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무협이란 무엇인가?

  • 작성일 2005-11-16
  • 조회수 2,234


 

 

'무협'- 협객이 무력을 사용, 약자를 돕는다

 

 

무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한 답부터 말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무(武)와 협(俠)에 관한 중국식 과장’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무’, ‘협’, 그리고 ‘중국식’ ‘과장’이라는 네 단어입니다.

 


‘무’는 무술(武術)이라고 할 때의 그 무를 말합니다. ‘협’이란 협객(俠客), 협의(俠義)라고 할 때의 협입니다. 이 두 가지가 ‘중국식’으로 ‘과장’되어 표현된 이야기가 무협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무협작가 양우생은 무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협이란 무와 협으로 이루어지는데, 혹시 무는 없어도 되지만 협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무와 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무보다는 협의 정신을 더 중요시하는 말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무협이라는 것이 실상 그러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협객의 정신이 제대로 표현된 소설은 중국에도, 한국에도 아주 드뭅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무협이란 무와 협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사실 협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것 없이도 무협은 성립된다.”

‘협’이라는 건 타인, 특히 약자를 돕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돕느냐고요? 바로 ‘무(武)’의 힘(=무력)을 사용해서 돕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우생의 규정대로 좁혀서 이야기한다면 무협이란 ‘협객이 무력을 사용해서 약자를 돕는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겠죠. 가령 이런 식입니다.

 

 옛날에 한 협객이 길을 가다가 슬피 울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사정을 물어보자 소년은 탐   관오리에게 부모와 재산을 잃었는데 자기는 약한지라 복수할 방법이 없어 그저 울고만 있다 고 한다. 협객은 농담 삼아서 소년에게 네 목숨을 내게 주면 내가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년은 반색을 하며 협객이 찬 칼을 잠시 빌려달라고 하더니 말릴 틈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어 죽었다. 협객은 입을 가벼이 놀린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죽은 소년의 복수를 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소년이 말한 그 탐관오리를 살해한 뒤 경비병들에게 자신도 목숨을 잃는다.

 

중국 고대의 전기문학에 나오는 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기(傳奇)라는 건 위인전기라고 할 때의 그 전기(傳記)가 아닙니다. 기이(奇異)한 일을 전(傳)한다고 해서 전기지요. 어쨌건 이 이야기는 약자를 돕고, 옳지 않은 일을 미워하는, 그리고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그 결과 자신이 죽게 될지라도 지키고야 마는 협객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그 수단이 무력적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

 

사실 이런 협객의 정신은 법과 질서가 문란한 사회, 그런 시대에서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 같으면 어떤 사람이 소년에게 복수를 대신 해주겠다고 말하겠습니까?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올리라고 하는 게 더 있을 수 있는 일겠지요. 하지만 국가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시대에는 남의 부탁을 받고 대신 한을 풀어주는 협객의 정신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지요. 이미 근세에만 와도 앞서 말한 규정 그대로의 협객은 매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협객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동양적인 대인군자를 그리게 된 것이 무협의 현실입니다. 사실은 협객이든 대인군자든 그 어느 쪽도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소설도 많이 나오지요. 그러니 순수한 협객의 정신이 표현된 소설이 드물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무협이 협객의 정신만을 고집했으면 할 이야기는 참으로 적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협의 정신을 버림으로써 남은 ‘무에 관한 중국식 과장’이라는 틀 안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길 수 있었습니다. 


 

초인적인 힘, 기공(氣功)
 

 

이제 ‘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무협소설을 안 읽어보신 분은 있겠지만 무협영화 한두 편 안 보신 분은 없겠지요? 거기서 사람이 붕붕 날아다니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혹시 있을까요? 영화 동방불패에서처럼 바늘을 던지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위가 폭발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없겠지요, 아마. 이게 바로 무에 대한 중국식 과장입니다. 그리고 이 과장의 핵심에는 기공과 초식이라는 두 개념이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세상에 기(氣)가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현을 약간 달리하면 세상은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음양이라고도 하고, 태극이라고도 하고, 삼재, 사상, 오행 등등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이 기를 모을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이 바로 기공(氣功)입니다. 단전호흡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중국의 무술은 이 기공과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태극권으로 대표되는 내가권이 특히 그렇습니다. 내가권(內家拳)이라는 이름 자체가 내가기공(內家氣功), 혹은 줄여서 내공(內功)이라고 부르는 힘을 수련하는 무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공이란 바로 천지에 충만한 기를 자신의 몸속에 쌓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은 어떤 방면에 대한 수련의 정도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죠.


 

세계일보 2005. 3. 25일자 기사 제목을 봅시다.

[문학] 한승원·박범신 두 중견 작가의 내공 깊은 장편 발표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4.29일자 칼럼 제목도 이렇습니다.

[김석수 컬럼] 박근혜의 내공과 그녀의 적들

 

내공이란 단어가 엉뚱한 곳에서 많이 쓰이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승원·박범신 두 중견 작가께서는 내공을 쌓아서 소설을 쓰시나 봅니다. 박근혜 총재는 정치에 내공을 발휘하시는 모양이고.

 

그런데 무협에서는 내공을 쌓아서 뭘 할까요? 그것은 바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겁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피아노선에 매달려서 그러는 것이긴 하지만) 벽을 뛰어넘고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닙니다. 장풍이라고 해서 손만 펼쳤는데 먼 곳의 적이 죽어 넘어지기도 하죠. 그런 과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기공이 무척 낯설고, 어쩐지 사기 같은 냄새가 많이 나는구나 하실지도 모르지만 기공은 몰라도 그 사상의 근본에 있는 기라는 존재는 사실 우리 한국인에겐 무척 가까운 것입니다.
기절했다. 기(氣)가 절(絶)했다. 즉 기가 끊어져서 정신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기막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맥. 기가 움직이는 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한의학의 침술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침을 놓는 자리는 핏줄이 아니라 바로 기가 움직이는 맥이거든요. 심지어 방귀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원래는 방기(放氣)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를 내보냈다는 것이죠.

 

 

중국식 무술 수련법, 초식

 

 

물론 경공술이니 장풍이 진짜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의 무술과 무협 속의 무공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한 삼천 배쯤 과장이 된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백발 삼천척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야말로 중국식 과장인 것이죠. 이러한 과장은 초식이라는 개념에도 가해집니다.

 

초식이라는 것은 달리 ‘투로’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정해진 일련의 동작들을 반복하면서 무술을 수련하는 것, 또 그렇게 정해진 방식을 말합니다. 태권도의 품세와도 비슷한 것이죠. 권투 같은 것하고 비교해보면 이건 굉장히 특이한 무술수련법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권투에서는 그냥 스트레이트니 잽이니 때리는 걸 연습하죠. 이렇게 막고 이렇게 피한 다음 상대가 어떻게 하면 또 이렇게 하면 되니까라고 하면서 일련의 동작들을 정해놓고 수련하진 않잖습니까. 그런데 중국무술은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른바 독사출동이니 야마분종, 봉황전시 등등의 사자성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단어들이 바로 그렇게 정해놓은 초식들의 이름입니다. 이게 어쩐지 멋지게 들리나 봅니다. 맹호경파산이라고 하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중국무술 팔극권의 기술 중 하나입니다만 이름이 멋지니까 그 위력도 강할 것 같은 느낌 안 드십니까?

 

이래서 원래는 수련법의 하나인 초식이 마치 사용하면 바로 끝장을 내는 필살기인 것처럼 사용되는 것, 그리고 무술 수련이 기공수련 더하기 초식수련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에 대한 중국식 과장입니다. 이러한 과장 위에 성립된 장르가 무협이라는 것이고요.

다음 회에서는 간략하게 무협의 역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소개>

 

좌백

좌백은 필명이고 본명은 장재훈입니다.
1965년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서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5년 무협소설 [대도오]를 써서 작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생사박], [혈기린외전], [천마군림], [비적유성탄] 등을 써왔습니다. 얼마전에는 구룡쟁패라는 컴퓨터 게임 시나리오를 썼으며 '논리의 미궁을 탈출하라'는 청소년용 철학서(랜덤하우스 중앙)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무협작가인 진산과 결혼해서 8살 난 아들 우진이를 두고 있습니다.


추천 콘텐츠

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