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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통해서본 ‘현실’의 의미

  • 작성일 2008-05-09
  • 조회수 610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 de Cervantes, 1547~1616)가 1605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돈 키호테』는 세계문학사 상 가장 익살스러운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누가 어떻게 세어보았는지 모르지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직접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간 알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한 찬사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돈 키호테』보다 더 심오하고 힘 있는 작품을 만난 적이 없다.”라고 했고, 윌리엄 포크너는 “매년 성경처럼 『돈 키호테』를 읽는다.”라고 고백했으며, 토마스 만은 “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비범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인가?”라고 경탄했고, 밀란 쿤데라는 “돈 키호테보다 더 살아있는 캐릭터는 없다.”고 추어올렸다지요.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도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목으로 지난 수십 년간 문단을 주도해 왔던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의 평가가 인상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교양인의 책읽기』에 이렇게 썼지요.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의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인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사는 폴스타프와 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말은 블룸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라고 했다지요.

블룸에 있어서 셰익스피어는 “플라톤이나 헤겔보다 더 방대하고 오묘”한 지혜를 가진 현인이자, “비평가로서의 절망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천재성을 가진 작가랍니다. 그런 그가 세르반테스를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에의 희곡 가운데 “몰리에르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희극적 성공을 거둔” 『한 여름 밤의 꿈』을 포함한 희극작품을 다 합쳐야 『돈 키호테』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돈 키호테』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돈 키호테』는 도대체 어떤 소설일까요? 얼마나 대단한 소설이기에 지난 4백 년 동안 한결같은 찬사들을 들을까요?


『돈 키호테』는 어떤 소설일까


기 넘치는 향사 돈 키호테 데 라만차』가 원제인 『돈 키호테』는 모두 2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1605년 세르반테스가 57세 되던 해에 발표한 1편은 4부 52장으로 구성되었지요. 그 가운데는 돈 키호테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31장이고, 그 사이사이에 ‘액자소설’ 형식으로 끼어든 다른 이야기들이 모두 21장이 있습니다.

소설은 “유명하고도 용감한 시골 귀족 돈 키호테 데 라만차의 신상과 일상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이름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나이는 오십 가까운” 가난한 시골 귀족(hidalgo; 스페인 귀족 중 가장 낮은 계급)이 살았지요. “키하다 또는 케사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사실은 1년 내내 한가했지만” 어쨌든 한가할 때마다 “기사소설에 빠져든 나머지” 논밭까지 팔아 기사소설을 사 읽었습니다.

그 결과 “이미 이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편력기사가 되어 “자신의 명성과 이름을 길이 남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중세의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자신에게 돈 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인 뒤, 7월 어느 이른 새벽에 마구간에서 늙은 말을 끌어내 자신이 늑장을 부릴수록 세상이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겠는가 하는 생각에 쫓겨 서둘러 길을 떠나지요.

그는 기사소설에 나오는 우스꽝스런 표현과 말투로 대화하고, 주막집을 웅장한 성으로, 주막집주인을 성주, 몸 파는 창녀들을 귀부인으로 인식합니다. 그에게는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그가 읽어온 글들과 같은 모양새”로 인식되기 때문이지요. 이때 돈 키호테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이 기사 임명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막집주인 알리아스를 억지로 부추겨 그로부터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기사로 임명을 받습니다.

마침내 편력기사가 되어 기분이 좋아진 돈 키호테는 어린 목동을 채찍질하는 농부를 저지하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톨레도 상인들에게 자신이 귀부인으로 섬기기로 정한 둘시네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하지요. 그녀를 보여주어야 그렇게 하겠다는 상인들에게 돈 키호테는 “중요한 것은 보지 않고도 믿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라며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갑옷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맞아 “묵사발”이 되지요. 쓰러져 있는 그를 지나가던 고향 농부가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오면서 1차 원정이 끝납니다.

돈 키호테의 기이한 행동이 기사소설 때문이라고 생각한 조카딸, 가정부, 동네 이발사 그리고 신부는 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불살라버리지요. 그러나 이틀 후에 깨어난 돈 키호테는 시골 농부인 산초 판사를 섬의 총독이 되게 해주겠다고 꾀어 어느 날 새벽 아무도 모르게 함께 2차 원정에 나섭니다.

그리고 곧바로 『돈 키호테』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모험을 하게 됩니다. 거대한 풍차와의 싸움이지요. 돈 키호테는 들판에 있는 삼사십 개의 풍차를 보자마자 거인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서 악의 씨를 뽑아버리는” 선한 싸움을 시작하지요. 어리둥절해진 산초 판사가 “거인이라뇨?”라고 외치는 순간, 돈 키호테는 “입 다물어라, 산초 판사!”라고 외치며 말을 몰아 풍차로 돌진해갑니다. 그리고 풍차날개에 낚아채여 들판에 나동그라지지요.

그 후에도 이러한 우스꽝스런 모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계속됩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고행자들의 행렬을 악당으로 오인하고 싸워 패하고 두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1편이 끝납니다. 한데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1편 가운데 1부가 끝나는 8장 끝부분, 즉 돈 키호테가 바스카야인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갑자기 원작가가 써놓은 원고가 바닥이 났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중단해 버리지요. 그런데 “제2의 작가”인 자기가 그 이후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어” 이어지는 이야기를 찾았다면서 2부를 시작합니다.

말인즉슨, 그가 톨레도와 알카나 시장을 거닐다가 우연히 아랍의 역사학자인 아메테 베넹헬리가 아랍어로 쓴 『돈 키호테 데 라만차 이야기』를 주어서 그것을 무어인에게 스페인어로 번역하게 하여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돈 키호테』의 원작자는 아메테 베넹헬리이고 세르반테스는 단지 그것을 번역한 것을 다시 편집하여 쓴 사람에 불과하지요. 사실일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작가들이 합스부르크 왕조와 종교재판소에 의해 엄한 감시를 받았지요. 한 줄이라도 왕권과 가톨릭 교권을 비판하는 글을 쓴 작가들은 하루아침에 파리 목숨처럼 처형되었답니다. 그래서 당시 작가들은 매우 조심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원작자가 아니라고 밝히는 방법을 자주 썼다고 합니다. 세르반테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는 거지요.

세르반테스는 우선 자기가 원작자가 아니라는 것, 또 원작자와 번역자가 모두 아랍인인데 그들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 등을 내세워 자기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책임을 미리 회피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그는 소설적 흥미를 살리면서 동시에 자신도 살아남기 위한 다른 장치들도 『돈 키호테』 안에 만들었습니다.

돈 키호테를 정상인이 아닌 것으로 묘사한 것도 바로 그래서라고 하지요. 검열관의 눈을 피해 당시 사회와 교회, 성직자, 귀족들을 마음 놓고 비꼬고 풍자하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요. 또 작품 안에 진행되고 있는 줄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액자소설’을 1편에만 일곱 개나 끼어 넣은 것도 역시 그래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액자소설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두 사람이 벌이는 모험의 단조로움을 넘어서 더 풍성한 이야거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중세 사회의 봉건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새로 다가오는 근대적 가치관을 주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편의 12장에서 14장까지 이어지는 첫 번째 액자소설은 산양치기 여인 마르셀라와 그녀를 사랑하다 자살한 목동 그리소스토모의 이야기지요. 마르셀라는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닌데, 왜 “그저 재미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달려드는 남자에 의해 정절을 잃어야만” 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자기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기 위해” 초원의 고독을 선택했다고도 합니다. 이에 돈 키호테는 “이 세상에서 그녀만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그럼으로써 남녀평등과 자유라는 새로운 사상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돈 키호테는 광인일까


『돈 키호테』를 읽다보면 독자들은 참으로 기상천외한 그의 언행들에 포복절도하기 십상입니다. 스페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지요. 어떤 왕이 길을 가는데 한 젊은이가 무엄하게도 혼자 미친 듯이 웃어대고 있더랍니다. 신하들이 제지하려고 하자 그것을 본 왕이 “놓아둬라. 저 친구는 분명 『돈 키호테』를 읽고 있는 중이다.”라고 했다지요. 이런 이야기가 나올 만큼 『돈 키호테』는 매우 흥미롭고 유머러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서 웃음이 가실 때쯤이면 문득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돈 키호테는 광인일까, 아니면 광인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일까? 그가 광인이거나 광인인 척 연기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기상천외한 행동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지요.

풍차를 거인이라며 달려드는 것이나 산초에게 당나귀 세 마리를 주기로 약속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둘시네아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같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숱한 행동들을 보면 그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편지를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겠다고 떠나는 산초를 보고는 “언뜻 보아서는 네가 나보다 더 정신이 나간 것 같구나.”라고 하는 것이나 미치광이 짓을 보여준다며 “바지를 벗어버리고는 셔츠만 입은 벌거숭이가 되어” 물구나무를 서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는 단지 미친 척 연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돈 키호테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런 혼란스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 키호테를 각자 나름대로 광인이라거나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4백 년 동안 이 작품을 연구하고 찬사를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 예컨대 셀링, 하이네, 투르게네프, 엘리엇, 우나무노, 오르테가, 나보코프, 블로흐, 푸코 등은 돈 키호테를 정상인으로 인정하고 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돈 키호테가 정상인이라는 전제 아래 긍정적인 측면에서 다음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객관적인 세계’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정상인에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것이지요. 이 곤란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학술적 이론들이 있습니다. 생물학과 철학에서 나온 주장들인데, 우선 생물학에서 보지요.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독일의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J. v. Uexküll, 1864~1944)은 오랫동안 동물들의 행동에 대해 연구한 끝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똑같은 하나의 ‘객관적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가상세계’를 스스로 구성하여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저서 『생물에서 본 세계』에 실린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지요.

인간의 행동 빠르기로는 지각할 수 있는 순간의 길이가 18분의 1초랍니다. 따라서 사람의 눈은 18분의 1초보다 짧은 시각은 인지하지 못한다지요. 그래서 연이어지는 그림을 1초에 18장 이상 빠르기로 보여주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랍니다. 이것이 활동사진, 곧 영화의 원리이지요. 마찬가지로 귀는 공기 진동이 1초에 18 이상이 되면 단일한 소리로만 듣고, 피부는 1초에 18번 이상 타격을 주면, 하나의 지속적인 타격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보다 훨씬 빠른 버들붕어는 어떤 영상을 1초간에 30회 이상 보여주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한답니다. 반대로 달팽이는 1초에 3회 이하로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의 움직임만 알아볼 수 있고, 1초에 4회 이상 움직이는 물체는 고정된 것으로 본다지요. 때문에 버들붕어가 순식간에 어린 송사리를 잡아먹는 것을 달팽이는 보지 못하고, 달팽이가 느려터지게 배춧잎을 갉아먹는 것도 버들붕어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답니다. 그런 일들이 서로의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말이지요.

또 배추흰나비는 빨강색은 보지 못한답니다. 단지 노랑색에서 자외색까지를 보지요. 그러나 호랑나비는 빨강색부터 자외색까지를 모두 인식한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장미들이 만발한 6월의 정원을 날아다니는 호랑나비에게는 노란 장미와 빨간 장미가 피어 있다는 것이 ‘참’이지만, 함께 어우러져 날고 있는 배추흰나비에게는 노란 장미만이 있다는 것이 ‘참’이지요. 

이 같은 실험들을 통해 스퀼이 내린 결론은 단순하지만 매우 놀랍습니다.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무수히 다양한 가상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스퀼은 이런 가상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세계들 사이에는 어느 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인식은 그가 구성한 환경세계에 의한 해석일 뿐이지요. 이를테면 들녘에 만발한 꽃은 아름다운 장식을 만들려는 소녀의 환경세계에서는 하나의 장식품입니다. 하지만 꽃줄기를 이용하여 꽃 속에 있는 먹이들에게로 가려는 개미의 환경세계에서는 길이고, 꽃을 뜯어먹는 소의 환경세계에서는 먹이지요. 이들 중 어느 누구의 해석이 ‘참되다’거나 ‘거짓되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인지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H. Maturana, 1928~)와 그의 동료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들도 ‘인지’는 주어진 외부 세계를 우리의 정신 안에 그대로 그려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스스로의 “삶 속에서 스스로 구성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놓는 작업”이라고 했지요. 요컨대 우리는 모두 인지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산다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의 삶이 다시 우리의 인지를 만듭니다. 인지와 삶이 순환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구성하기 때문에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고, 세계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에 다시 우리가 세계를 ‘그렇게’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마투라나는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고 표현했지요.

여기에서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의 우주를 창조한다.”라는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W. Churchill,1874~1965)의 말이나 “선한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천국을 경험하고, 악한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옥을 경험한다.”라는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 1797~1856)의 말을 한번 떠올려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요. 이 말들이 스퀼이나 마투라나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 듯 보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들은 단지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를 말했을 뿐이며 스퀼이나 마투라나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돈 키호테는 단지 특별한 사람일 뿐 미친 사람이라 할 수 없지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여 그 안에서 인식하고 행동하며 산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그가 구성한 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사도 이야기’에 근거해 있다는 것뿐입니다. 혹시 바로 그것이 돈 키호테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이어 소개하고 싶은 철학이론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실행한 ‘세계’에 대한 사유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세계란 객관적․물리적 시공간이 아닙니다. 스퀼과 마투라나가 간파한 바와 같이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의 해석이며 풍경화이자 시(詩)랍니다.


돈 키호테는 왜 ‘이름 짓기’에 골몰했을까


       


돈 키호테가 광인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고 볼 경우, 그가 하는 행동들 중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름 짓기’지요. 돈 키호테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편력기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에게는 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갑옷과 종마와 사모하는 여인이지요.

그래서 그는 우선 “오래전 증조부님들이 쓰던” 녹슬고 곰팡이 핀 투구와 갑옷을 적당히 손질해서 걸치고 비쩍 마른 늙은 말을 마구간에서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알렉산더의 부세팔루스나 엘 시드의 비비에카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그 말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지 “장장 나흘 동안이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시난테(Rocinante)’로 정하지요. 스페인어로 ‘로신(rocin)’이란 늙은 말이고 ‘안테(-ante)’는 최고를 나타내는 어미라니, 결국 ‘최고의 늙은 말’이라는 뜻을 가진 멋진 이름이지요.

그 다음 “다시 여드레를” 고민한 끝에 자신의 이름도 ‘돈 키호테 데 라만차’로 바꿉니다. ‘돈(Don)’은 귀족계급의 남자를 나타내고 거기에 자신의 성씨인 ‘키하다’를 위엄 있게 ‘키호테(Quixote)’로 변조하여 만들었지요. 그리고 전설의 기사인 아마디스가 “조국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에 덧붙여” ‘아마디스 데 기울라’라고 한 것을 흉내 내어, 그의 고향의 이름을 덧붙여 ‘돈 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한 겁니다.   

이제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사모하는 여인인데, 이유인즉 그의 생각에 “사랑 없는 편력기사는 잎새와 열매가 없는 나무요, 영혼 없는 육체와 같기” 때문이었지요. 마침 마을 인근에 ‘알돈사 로렌소’라는 아리따운 농부 처녀가 살고 있었답니다. 돈 키호테는 그녀를 “마음속 연인”으로 삼고, 다시 여러 날 고심하여 “자신의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리고 공주나 귀부인에 잘 맞는 이름을 골라”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이것이 편력기사로서 돈 키호테가 한 첫 번째 일입니다.

한데, 그는 왜 이렇게 이름 짓기에 골몰했을까요? 모를 일이지만, 한번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이름 짓기란 본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지요.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엄마’, ‘아빠’, ‘맘마’와 같은 아주 소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묘사합니다. 그밖에는 모두 ‘그거’나 ‘저거’지요. 그만큼 단순한데, 이것이 아이가 이해하고 구성한 아이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더 많은 대상들을 이해할수록 차츰 더 많은 이름들이 아이의 세계로 편입되지요. 그럼으로써 아이의 세계는 점차 세분화되고 복잡하게 구성됩니다.

이런 과정은 『구약 성서』에서 신이 각종 동물들을 아담에게 데려가 이름을 짓게 하는 것(창세기 2 : 19)에도 나타나있습니다. 아담이 만물에게 차례로 이름을 지어 준 일은 그가 점차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 나가는 행위로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이렇듯 이름 짓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갑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도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성하려고 새로운 이름 짓기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요. 연관하여 살펴볼 흥미로운 철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1927년 발표한 <존재와 시간>에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보지요. 자연은 관광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관광지로 이해됩니다. 해변은 해수욕가능성을 통해 해수욕장으로 이해되고, 산은 등산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등산지로 이해되지요. 또한 돌과 나무는 건축가능성을 통해 석재 또는 목재로 이해되고, 식물의 열매들은 식용가능성을 통해 곡식 또는 과일로 우리에게 이해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대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자신의 가능성들을 통해 언제나 “~을 ~으로” 이해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해(Verstehen)란 우리가 대상에게 그 쓸모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화(be-deuten)’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의미화 작업에 의해 ‘세계’가 우리에게 태어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즉 뉴턴이나 데카르트가 말하는 물리적․객관적 시공간과는 전혀 다르지요.

하이데거에 있어 ‘세계(Welt)’는 우리가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그 쓸모에 따라 의미를 지시해주는 바탕이자, 우리에 의해 구성된 ‘의미의 그물망’일 뿐입니다. 같은 말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쓸모라는 존재양식에서 만나게 하는 바탕, 즉 자기 지시적 이해가 행해지는 그곳이 다름 아닌 세계라는 현상이다.”라고 표현했지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란 다름 아닌 스퀼이 말하는 ‘환경세계’이며,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 구성한 하나의 세계”지요. 그리고 바로 이 세계를 우리는 일상 언어로 ‘현실(現實)’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은 각 개인마다 그 사람이 처해있는 ‘처지(Befindlichkeit)’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사람마다 그들의 존재가능성도 각각 다르며, 그에 따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가 어떤 나무의 열매를 그것의 식용가능성을 따라 똑같이 ‘과일’라고 이해한다고 하지요. 그렇더라도 과일은 요리를 위해서는 ‘식재료로’ 사용될 수 있고, 판매를 위해서는 ‘상품으로’ 진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상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처지’에 의해서 과일을 ‘상품으로’ 이해하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가 요리사라면 디저트를 위한 ‘식재료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대상에 의해 주어지는 존재가능성들을 자기의 처지에 의해서 정리하여 그 중 어떤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갖는 작업’을 하이데거는 ‘해석(Auslegung)’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해석은 이해보다 더 주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석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다음같이 말했지요.


“이해의 완수를 우리는 해석이라 부른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는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는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된다. 해석은 실존론적으로 이해를 바탕으로 성립되지, 거꾸로 해석을 통해서 이해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해에 의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고, 해석에 의해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셈이지요. 물론 이때 이해에 의해 드러난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이고 해석에 의해 드러난 나의 세계가 곧 ‘나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돈 키호테의 ‘이름 짓기’는 그만의 새로운 세계 해석, 곧 편력기사라는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에 의한 새로운 현실 해석의 첫걸음인 셈이지요.

돈 키호테는 본디 할 일 없는 시골 귀족으로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조금 더 넣어서 끓인 전골 요리를” 좋아 하고 “밤에는 주로 살피콘 요리를, 토요일에는 기름에 튀긴 베이컨과 계란을, 금요일에는 완두콩을, 일요일에는 새끼 비둘기 요리를 먹느라 재산의 4분의 3을 소비”할 만큼 소모적이고 퇴폐적으로 살던 노인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기사소설을 읽고 “처녀들을 지키고 과부를 돕고 고아들과 빈민들을 구제”하는 편력기사로서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석하여 구성한 그 세계, 곧 편력기사로서의 삶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늙은 말을 ‘로시난테’로, 자신을 ‘돈 키호테 데 만차’로, 이웃마을 처녀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로 이름 지었던 거지요. 이것은 과일을 상인이 상품으로, 그리고 요리사가 식재료로 해석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지요. 주막집을 웅장한 성으로, 주막집 주인을 성주로, 몸 파는 창녀들을 귀부인으로, 풍차를 거인으로, 종교 행렬을 적군의 기사들로, 면도 그릇을 전설에 나오는 투구로, 죄수들을 해적선에 나포된 불쌍한 노예들로 해석하여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돈 키호테는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 곧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갔던 거지요. 


돈 키호테와 시지프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의 이해에는 ‘본래적 이해’와 ‘비본래적 이해’가 있다고 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세계 구성에는 ‘본래적 구성’과 ‘비본래적 구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하이데거에 있어 ‘본래적’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존재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그것을 향해 자기를 내던지는 것’을 뜻합니다. 곧 ‘기획투사(Entwurf)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비본래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자기 자신에서 찾지 않고 ‘세상사람(世人)’에게서 찾는 것을 말하지요. 즉 ‘세상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서 이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이데거는 사람이 본래적으로 사는 것을 ‘실존’이라 하고, 비본래적으로 사는 것을 ‘퇴락’이라 했습니다. 실존은 진정한 자기로 사는 것이고, 퇴락은 진정한 삶을 회피하고 ‘세상사람’을 따라 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시골 귀족의 소모적이고 퇴락적인 삶을 버리고 편력기사로 나선 돈 키호테는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영웅적으로 묘사한 시지프 못지않게 ‘실존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달리 편력기사라는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송두리째 내던졌기 때문이지요.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는 그의 『돈 키호테 성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영웅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독창성보다 더 심오한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인습과 관행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존의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양식에 맞춰진다. 그러한 삶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습관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현실 문제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그 일부를 떼어내는 과정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르테가가 돈 키호테의 삶을 “습관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현실 문제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그 일부를 떼어내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돈 키호테의 삶을 실존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씻어버려야 할 불명예, 바로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무분별한 일, 개선해야 할 폐단과 해결해야 할 부채가 있는 한 하루라도 지체하는 건 세상에 대한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말에 노구를 싣고 거친 황야로 나간 돈 키호테의 모습에서 오르테가도 실존하는 영웅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물론 그 모습이 조금 무모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산꼭대기로 밀어 올린 바위가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지면 그것을 다시 정상을 향해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바위 밀어올리기’도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무모하고 우습긴 마찬가지가 아니던가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의 『희망의 원리』에 나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무언가 나사 빠진 인간이, 늙은 말을 타고, 과거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기괴한 광기에 사로잡혀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는 분명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주체가 결연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실천하려는 의지는 마치 세계의 반응이 거칠고 저열한 것만큼 그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자신의 손아귀를 통해서 모든 세계를 불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돈키호테의 의지는 정말로 위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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