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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족, 그 두 번째 이야기> 이탈꿈꾸던 이들, 화해위해 적극 나서다

  • 작성일 2009-08-12
  • 조회수 596


<가족, 그 두 번째 이야기>

 

 

 

  글/고봉준

 

젊은 작가들이 벌이는 가족이라는 제도와의 사투

 

  최근 김이설이라는 소설가의 장편소설 『나쁜 피』가 출간되었습니다. (사진 왼쪽)소설의 출간을 알리는 신문의 문화면에는 “가족이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불행의 원천 그 자체인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가득하다”라는 문장이 박혀 있습니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가 역시 또래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의 가족 이데올로기인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드는 중인가 봅니다. 물론, 작가의 역량은 ‘가족’이라는 소재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문학은 언제나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서 긴장하는 발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소설가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일 까닭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노출하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이 경우 ‘동일한 문제의식’은 하나의 경향이라고 평가됩니다. 그리고 이 경향의 변화를 근거로 문학의 시대성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문학에서 ‘가족’은 진부한 소재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가족’에 대한 한국문학의 관심은 편집증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정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비정상성은 ‘가족’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의 젊은 소설이 ‘가족’이라는 질서에 구멍을 내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 왔는가는 지난번 글에서 밝힌 대로입니다. 소설과 시 모두에서 젊은 세대는 가족이라는 제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경향이 한국문학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첨예한 현실적 갈등의 문제를 담으려는 소설도 있고, 소통불가능성의 현실을 가로지르려는 문학적인 사유도 있으며, 감동이나 소통과 같은 자칫 상투적이기 쉬운 시선이 놓치고 있는 현실의 일그러진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도 있으니까요. 특히 ‘가족’이라는 동일한 소재에 대한 작품의 편차나 시각차는 한번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여성작가들에게 가족이란, 벗어나야 할 어떤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최근작이 ‘가족’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90년대의 여성문학은 가족과 개인, 제도와 욕망의 충돌에 관심을 집중했었습니다. 아버지가 설계한 집에 균열이 생기고, 물이 스며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냄새가 진동하고, 죽음의 기운이 삶의 공간을 짓누르고……. 90년대 문학 곳곳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들이지요. ‘가족=집’이란 누군가에게는 지켜야 할, 혹은 지키고 싶은 곳이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벗어나야 할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을 지키는 것과 ‘가족’에서 벗어나는 것 모두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도이든, 혈연적인 유대이든, 아니면 필요에 의해 함께 살고 있는 집단이든, ‘가족’이라는 두 글자에서는 다른 방향을 향해서 움직이는 힘이 느껴집니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야’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그 외침이 바로 ‘가족’에 붙들려 있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로부터’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지금, 그들의 변화 1

‘불화’의 공간인 가족에서 ‘화해’의 순간을 읽어내다

 

  하성란(사진 오른쪽)의 「알파의 시간」(《문학과 사회》2008년 봄. 2009현대문학상 수상작, 사진 오른쪽)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딸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가족 이야기는 무관하지 않은, 그렇지만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국어교사였던 아버지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특수를 기대하면서 사업자금으로 엄마의 결혼반지까지 빼앗아 집을 나가버린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아버지의 부재 이후 남겨진 사남매와 엄마의 가난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두 번째 이야기를 한층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아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이 중년여성이 20년 전 아버지가 포니를 몰고 넘었음직한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첫 장면에서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포개지는 순간입니다. 시간의 역전 구성은 아니지만 오래전 아버지가 지나간 길을 되밟아 따라가는 행위에는 “이 산의 정상인 클라이맥스를 통과해 저편 내리막길로 내려갈 즈음에는 이십 년 해묵은 오해와 갈등이 풀려 대단원을 맞게 되리라는 소설적 플롯에 이 상황을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은…”처럼 아버지-과거를 긍정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며, 고저의 굴곡으로 이루어진 도로()는 갈등에서 대단원에 이르는 이해의 과정에 대한 문학적 비유인 셈입니다.

  20년 전, 그러니까 아버지가 사업자금을 들고 집을 나가버린 다음부터 엄마는 네 남매를 양육하고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음식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음식 솜씨가 없었던 엄마였으니 ‘장사’란 어찌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표명 정도였을 것입니다. 시장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한 엄마는 어느 날 얼음을 대주는 사내와 가까워지고, 그 관계로 인해서 ‘어름집 여자’에게 호되게 당하고 맙니다. 사건 이후, 시장 골목의 여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엄마를 따돌림으로써 결국 엄마는 권리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가게를 접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막내가 결혼을 하면서 집에는 엄마와 ‘나’만 남게 됩니다. 노년의 어미와 중년의 딸이 한 집에서 사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싸울 땐 엄마고 딸이고를 떠나 두 여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호불호가 강해지는 엄마와, 엄마에게 결코 져 줄 마음이 없는 딸 사이에 평화로운 일상이란 순간에 불과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합니다. 그 사건으로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반신불수 상태가 됩니다. 90년대의 문학에서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병마와 죽음의 냄새는 대개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이 소설에서 집 전체를 음울하게 만드는 ‘구린내’는 엄마의 것입니다. 이런 엄마에게 딸인 ‘나’는 “알아, 다 알아”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엄마는 “알긴 뭘 알어? 머리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머리가 아니라 여기, 여기로 알아달란 말이야, 이년아.”라고 면박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엄마가 말하는 ‘여기’란 가슴입니다. 설령 상대가 가족이라고 해도, 타인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소설은 자꾸 이 질문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듯합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이 인간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족 안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쉬었다 가세요.” 아마 나는 끝까지 엄마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해 봄에서 여름까지의 오 개월이 내게는 발 하나짜리 돼지의 공포였지만 엄마에게는 붉고 푸르던 고명의 시절이었을까. 아직까지 나는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기억이 점멸등처럼 깜빡이기 시작합니다. 며느리들의 뒷담화를 통해서 확인되는 엄마의 치매는 “쉬었다 가세요……”라는 엄마의 잠꼬대에서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이 전언의 수신자가 한때 엄마의 가게에 얼음을 대주던 사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의 기억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한 시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딸의 시선에서 그 시간은 “발 하나짜리 돼지의 공포”의 시간이었지만 엄마에게는 또 다른 시간이었나 봅니다. 이것이 바로 ‘알파의 시간’이라는 낯선 제목의 의미인 셈입니다. 어떤 사태가 한 인간에게서 차지하는 실존적인 부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시간은 결코 물리법칙의 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알파의 시간 안에서, ‘나’에게 그 시간은 꽤 길었지만, 주인공은 엄마와 아빠의 지난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비루함으로 점철된 일상 안에서 일상, 즉 삶 자체를 긍정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부재하는 아빠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장면에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마치 잃어버린 대상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멀리 있는 것이 더 값지게 보이는 욕망의 착시현상 같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서 한 인간의 삶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부정의 대상처럼 보이는 것들과 화해하려는 주인공의 의지는 분명 90년대의 공통감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해의 의지는, ‘가족’이라는 제도에 결코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내려는 우리 시대의 젊은 소설과도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이 차이를 작가 개인의 몫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시대성이나 세대의 문제로 환원시킬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젊은 작가들이 ‘불화’의 공간을 설정하고 있는 가족에서 몇몇 작가들은 ‘화해’의 순간을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그들의 변화 2

오히려 낯선 상투적인 가족 화해

 

  조경란"(사진 왼쪽)의 「기타부기 부기우기」(《세계의 문학》2008년 여름. 사진 오른쪽) 역시 가족 간의 화해 이야기입니다. 개인을 옭죄는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던 그녀의 90년대 소설의 주인공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반목하던 형제들은 ‘하나’가 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두 달 전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Y시로 내려간 다음부터 두 오빠와 ‘나’는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Y시로 내려갑니다. Y시에 사는 부모님과 어린 조카를 제외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의 구성원은 큰오빠와 새언니, 작은오빠, 그리고 ‘나’가 전부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 관계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먼저 큰오빠와 새언니 사이에는 ‘대화’가 없습니다. “큰오빠와 새언니가 한집에 살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지 벌써 6개월이 넘었다는 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크레인 기사인 작은오빠는 작은 새언니가 가출한 이후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일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스무 살 무렵, 낡고 초라한 아버지/오빠의 집을 벗어나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집”을 갖기 위해 독립해서 살아갑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가 90년대 여성문학, 특히 조경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암에 걸려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의 형상 역시 낯익습니다. 아니, “처자식을 거느렸으면 먹고사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평생 신조로 간직한 아버지가 아파서 누워 있는 모습이나, 아이들의 학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뽑기 장사’를 하다가 다람쥐가 달아나버려 하루 종일 우는 아버지의 모습 역시 90년대의 여성문학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가장의 사명감과 동시에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들의 불행의 일면은 모두 가족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이 아버지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시기와 엇비슷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최근에 와서다.”라는 주인공의 생각 역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부가 궁금하다가도 정작 한 자리에 모이면 싸우기 일쑤인 게 가족의 생리이지요. “왜 다 모이면 꼭 밥상 앞에서 싸우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비루한 가족사와 재산문제만으로도 가족은 이미-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거기에 세상 돌아가는 문제나 가족 한 사람의 불행이 겹쳐지게 되면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지요. 이 소설에서 ‘큰오빠-새언니-작은오빠-나’가 아마도 그런 문제적 가족일 것입니다.

 

   제일로 중요한 것만 남길 거야. 엄마는 앞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   은 순간, 엄마는 지금 엄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했다. 그러고   는 그 이튿날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던 물건들을 한 가지씩 버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느낀 모양이다.

 

  한편, 어머니는 남편이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그동안 자신이 공들여 구입하고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을 내다버리기 시작합니다. 로만 야콥슨의 실어증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장 나중까지 기억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만난 사람은 알아보지 못해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억은 ‘적층’이라는 말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건을 버리는 엄마의 심리를 실어증과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림으로써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을 간직하겠다는 엄마의 심리에는 소중한 것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존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또한 이 형제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세간살이를 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최후까지 버려질 수 없는 것이 ‘가족’이고, 때문에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식의 발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족’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후까지 버려질 수 없는 것이 ‘가족’ 뿐이라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족’이 없어서 버림과 취함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가족’ 관계가 정상적인 삶이고, 가족 관계의 부재가 비정상적인 삶이라는 도식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항상 ‘가족’이 모든 결정의 근거가 되는 것은 비역사적입니다.

  주인공 ‘나’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 다른 하나는 Y시 아버지 집에 있는 나.” 이 분리를 개인으로서의 ‘나’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픈 이후로 ‘나’는 어디에 있든 보이지 않는 ‘다리’가 두 개의 나를 연결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그것을 착각이라고 말해도 좋고, 불안정한 ‘다리’라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다리가 불안정한 이유는 두 개의 ‘나’가 동일하지도,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도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다리는 운명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떨어져 나오고 싶고, 떨어져 있을 때는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을 경험하니까요. 아무튼 형제들과 새언니는 우연히 함께 외출을 하게 됩니다. 엄마가 이불을 버려버렸기 때문에 이불을 사러 나간 것이지요. 그리고 이불을 사러 시장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길은 불현듯 노래방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불을 사기 위해 부모님을 제외한 가족 전부가 외출을 한다는 것, 그리고 냉랭한 관계였던 그들이 노래방에 들러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뭐라고 할까요, 반목에 사로잡힌 가족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돋보인다고 할까요. 암튼, 형제들은 노래방에 들러서 아버지의 애창곡인 “기타부기 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부기”를 합창하게 됩니다. 가족의 화해 장면입니다. 이 화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한 공책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지금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처럼 나는 아버지의 노래 안에서 두려움을 잊어버립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엔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작가는 그 자리에 새로운 삶, 혹은 ‘울음’과 ‘공책’으로 상징되는 글쓰기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러한 엔딩은 90년대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종결법입니다. 아울러 2000년대의 젊은 소설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저항과 판타지가 동시에

 

  가족’이라는 남성적가부장적 권력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었던 작가들이 왜 이즈음에 이르러서 적극적으로 가족과의 화해를 소설화하기 시작했는지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작가 개인의 변화하고 말할 수도 있고, 가족을 매개로 한 시대상의 변화를 소설이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문학의 한켠에서는 가족’이라는 제도에 봉합되지 못할 구멍을 내는 작업들이 반복해서 시도되고 있는데, 다른 한켠에서는 그 구멍을 판타지로 봉합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각각의 시도가 무엇을 포착하고 있고, 또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건 독자들의 몫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에게 ‘가족’이 치명적인 매혹으로 다가온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매혹이 존재하는 한, 소설과 가족의 결합은 필연적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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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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