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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의 송어낚시

  • 작성일 2010-02-19
  • 조회수 894

                       

                                     

                              진부의 송어낚시

 

 

"오늘 저녁도 축제위원과 된장서리는 사무실의 연탄난로 옆에 앉아 술을 마시며 송어 이야기로 열띤 씨름을 한다. 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송어의 마음이라. 얼음장 아래에서 헤엄치는, 아무도 모르는 송어의 마음을 얻으려고 추운 겨울날 사람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손을 비비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나도 아직 은빛 송어의 마음을 얻지 못한 듯하다. 근데…… 껌팔이 아저씨는 어떻게 얻었지?"


 김 도 연

 

 

한 뼘쯤 되는 넓이의 얼음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에 살얼음이 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가 만만찮다. 마치 등덜미로 살얼음이 끼는 기분이다. 가느다란 낚싯줄은 고패질을 멈춘 지 오래여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히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다. 볼은 말할 것도 없다. 얼음구멍을 앞에 놓고 좌선에 든 월정사 스님들처럼 앉아 있은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건만 송어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꼬리도 못 봤다. 나, 열여덟 고3 정미, 1월의 혹한 속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그것도 하필 얼음장 위에서. 친구들은 모두 따스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텐데 나는 벌써 며칠째 콧물을 흘리며 송어낚시라니. 송어낚시 아르바이트라니.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든 건 칼바람 불던 그날 담임과 싸우고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저 다리를 건너다가 평소의 나답지 않게 무엇에 홀린 듯 다리 아래를 바라본, 그것도 겨울철 물고기처럼 기름기가 잔뜩 낀 내 두 눈 탓이다. 그날 나는 다리 위에서 은빛 무지개송어라도 보았단 말인가. 그나저나…… 오늘도 꽝일까?

 

 껌팔이 아저씨는 변함없이 입장권을 사지 않고 그물 울타리를 비집고 얼음장으로 들어왔다. 견지낚싯대를 한 손에 든 채. 주머니에는 분명 소주 한 병이 들어 있을 것이다. 축제위원이며 진행을 맡은 아르바이트생들도 아예 포기한 눈치다. 하긴 뭐, 누구에게도 그 정도 아량은 있을 것이다. 장날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붉은 지휘봉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으니 면장이 나서서라도 무료입장을 권할 법도 하다. 교통정리를 제대로 하는 것인지는 의심이 가지만. 그 외의 시간은 터미널에서 껌을 팔고 상가 앞에 쪼그려 앉아 아주 빈약한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가끔은 그대로 꼬꾸라져 잠든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아주 가끔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어 119 차량이 와서 싣고 가기도 했다. 직장이나 다름없는 터미널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눈만 마주치면 아주 천천히 다가와 (사정은 모르지만 몸이 불편하다) 껌을 내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다가오는 동안 슬금슬금 도망가고 또 다가오면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며 버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얼음장 위에서는 절대 껌을 팔지 않았다. 오직 송어낚시에만 몰두한다. 가끔 소주를 마시며.

 

 진부의 송어낚시는 캄캄한 겨울밤에도 계속된다. 낚시꾼 : 송어축제가 아니고 송어 얼음 낚시터인가 봐요. 뭔 축제가 돈도 많이 들고 송어 구경도 못 했어요. 개울에다 송어 몇 마리 풀어놓고 거기서 뭐 하라는 건지……. 그건 그렇다 치고 축제장 음식 파는 곳에서 떡국을 시켰는데요, 국물에 떡 몇 개 넣어 4천 원 받아먹고, 송어 초밥이라고 나온 것은 만든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지만 딱딱해서 먹을 수 없었어요. 위생 상태도 영 엉망이더군요. 송어 얼굴 : 저희 가족도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낚시를 했으나 송어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왔음. 루어 낚시터에선 포클레인이 시끄럽게 작업을 하고 있고. 떡국집 사장 : 떡국 4000원 받아먹고 초밥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떡국엔 떡과 국물 들어가는 거 당연한데 뭐가 문제일까요? 양이 적으면 더 달라고 하면 되는데 말도 못하고 있다 나가서 웬 투정? 백화점에서 초밥 먹어보기나 했는지 모르겠소. 전문 일식집에선 아예 못 먹을 주변머리처럼 보이는군요. 매사에 부정적이고 삐딱한 당신의 낚시에 걸릴 멍청한 송어가 이곳엔 아쉽게도 없네요. 지나가는 사람 : 떡국집 사장 웃기네! 피라미 : 헐! 떡국집 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

 

사실 나의 임무는 송어낚시가 아니다. 얼음구멍 앞에 앉아 송어낚시를 하며 송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온갖 말들을 낚아 올려 그 중 월척이다 싶은 것들을 추려 축제위원들에게 전달하는 게 주 임무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나의 정체와 임무를 알지 못하기에 일종의 스파이, 송어 스파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한 번도 송어낚시터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없다. 그날 좁은 면소재지를 쏘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다리 위에서 나는 내게 말했다. 정미야,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그러자 담임의 질문이 다시 되살아났다.

“왜 그랬는데?”

명색이 국어선생이자 시인인 담임의 입에서 나온 참으로 촌스런 질문이었다.

“그냥 나왔어요.”

“그냥? 수능시험을 보러 간 수험생이 2교시가 끝나자 나머지는 포기하고 그냥 나왔다고? 그냥?”

“예.”

 “그래도 뭔가 그럴 듯한 이유 한 가지는 내게 말해줘야 하지 않아?”

“설명이 안 돼요. 그냥……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기 싫었어요. 선생님은 시인이니 제 마음을 알 수 있잖아요.”

“몰라. 니가 「이방인」의 뫼르소니?”

“예?”

 “아니다. 그래, 다시 수험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대학 진학은 어떻게 할래?”

“안 갈래요.”

 “못 가는 거지!”

이후의 대화는 떠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송어축제장의 송어낚시에 대한 논란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날 다리 위에서 나는 맞바람을 맞으며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 얼음장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한겨울에, 그것도 가장 추운 얼음장 위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수능을 보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그날 내 마음을 다리 아래로 끌어 내렸을까. 얼음장 주변을 기웃거리던 내게 견지낚싯대를 주고 간 사람은 누굴까. 왜 하필 그때 껌팔이 아저씨가 나타나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가는 방법을 몸소 보여준 것일까. 그리고 나는 한 시간여의 낚시 끝에 송어는 잡지 못하고 진행을 맡은 아르바이트생도 아닌 축제위원에게 껌팔이 아저씨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송어축제장의 송어 스파이가 되었다. 축제위원에게 던진 한 마디 말 때문에(물론 송어를 잡지 못하고 투덜거리며 떠나간 다른 낚시꾼들이 뱉어놓은 말이지만).

“두 마리 이상 못 잡게 하는 것보다 실력껏 잡게 하되 가져가는 송어만 개인당 두 마리로 제한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못 잡은 분들께 나눠주게 하면 서로가 좋잖아요.”

그러나 껌팔이 아저씨는 스파이가 되지 못했다.

 

 “이 글을 쓴 논설위원이 내 친구야.”

축제위원은 지역신문의 사설을 정성껏 오려서 게시판에 붙였다.

“거기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 친 곳을 한번 소리 내서 읽어봐.”

분량이 많지도 않은 글에 밑줄은 빨간색, 파란색, 녹색으로 각각 나눠져 있다. 축제위원은 몹시 지친 얼굴이다. 아마도 매일 이어지는, 송어 낚시꾼들의 빗발치는 항의 때문일 것이다. 게시판에 붙여 놓은 사설만이 그의 위안인 것 같아 나는 큰소리로 읽어주기로 작정한다.

"평창에 송어가 들어온 해는 지난 1965년이다. 미국에서 공수돼 온 송어알이 물이 좋은 석회암 골짜기인 평창읍 상리의 당시 도립양어장, 곧 지금의 평창송어장에서 부화, 양식에 성공한 것으로 시작된 평창 송어의 역사는 그대로 대한민국의 송어 역사가 된다. 이런 한국 송어의 출발지에서 그동안 송어를 대상 삼는 어떤 행사도 없었다는 점에 겨울철이 되면 주민들은 늘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어때?”

“예…… 뭐, 우리나라 송어의 역사네요.”

“저 글을 쓴 놈이 박사야. 역시 박사가 달라. 우리가 깜박한 걸 딱 집어내잖아. 그 옆에 붙여놓은 것도 한번 읽어봐.”

옆에 붙여 놓은 것은 낚시 책에서 복사한 것이다.

“송어는 탐식성이 강하고 성질이 사나우며 육식을 주로 하지만 잡식성이다. 낚시에 걸렸을 때의 강렬한 저항은 타 어종에 비교할 데가 없다.”

그리고 ‘송어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몸매에 섬세한 성격의 품위 있는 물고기’라는 좀 이상하고 까다로운 송어낚시에 관한 내용을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마저 읽었다.

 “송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난리 치는 인간들한테 저 얘기들을 홍보할 방법이 없을까?” 앗! 축제위원이 마침내 송어 스파이로서의 나의 자질을 시험하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런데 송어낚시 홍보를 스파이가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머뭇거리는 사이 축제위원이 다시 묻는다.

“그래, 너는 그동안 송어를 몇 마리나 낚았냐?”

“……한 마리도 못 낚았어요.”

“그렇구나. 그 껌팔이 녀석은 꽤 낚았다고 하던데……”

위기다. 점 찍어놓은 휴대폰을 장만하려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저기…… 목소리 좋은 사람을 찾아서 저 내용들을 방송으로 반복해서 들려주면 안 될까요?”

 

 넓은 얼음장 위의 낚시꾼들은 마치 과거시험을 보듯 얼음구멍에 몰두하고 있다. 낚싯대를 들었다 내렸다 반복하며. 수시로 살얼음을 건져내며. 간혹 펄떡거리는 송어를 얼음장 위로 건져낸 사람의 감탄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천천히 자신의 얼음구멍으로 되돌아온다. 어떤 이는 아예 그 옆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그나저나…… 나도 이제 한 마리 건져내야 하지 않나. 하루에도 몇 번씩 자리를 옮기고 다양한 종류와 크기, 색깔의 루어, 웜, 스푼을 사용했지만 입질도 하지 않는다. 날씨가 풀리고 대학 원서접수가 끝나면 친구들도 낚싯대를 들고 얼음장 위로 몰려들 텐데 심히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낚시는 위장이고 사실은 스파이 활동중이라고 밝힐 수도 없지 않은가. 친구들은 내가 세속을 떠나(킥킥!) 매일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모양이다. 나 참, 어디를 가나 사는 게 고행이다. 그동안 고패질을 얼마나 했는지 팔뚝에 알이 뱄을 정도니 말이다. 다시 그나저나…… 지금 나는 얼음구멍 앞에 앉아 낚싯대를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지만 이 겨울이 지나면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송어축제는 끝났지만 여전히 송어 스파이의 자격으로 낚싯대를 들고 계곡을 탐험하고 있을까. 외로이. 네 시 반이 지나니 해가 진부의 서쪽 사남산(射南山)을 넘어간다. 얼음장 위로 그늘이 내려온다. 춥다.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틸 걸 그랬나보다. 양말을 두 켤레나 신었는데도 발이 시리다. 손이 곱아 고패질을 포기한다.

“낚시는 잘 돼?” (으악! 담탱이가 찾아왔다!)

 “웬일이세요?”

“니가 낚시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러 왔다. 그래, 잡은 송어는 어디 있냐?”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다!)

“요 아래에 있어요.”

나는 곱은 손가락을 간신히 펴서 물속이 보이지 않는 얼음장을 가리켰다.

 “송어낚시도 좋지만 대학 가려면 원서도 써야지.”

 

수능시험을 2교시까지 보았는데 내가 갈 대학이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담임은 나를 대학 청소부로 팔아넘기려는 모양이다. 아, 그나저나 밤의 송어낚시터는 여전히 시끄럽다. 떡국 만세 : 떡국집 사장님, 저는 떡국 사 먹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글을 읽어보니 너무 지나치시네요. 감정이 안 좋은 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불만을 표현한 분한테 주변머리가 없다는 얘긴 좀 듣기 거북하네요. 떡고물 : 떡국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삐딱한 또라이들도 님의 고객입니다. 그런 고객을 만족시키고 또 그 삐딱한 분들에게서도 수익을 창출해 내겠다는 것이 서비스업의 기본 마인드입니다. 외람되지만 다른 직종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어이없음 : 어떻게 여러분들의 손님에게 그런 말씀을. 주변머리, 멍청이, 편협함, 삽질, 경고…… 이 행사를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고생하신 다른 분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신 겁니다. 유턴 : 떡국 사장님의 말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리게 되었군요. 저도 마찬가지로 발길을 돌립니다. 무서운 송어낚시 : 정말 기분 더럽군요. 정중히 그리고 엄숙히 요구합니다. 운영진님, 공식적으로 사과하십시오.

“정미, 니 생각은 어떠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떡국집 사장 놈 때문에 얼마 없는 내 머리카락 다 빠진다.”

“근데 떡국집 사장님이 직접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놈은 고집불통 송어야!”

축제위원 : 여러분들의 글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송어축제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의견을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축제위원들뿐 아니라 진부면민 1만여 명이 많은 시간 축제의 성공을 위해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열정과 후원만으로 동참하다 보니 다소 의욕이 지나치고 더불어 부족한 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축제위원으로서 정중히 사과를 드립니다.

“약하냐?”

“뭔 일이 벌어지면 나중에 정치인이 뭉뚱그려서 유감 표명하는 거랑 비슷하네요.”

“그게 대부분의 삶이고 정치지.”

 

오랜만에 추위가 풀린 오후, 낚시꾼들은 계가가 끝난 바둑판에 놓여 있는 바둑알처럼, 넓은 얼음낚시터를 꽉 채운 채 낚시를 한다. 옛날 어떤 이가, 낚시의 목적이 반드시 물고기를 잡는 데 있지 않다 하였건만 낚싯대를 든 사람들의 눈빛은 절절하다. 여러 수를 낚지는 않더라도 지불한 입장료만큼의 송어는 만나고 싶다고 씌어 있다. ‘낚시가 고기를 낚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을 관조하고 명상의 시간을 통해 정신건강을 살찌운다’는 <낚시 백과>의 대의(大義)를 겨울날 얼음판 위에서 함께 온 자녀들과 아내에게 적절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옆자리의 낚시꾼들은 대의의 마지막 구절 그대로 ‘더불어 물고기를 낚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날씨가 풀렸지만 겨울은 겨울이기에 송어가 잡히면 손과 발이 덜 시리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얼음판 위에서 손을 비비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직 한 마리도 끌어내지 못하는 가장을 슬슬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가장 낚시꾼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깊어진다. 저 인간은 대체 어떤 채비를 했기에 연달아 송어가 올라온단 말인가. 혹시 금지돼 있는 생미끼를 몰래 쓰는 건 아닐까. 내가 자리를 잘못 잡은 건가. 역시 식구들과 함께 오는 게 아니었어. 혼자 고독을 씹으며 하는 낚시가 진짠데 말이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식들이 입장료만 받아먹고 송어는 몇 마리 안 풀어놓은 것 같단 말이야. 아빠, 배고파! 조금만 참아. 우리 송어는 언제 낚을 거야? 당신 실력으론 안 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지. 본전은 뽑아야지. 당신은 애랑 먼저 나가서 뭐 좀 사 먹어. 난 한 시간만 더 하고 갈 테니까.

송어낚시꾼 내일 진학상담 있으니 학교로 와라 네가 잡은 송어회 한 접시 들고 담임의 문자메시지다! 얼음 낚시터까지 찾아와 밥까지 사줬는데 안 가면 삐치겠지. 그나저나…… 내가 갈 대학이 과연 있을까?

 샘, 송어는 아직 못 잡았어요 잡은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그나저나…… 보아하니 오늘 밤의 송어낚시터는 또 시끄럽겠다.

난 꼭 먹어야 한다

뭐야? 나 보고 다른 사람이 잡은 걸 구걸이라도 하라는 거야! 하지만 내 시선은 잡은 송어를 얼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있는 껌팔이 아저씨에게서 돌아오지 않는다. 송어낚시터의 규칙 중 하나는, 낚은 고기를 두 마리 이상 밖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껌팔이 아저씨가 터미널에서 사람들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껌을 내밀며 말을 건넸던 것처럼 나도 해볼까.

아저씨, 송어 한 마리 제게 주면 안 돼요?

 

강원 도민 : 송어낚시축젠데 송어가 안 잡힙니다. 그러면 송어축제에 눈썰매 타러 오란 말씀인가요? 고기가 비싸다고 많이 못 풀어놓을 거면 왜 축제를 열었는지요. 전국에서 하루 시간 내서 오시는 분들 고생시키려고 열었나요. 강원 도민으로서 창피합니다. 차라리 입장료 올리고 고기 더 풀어놓으세요. 축제위원 : 축제장에는 여러 가지 체험 코너가 있는데 그중 중심적인 것이 송어낚시 체험입니다. 그러나 지적하신 것처럼 같은 도민이라고 해서 창피를 당할 만큼 그렇게 빈약하거나 졸속으로 행사를 치르지는 않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인제 빙어축제나 화천 산천어축제 쪽 사람으로 오해 받습니다. (아, 축제위원이 마침내 사고를 치는구나!) 된장서리(떡국집 사장) : 만족하지 못하셨군요. 낚시에 실패하셨군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으로 하는 행사라 고객만족을 위해 일반 유료낚시터의 네 배가 넘는 수의 송어를 풀었으며 매일 보충 방류를 하고 있습니다. 적응을 위해 행사 일 주일 전부터 송어를 풀었고 밥을 주지 않고 굶기고 있습니다. 회 센터에선 미처 회를 떠주지 못할 정도로 많은 송어가 잡히고 있습니다. 송어 킬러 : 횟집에서 회를 뜨는 건 70% 파는 것이었습니다. 어따 거짓말 합니까. 거기서 1시간 30분 동안 술 마시면서 본 겁니다. 잡아오는 사람은 30%밖에 안 되드만. 그리고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있었는데 송어 안 풀던데요. 그 뒤에 풀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시죠. 그건 아니져 : 회를 떠주지 못할 정도로 송어가 잘 잡힌다 하시는데 그것은 일반인의 기준이 아니죠. 루어나 플라이 전문채비를 운용할 경우입니다. 그런 전문가 분들이 수십 수씩 잡아 못 잡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거죠. 회 뜨러 가는 분들이 모두 송어를 직접 잡은 거라는 가설은 지나치십니다. 된장서리 : 낚시를 대충 아시는 분이군요. 낚시터 입장시 개인채비 허용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웜으로 수십 수씩 잡아 나눠준 분이 계시다고 인정하면서 고기 안 풀었다고요? 앞뒤가 맞지 않은 삽질 그만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물 타기 하지 말기를 경고합니다. 무서운 된장 : 웜으로 수십 수씩 잡은 사람은 구멍치기라는 행위를 한 사람이죠. 구석진 부분에 포인트를 잡은 사람. 모든 사람이 구석에서 낚시할 수 있나요? 추운 겨울날 많이 잡은 분 앞에서 검은 비닐봉지 들고 송어 얻으려고 기다리는 초보 낚시인들 입장에 서 보셨는지요? 깡패 집단도 아닐 것인데 축제 참가자들한테 삽질, 경고라니요? 그럴 거면 아예 낚시터도 닫아버리십시오.

 

학교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송어낚시터에는 변함없이 낚시꾼들로 북적거린다. 나는 아직까지 한 마리의 송어도 잡지 못했다. 겨울이면 눈보라만 횡행하던 이 작은 마을에 왜 갑자기 송어떼가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저렇게 송어떼에 열중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송어를 닮은 새로운 아이돌 가수가 나타난 것처럼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야단법석이다. 학교로 가는 길이 낯설다. 삼 년 동안 걸어 다닌 길인데. 학교가 아닌 낯선 곳,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이를테면 송어양식장 같은 데로 가는 기분이다. 하긴 뭐 송어양식장이나 학교나 그게 그거겠지. 만두나 찐빵을 찌는, 김이 솔솔 피어나는 분식집을 지나친다. 팬시점도. 제과점도. 모두 다, 이제는 나와 무관한 곳이 되어버린 듯하다. 오호, 저곳! 쉬는 시간이면 녀석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입과 코로 연기를 뿜어내고 침을 찍찍 뱉는 도서관과 보건소 사이의 침침한 골목 입구에서 나는 걸음을 멈춘다. 우리가 떠나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저 그늘진 골목에서 한숨과 희망을 뒤섞으며 서성거리겠지. 골목 바깥의 눈치를 살피며. “그래, 송어는 좀 잡았나?”

 “……아뇨.”

“니가 잡은 송어회 좀 먹어보나 했는데.”

“……졸업식 전까진 꼭 한 마리 잡아드릴게요. 대신 선생님도 약속 하나 해주세요.” “뭔데?”

“선생님 시집 나오면 꼭 받고 싶어요.”

“송어 한 마리랑…… 시집 한 권을 바꾸자?”

“예.”

“정미야. 시집 속에는 꽤 많은 나무들과 물고기들, 그리고 사람들이 살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내가 밑지는 것 같다.”

“뭐……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얘기해주세요.”

이건 꼭 국경 근처에서 몰래 무슨 물물교역을 하는 것 같다. 담임은 내게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마침내 건네준다. 나는 얼음구멍을 통해 얼음장 밑의 송어를 끌어올리듯 그것을 펼친다. 물 밖으로 나온 무지개송어 한 마리가 내 손바닥 위에서 펄떡거린다.

“여기로 가라구요?”

 

눈발 한 점 섞이지 않은 바람이 분다. 얼음장을 핥고 온 바람은 살갗을 베어버릴 듯하다. 하지만 앉거나 서서 얼음구멍을 향해 머리를 구부린 송어낚시꾼들은 좀처럼 얼음장 위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밀레의 그림 <만종> 속의 두 농부처럼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딛고 선 얼음장 아래의 송어를 향해. 플라스틱 맥주박스를 깔고 앉은 껌팔이 아저씨도 늘 똑같은 옷을 껴입은 채 고패질을 하고 있다. 나는 바람을 막아주는 비닐 천막 안에 앉아 낚시터에서 피어나는 온갖 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이 작고 조용한 마을이 송어라는 물고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질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전까지는 어느 집 며느리가 농용 트럭을 몰고 가다 음주단속에 걸려 면허취소가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몇 개월을 즐겁게 지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송어 덕분에 매일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뛰어다니고 있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저 껌팔이 아저씨는 물을 만난 듯 송어를 낚아 올리고 있고 설상가상…… 담임은 내게 시나 소설을 쓰는 학과로 진학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 정도면 강원도 산골마을 진부의 갑신정변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글을 쓰면 잘 쓸 것 같다고? 내가…… 글을…… 쓰면…… 잘 쓸 것…… 같다고…… 내가? 나오는 것도 한숨이고 삼키는 것도 한숨뿐이다. 차라리 송어낚시학과에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다. 자기는 틈날 때마다 너희들은 대학에 가더라도 글 같은 것은 쓰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면서 지금 내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권하다니. 젠장! 눈발 한 점 섞이지 않은 바람이 부는 1월이다. 비닐 천막을 헤집고 들어오는 칼바람소리가 사납다. 얼음구멍의 살얼음은 건져내는 족족 다시 얼고 있다. 그런데…… 이쯤 기다렸으면 바늘에 걸리지 않더라도 송어 한 마리 얼음구멍 속에서 스스로 튀어 올라야 하지 않나? 해도 너무 하는 것 같다. 송어낚시터의 여론을 수집하는 게 내 본연의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렇게 추운 날 낚싯대를 폼으로 들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생각 같아선 얼마 전에 신내림을 받았다는 석두산 작두보살을 찾아가 송어와 나의 궁합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야 졸업식 전까지 내가 잡은 송어회를 먹고 싶다는 담탱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 아닌가.

“이거…… 가질래요?”

헉! 껌팔이 아저씨가 발갛게 언 손으로 펄떡거리는 송어를 들고 내 앞에 서 있다.

 

“송어를 더 풀어야 될 거 같아.”

“야, 낚시꾼들 요구사항은 끝이 없어! 한 번 들어주면 계속 들어줘야 돼.” “송어를 잡아보는 송어축제잖아. 송어를 잡을 수 있게 해줘야지. 그리고 부탁인데 제발 게시판에다 거친 글 좀 올리지 마라. 응?”

“그게 너랑 나의 입장 차이다. 딱 까놓고 말해 넌 정치에 욕심이 있는 놈이고, 난 양식장 운영하며 송어나 팔아먹는 장사꾼일 뿐이다. 이게 송어를 바라보는 우리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야.”

축제위원과 된장서리(떡국집 사장)는 위원회 사무실에서 송어구이를 안주로 술을 마신다. 내가 들어가면서 끊긴 대화는 나가기 무섭게 다시 이어진다. 낚시꾼들이 떠나간 얼음장엔 어둠만이 가득하다. 얼음구멍에서 찰랑거리던 차가운 물도 밤새 조금씩 두꺼워지며 얼어갈 것이다. 얼음장 아래의 송어들은 밤새 무엇을 할까. 낚시꾼들은 어떤 꿈을 꾸며 밤을 건너갈까. 다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리 아래를 일별하고 밤의 송어낚시터를 향해 걷는다. 나의 송어는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시인 송어는? (아마 술 마시고 있을 거야.)

 아직 안 늦음 : 축제장의 식당들 서비스 교육, 필요합니다. 회 떠 주는데 2천 원. 쌉니다. 그러나 회만 먹나요? 쌈 필요하죠? 상추 몇 장에 마늘, 고추 몇 조각 주고 3천 원? 너무합니다. 쌈 안 먹을 테니 고추장 좀 달라 하니 간장 종지에 주면서 천 원 받습니다. 무지개송어 : 전문 낚시꾼들 아니면 송어를 잡을 기회가 적다는 거 아쉽네요. 이런 식의 행사는 사람들이 송어를 안 좋게 인식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송어축제에 송어가 많지 않다면 문제지요. 송어 좀 많이 풀어주세요. 송어 아빠 : 그런데 정말로 하루에 송어를 한 번도 풀지 않나요? 축제위원 : 지금까지 송어를 10톤 정도 풀었습니다. 송어 한 마리가 1킬로를 넘지 않습니다. 계산해보면 1만여 마리가 이미 풀려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회 센터의 비좁음과 기다림에 불만을 제기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보면 송어가 많이 잡힌다는 얘기랍니다. 송어 킬러 : 방류한 양만 계산하지 말고 지금까지 방문한 사람을 계산해보시죠. 방문자를 대충 계산해도 한 마리씩이라도 잡으려면 적어도 50톤 이상 방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송어 이야기 : 저는 아들, 그리고 친구와 가서 26수 정도 잡고 왔습니다. 두 번의 허탕 경험을 살려 메탈이나 스푼을 작고 가늘고 화려한 것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최 측입니다. ‘낚시 그만하고 가라. 충분히 잡았지 않았느냐. 혼자 다 잡으면 다른 사람은 뭘 잡냐.’ 하더군요. 잡은 송어를 못 잡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데도 말입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한 마리씩 잡을 수 있도록 송어를 많이 푸는 거겠지요. 아 참, 잡은 고기는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루어 : 손맛, 입맛 제대로 보신 것 같군요. 저도 여러 방법을 써 보았는데 안 되더군요. 제가 생각하기론 아침 일찍 사람들 적을 때나 해질 무렵에 입질이 활발할 것 같은데 9시 입장에 5시 폐장이라…… 그냥 왔다 가라는 얘기겠죠. 지나가다 : 축제위원님의 글 상당히 거슬리네요. 송어 못 잡는 사람들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송어 마니아 : 저도 동감입니다. 축제위원님, 기존의 물속 송어 포기하고 꾸준하게 매일매일 방류하기 바랍니다. 축제위원 : 여러분들의 글 참으로 재미있군요. 물론 축제위원으로 많은 분들이 많은 재미를 느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현장에서 느끼기엔 대다수의 체험객님들께서 많은 행복 즐건 추억 나누기에 저는 그저 행복하며 나름 저 하늘에 별처럼 두리뭉실 행복합니다. 한편으론 안타깝습니다. 왜냐구요. 많은 분들의 아픔의 글들을 접하니까요. 많은 분들의 손맛을 보고 싶습니다. 저 역시 손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고 싶은 솔직한 심정 이해해 주십시오. 해적선장 : 축제위원님의 글, 흠…… 무슨 말씀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드디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신 거 같네요.

맙소사! 축제위원이 된장서리와 술을 마시더니 결국 폭탄을 터뜨렸다. 술 취한 송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빨리 전화해서 밤거리를 배회하는 취한 송어들을 잡아들이라고 해야겠다. 송어 스파이의 역량을 발휘할 순간이다. 내 마음속의 송어는 어디에 있는지 아직 오리무중인데 다른 이의 송어는 왜 이렇게 잘 보인단 말인가.

 

 “무슨 꽈?”

“문예, 창작학과!”

“거기가 뭐하는 데냐? 송어 잡는 데는 아니지?”

“시나 소설 쓰는 데야.”

“정미야…… 닌 어렸을 때부터 일기도 잘 안 썼는데.”

“지금부터 쓰면 되지! 근데…… 등록금은 있어?”

“송어 구경은 언제 시켜줄 거냐?”

 

토요일인데다 날씨마저 풀린 터라 송어낚시터는 주인 없는 얼음구멍이 거의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심심찮게 송어가 올라오고 있는 추세다. 이건 기밀사항인데, 주말이라고 평일보다 훨씬 많은 수의 송어를 방류한 결과다. 요즘 진부 사람들의 공통 화제는 오로지 송어뿐이다. 잡은 송어와 못 잡은 송어, 그리고 얻어먹은 송어 이야기를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세 부류의 송어 이야기에서 가지를 친 수많은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느라 바쁘다. 하물며 잡아놓은 송어를 잠시 한눈팔던 사이 지나가던 도둑고양이가 훔쳐간 사건까지. 그런데…… 이게 뭐야! 왜 내 낚싯대는 한 번도 휠 생각을 안 하는 걸까. 이 정도 낚시를 했으면 꿈에서라도 송어를 낚아야 하는데 피라미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창피하고……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까지 하다. 주변에 다른 낚시꾼들만 없다면 못 피우는 담배라도 몇 모금 피우고 싶은 심정이다. 껌팔이 아저씨의 소주라도 훔쳐 마시고 싶다. 껌팔이 아저씨는 히히 웃으며, 침을 흘리며, 늘 술에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꾸준히 송어를 낚고 있다.

“싫어요! 제가 잡을 거예요.”

엊그제 나는 송어를 주고 싶어하는 껌팔이 아저씨의 성의를 매정하게 거절했다. 사실 그가 들고 있던 송어가 더럽게 느껴졌다. 그가 주는 송어를 받는 게 창피했다. 송어를 거절하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손 사이에서 꿈틀거리던 송어는 펄쩍 뛰어올라 내 앞의 얼음구멍 속으로 도로 들어갔다.

껌팔이 아저씨는 가끔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는다. 조금 미안하다. 예전 같으면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얼굴을 돌려버렸겠지만 지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얼음구멍에 고정시킨다. 그가 또 송어를 가져온다면? 에고, 나도 몰라! 나의 미모가 원수지, 원수. 그나저나…… 얘들,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예의상으로라도 한 번 물 밖으로 얼굴을 보여줘야 하잖아.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송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욕을 하며 얼음장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 역시 그렇다고 지난 번 수능시험 때처럼 중도에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면 안 되겠지. 더 이상 안 되겠지…… 정미야 니가 잡을 송어 기다리다 굶어죽겠다. 귀신같은 담탱이의 문자메시지다. 저는 나온다 나온다 하면서 안 나오는 선생님 시집을 2년 동안 기다렸어요!!! 좀 참으세요. 정곡을 찔러야 잔소리가 조용해진다. 시집 나왔다.

 

“니가 무슨 자선 사업가냐? 그렇게 송어를 마구 퍼주게.”

“송어축제잖아.”

“요즘은 가는 곳마다 축제가 넘치는 세상이야. 축제장만 찾아다니는 갈매기떼가 관광객들이고. 갈매기들 입맛을 모두 맞출 수는 없는 거야!”

“송어축제를 만든 건 우리잖아. 성공한 축제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우리고.”

“하루에 만 명의 낚시꾼이 송어 잡으러 왔다고 만 마리의 송어를 풀 수는 없는 얘기라고. 한 마리만 잡아도 끝이잖아! 그럼 우린 뭘 해야 되는지 알아?”

“잠깐! 송어가 다 잡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송어의 마음이지. 하지만 인간이나 동물이나 미끼 앞에서는 약해지게 된단 말이야. 야, 그래서 내가 양식장에서 어떻게 했는지 알아? 이곳으로 갈 송어들을 일주일 동안 굶긴 게 아니라 일부러 배터지게 먹이를 줬단 말이다.”

“……그런 건 얘길 했어야지. 그건 너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잖아?”

“니 거지 되는 거 막으려고 그랬다. 그놈의 군의원이니 도의원 배지에 맘이 홀려 있는 이상 니는 사비를 들여서라도 송어를 갈매기들 입에 넣어줄 테니까.”

“정미야, 이 얘긴 못 들은 거로 해라. 비밀 꼭 지키고.”

“예.”

“괜찮아! 문제될 거 없어. 되더라도 내가 책임질 거니 걱정하지 마!”

“저 갈게요. 저번처럼 또 취해서 게시판에 글 올리지 마세요!”

“정미야, 이 친구 나중에 군수 되면 니가 비서해도 되겠다!”

“저는 시인이 될 거예요.”

오늘 저녁도 축제위원과 된장서리는 사무실의 연탄난로 옆에 앉아 술을 마시며 송어 이야기로 열띤 씨름을 한다. 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송어의 마음이라. 얼음장 아래에서 헤엄치는, 아무도 모르는 송어의 마음을 얻으려고 추운 겨울날 사람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손을 비비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나도 아직 은빛 송어의 마음을 얻지 못한 듯하다. 근데…… 껌팔이 아저씨는 어떻게 얻었지? 

  다리 위에서 보니, 얼음구멍이 질서정연하게 뚫려 있는 얼음장은 바둑판이 아니라 오대산 월정사의 적광전 넓은 법당처럼 보인다. 크크! 나도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처럼 한 소식 한 건가?

 

여행객 : 송어축제라고 해서 스키장행을 미루고 아이들과 함께 갔는데, 이게 뭡니까 , 송어는 구경도 못 했습니다. 바람이 거세지고 추워질수록 불만이 커졌고 누구에게 주워들었는지 아이들 입에서 “송어축제 완전 사기다!” 라는 말까지 나왔네요. 공갈 송어 : 얼음이라도 밟아보셨군요. 저는 사람이 많다고 들여보내주지 않아 소달구지 한 번 타고 그냥 서울로 왔답니다. 산천어 : 이거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갔으면 여자 친구의 원성만 듣고 왔겠네요. 뭐가 이래! 빙어 : 저는 튜브웜 다운샷으로 15마리 잡았는데요. 잡아서 못 잡으신 분들한테 나눠주고 왔는데. 채비만 잘 해서 가면 잡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가시는 것 아닌가요? 다들 막스푼만 흔들고 있으니…… 운영진에게 따지기 전에 송어를 잡을 채비 먼저 하심이 어떨지. 평창군민 : 어제 다녀왔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했는데 송어 잡는 사람 두 명 봤습니다. 1인당 두 마리까지만 가져갈 수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왔죠. 송어 꽝 : 네. 진짜 송어 없습니다. 저도 좀 한다하는 꾼인데 가족들 보기 민망하더군요. 가려던 이 : 저도 화천 산천어축제 가야겠네요. 소설 속에 나오는 평창이나 역사 속에 나오는 평창은 좋은 곳인데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송어의 마음 :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 나는 7년 동안 낚시를 하러 갔으며 / 단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 나는 낚싯바늘에 걸린 송어를 전부 놓쳐버렸다 / 그것들은 펄쩍 뛰어오르거나 / 또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거나 / 또는 몸부림쳐서 빠져나가거나 / 또는 나의 리더를 부러뜨리거나 / 또는 수면으로 떨어지면서 빠져나가거나 / 또는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면서 빠져나갔다 / 나는 송어에 내 손을 대본 일조차 없다 / 이러한 좌절과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 나는 믿는다, / 그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실험이었음을 / 놓친 송어의 총계를 생각해 볼 때 // 그러나 내년에는 다른 어느 누군가가 / 송어낚시를 하러 가야만 할 것이다 / 다른 어느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알론조 하겐의 <미국의 송어낚시 비문>

  슬픈 일이 벌어졌다. 껌팔이 아저씨가 그 주인공이다. 아저씨는 모두 잠든 겨울밤 얼음장 위에서 맥주박스에 앉아 낚시를 하다 영원히 잠들었다. 아저씨 옆에는 빈 소주병 세 개가 놓여 있고 품에는 얼어버린 송어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왜 한밤중에 송어낚시를 하러 나왔을까. 낚시꾼들이 잠든 깊은 밤 얼음 아래의 송어가 아저씨를 부른 걸까. 너무 춥고 고독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다른 이들은 모두 송어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마음씨 착한 아저씨만 뿌리치지 못하고 나온 것만 같다. 아저씨가 낚시를 했던 얼음구멍은 지금 비어 있다. 나는 그 옆에다 흰 국화 한 송이를 갖다 놓았다. 아저씨가 내게 주려고 했던 송어를 받지 않은 게 자꾸만 후회된다. 길고 깊은 겨울밤 아저씨와 송어는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그때 나는 무슨 꿈을 꾸며 잠들어 있었을까. 이제 며칠이 지나면 진부의 송어낚시는 끝을 맺는다. 낚시꾼들이 앉아 있는 이 얼음장도 사고를 우려해 모두 깨어버린다고 한다. 모두가 떠나갔는데 바보 같은 껌팔이 아저씨만 떠나지 못하고 차가운 물 위에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도 송어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떠나가야겠지. 곧 졸업을 하니 진부도 떠나야만 하겠지. 그런데…… 잡지 못한 송어와 함께 떠날 수는 없는 걸까.

  얼음구멍 속의 물은 여전히 흐리고 송어는 보이지 않는다.

 

“담탱이가 마침내 시집을 냈어.”

 “……” “너, 좀 너무하지 않아? 얼굴 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거 아냐?”

 “……!”

 “고마워.”

“……?”

“그냥 고마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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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

 

김도연

 

소설가

강원도 평창 출생.

강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강원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0년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산문집 <눈 이야기>가 있다.


 

                                                               *작품 후기*

 

 " 전문 낚시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엔 은빛송어 한 마리쯤은 살고 있을 겁니다. 아니 그 송어를 꿈꾸고 있겠지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처지에서 그 송어를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끝내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송어를 꿈꾸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은빛송어와 함께 아름다운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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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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