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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이면, 판타지

  • 작성일 2005-07-28
  • 조회수 1,717


        

 

 판타지 문학의 주역은? 

 

판타지 문학의 주역이라고 하면 무엇일까? 강력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용사의 모험담? 엘프며 고블린(사진왼쪽)같은 신비한 종족과 몬스터?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는 강력한 마법과 전설의 검? 물론 이런 것들은 판타지 문학에서 상당히 높은 빈도로 등장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특히나 한국에서 쓰여지고 읽혀지는 판타지 문학에서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재 한국에서 쓰여지고 읽혀지는 판타지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영웅 환상담이라고도 불리는 ‘히로익 판타지Heroic Fantasy’ 즉 한 영웅의 모험담을 그려나가는 스토리와, 환상 서사담이라고도 불리는 ‘에픽 판타지Epic Fantasy’, 즉 하나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방대한 역사와 사건을 서사시처럼 풀어나가는 스토리다. 국내에서 판타지라고 하면 이 두 가지 종류만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제로 판타지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상당히 폭 넓고 다양하다. 위에 거론한 용사나, 인간 외의 환상 종족, 마법과 검 따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지 문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역은 대체 무엇일까?

 

 

작가 맘대로 쓰기만 하면 판타지?

 

 

히로익 판타지와 에픽 판타지로 가득한 한국 땅이지만, 판타지를 습작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상당히 쉽게 접할 수 있다. 판타지Fantasy라는 단어는 상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판타지 문학이란 작가 마음대로 쓰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말대로 상상, 공상을 의미하는 단어를 이름으로 내걸고 있는 장르가 판타지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상상을 마음대로 쓰기만 하면 판타지가 되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작가 마음대로 라는 표현에서 내포하는 것처럼  무제한의 상상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판타지 문학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J.R.R. 톨킨은 '판타지는 현실 세계가 아닌 그 복사이며, 작가는 조물주의 일을 배워 전달하는 역할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현실 세계가 아닌 그 복사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지의 제왕』과 『호비트』를 통하여 미들어쓰 (Middle Earth)라는 거대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해 낸 장본인이 판타지란 현실의 복사라는 표현은 왜 쓴 것일까

 

지금까지 톨킨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지의 제왕』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고, 또 매년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빛과 어둠의 전쟁을 다룬 이야기라는 해석부터, 파시즘과 인종차별을 내포했다는 해석까지 참으로 다양하고도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고개는 하늘로, 발은 현실위에

 

 

판타지는 자유로운 상상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판타지를 쓰는 사람은 결국 하나의 사회에 소속되어 그 사회의 영향 아래서 자라난 자다.  이러한 사람이 작가로서 가상의 세계를 하나 새롭게 창조해 낸다고 할 때, 자신이 이제껏 보아온 사회의 가치관이나 도덕, 역사에서 완벽히 동떨어진 작품을 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상상이라는 능력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나고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이자 역사와 신화 연구가로서의 톨킨이 고대 문자인 룬과 북구 신화를 바탕으로 미들어쓰를 창조하였고,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자폐적 성향을 지녔던 러브크래프트가 『크툴후 신화』를 창조해내었던 것처럼, 결국 판타지 작가들의 창조마저도 ‘고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만 발은 현실을 딛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판타지 문학에 있어서 가장 큰 주역은 작품속에 그려지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것은 톨킨의 미들어쓰나 르귄이 창조한 세계인 어스시처럼 완전히 현실 세계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세계일 수도 있고, 언뜻 보기에 현실과 별 다른 차이를 느끼기 힘든 세계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발생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이므로 현실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가장 커다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이 판타지의 세계. 이것은 명백히 현실과는 다르지만 위에서 톨킨의 말을 빌어 이야기했듯, 현실의 복사이기도 하다. 현실의 복사라는 말은 작가가 결국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 즉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판타지의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상상의 기초는 역사와 문화!

 

 

판타지는 그 작가가 자라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어떠한 형태였는지, 어떠한 식으로 흘러 왔는지를 살펴보기에 좋은 장르다. 현실에 존재한 바 없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꽤 재미있지 않은가.
『반지의 제왕』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의 영국 판타지들을 생각해보자. 영국 판타지 문학에서는 기나긴 역사를 가진 종족과 국가가 흔들림 없이 건재해 있으며, 정령이나 유령 혹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자연스럽게 인간들과 공존하고 있으며 , 등장인물들 역시 그 신비함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근래에 쓰여진 『해리 포터 시리즈』 역시도 이런 영국의 오랜 신화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에 따라 다른 판타지의 세계    

 

 

-영국, 역사 속 설화, 민담이 토대

 

 

 

알다시피 영국은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이 나라에는 그 긴 역사만큼의 민담과 설화가 존재하고 있으며, 영국의 사람들은 그러한 민담과 설화를 접하며 자라난다. 짙은 안개와 거친 바다, 황무지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또한 기사와 귀족 제도와 기독교를 토대로 한 종교가 오랜 역사와 함께 사회를 이루고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면들이 모여 영국의 판타지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성서에 나오는 빛의 군대와 어둠의 군대의 전쟁은 절대악에 맞서 싸우는 선한 용사들의 기초가 되었으며, 민담을 통해 전해 내려온 기사 모험담은 약점을 지닌 주인공과 그를 보좌하는 충실한 동료들이 세계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임무를 띈 존재들이라는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온 설화와 민담에 수없이 등장한 요정과 정령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들의 판타지 문학에 한 부분을 차지하며 끼어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국가개념 옅은 경우 많아

 

 

그에 반해 미국의 판타지에서는 국가 개념이 옅은 경우가 많고, 기존의 국가를 전복시키거나 새 국가를 세우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또한 등장하는 몬스터나 적들은 손이나 무기가 닿을 수 있는 확실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시 알다시피 미국은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그 대부분의 역사는 고속 성장과 문명 발전, 그리고 현실적인 적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보낸 시간으로 덮여 있다. 다양한 민족이 뒤섞인 만큼 미국에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빠른 발전에 눌려 사라져간 것이 더 많았다.

 

물론 미국의 판타지에서도 유럽 판타지에서 보이는 특징이 나타나는 때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타지는 기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이야기를 차용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의 한계인 것일까. 미국의 판타지는 뚜렷한 문화를 가진 타국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배어 나오기도 한다. 그 일례로, 『코난 사가』를 써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초기 히로익 판타지에는 등장하는 여성이 모두 동양인의 짙은 흑발을 가지고 있으며, 영웅이 활약하는 타국의 도시에서는 동양이나 중동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물론 이런 점을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인들의 정복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령대신 외계인이 두렵다   


긴 역사를 가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호러라고 하면 대개 악령이나 사악한 요정 따위를 떠올린다. 실제로 유령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도 흔하다. 그러나 미국은 유령이나 요정 따위의 민담이 파생될 만큼의 역사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에서 찾아오는 외계인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도시 괴담 등으로 자신들의 공포 욕구와 신비적인 상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우주 저 멀리에서 찾아올 예정인 사악하고 공포스러운 신들인 『크툴후 신화』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공포나 살인극 같은 새로운 시각의 판타지와 호러를 창조하는 토대가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판타지문학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판타지- 히로익 판타지나 에픽 판타지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판타지란 세계전체를 다루는 장르! 

 

 

결국 판타지 문화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세계의 문화와 역사 전체를 다룰 정도로 큰 규모의 이야기거리가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판타지 문학이 상상의 문학이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이 가는 대로 떠오르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문학세계란 뜻이다. 또한 이러한 상징들은 작가가 속해있는 사회의 통념과 작가의 사고방식과 사상을 바탕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상상의 문학이라는 판타지문학과 당대의 역사와 현실은 서로간에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이를테면 샴 쌍둥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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