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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그냥 다를 뿐이야 (3)

  • 작성일 2005-11-14
  • 조회수 278


 

 

미국 아동청소년문학과 다문화적 관심

 

아동청소년문학에서 다문화적 관심이 가장 큰 나라는 아무래도 다인종 국가인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1960년대 피부색의 차이로 정치, 경제, 교육에서 소외되고 억압당해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시민권 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운동에 자극을 받아 미국 내의 멕시코계, 아시아계, 푸에르토리코계 등 미국 내 비주류 민족들 역시 정치, 경제, 교육적 기회의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이 운동은 여성, 장애자, 동성연애자들과 같은 다른 집단에게도 그들의 권리와 자격을 주장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아동청소년문학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이는데, 특히 흑인의 체험을 감싸 안으려는 시도는 영국의 아동청소년문학가 존 로 타운젠드도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현대 아동청소년문학의 눈에 띄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다. 백인 지배 사회에서 흑인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 1852년>이나 <허클베리 핀.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종 차별 폐지론자’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다른 소수집단, 즉 아메리카 인디언, 아시아계, 라틴아메리카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2001년의 9.11 사태 이후에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와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보면 이러한 다문화적 관점이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관점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반(反)편견’을 목표로 하는 교육과 아동청소년문학 분야에서 다문화적 관심은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이 주제에 관한 다양한 도서목록이 작성되고 있다.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걸어간 남자

 

우리나라에도 더러 이 목록에 속하는 작품들이 소개되곤 하는데, 때로는 미국에서 그 작품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맥락, 즉 미국 아동청소년문학의 다문화적 관심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에 더 끌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령  2004년 칼데콧 상과 보스톤 글로브 혼북 상을 받은 그림책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걸어간 남자>를 보자. 이 책은 1974년 필립 쁘띠라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이가 '쌍둥이 빌딩'(뉴욕 세계무역센터) 사이에 팽팽한 줄을 매고 300미터 높이의 공중을 오가며 1시간 동안 온갖 묘기를 부린 실화를 다룬다. 하지만 만약 쌍둥이 빌딩이 비극적으로 사라진 9.11사태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그토록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인다. 아니, 바로 9.11사태 때문에 미국 밖의 독자로서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 책에서 읽히는 숨은 질문 때문이다. 그 남자가 묘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그 빌딩은 어디로 갔는가? 네가 없앴는가? 네가 파괴했는가? 왜? 그런 물음들을 이끌어내려는 것만 같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합리적인 관점에서 아이들 독자에게 테러를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를 야기했던 원인까지 설명하기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그 길을 생략하고서 테러를 이야기한다면,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미국 아이들에게 대단한 선동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반테러에 대한 선동이지만, 이렇게 테러 일반을 생각하며 반테러를 생각하기엔 9.11 사태는 그들에게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히려 그들에게는 상실이 먼저 다가오고, 상실에 따른 슬픔과 아픔이 다가오고, 그리고 이른바 911테러의 가시적인 발원자들에 대한 분노가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의도하는 바가 그런 분노나 선동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렇게 읽힐 소지가 있다면, 미국인들에겐 이 책이 뉴베리 상을 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상호인정을 목표로 하는 다문화적 관점에서는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바람의 딸 샤바누

 

<바람의 딸 샤바누>(사계절, 2005년) 역시 뉴베리 어너상 수상작일 뿐만 아니라 미국 내 다문화 관련 여러 도서목록에서 추천을 받는 책이다. 처음 이 작품을 눈여겨 본 계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파키스탄 유목민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은 우리나라와 오래 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온 나라이다. 파키스탄의 고승 마라난타는 백제에 불교를 전파했고, 서기 727년 혜초가 불교가 융성한 파키스탄 서북부의 간다라를 방문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파키스탄은 가난한 외국인 근로자의 나라로만 인식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파키스탄의 북부 촐리스탄 사막에서 낙타를 기르며 유목 생활을 하는 가족의 둘째 딸인 열한 살 소녀 샤바누의 곁으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여자 아이가 열세 살이면 결혼을 해야 한다. 열세 살 난 언니 풀란은 이미 약혼했고, 따라서 아이가 아니라 여자다. 이슬람 여자는 함부로 밖에 나가서도 안 되고, 외출할 때는 꼭 차도르로 얼굴을 가려야 하며 결혼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배워야 한다. 언니는 구속적인 삶에 순종하지만, 집안 살림보다는 바깥에 나가 낙타를 돌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샤바누는 그렇지 않다. 샤바누는 언니의 결혼 준비를 도우며 결혼과 사랑, 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샤바누에게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채 결혼해야 하는 제도와 관습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샤바누는 자유롭게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샤르마 이모가 부럽다. 그러던 중 언니의 결혼 준비가 한창인 때 언니의 약혼자가 죽게 된다. 부유한 지주의 동생이 예쁜 언니를 탐냈기 때문이다. 언니는 그 약혼자의 동생 무라드와 결혼한다. 무라드는 암묵리에 정해져 있던 샤바누의 결혼 상대였다. 샤바누 자신은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미래를 위해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지주의 네 번째 부인이 되어야 한다. 결국 샤바누는 가출을 감행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함께 떠난 어린 낙타 미투의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사진 왼쪽 위-촐리스탄 사막>

 

미투 옆에 누웠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입힐 건 없었다. 굴루번드처럼 나는 가족한테 배신을 당해 팔렸다. 또 미투는 나처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뛰어난 재능을 잃고 말았다.(321쪽)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또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샤바누는 샤르마 이모가 들려준 충고를 가슴에 새긴다.

 

비밀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거야. 그게 바로 가슴 속에 자리잡은 영혼의 비밀이지. (323쪽)

 

독자는 당찬 소녀 샤바누의 운명 앞에서 가슴 아픈 감동을 느끼며 책을 덮게 된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야”

 

이 책의 작가 수잔느 피셔 스테이플스는 파키스탄의 펀자브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여성들을 위한 문맹퇴치 프로젝트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다른 이들에 대한 깊은 존중심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 물음 하나가 떠오른다. 아무리 타문화와 타인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있다 하더라도 백인이자 외국인으로서 갖는 한계는 없을까? 이슬람이나 파키스탄과는 너무도 낯선 독자로서는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1970년 <뉴욕 타임즈 북리뷰>에서 흑인 작가 줄리어스 레스터(Julius Lester)가 한 말이 떠오른다.다시 말해, 일차적으로 파키스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흑인을 다룬 책을 비평할 때에는 작가가 무슨 인종이든지 두 가지 질문을 한다. “흑인의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는가?”, “흑인 어린이들이 읽기에 적당한가?” 백인 작가의 작품 가운데 이 두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스테이플스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를 처음에는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것이 사막 생활에 대단히 요긴한 것임을 발견할 정도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게 된다. 그가 깨달은 것은 1995년 작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의 제목처럼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야!”이다.(http://scholar.lib.vt.edu/ejournals/ALAN/winter95/Staples.html).

 

 

스테이플스는 <바람의 딸 샤바누>에서 척박한 사막 속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을,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눈으로 그리지 않는다. 나름의 삶의 즐거움과 따뜻한 인간관계를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슬람 독자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가족의 배신”으로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지주와 결혼하게 되도록 설정된 상황을 보며 작가가 은밀한 방식으로 이슬람 문화의 도덕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도 있겠다 싶다.

<사진 왼쪽- 작품속에 나오는 데라워 요새>

 

 

 

문화적 전유

 

자기와 다른 집단의 체험을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절도 행위로 보고 “문화적 전유” 혹은 “목소리의 전유”라고 일컫는다. 물론 이것을 논리적 극단으로 몰고 가보면 남성은 여성에 대해 믿을 만한 소설을 쓸 수 없으며,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에 대한 믿을 만한 소설을 쓸 수 없다. 혹은 더 나아가, 어른은 어린이에 대해 믿을 만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페리 노들만이 지적하고 있듯이 문화적 전유 개념에 들어 있는 몇 가지 가설, 즉 “첫째, 이야기에서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 작가의 의식적, 무의식적 태도 때문에 왜곡된다. 둘째, 인종적, 민족적 집단의 특징은 모든 작가의 의식적, 무의식적 태도를 창조하는 데 불가피하게 한몫을 담당한다. 셋째, 독자는 허구적 묘사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그리는 작가가 쓴 스토리는 늘 오도될 위험성이 있다.”(<어린이 문학의 즐거움 1>, 259쪽)는 점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쓰든, 제3자를 통한 글을 읽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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