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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거울

  • 작성일 2010-09-06
  • 조회수 633

 

[제1회]


 

거 울



강신주(철학자)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괘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한 여성이 화장을 고치려고 거울을 봅니다. 방금 식사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거울을 통해 그녀는 아주 능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입술에 립스틱을 바릅니다.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어서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알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어야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바로 자신의 실제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다행스럽게도 이런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재훈이라는 친한 친구를 불러오고, 그로 하여금 거울과 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는 물어보면 됩니다. “야, 거울 안에 비친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이 같은지 다른지 살펴봐라. 같다면 정직하게 같다고 말하고, 만약 다르다고 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돼.” 재훈은 나도 아니고, 거울에 비친 나도 아닌 제3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내 얼굴과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진지하게 살펴보던 재훈은 다행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은 실제 네 모습과 똑같아.” 안심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재훈이란 친구의 증언으로 나는 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재훈이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두 번째 친구, 응천이를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응천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응천아. 재훈이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지 살펴줘.” 다행스럽게도 응천은 재훈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응천이도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하겠지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는 달리 원래 내 모습이 흉측하기 때문에, 재훈이뿐만 아니라 응천이도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럼 어떤 친구를 세워서 재훈이와 응천이를 감시하라고 할까? 그렇지만 이 친구도 똑같이 내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 어떻게 하지?” 회의와 의심은 이렇게 그칠 줄 모르고 심화되어, 그 끝이 어디일지 우리는 감히 예측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실제 내 얼굴과 같다고 믿었다면, 이런 꼬리를 무는 회의는 없었을 겁니다. 혹은 한번 의심을 하더라도 재훈이를 믿었다면, 의심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찾았을 겁니다. 아니면 재훈이를 의심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응천이의 관찰을 믿었다면, 회의와 불안의 연쇄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테지요. 결국 처음부터 내 실제 얼굴과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같은지 다른지를 해결하는 방법은 ‘믿음’이었던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이미지가 실제 나의 모습이라고 믿는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이미지는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를 계속 따라다닌다는 겁니다. 바람이라도 불어 머리를 흩날리거나 아니면 음식이 입에 묻었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다시 매만지거나 입술을 닦습니다. 이것은 거울을 통해 보았던 내 이미지를 기준으로 우리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살피고 통제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930년대 경성을 활보하던 모던보이 이상(李箱, 1910-1937)은 어느 날 거울을 응시합니다.  세련된 모던보이였던 이상에게 거울은 거의 필수품이었을 겁니다. 거울을 통해 이상은 자의식, 즉 자신을 자기로 보고 있는 의식의 기원을 얼핏 느끼게 됩니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 제비다방에서 어느 멋진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상을 떠올려 보세요. 환담을 나누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 표정, 입 모양, 그리고 제스처,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을 겁니다. 이미 그에게는 거울을 통해 확인된 자기 이미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거울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는 그의 말은 “내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고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겁니다.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을 가질 수도 없는 법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1981)도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13년에 내가 국제 정신분석 학술대회에서 소개했던 거울단계라는 개념은 프랑스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다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개념에 다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거울단계의 개념이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 속에서 ‘나’라는 것이 어떻게 기능한지를 해명해주기 때문이다. 거울단계의 경험은 우리가 ‘코기토(Cogito)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철학에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크리(Écrits)』

 


방금 읽은 부분은 『에크리(Écrits)』에 실려 있는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나’라는 기능을 형성하는 거울단계」라는 논문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아이는 생후 18개월 동안 거울 속의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을 자기로 의식하고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거울과 관련된 경험이 없었다면 ‘나’라는 자의식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과정을 라캉은 ‘거울단계(mirror stage; stadue de miroir)’라고 부릅니다. 거울단계를 통과해서 ‘내’가 탄생한 것이라면, ‘나’라는 의식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나’, 즉 코기토(cogito)가 인간에게 원래부터 주어져 있다고 전제했던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생각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내’가 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을 이야기하는 라캉의 말을 하나 더 살펴볼까요.


 

거울 앞에서 서서 자신의 이미지에 놀라고 있는 어린아이를 다시 생각해보자. 아이는 걷거나 일어날 수 없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지만, 기쁨에 차서 환호성을 울리며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아이는 이런 환호성 속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지지물들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크리(Écrits)』



어느 순간 거울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거울의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같다고 믿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즉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을 자기로 의식한다는 것이지요. 라캉에 따르면 ‘나’는 바로 여기에서 출현합니다. 그러니까 실제 자신의 모습과 거울 속의 모습을 동시에 보고 있다고 믿어지는 자리, 즉 제3자의 자리가 바로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초로 거울 속의 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믿게 된 순간, 아이는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의 감정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육체의 탄생 이후 드디어 ‘나’라는 정신이 탄생한 순간, 진정한 내가 탄생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놀라움과 기쁨이란 상반된 감정이 폭발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겁니다.
거울을 응시하면서 시인 이상은 최초로 자신이 탄생했던 충격적인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내면에 들여놓으면서 ‘내’가 탄생했다는 것이 ‘거울단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은 위대한 걸음, 어쩌면 자기 해체적인 걸음을 떼려고 합니다. 「거울」이란 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모던보이는 말합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고 말입니다. 이상은 거울 속의 나, 혹은 나의 내면에 각인된 거울 속의 이미지를 진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나’를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을 배우기에 급급했던 시절, 코기토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상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는 가장 모던한 시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모던했기에 모던의 한계에까지 이른 겁니다. 한마디로 이상은 포스트모던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나르시스(Narcissus)를 아시나요? 우연히도 그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연못을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탈진하여 죽게 되지요. 거울을 통해 고독하게 만들어진 ‘나’는 이렇게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내’가 거울단계를 거쳐서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모두 나르시스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거울을 보며 얼굴을 단장하던 어떤 여인이 어느 순간 만족스러운 미소를 거울 속의 자신의 이미지에 던집니다. 그러나 잊지는 말아야죠. 이런 만족에는 고독한 나만 있을 뿐 타자란 부재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는 타자 아닐까요? 타자는 나를 비추어주어 나를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거울처럼 나를 고독하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미소로 우리는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타자의 눈빛으로 자신의 입가에 무언가가 묻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거울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거울을 깨서 타자를 만날 것인가? 



Photograph by 드래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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