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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계에 선 타자와의 소통, 그 두가지 모습

  • 작성일 2009-01-19
  • 조회수 927


 
경계가 없다는 상상해보신 적 있나요

 

“국가의 경계가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어렵지 않아요/죽이지도 않고, 죽일 일도 없고/종교도 없고,/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날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몰라요/하지만 나만 이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니에요/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은/생각을 가지게 될 거에요”

비틀즈의 리더였던 존 레넌(John Lennon, 사진 왼쪽)이 1971년에 발표한 <이매진(imagine)>의 한 소절입니다. 1960년대, 젊음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비틀즈 해체 이후 위대한 몽상가로 변신했습니다. 1969년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에 항의하는 뜻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받은 MBE 훈장을 반납하고 영국과 미국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War is Over! (If You Want I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화 캠페인을 벌였지요.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지만 그가 상상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세계는 여전히 인종, 종교, 이념에 의해 구획되어 있고,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국가의 경계는 느슨해졌지만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들에게 국가의 경계와 위력은 견고하기만 하지요. 국가의 너머엔 또 다른 국가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세상에는 국가 영토가 아닌 곳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계들, 가령 국가, 종교, 이념의 경계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한 예술은 언제나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완고한 경계들을 허무는 해방에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에서 예술가는 몽상가야 합니다.

 


국경 밖 사람들이라고 모두 외국인?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국경 저편에서 온 사람을 ‘외국인’이라고 부릅니다. 국경 저편에 오직 다른 국가만, 다른 국가의 국민만이 살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호칭이겠지요. 그런데 정말 국경 너머의 모든 사람을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한 일일까요? ‘외국인’이라는 호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국가[國]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떤 국가의 일원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독립을 저지당한 상태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팔레스티나인들, 그리고 국적을 박탈당한 이민자들이나 망명객이 되어 타국의 보호를 구하는 사람들은 엄밀하게 말해 국가[國]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은 외국인이 아닙니다. 영화 <터미널>(The Terminal, 사진 위)을 떠올려 보세요. 동유럽의 소국(小國) 크로코지아의 나보스키는 부푼 가슴을 안고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지만, 그가 입국 심사대를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고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지요. 유령 국가, 그러니까 일시적이나마 크로코지아라는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주인공 나보스키는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뉴욕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지요. 비자나 여권이란 ‘국가’가 보증할 때에만 효력을 발생하는데, 그 국가가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그에게 허용된 곳은 공항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항’이란 경계이지요. 입국과 출국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 한 국가의 영토 안에 있지만 아직 입국심사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 공항이란 그런 곳입니다. 자신의 여권을 증명해 줄 국가가 사라짐으로써 그는 졸지에 망명객이나 난민의 입장에 처하게 되지요. 바로 그때, 미국인들에게 나보스키는 국경 밖에서 온 이방인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를 외국인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지요.


외국인, 한국문학에 등장하기 시작하다


 

외국인, 혹은 이민자들의 등장은 일찍이 한국문학이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우리가 피부로 체감하고 있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질, 그러면서도 이미 충분하게 강력한 현실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문학은 ‘한국’,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뚜렷한 경계선 안에서 생산-소비되어 왔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예외가 규칙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정도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문학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문학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한국문학의 밑바닥에는 정서적 유대감 같은 것이 깔려 있습니다. 이 정서적인 유대가 바로 ‘감동’의 원천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의 작가들이 이주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전 지구적 자본화에 대한 문학적 대응인 셈이지요. 굳이 해외시장 운운하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문학은 ‘한국적’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에만 호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상황 앞에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논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논리를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식으로 뒤집어도 설득력은 없습니다. 외국인 혹은 이주자와의 만남은 이제 문학의 절박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소통(疏通)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차이




김연수(사진 왼쪽)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
(《현대문학》 2007년 1월호)와 손홍규(사진 오른쪽)의 「이무기사냥꾼」(《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은 외국인/이주노동자와의 만남(소통)에 관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소통의 양상에서 두 작품은 색깔이 많이 다릅니다. 소통(疏通)이란 떨어져 있는 것들, 낯선 것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동일한 것은 결코 소통하지 않지요. 동일한 것, 정서적인 유대나 이념적인 지향의 공통성 내에서 소통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들 안에도 이질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질성은 동일성의 내부에서 포착되는 양적인 차이일 따름입니다. 다른 것들만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소통이란 ‘다름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과 구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동일한 언어규칙을 공유한 집단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언어의 정확한 의미를 공유/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언어규칙이나 의미의 공유 없이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정보)를 오류 없이 주고받는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물론 동일한 언어규칙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는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법하니까요. 그렇지만 오직 한국어만을 아는 사람과, 오직 영어만을 아는 사람 사이, 그러니까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합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양자가 상대의 언어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소통(疏通)은 동일한 언어규칙, 혹은 정서적 유대라는 공통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소통’이 말처럼 쉽지 않은 까닭도 이 때문이지요. 소통이 ‘언어’를 매개로 한 대화로 이해될 때, 소통은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소통이 이질적인 것들을 아름답게 만나게 한다는 이상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공유하는 것이 없는 존재들 사이의 만남이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바람에 불과합니다. 소통은 관계 그 자체를 가리키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결과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관심만 있다면.... 언어가 무슨 상관이람”



    *김연수 작가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실린 현대문학 2007년 1월호 표지*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는 사트비르 싱이라는 인도인이 등장합니다. 아내의 대화 상대이자 외국인 친구인 싱이 한 해의 마지막 날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 ‘나’의 집을 찾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친구”인 인도인이 피아노를 조율하러 올 것이라는 아내의 예고가 있었지만 낯선 이방인과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은 ‘나’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싱이 ‘나’에게 한 첫 말 - “저는 매일 터번 쓰지 못하겠어요. 한국 사람들 안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1시간 버스 타야 합니다. 버스에서 술 취한 사람들, 알 카에다 말합니다. 버스에서 개새끼들 있습니다. 그치? 오늘은 명절, 터번 쓰겠습니다.” - 은 재미있으면서도 황당합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렇지만 적응하기는 어려운, 비문투성이의 한국어이지요. 비문도 비문이거니와 ‘나’는, 아내의 말투를 흉내 내는 듯한 ‘그치?’라는 이방인의 표현법에 적지 않게 놀랍니다. 친밀감을 표현하는 이 ‘그치?’라는 표현이 친밀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발화될 때, 그것은 이상한 언어가 되지요. 소설은 아내와 나의 비소통적 관계, 그리고 아내와 싱의 소통적 관계, 그리고 피아노를 매개로 한 노인과 ‘나’의 관계를 ‘나’가 서투른 영어로 싱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외국인과의 한국어 대화는, 짐작할 수 있듯이, 계속해서 의미체계에서 미끄러집니다. ‘나’는 낯선 이방인에게 한국어로 ‘외로움’을 설명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또 있습니다. 아내
시크교도 사트비르 싱, 한국에 돈을 벌려고 온 외국인노동자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아내와 싱을 소통시킨 것은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아내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은 남편인 ‘나’가 아니라 친구인 사트비르 싱이었던 셈이지요.

아내가 돌아올 시간까지 ‘나’와 사트비르 싱은 어색함 속에서 말을 주고받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아내가 싱에게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아내는 싱에게 영어로, 싱은 아내에게 한국어로,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서툰 언어로 소통을 해 왔던 것입니다. 가령 싱의 언어는 이렇습니다. “그리고 헤진 영어 말합니다. Always I wanted a baby. I want to be a elephant like this. I am alone. I feel lonely. 혜진 영어 잘 못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한국말 잘 못합니다. 혜진 영어 말하면 저는 한국말 합니다. 서로 서로 틀린 부분을 고쳐줍니다. 항상 저는 아기 원하겠습니다. 저는 이 코끼리 되기를 원하겠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저는…….” 아내와 싱의 “말하자면 친구” 관계는, 그러니까 아내가 일방적으로 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는 대칭적 관계였던 셈이지요. lonely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지만, 정작 그것을 한국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싱. 언어의 번역불가능성, 그렇지만 그들의 소통은 이미 언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작가는 소통이 언어의 문제를 초월하는 것임을, 아울러 소통-관계가 수직적일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서로 서로 틀린 부분을 고쳐줄 수 있는 인내심과 관심이 있다면, 언어가 무슨 상관이겠냐는 것이겠지요. 그러니「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서 ‘모두’는 한국인이라는 혈통적․정서적 경계선을 넘어선 지점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의 확장으로서의 ‘우리’가 아닌, 낯선 것들끼리의 비언어적 소통 경험을 작가는 ‘모두’라는 부사에 담으려는 듯합니다. ‘우리’와 ‘모두’의 이 미묘한 차이에 내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선 이들



손홍규의 「이무기 사냥꾼」(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 통권 제43호)을 소통에 대한 비관적 버전이라고 평가하는 건 과장일까요.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용태와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인 알리입니다. 물론 이 소설은 외국인노동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힘없고 나약한 존재들의 생존법, 즉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비루한 존재들의 삶 이야기입니다. ‘죽은 시늉’을 통해서 매번 위기의 순간을 넘기는 알리의 생존법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공동체의 폭력이 있을 때마다 죽은 시늉을 함으로써 살아남는 용태의 부모는 “힘없고 나약한 것들은 일쑤 이처럼 죽은 체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동류입니다. 용태의 부모에 대한 공동체의 배제 논리는 표면상으로는 ‘상피 붙은 자식’이지만, 우리는 레드컴플렉스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용태 부모를 희생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용태의 부모는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타자인 셈이고, 때문에 그들은 공동체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존재인 셈이지요. 다시 말하거니와, 이 소설은 소통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배제적 포함과 포함적 배제를 통해서 작동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죽은 척하는 연기를 통해서 공동체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배제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의 절박함 앞에 무너지는 소통의 가능성




이 소설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용태 가족을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마을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배제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국이라는 민족공동체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는 이들 공동체는 배제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합니다. 공동체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용태의 부모와 이주노동자 알리 역시 동일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경계’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도 위계를 만들어내려는 심리적인 노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령 체불 임금을 달라며 외국인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사장은 조선족인 장에게 “자네는 저런 놈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배달민족이잖어.”라고 민족적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그를 회유합니다. 용태 역시 캐나다 입국을 거부당하고 강제추방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비록 강제추방되는 신세인 건 피차일반이라 해도 더럽고 못생긴 작자들과 한보따리로 취급된다는 게 못내 억울했다.”처럼 인종적 위계를 주장합니다. 공동체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종적 위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작품의 결말에서 알리는 보기 좋게 용태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납니다. 옥탑방의 보증금을 들고 도망치려는 용태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알리가 먼저 그 돈을 챙겨 도망간 것이지요. 경계에 선 비루한 삶에서 타자와의 소통이란 이렇게 먼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소통보다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성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타자에 대한 환대,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가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손홍규의 소설은 이처럼 인간과 동물, 혹은 공동체의 경계에 선 삶을 내세워 소통의 (불)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합니다. 삶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가슴 아프게 되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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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된 작품 저자 소개*


 

손홍규

 

김연수

소설가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

2004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지은 책으로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등이 있음

   

소설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성균관대 영문학과 졸업

지은책으로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굳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랑이라니, 선영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등이 있음

작가세계문학상,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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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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