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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 작성일 2008-12-22
  • 조회수 704



 


 
사랑과 감정이 금기어가 된 도시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알파빌(Alphaville)>은 ‘감정’이 부재하는 세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사랑’이 금지된 도시가 나옵니다. 동료의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수사요원 레미 코션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감정마저 통제하는 알파 컴퓨터의 개발자 본 브론(폰 브라운) 박사를 찾기 위해 ‘피가로-프라우다’의 기자로 위장하고 도시 알파빌에 들어가지요. 알파빌은 논리가 지배하는 도시입니다. 도시라기보다는 국가에 가깝고, 그보다는 ‘세계’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지요. 그곳을 지배하는 건 브라운 박사가 개발한 알파 60이라는 컴퓨터입니다. 그곳은 감정이 죄가 되는 곳입니다. 단적으로 ‘사랑’이 금지된 곳이지요. 사랑만이 아닙니다. 눈물, 희망, 절망, 고독 등의 인간적 감정은 그곳에서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이 영화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린 한 남자를 처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총에 맞은 남자가 수용장으로 떨어졌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어 남자를 난도질하는 장면,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레미 코션은 그곳에서 사랑과 슬픔을 느낍니다. ‘슬픔’이 감정으로부터 소외된 그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느낌이라면, ‘사랑’은 자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파견된 나스타샤에 대한 코션의 감정입니다. 알파빌의 인간들은 슬픔도 사랑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이방인 레미 코션만이 그것들을 느낄 따름이지요. 이 영화는 분명 산업사회와 전체주의에 대한 풍자입니다. 주인공이 ‘피가로-프라우다’의 기자를 사칭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피가로는 프랑스 우익의 대변지였고, 프라우다는 구(舊)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 이름입니다. 그러니 고다르의 <알파빌>은 디스토피아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소설에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다 


  최근 한국소설에도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체들의 세계를 소설화하는 편혜영과 폭력의 세계를 소설화하는 백가흠이 대표적입니다. 편혜영의 단편 「문득」은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자꾸 영화 <알파빌>이 떠오르곤 합니다. ‘디스토피아’라는 시각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영화 <알파빌>은 SF에 해당하지만, 편혜영의 「문득」은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극사실주의적이지요. 아마도 내가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고다르의 영화를 떠올린 까닭은 어떤 ‘가치’나 ‘관념’이 부재하는 세계라는 공통점 때문일 겁니다. <알파빌>에는 감정이 없고, 편혜영의 소설에는 ‘왜’가 없습니다. 고다르의 <알파빌>에선 ‘사랑’이 금기어이고, 편혜영의 「문득」에선 ‘왜’가 금기어입니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먼저,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 하나를 빼버리기만 하면, 혹은 어떤 가치를 금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세상은 금세 이상한 곳이 되고 맙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화와 소설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다는 건 그만큼 지금-이곳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소설이 세계 속의 인간실존을 다루는 것이라면, 현실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어떤 단어 하나를 금지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발상인 것 같습니다.


 “질문은 사양!!, 그냥 시체처럼 살아라”


  편혜영의 「문득」(『아오이가든』, 문학과지성사, 2005)은 ‘시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니, 사실은 시체에 ‘의한’ 이야기이지요.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날 왕피천에서 시체 한 구가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옵니다. 빨간색 터틀넥을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입니다. 여자의 시체가 올라온 왕피천 옆에는 종유석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동굴은 옛 왕조의 전쟁 때 주민 오백여 명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가 적군이 동굴 입구를 막아버려서 몰살되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관광객들은 이 동굴에 종유석을 보러 오지만, 실상 이곳은 죽음의 공간인 셈이지요. 죽음과 어둠의 공간, 이 동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맹수나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동굴의 관리소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온 여자가 바로 그녀입니다. 영화 <식스센스>에서의 브루스 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이미 죽은 시체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시체입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지독한 냄새에 시달립니다. 자신이 썩는 냄새를 맡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요.

  그녀를 죽인 것 그녀의 남편입니다. 공사장 벽돌공인 그녀의 남편은 2년째 마라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벽돌만 쌓던 그는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네 시간 만에 완주하기, 이것이 그녀의 남편이 지닌 목표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왜’ 마라톤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고 물으면, 남편은 “그냥 뛰지. 너는 왜 처먹냐? 살려고 처먹는 거 아니냐. 사는 데 이유 있냐?”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늘 여자를 때렸다. 그냥 때렸다. 사는 데 이유가 없는데 때리는 것에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콤플렉스가 있거나 여자의 순결을 의심하거나 어릴 때 폭력 가정에서 자란 상처가 있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소심함을 가장하기 위해 술만 먹으면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때리는 것이지, 규칙성도 없고 인과성도 없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죽은 건지 산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중략… 그는 계속 때렸다. 무엇에든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틀릴 수도 있었다. 



  남편의 폭력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으니 폭력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짐작할 수도 없지요. 어느 날 그녀는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맞았고, 또 남편에게 목이 졸렸습니다. 숨이 막혀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순간에 그녀는 기절했고, 깨어난 다음 남편이 돌로 쳐 죽인 고양이 제니퍼의 멀쩡한 모습을 봅니다. 아마도 이때부터가 시체에 ‘의한’ 이야기일 겁니다. 소설은 시체와 시체 아닌 사람들의 일상을 교묘하게 뒤섞어 놓음으로써 그녀가 시체라는 사실을 은폐하면서도, 동시에 그녀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시취를 맡게 함으로써 그녀가 시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한 번은 그녀가 근무하는 동굴에 한 아이가 나타납니다. 오백 명의 죽음을 설명하는 그녀에게 그 아이는 “그런데 왜 아줌마는 죽은 사람을 사람이라고 불러요?”라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죽은 사람을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이에게 산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죽은 사람도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자기가 살아 있다거나 죽었다고 느끼는 건 어느 한 순간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아, 내가 살았구나, 아, 참, 내가 죽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구.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편혜영의 소설은 어떤 경우에 ‘시체들’과 ‘산 사람’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무섭고, 또 가장 슬픈 대목입니다. 매일처럼 남편에게 이유 없는 구타를 당하고,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매일처럼 목이 긴 스웨터를 입고 다녀야만 했던 그녀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소설 속 여자의 말처럼 세상 모든 일에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혹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아찔해집니다. ‘왜’는 실존의 언어입니다. 그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인과적인 문제와는 다릅니다. ‘왜’ 속에는 삶에 투여되는 개인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앞에 시체를 들이밀면서 작가는 ‘이게 인간의 본모습이야’라고 말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왜’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동물’과 ‘비인(非人)’과 ‘시체’의 경계를 왕복하면서 살아가는 것 말이에요.


비정상/장애라는 낙인, 폭력의 명분되다      


  백가흠의 「배꽃이 지고」(『귀뚜라미가 온다』, 문학동네, 2005) 역시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인적이 드문 계곡 사이에 과수원이 있습니다. 이 과수원에는 과수원 주인 사내와 그의 늙은 아내 과수원댁, 병출과 그의 아내 개순,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의 일상을 자세히 보면 ‘살고 있다’라는 말이 참 무색하기만 합니다. 병출과 개순은 정신지체 장애인이고, 과수원댁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지체 장애인입니다. 이 과수원집에서 “멀쩡한 사람은 주인 사내”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내는 가족 혹은 동거인들에게 ‘주인’ 행세를 합니다. 주인과 노예의 세계, 그곳에서 주인이 노예를 다루는 방식은 무지막지한 폭력입니다. 먼저, 과수원댁에게 주인의 ‘매질’은 일상의 시작입니다. 그녀에 대한 남편의 폭력 역시 이유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개순, 개순에 대한 과수원 사내의 폭력은 성적인 방식을 취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겁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꾼으로 데리고 온 사내에게 그녀와의 성관계를 허락하기도 합니다. 과수원 사내가 아내를 겁탈할 때마다 병출은 미미한 불쾌감을 표출하지만, 그 불쾌감에 대한 주인 사내의 반응 또한 폭력입니다. 주인 사내의 폭력은 병출 부부의 갓난아기를 마루 위로 집어던져 살해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합니다. 사내에게 맞아서 이가 부러진 병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과수원댁, 그리고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아야 하는 개순, 그들은 모두 폭력의 희생자입니다.


  시벌, 그 새끼 좀 갖다버리랑게.

  사내가 달려와 아버지 등에 업혀 있는 아이를 번쩍 듭니다. 병출씨는 움찔하며 살짝 옆으로 비켜서고, 여자는 멍하니 쳐다봅니다. 과수원댁은 꼼짝도 하지 않고 땅바닥에 뻗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막아야 했지만, 아무도 사내를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과수원집에서 정상인 사람은 오직 사내뿐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에 번쩍 들린 아이가 발악을 하며 몸부림칩니다. 사내가 아이를 마루 위로 집어던집니다. 아이가 벽에 부딪히더니 마루로 떨어집니다. 순식간에 아이 울음소리가 멈춥니다.



  편혜영의 「문득」에서 폭력이 남편의 ‘힘’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면, 백가흠의 「배꽃이 지고」에서 과수원 사내의 폭력 역시 ‘힘’에 근거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상인과 장애인, 주인과 노예라는 도식에 근거하고 있어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 혹은 장애인에 대한 정상인의 태도를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여줍니다. ‘장애우’라는 완곡하고 친근한 표현을 쓰면서도, 우리의 마음 한켠에는 정상인이 사회의 주인이고, 그러니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의사결정을 못 한다고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그들을 항상 정상인의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하려는 태도는, 과수원 사내의 폭력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에 대한 심각한 폭력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주인이라고 내세우는 이 과수원 사내의 행동에서 우리는 ‘장애인=정상인의 타자’라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내가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 폭력의 이유라면 이유일 것입니다. 사내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모자란 새끼들”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으로 본다면 사내가 비정상적인 인물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어느 누구도 사내를 주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지만, 매를 맞으면서 그들은 점점 주인과 노예라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모자라서이기도 하고, 사내를 제압할 힘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법이 폭력의 대안일 수 있을까? 

 

여기서 ‘폭력’에 대해 ‘평화’의 소중함을 역설하거나, ‘법’의 중요성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평화는 중요한 가치이고, 또 아내를 살해하거나 장애인을 감금, 착취하면 법을 위반하는 일이 됩니다. 국어사전의 ‘폭력’ 항목에는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이라고 적혀 있군요. 이 뜻으로만 본다면 ‘법’이 ‘폭력’의 반대말은 아니군요. 각종 집회를 해산시키려고 동원되는 공권력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잖아요. 다른 점이 있다면, 법의 폭력은 허가를 받은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발터 벤야민은 경찰의 이런 폭력을 법 보존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이라고 규정했지요. 경찰은 이미 만들어진 법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데, 국가는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해 일일이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경찰에게 일종의 권한을 부여하게 되고, 그 때문에 법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경찰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법을 위반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찰의 폭력은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법을 초월해 있지요. 이야기가 맥락을 벗어났지만, ‘폭력’의 반대가 곧 ‘평화’는 아니며, ‘법’이 모든 폭력을 없애준다는 말 역시 거짓입니다. 그러니까 두 편의 소설을 단순히 폭력에 대한 비판으로만 읽어선 안 됩니다. 

  폭력을 통해 세계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편혜영과 백가흠의 소설은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폭력’이 예외적인 경우에, 혹은 운이 나쁘거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형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행해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소설들에서 ‘폭력’은 일상의 예외가 아니라 정확하게 일상 그 자체입니다. 폭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두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폭력에 대한 소설적 과장보다 지금-이곳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는 작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은 때때로 자기가 왜 존재하는가를 안다고 믿어야 한다. 인간 종족은 삶에의 주기적인 신뢰 없이는 번영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우리에게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강제합니다.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에야 이 질문은 우리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지만, 또 불행한 삶은 종종 ‘왜’라는 물음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고문’한다고 합니다. ‘고문’이란 신체나 정신을 괴롭게 만듦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이 없을 때, 세상은 두 편의 소설이 보여주듯이 명령과 복종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질문이 있어 비로소 소설은 인간적  

  두 편의 소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서구의 실존철학 역시 ‘왜’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져나갈 수 있는 능동성, 즉 기투성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과 사물의 차이를 이 능동성과 물음의 가능성에서 찾습니다.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사물은 다르지 않지만, 인간은 이미-항상 자신의 현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세계의 안에 포함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제 방식으로 요약하면 ‘왜’라는 물음일 겁니다. 물음이 없는 곳엔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바람에 날아가는 비닐봉지는 물음 없이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힘/능력으로 운동하는 게 아니지요. 하이데거의 말처럼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왜’라는 물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권력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탐탁해하지 않습니다. 귀찮고, 번거롭고, 까다롭다고 생각하지요. 어떤 경우엔, ‘왜’라고 질문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지요. 아니, 그런 사람들을 만드는 게 권력의 목표일 겁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유는 ‘왜’라는 물음 없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소설이 인간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질문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왜’는 단순한 궁금증의 표현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사유하려는 자들이 내딛게 되는 첫 발걸음입니다. ‘폭력’은 ‘왜’라는 물음에 대해 답할 수 없는 자의 무능력이 표출되는 방식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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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1. 백가흠


소설가
1974년 전북 익산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수료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광어」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

작품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2005)와『조대리의 트렁크』(2007)가 있음


2. 편혜영


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이슬털기」가 당선돼 등단 

소설집으로 『아오이가든』『사육장 쪽으로』가 있음
2007년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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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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