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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1)

  • 작성일 2023-10-01
  • 조회수 1,944

   안전의 방향 (1)


   홍성희


   *


   안전하려는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김지연의 「먼바다 쪽으로」1)에서 ‘현태’는 누군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그의 불안 증세가 완화되길 바라는 ‘종희’는 생활을 정리하고 현태와 함께 도시 밖으로 이주한다. 현태가 위험을 느끼게 된 배경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도시에 남겨지고, 위험을 피하는 마음은 그렇게 ‘먼바다 쪽으로’ 가려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먼 바닷가에서도 현태는 무시로 공포에 휩싸인다. 멀어졌을 뿐 위험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의 거리는 언제고 좁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태와 종희는 안전하려는 마음의 크기와 동일한 정도로 확고하게 이내 위험이 닥쳐올 것을 믿고, 그것을 기다린다. 현태는 그 불안이 형체를 입고 시꺼먼 모래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조개껍질을 열고, 열고, 또 여는 방식으로 스스로 위험한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에게 안전하려는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지키기 위해 기꺼이 위험해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들의 그림자는 ‘먼바다 쪽으로’ 물을 가르며 계속 걸어 들어가고, 종국에 스스로 물속에 잠긴다.

   이 소설에서, 혹은 세계에서 안전이란 아마도 그처럼 위험의 상대항이 아니라 위험과 이음동의어이다. 먼 바다를 향하는 현태와 종희의 이야기는 애초에 그런 조건 속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다세대 주택에서 담배를 태우고 발을 굴러 게임을 하고 기타를 연주하여 이웃들의 항의를 받는 현태에게 종희는 이웃들이 모두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특히 “아랫집 남자가 우릴 죽일 거”(218)라고 ‘농담’한다. “농담이어야 하지 않겠어요?”(219) ‘아랫집 남자’가 종희에게 건네는 또 다른 ‘농담’은 실질적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위험으로 ‘아랫집’에 상주한다. 그 얼핏 안전한 ‘농담’들의 세계에서 공포와 불안은 이미 현태에게서보다 먼저 가동 중이다. 일상은 위험 위에 세워져 있으며, 다세대주택에서 모두는 기꺼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위험해진다.

   독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것들에 이름을 붙”(227)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개 줍기는 안전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조개의 이름은 종종 이것인지 저것인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것과 저것이 선명하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오래 살면서 독이 있는 건 피해 주워 먹고 산 사람”(227)의 경험과 시간을 막연히 믿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의 조개더미에건 시꺼먼 모래가 가득한 패각은 숨어 있다. 위험은 이름이나 직관으로 구분해내는 안전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가장한 모든 것의 내부에 있다. 어쩌면 정말 공포스러운 것은 “먹어도 안 죽는”(228) 정도로 상존하는 그 보이지 않는 내부의 위험이다. 그 위험은 도시에서도 먼 바다에서도 다세대주택의 ‘농담’처럼 반복된다.


  *


   드라마 『비밀의 숲 2』2)는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를 중심으로 학교폭력, 경찰 내 집단 괴롭힘, 정관예우, 뇌물비리, 취업비리, 정경유착 등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룬다.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와 양상은 같지 않지만, 모든 문제는 서로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관관계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러 종류의 ‘내부’와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위험의 형태들이다. 이를 테면 사진 속 어깨동무한 친구들의 ‘우정 여행’ 안쪽에는 오랜 갈취와 괴롭힘이 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내부가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 오래 곪아온 위험은 타인을 공격하고, 회유와 겁박과 폭력의 연쇄 속에서 위험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것으로서 실체를 드러낸다.

   극의 서사는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배면에서 작품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수사권 조정 관련 부분이다. 수사지휘권, 수사종결권, 영장청구권 등이 언급되는 가운데 ‘비밀의 숲’을 관통하는 핵심 물음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권한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갖든 반드시 발생하게 될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가 과연 마련될 수 있는가이다. 극에서 영장청구권을 요구하는 경찰측에 검찰측은 “영장은 태생부터가 기본권 침해”임을 강조하여 말한다. 구체적 대상에 대해 체포·구금·압수·수색 등을 명령하거나 허가하는 법적 문서로서 영장은, 법치사회를 수호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이때 영장이 겨냥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범법자’라는 법이 보장하는 안전에 ‘외부’를 만드는 위험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장은,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그 자체의 권력과, 그 권력을 손에 쥐는 자가 휘두를 수 있는 또 다른 권력, 기관 및 제도 ‘내부’의 위험을 상대한다. 시민의 기본권을 함부로 침해할 수 있는 위험과 동시에 특정 시민의 기본권만을 특수하게 비호할 수 있는 위험은 언제나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영장은 태생부터가 기본권 침해”라는 말은 “검찰의 힘은 기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소할 사건을 기소하지 않는 데 있다”는 말로 이어진다. ‘비밀의 숲’의 해안선을 지키듯 ‘내부’를 경계하는 한 검사의 입을 빌려 강조되는 것은, ‘치안’에 관한 논쟁이란 외부로부터의 ‘안전’만이 아니라 그 안전의 제도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내부의 위험을 직시하는 데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이미 가동되고 있는가. 그것을 외면 없이 마주할 수 있을 때 제도는 ‘조정’될 수 있고, 꼬리를 무는 사건들은 ‘들키지’ 않으려는 공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슬하게나마 사장되거나 거짓 종결되어 버리지 않을 수 있다.


  *


   김기태의 소설 「보편 교양」3)은 ‘곽’의 위험과 안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름인지 성인지 알 수 없는 ‘곽’으로 불리는 그는 “너무 많은 종이를 소모”(189)하지만 분리수거를 충실히 하고, 그런 자신의 경향성에 대해 자발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191)하기 때문에 때로 냉소하고, “겸손하면서도 정직하고 싶어서”(191) 적당한 유머를 사용하며, “수업 마지막 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196)이라는 일기와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198)라는 일기를 나란히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곽은 “균형감각”(191)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곽의 사고와 태도와 선택은 균형 상태에 대한 예민한 감각 속에서 세심히 기획되고 조정되며, 그러한 방식으로 안전하다.

   김기태의 소설은 곽과 같은 사람을 여러 번 그려왔다, “네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모양”(87)의 안경을 쓰고 순종적이지도 모나지도 않게 처세하며 사는 사람. 그렇게 “저마저 손을 들면, 그 아이는 사형장으로 향하게 되겠지요”(92) 같은 말을 스스로 읊어본 적 없이, 더 커진 집의 식탁에 초를 켜고 앉아 “멀리에서 굶고 울고 헤매는 사람들, 부딪히고 무너지고 있을 것들을 잠시 애도”(101)하는 사람.4)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불편한 예감”으로 여기며 결국 “근시의 사랑”(270)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남는 사람.5) 그렇게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브레히트의 시구에 두 사람이 처음 선 채로 서로의 몸을 안은 가까운 순간을 덧씌워 “두 사람” 범위의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6) “너네는 어쩌다 이렇게 좆같아졌어?”(141)라고 묻는 마음을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과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146)에 대한 다정함으로 과감히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7)

   이를 테면 김기태의 소설이 그리는 사람은 마치 종이를 소모하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듯 세계의 위기를 아는 일과 자기 일상의 안전을 지키는 일 사이에서 윤리적인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때 그 균형감의 핵심은 그의 소설이 그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위기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방관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차별당하거나 착취당하는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폄하되거나 소비되는 위치에서, 혹은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다만 오래된 관습을 성실히 살아가는 자리에서 그들은 무언가 부당함을 느끼지만, 소설은 상처보다는 의지를, 비판보다는 낙천을 믿는 쪽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 이끈다.

   곽이 앉은 자리의 배경에는 그런 그들이 익숙하게 포진해 있다. 곽은 처음 꾸리는 ‘보편 교양’ 수업에서 “인류의 지성사와 예술사에서 고유의 좌표를 차지하는 열권 내외의 도서를 선정”(193)한다. 초안으로 작성한 열한권의 목록에서 백인 남성 저자의 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그 가운데 두 권을 백인 여성과 인도인 지도자의 저서로 바꾸어 목록을 완성한다. 그런 방식으로 목록의, ‘보편 교양’의, 곽의 균형감은 가시화된다.

   그러나 언뜻 지식과 아름다움의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감각을 지향하는 듯한 곽의 태도는 수업 커리큘럼으로 전시되는 도서 목록의 범주 외의 장소로 나아가지 않는다. “스무살도 안 된 아이를 밤마다 거리로 내모는 사회가 새삼 무서웠다”(197)고 말할 때, 그의 자리는 그러한 사회나 학생의 그러한 밤들로부터 멀리, 한낮의 교실 안에 머물러 있다. 그 안에서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운동법칙을 연구”(201)한 철저히 ‘학술적’인 작업으로 소개되고, 그 ‘비판’의 대상은 지금으로부터 먼 “초기 자본주의의 혹독한 노동환경”(200)으로 한정지어지며, 그 의의와 한계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상태로 이야기된다. 곽의 의도를 초과하여 “대안적 체제를 모색하는 데에 여전히 맑스가 유효함을 주장”하는 학생의 에세이는 “독서 이력과 습득 개념과 적용 사례, 최종 산출물의 탐구 목적과 방법, 수행 수준, 그 과정에서 드러난 협력적 학습 태도까지” “최고 수준의 학업 역량”(206)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다만 학구적 태도와 학술적 ‘능력’의 영역 안에서 평가된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곽의 ‘보편 교양’은 “전공별 심화 독서 플랫폼 과목”(207)으로 안착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세계를 지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활용하는 곽의 교실은 이미 항상 안전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교실 속 균형은 타이어 위에 안착한 시소의 기울어진 한 끝에 앉아 양 팔을 벌린 것처럼 안전하고, 연극적이다.

   곽의 이야기는 그의 목록에서 ‘위험’을 발견한 한 학부모에 의해 위기를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위험’으로 여겨졌던 것이 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안전’한 것임을 상호 확인하는 방식으로 위기는 애초에 위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합의되며, “교내 독서 인증 프로그램의 공식 추천도서 목록”(207)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안전성을 공인받는 것으로 ‘안전’은 외려 견고해진다. 이 “해프닝”(208)은 두 갈레로 읽힌다. 위기를 잘 지나가며 더 단단하고 “더 정교”(209)해지는 안전에 대한 다정하고 낙관적인 이야기, 혹은 더 정교해지는 안전의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안전의 체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위험의 실재에 관한 비판적인 장면화.

   ‘해프닝’의 실체는 곽과 ‘은재’라는 학생이 수업에 대해 혹은 ‘맑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진심’과 “맑스 전혀 문제없고 고전읽기 수업도 괜찮다”는 “컨설턴트 선생님”(208)의 말마디 사이에 자리해 있다. 곽의 이야기는 교육자와 학습자의 ‘지적 탐구’에 대한 ‘진심’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의 구조를 결정하는 시장의 교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일까. “자신이 알아본 은재의 역량을 대학에서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도, 진정 귀한 것은 지성 그 자체이며 그에 비하면 대학 합격증은 일종의 운전면허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207)는 문장에서 핵심이 되는 사실은, 쉼표의 앞이나 뒤에 적힌 내용이 아니라 쉼표의 자리에 숨겨진 내용에 있다. 은재가 ‘서울대 일반전형’에 합격함으로써 곽의 목록이 사후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 “진정 귀한 것은 지성 그 자체”라는 곽의 긍정은 대학의 선택과 “컨설턴트 선생님”의 긍정, 나아가 은재 아버지의 인정에 의해 공인된 자리에서 제한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다는 사실, 그렇게 “‘서울대 몇명 보냈는지’로만 학교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역사회나 거기에 휘둘리는 관리자들”과 다르지 않게 곽은 은재의 ‘지성’과 ‘보편 교양’ 수업의 가치에 몰두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곽에게도 선택이기보다는 선택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와중에 교육 제도 혹은 시장의 사각지대에는 자본주의를 ‘지식’의 대상으로 ‘학습’할 수만은 없는 학생들과 외부에서 제공하는 ‘안전’의 체제를 ‘학습’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들 말이다.

   소설 「보편 교양」은 그 사실들을 스스로 알고, 독자들로 하여금 알아차리게 하지만, 소설의 내용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 속 ‘지성’의 위치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한 ‘지성’의 태도를 문제적으로 살필 수 있을 언어를 학생들과 곽의 입으로 들리게 하면서도 소설은 단편적인 장면화 이상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멈춘다. 그런 선택을 할 때 이 소설의 위치는 곽의 교실이 있는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면들은 ‘해프닝happening’처럼 가볍게 지나가는 사건으로서 어쩌면 “우수한 학생”(207)들과 함께 하게 될 새 학기 수업의 책장을 더 풍성히 채우는 계기가 될 따름이고, 곽이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210)는 특유의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더 견고한 배경이 되어줄 뿐이다.

   안전은 선택이기보다 필수이고 개인이 처해 있는 조건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듭 움켜쥐어야만 하는 삶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곽의 자리에 있고, 그래서 김기태의 소설 속 인물들이 안전한 자리에 머물 때 거기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보고, 낙천적인 성장 서사를 읽어내며, 그로부터 감동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혹은 그 인물들의 삶의 양태를 일종의 ‘부조리극’의 한 형태로 읽어내면서 단편소설의 완결성에 몰두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곽과 심정적으로 가까이 있거나 지적으로 멀리에 있는 사이에 소설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무언가가 정말로 벌어지고 있다happen-ing면, 독자의 감격과 감동은 시소의 어느 쪽에 앉아 있기를 선택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일까.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을 자세히 보게 만들지는 않기로 하는 선택에서, 혹은 볼 수 있는 것을 자세히 보지는 않기로 하는 선택에서, 소설을 둘러싼 우리 각자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보편 교양’의 균형감 앞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곳은 이런 물음들을 거듭 묻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안전하려는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 마음의 복판에서 무엇이 이미, 가동되고 있는가.


  *


   문학은 내내 안전한 공간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학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모습을 모방하여 재현해낸 종이 위의 세계이고, 그 세계의 입체성이란 가장 ‘리얼리즘’과 가까울 때에조차 종이의 평면 아래 위치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허구나 상상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속 살인은 현실의 살인과 같지 않으며, 문학 속 폭력은 폭력 자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해 가공된 ‘재현’으로서 안전하게 이행되고, 또 안전하게 소화될 수 있다. 재현은 재현일 뿐 실제 폭력을 의도하거나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논리, 재현의 ‘목적’을 재현의 현실이나 재현된 현실과 분리된 곳에 위치시키는 논리는 그렇게 문학 속의 폭력을 종종 정당화하고 보호한다. 이 논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계기를 통해 문제시되고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비판에 맞서 살아남거나 비판 아래에 감추어진 채로 지속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예술들과 더불어 문학은 그렇게 오래 안전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문학은 사람이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로서 태생적으로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만이 등장하는 문학에서도 모든 이야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되고 전개되며, 그런 점에서 사람과 무관한 문학은 없다. 영상 매체에서처럼 직접적인 이미지로 제시되거나 그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재현자의 신체로 각인되지는 않지만, 문학 속에서 문학적으로 ‘재현’되는 가상의 존재 역시도 사람으로서의 구체성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종이의 평면 너머 입체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실체를 신뢰할 수 있을 때 서사는, 혹은 감각과 감정, 몸과 사유의 세계는 그 재현된 세계를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더 설득력 있게, 혹은 ‘현실성 있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재현적 성격에 대한 논의와 함께 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의가 나란히 이루어지는 이유는 문학 속 폭력이 현실의 폭력과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그 역시 폭력으로서 충분히 위험하다는 것을 재차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단 재현된 것과 현실 사이의 관계성을 독해하는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문학 안에서 재현된 현실 자체의 구도를 독해하는 맥락에서도 말이다. 이를 테면 문학 속 폭력은 현실의 누군가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이 아닐 때에조차 현실에서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폭력이다. 사람의 이미지는 곧장 사람이지 않을지언정 그 이미지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방식은 곧장 사람의 그것이다.

   문학의 자율성을 수호하기 위해 문학이 감수하는 폭력이란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문학 내부의 위험이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방법을 담고 있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에 대하여 폭력적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문학은 태생적으로 사람에 대해 폭력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따라서 어떤 사람이 혹은 문학이 폭력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그저 판가름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어떤 폭력까지를 감수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 정도를 판단하는 일이다. 문학은 어떤 정도의 폭력이든 감수하기로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은 문학의 ‘자율성’의 영역이지만, ‘문학의’ 선택은 사람의 선택과 구분되지 않는다. 문학은 언제나 사람의 일이며, 사람으로부터 안전한 장소에 있는 문학이란 실제가 아니라 사람의 의도와 선택이 만들어낸 생산물이고,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안전하려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마음은 문학의 자율성을 수호함으로써 문학하는 사람의 현실 폭력에 눈감고 그 ‘문학적’ 위치를 비호하는 오래된 위험과도 사실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문학은 스스로 안전하지도, 안전한 공간이지도 않으면서, 가장 안전하고자 할 때 가장 위험해지고 마는 제도로 여기에 있다. (계속)

1) 김지연, 「먼바다 쪽으로」,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211-231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2) 이수연 각본, 박현석 연출, 2020.
3)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189-210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4) 김기태, 「전조등」, 『현대문학』 2022년 4월호, 83-84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5) 김기태, 「세상 모든 바다」, 『Axt』 2022년 3-4월호, 256-270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6)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장 웹진』 2022년 8월호.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2348&act=view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7) 김기태, 「롤링 선더 러브」, 『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117-147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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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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