가 원하는 거 다 들어주라고! 그러다 덜컥 서울예전 극작과에 합격했어요.

제가 고향이 전라도 여수였는데 서울 남산에 있는 학교를 와보니 하루하루가 정말 축제 같은 거예요. 학교가 되게 조그마했어요. 동네 곳곳 주택가,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고 검도하고 기타치고 그러는 거예요.

도서관이 정말 작았는데 실용 음악과 학생이 바로 밖에서 연습하면 시끄럽다고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 그 학생이 가요제 가서 대상 받고, 그 친구가 장윤정이더라고요. 손예진·김하늘·한혜진 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젠 다들 유명해져 있더라고요.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감독도 되고 이것저것 하고 있는 거 보니까, 나도 둘러보니 내 부류에서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되게 힘들어요. 며칠 전에 영화가 각색을 해서 개봉을 했거든요. 보러 갔어요. 영화사가 바뀌고 바뀌고 그러다가 크레딧에 제 이름이 들어갈 지 어떨지 모르는 상태였는데, 정말 난도질을 당해서 이상한 영화가 됐어요. 카카오톡에 영화 홍보했던 글을 얼른 지웠어요.

휴먼다큐도 영화로 썼는데, 다 찍고 후반작업 다 끝나고서 주연배우가 여배우를 폭행해서 결국 영화개봉을 못한 적도 있어요. 버티고 잘 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자기 뜻대로 안 될 수 있더라고요. 그래도 참고 노력하면 하나씩 하나씩 돼가거든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해요.

예전 1~2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뭐 하자고 하면 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죠. 지금은 야채하고 과일로 된 악기들로 공연을 만들고 있어요. 채소오케스트라예요. 라인업도 거의 다 됐어요. 외국에서는 이미 의사나 변호사들이 채소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있어요. 저희는 우리나라 전래동요라든가 우리나라 리듬이 있는 공연을 만들 거예요. 공연에 호랑이, 사자가 나오고 당근피리 소리에 맞춰서 연주를 하고 그래요. 만파식적 얘기를 바탕으로 공연을 올릴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거의 십 년 이상 남들한테 많이 맞고 아직도 많이 맞아야 되는지, 되게 힘들어요. 마음도 아파요. 돈도 안 돼요. 하지만 이제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니깐 힘들어도 즐거워요.

 

글틴(이지원, 유가연) : 궁금했던 것들을 연결해서 한꺼번에 다 말씀 해주셨어요. 현실에 치이는 과정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루는 과정에서 벽을 느끼셨던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특별한 에피소드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서연 : 지금은 좀 초월한 거 같긴 한데, 글쎄요. 저는 최근 몇 년 동안은, 삼십 대 돼서는 여유를 가지고 편안해지긴 했어요.

처음 부산에서 올라올 때는 뜨거운 열정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돈도 없고 6개월 동안 라면만 먹고 그랬는데, 그래도 너무 즐거웠어요. 회사를 취직하게 됐잖아요.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하룻밤 지나 출근했는데, 부산에서 새벽에 올라왔다고 하면 부담이 될 거 같아서, 회사 근처에 산다고 했거든요. 그 다음 날 출근하라고 했는데 잘 데도 없고, 동대문에서 옷 사서, 신촌 여관방에서 잤어요. ‘내일부터 집에 못 간다’ 집에 전화했죠. 엄마가 너무 놀란 거예요. 아빠랑도 싸우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은 선생님이나 공무원처럼 안정된 직장을 갖길 바라는데, ‘넌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하냐’고 그러셨어요. 나중에 올라와서 직장 생활하면서 아버지가 많이 우셨다고 하셔서 마음이 아팠죠. 그 날 밤 여관방에서 자고, 출근해서 일하고, 다음 날에 또 잘 때가 없잖아요. 홍대에서 아는 언니가 자취하고 있어서 거기서 자고, 그런데 회사가면 즐거워서 12월 크리스마스 때도 회사에 출근했어요.

비품 구입하고 은행도 가고 사장님 재떨이 비우고, 내가 즐거우니까 다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이것저것 다 했어요. 처음에는 기획팀이 아니었는데, 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당돌하다’고 사장님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그때는 뭘 몰라서 많이 울었거든요. ‘여기서 나가면 절대 안 되겠다’ 해서 버텼어요. 더 일찍 나가서 일 열심히 하고 직원들 책상 다 닦고 그랬죠.

그땐 김형석 작곡가 만나니 너무 좋아서 가까이에도 못 갔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노래들 누가 작곡했나 보면 작곡가 이름이 다 ‘김형석’이었거든요. 성시경 씨도 좋았어요. 윗선에서 직원들 텃새도 많았고 시골에서 올라와서 뭘 모르고 그러니까 견디다가 우는 날도 많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니 결국 기획팀으로 보내줬어요. 기획팀 발령받은 날 좋아서 막 뛰어다니고 그랬어요. 성시경 리메이크 앨범 제작에 참여했는데, 좋아하는 노래 안건 냈더니 된 거예요. 그때 타이틀곡이 ‘제주도의 푸른 밤’이었고, 제가 좋아했던 노래 ‘여우야’가 후속곡이었어요. 그럴 때는 작은 건데 심하게 감동했고, 많은 사람들이 제가 한 일을 공감해줘서 좋았어요.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성시경 공연이 열린 적이 있는데, 그때 공연에 대해서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인터파크 티켓 올리는 것도 그렇고 계약서 쓰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하나도 몰랐어요. 처음으로 이것저것 다 했던 거예요. 그래도 그때 일하면서 썼던 구성이나 아이디어가 공연에 반영돼서 좋았어요. 실수도 했죠. 공연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보니, 음향 조명이 들어와야 하는데 놓친 것도 있었고, 코요테 왔는데 마이크가 없어서 진땀 흘리고 그랬어요. 음향 감독, 조명 감독 없이 직원이 다 했던 거예요. 공연 퀄리티는 좋았어요. 성시경 씨 처음으로 반짝이 옷 입고 트로트 노래도 부르고 무대 올랐던 세션들도 관객들도 다 너무 재미있어했구요. 그때 대학로 공기가 정말 따뜻했죠.

 

후지모토 미호 : 저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요. 첫 사회 나갔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매번 작은 걸로 서운해 하고 작은 걸로 눈물 많이 흘리고 그래요. 심지어 거래처에 메일 쓰는 방법도 몰랐어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거래처 사람에게 물었는데, 그 사람이 저보고 ‘나는 당신의 상사가 아닙니다’ 그러더라고요. 물어볼 데가 거기밖에 없었어요. 내 멋대로 일하면 안 되잖아요. 일을 진행하는 데 엄청 욕을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제일 힘들었던 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상사의 말이 잘못됐고, 사기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그거 진행시켜’ 그러면 저는 ‘이건 아닙니다’ 그러면 ‘너는 어느 쪽 사람인데?’ 그래요. ‘상대쪽 편들려는 게 아니라, 회사 이익이 생기되, 사기 치면 안 된다’고 말하다 많이 속상한 일이 있었어요. 회사 내에서 ‘너 일 못한다. 너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일본에 전화하면서도 울면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어쨌든 간에 결국 내가 만족스럽다기보다 상사가 만족스럽게 일하기는 했어요. 마음이 많이 안 좋았고, 그런 일이 엔터 쪽에서 생길 때마다 충격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저한테 “너 같은 사람만 세상에 있는 거 아니야” 그러셨는데, 그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도 잘 몰라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예전 어느 분이 저보고 ‘좋게 얘기하면 너무 착하다. 그쪽도 생각하고 이쪽도 생각하고 그런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기로 돌아가는 게 보일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저런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야 되나?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닌 회사도 있을 테지만, 지금도 그렇게 양 쪽을 잘 생각하고 잘 하고 있는 회사를 보긴 힘들어요.

어른이 되지만 내가 갖고 있던 성격이 변하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이젠 그런 일이 일어나도 더 이상 놀라지는 않아요.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놀라진 않아요. 그렇다고 괜찮아지진 않아요. 한 번 두 번 겪으니 익숙해지는 거지, 괜찮지는 않거든요. 어렸을 땐 몰랐던, 사람의 검은 점이 보이는 거죠.

‘더 이상 내가 부모님이 보호해줬던 소녀가 아니구나’ 생각할 때 슬프지만, 어떡하겠어요? 나는 살아가야 되고 나는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잖아요. 엄마 아빠가 그러셨던 것처럼 어느새 나도 살아가고 있어요.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는 일을 겪기도 하고,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중요한 걸 찾게 되고 그래요. 그래서 옆에 누군가 있어 준다는 게 행복하다고 느끼고, 나쁜 일이 있어야 행복한 일도 생긴다는 걸 알게 되죠. 항상 두 개가 한 세트예요. 나는 ‘아! 못 살겠다. 안 살고 싶어’ 그런 일이 있으면 생명의 중요함을 느끼는 일이 꼭 생겨요. 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같이 와요. 본인이 안 좋은 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일이 돼요.

 

강병원 : 저는 이 쪽 계통 일 하면서 지금 되게 재미있고 좋아요. 회사 만든 지는 두 달 밖에 안 됐지만 여러 일을 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찾아가서 공연하는 것도 즐거워요. 가령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올해 천 년 째 보존되고 있어서 홍보동영상을 만들었는데요. 홍보동영상은 대개 천편일률적인데, 이번에는 다르게 단편영화로 만들어요. 얼마 전에 찍고 왔거든요. 감독은 제가 아니었지만 배우나 콘티, 글 써주는 거는 어느 정도 우리 회사에서 했어요. 즐거웠죠.

다음 달부터는 연극 ‘임대아파트’ 장기공연에 들어갈 예정인데요. 글틴 친구들도 저한테 얘기하고 보러 오세요.

지금 이렇게 하나하나 해나가는 게 참 좋은데, 예술을 꿈꾸는 어린 친구들한테 말해주고 싶은 건 자기 권리를 잘 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계약서도 잘 써야 하고 자기가 쓴 글 보호도 잘 해야 돼요. 누가 뭘 해준다고 해서 믿다가 사기를 당할 수도 있으니 그런 것도 조심하세요. 사회에서는 열정 있고 재능 있는 어린 친구들을 막 부려서 써먹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봐’ 좌절하는 친구들이 생기는데, 현실에서 제도나 시스템이 잘 안 받쳐줄 때 속상하죠. 미리 저작권 권리라도 공부해두세요. 자기 권리를 잘 찾으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어요.

 

글틴(이지원, 유가연) : 그럼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을 콕 집어주신다면 뭐가 있을까요? 저희가 첫 걸음을 뗄 때 준비할 것들을 알려주세요.

 

후지모토 미호 : 가장 필요한 건 공부죠.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저는 그게 구체적으로는 언어였어요. ‘최소한 이것만큼은 알아야 돼’하는 것들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하나를 다 하니까 뒤돌아보니 두세 개가 함께 따라 오더라고요. 저는 십 년 전에 한국 와서 처음으로 언어를 공부했어요. 여러 분 누구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세요.

 

서연 : 좋아하는 목표점을 찾은 뒤 많이 경험하세요. 어릴 적 장래희망 쓰잖아요. 저는 매니저였는데, 어느 순간 십 년 지나 보니 공연 매니저· 가수 매니저가 돼 있더라고요. 잘 해서 점프하는 건 역량이고 노력인 거지만, 무의식적인 것에서라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거기에 닿아 있어요. 뜻 맞는 사람들도 만나게 돼요.

무조건 학교에서 ‘공부해라. 공부해라’ 해놓고 ‘네 꿈이 뭐냐?’ 물어보면 당황스럽잖아요. 자기 꿈에 대해서만큼은 직접 경험해보고 사람들 많이 만나세요. 이십 대 초반이 중요해요. 쫙쫙 빨아들이세요.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라 그러잖아요. 저는 아직도 여행을 많이 가고 싶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못 다녀서 그렇지, 여행하면서 자신도 돌아보게 되잖아요. 책도 많이 읽으시고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죠.

 

강병원 :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세요. 생각은 계속 할 수 있거든요. 생각하고 있는 걸 한 글자 한 글자 써 나가다 보면 완성된 글을 볼 수 있어요. 그걸 들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쳐보고 고치고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저는 내년에 엑스포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요. 하고 싶다는 생각뿐 아니라 엑스포 다녀보고 관계자들 만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조사하고 그래요. 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지고서는 ‘하고 싶은 게’ 되는 거고, ‘해야지’ 하게 되는 거 같아요. 100을 생각했더라도 50을 행동하면 25라도 이루잖아요. 25만큼만이라도 계속 하게 되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먼저 하세요.

힘들긴 하죠. 예술을 계속 하려면 돈이 많거나 천재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고 정말 힘들어도 하고 싶다면 해야죠. 그러다 행복한 순간들도 만나게 되죠. 하기 싫은 걸 하는 것보다는 좀 더 큰 희열을 맛보지 않을까요? 꿈을 꾸려면 좀 사회에 의미도 있고 재미있게 잘 할 수 있는 꿈을 꾸는 것도 좋잖아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인식시키고 하나씩 바꿔나가게끔 하는 그런 게 전 마음에 들거든요.

연극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돈을 못 벌어요. 연봉 200만일 때도 있어요. 일 년에 사 개월 공연하면 팔 개월 쉴 때도 있죠.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요. 극작가, 발레리나, 영화 하는 사람, 예술 하는 여러 분야의 학생들이 한 해 당 여러 명이 졸업하는데 다들 다른 일도 병행해요. 빨간 펜 선생님도 하고 웨딩 촬영도 하고 레슨도 하죠.

 

서연 : 정말 눈물겨운 일이 너무 많아요. 돈을 많이 번다거나 잘 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럴 땐 운도 필요한 거 같아요. 다들 여러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요. 자본이 있는 기업들이 사회 환원 차원에서 문화에 많이 투자했으면 좋겠어요. 대학로 공연 다니다 보면 좋은 거 정말 많거든요. 자본을 투입해서 홍보하면 잘 될 거 많은데, 콘텐츠와 배우·아이디어는 다 있어도 자본이랑 연결해서 큰 무대 펼칠 기획자가 없대요. 너무 안타깝죠.

주류가 있는 게 비주류가 있어서 키워나가는 건데, 주류에도 타성에 젖어있거나 누가 하면 따라하는 게 많죠. 세상이 넓다지만 의외로 작아요. 비주류 좋은 아이디어가 산발돼 있거든요. 그걸 연결·확장 해주는 기획자가 많지 않아요. 문화산업 전반적으로 많이 교류가 필요한 거 같아요.

 

글틴(이지원, 유가연) : 일하시다 힘들 때는 어떻게 극복하나요?

 

박서연 : 사람들 만나서 힘을 얻죠. 내 얘기 공감해 주고 ‘너 잘 할 수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너 그럴 수 있어’라는 위로가, 그런 교감이 참 힘이 되죠.

 

후지모토 미호 : 시간이 필요해요. 안 될 때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좋은 일이 있으면 계속 잘 될 때도 있어요. 정말 우울할 때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마음을 정리해야죠.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예요. 저는 예전 회사 대표님이 이런 얘길 해줬어요. 힘들 땐 엄청 각도가 큰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래요. 편하다 싶을 때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거구요.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다리는 건 아녔어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들어도 노력을 하게 돼요. 억지로라도요. 내 안의 나를 보호하려다 상처를 받으면 더 사람도 안 만나고 싶은데 선배들 조언 듣고 나면 합리적으로 보이죠. 저는 스물여덟 쯤 나쁜 경험은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 다음회 예고

 

청소년들을 위한 속 깊은 진로 멘토 찾기, ‘네 꿈을 펼쳐라 시즌 2─글틴 인터뷰 탐험’은 글틴 친구들이 직접 참가하는 쌍방형 인터뷰 코너예요. 책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향후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감성과 끼를 펼칠 수 있을지, 실질적인 조언을 얻는 자리로 진행됩니다.

참가 학생들은 작가, 가수, 연극인, 문화기획자, 방송피디 등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어른들을 만나 꿈을 꾸고 실현해가는 모습을 간접 경험합니다.

‘네 꿈’ 인터뷰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진행되며,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든 참가 할 수 있어요. 인터뷰에 참가하고 싶은 학생은 ‘글틴’ 사이트에 접속해 ‘글틴놀이터─궁냥궁냥’(자유게시판)에 신청을 하면 됩니다. 신청 학생 중 두 명의 학생을 추첨해 진행합니다.

 

6월의 초대손님은, 힙합의 세 친구 ‘술래(Late-B)’, ‘빅사이즈(번트피)’, ‘내토(Late_B)’입니다. 내토는 충북 제천을 일컫는 옛 우리말입니다. 내토에서 자란 술래와 내토는, 어릴 적부터 힙합을 함께 한 친구이며 거의 매일 수다를 떨 만큼, 각별한 친구 사이입니다. 서로 같은 꿈을 꾸었고, 현재 힙합 가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술래는 2010년 가을 ‘전국청소년 시낭송축제’ 기념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해 ‘고래가 그랬어’, ‘둘리’, ‘혜화동’ 등에서 랩실력을 드러내 학생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현재 프렌즈 FM 96.7mhz 다이나믹 듀오의 ‘프리웨이’(토, 일 12:00~14:00)에서 한 달에 한 번, 빌보드 싱글 랩 순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토, 빅사이즈, 술래 이 셋은 강렬한 랩과 서정적인 랩, 모든 게 가능한 전천후 래퍼들입니다. 검은 페도라 모자가 잘 어울리는 ‘술래’와 레게머리의 ‘빅사이즈’, 귀여운 표정의 ‘내토’ 등 이 셋은 절대 ‘무섭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힙합 하는 사람들은 무서울 지도 몰라’라고 겁먹은 글틴 친구가 있다면, 과감히 이들을 만나보세요.

재치어린 말투와 진실한 음악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남은 학교생활을 이들 노래와 더불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힙합그룹 ‘번트피’에서 활동하는 빅사이즈는 실제로 ‘무섭지 않아’라는 앨범을 발표해 자신의 자상함을 증명하기도 했어요. ‘번트 P’는 월간 힙합으로 유튜브와 트위터 등을 통해 매달 힙합 노래를 발표하고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힙합 하는 세 남자, 노래하는 음유 시인! 이 세 래퍼들의 문학사랑·어린 시절·노래이야기를 들고픈 글틴 친구들은 게시판에 참가 신청을 올리세요.

 

정리/작성_ 변인숙 baram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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