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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

  • 작성일 2023-09-01
  • 조회수 1,179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6. “새로운 성장소설”1)

   장정일은 『구월의 이틀』의 작가 후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소설을 쓰면서 의식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익 청년 탄생기(성장기)’를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서구 유럽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구 우파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이 구체화되면서부터였다.”2) 그가 읽었던 서구 유럽 소설의 목록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 독자로서는 그가 느꼈던 막연한 부러움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이후의 서술로 미루어 볼 때 거기에는 보편적 근대의 정상적 경로를 밟아 왔다고 가정된 유럽의 이념적 지형에 대한 ‘후진국적 선망’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장정일은 서구 유럽에는 “건전한 상식과 나름의 철학을 토대로 한 우파가 득세”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정당성도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했기에 “‘우익 청년 일대기’” 같은 것이 나올 수 없었다고 말한다. 

   ‘품격 있는 보수’에 대한 선망은 익숙하다. 식민과 분단, 뒤이은 반공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소멸된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품격 있는 보수’는 공동체가 함께 수호하고 전승해야 할 가치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가 존재할 수 있을 때 가능하지만 한국의 경우 ‘반만년’ 운운하는 역사가 무색하게 공동체가 공유하는 유무형의 가치에 대한 존숭(尊崇)이 희박하다. 건국절 논란에서 보이듯 보수를 자처하는 ‘대한민국 세력’은 자신들의 기원을 좀처럼 1948년 이전으로 소급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전쟁을 예비한 극심한 갈등과 학살, 그리고 전쟁 이후 온 나라를 병영으로 만들어 운영했던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그런 풍토에서 ‘우익 청년’은 앞서 살펴본 『오욕의 강물』의 이상태처럼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병리적 인물로 표상될 뿐 시간의 내력을 충분히 견디어 거기에 앞날을 정박시키려는 ‘품격 있는 보수’에의 의욕을 보여주지 못한다. 

   장정일이 ‘우익 청년 일대기’를 시도했다는 건 이상태와 같은 우익 청년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우익 청년의 형상화를 도모해 볼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일군의 젊은 청년들이 스스로를 보수 우익으로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뉴라이트’를 새로운 보수 운동의 총아로 승인하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장정일의 시선은 당면한 ‘뉴라이트’라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지양하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구성될 ‘우익의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정일에 따르면 새로운 우익을 표방하고 나선 뉴라이트 역시 “좌파에 대한 피해의식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일제와 독재에 부역한 원죄가 있”는 올드 라이트와 별 다를 바 없다. 장정일이 기대를 거는 인물은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은’이다. 장정일은 ‘은’에게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부여했다고 설명하며, 비록 이 작품에서 그는 올드 라이트와 뉴 라이트의 영향 아래 있지만 “그들과의 사상투쟁을 통해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으로 단련되어 갈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장정일이 기대했던 “젊고 순수한 우익”은 과연 출현했는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금’과 ‘은’은 2003년에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다. ‘금’은 광주 출신으로 지역에서 사회운동에 헌신하다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부산 출신인 ‘은’ 역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게 된다.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한 금과 사범대학교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한 은은 서로 전공은 달랐지만 교양 필수과목인 <현대문학의 이해>를 함께 수강하면서 교분을 쌓는다. 작품의 서사는 각각 ‘금’과 ‘은’의 행로를 번갈아가며 좇지만 무게는 ‘은’에게 더 기울어 있다. 이 소설은 문학과 예술로 대표되는 미적 가치를 추구한 ‘은’이라는 소년이 그 세계를 위악적으로 부정하고 냉혹한 힘의 원리를 숭배하는 우익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장정일이 쓴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서구 유럽의 소설” 리스트에 토마스 만이 쓴 「토니오 크뢰거」가 들어 있을까? 매우 높은 확률로 그럴 거라 추측하는데 『구월의 이틀』이 품고 있는 다양한 모티프들이 「토니오 크뢰거」의 그것과 매우 높은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가 한스 한젠에게 품은 동성애적 감정은 ‘은’이 ‘금’에게 품은 동성애적 감정과 유사하거니와 ‘문학 소년’인 토니오 크뢰거와 ‘은’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양가감정이 핵심이다. 열네 살의 토니오 크뢰거는 “승마를 하고 체조를 하며 수영을 하는 씩씩한 장부”3)인 동창생 한스 한젠을 사랑하지만 내향적인 성격의 그는 한스와 흔쾌히 어울리지 못한다. 문제는 단지 그의 성격이 내향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선량한 학생들과 건전한 평범성을 갖춘 학생들”4)과는 다른 ‘별종’으로 여기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남들과 다르게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일반적인 남성 동성 사회성을 구성하는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어서 토니오 크뢰거 역시 “시를 쓴다는 것이 방종한 짓이며 원래 온당치 않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감은 이후 잉에보르크 홀름 양을 사랑하게 된 후에도 지속된다. 한스에 대한 사랑은 잉에 홀름에 대한 사랑으로 옮아갔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그녀가 “시 나부랭이를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틀림없이”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상심한다.

   시를 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감은 『구월의 이틀』의 주인공 ‘은’에게도 나타난다. 오에의 「세븐틴」에서 소년이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설익은 좌익 이념이었다면 『구월의 이틀』에서 그것은 “미”와 “시”다.5) 중요한 것은 그 둘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 부정을 추동하는 심리적 기제다. 「세븐틴」의 소년이 설익은 좌익 이념이라는 관념과 자위행위에 몰두하는 초라한 자아라는 실체 사이에서 발원하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천황이라는 상징에 자아를 내던졌다면, 『구월의 이틀』의 ‘은’은 ‘사람을 철없고 한심스럽게 만드는 문학’과 결별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객관적인 ‘힘’에 투신함으로써 ‘성장’을 도모한다. “부산 시내의 고등학교 문예반 연합 동아리 전체에서 가장 시를 잘 쓰는 학생”6)이었던 은은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고 자신이 아껴 가며 읽었던 세계문학전집까지 차압당해 빼앗기게 되면서 “그걸로는 나를 지킬 수도 없고, 세상을 만들 수도 없다는 생각”7)에 닿게 된다. 그 생각은 점점 커져서 종내 “‘내가 이렇게 한심스럽고 현실에 어두운 까닭은, 다 시집을 끼고 살기 때문이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르는 것은 그래서야. 그러니 사람을 철없고 한심스럽게 만드는 이런 문학과는 어서 결별하는 게 좋아. 그런데… 내게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시 쓰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8)와 같은 실존적인 고민으로 발전한다. 

   이 고민은 정확히 토니오 크뢰거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지만 ‘은’은 토니오 크뢰거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토니오 크뢰거는 “진부한 것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분별과 취향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날카롭고 섬세한 예술가적 재능을 발판 삼아 등단에 성공하여 “탁월한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우뚝 선다.9) 시인이 된 그의 경멸은 이제 나약하게 시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는 스스로가 아니라 예술가적 삶을 외투처럼 걸치는 딜레탕트들을 향한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모델로 한 토니오 크뢰거의 입을 빌려 평범한 세인들과는 다른 예술가의 독특한 존재론을 설파한다. 그는 연인인 리자베타에게 늘어놓는 일장연설을 통해 “우리 예술가들 자신은 그 무엇인가 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과 이상하게도 동떨어지고 무관한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유난한 ‘별종’으로 느끼게 했던,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끔 만들었던 성격적 결함은 예술가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반어, 불신, 반항”의 징표로 여겨진다. 

   이 대목만 떼어 놓고 본다면 이 작품이 미와 예술의 세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소외받다가 예술을 통해 명성을 획득하게 된 예술가가 자신을 소외시킨 범속한 세계를 향해 원한을 발산하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단지 일반 시민과는 다른 예술가의 미적 존재성을 독단적으로 내세우는 작품이 아니다.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토니오 크뢰거는 스스로를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이라 지칭하면서 그 자신의 내부에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시민과 예술가라는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마성적인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자들”을 비판하면서 “나의 시민성이 <삶>에 대한 나의 사랑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긍한다. 

   그런데 ‘은’에게는 토니오 크뢰거가 지녔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통합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요소인 ‘시민적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은’이 문학의 세계를 위악적으로 부정하고 힘의 논리에 투신하게 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시민적 사랑’의 부재에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적 유미주의와 범속한 세속주의 사이를 방황하면서도 끝내 이 둘을 ‘시민적 사랑’으로 통합하려는 토니오 크뢰거와 달리 “문학이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10)고 생각하는 ‘은’은 시의 세계에 침을 뱉고 돌아선 뒤 우익 학생운동에 뛰어든다. 한때 탐미주의자에 가까웠던 ‘은’이 과격한 우익 학생으로 변모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은’은 중학교 때부터 “병적일 정도의 신체적 열등감”11)에 시달렸으며 시의 세계는 그런 열등감을 자족적으로 보상하는 상상의 도피처였다. 하지만 그 도피처가 실제 현실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깨닫자 ‘은’은 현실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과 의지에 매혹된다.

   거기에는 보수 논객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의 작은아버지의 영향도 크게 작용한다. ‘은’의 작은아버지는 ‘대한민국 재건국 운동’을 앞장서서 펼치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전국 대학생 연합회 ‘자유의 나무’”를 물밑에서 이끄는 인물이다. ‘은’은 “한줌의 좌파들보다 침묵하는 다수가 실은 더 많았는데도,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한줌도 못 되는 좌파 책동가들에게 농락당했”으며 “이제 우익 청년 대학생도 조직해야” 한다는 작은아버지의 연설에 감동하여 ‘자유의 나무’에 가입하기로 마음먹는다. 흥미롭게도 그 순간 ‘은’은 「세븐틴」의 소년이 느꼈던 것 같은 폭력의 에피파니에 휩싸인다.(“박정희를 빨갱이라고 부르대는 철부지들을 박멸해야 한다! 바퀴벌레 잡듯 잡아야 한다! 놈들의 창자를 꺼내야 한다!”) 발산하는 폭력의 에피파니는 ‘은’이 비어 있는 시민적 우애와 사랑의 자리를 「세븐틴」의 소년을 따라 ‘빨갱이’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채우게 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7. ‘패자의 언어’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좌익을 꿈꾸었던 「세븐틴」의 소년과 시인이 되기를 소원했던 ‘은’은 심정적으로 ‘자기모멸’과 무력감에 시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븐틴」의 소년은 자유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즉 자신이 느끼는 무력감을 극단까지 몰아붙여 일종의 사물과 같은 수동성에 도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난다. ‘은’은 자신이 현실에서 무력한 이유를 시에 탐닉하는 유약한 정신 탓으로 돌려버리고 자신의 성 정체성과(‘은’은 동성애자다) 문학에 대한 사랑을 모두 위악적으로 부정한 채 자신이 힘으로 세계를 길들일 수 있기를 욕망한다. ‘자기모멸’의 심정과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한 원천으로서의 힘에 경사되는 마음의 구조는 ‘우익 성장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모티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두 청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도 존재한다. 「세븐틴」의 소년에게는 귀의할 수 있는 정치적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이 존재하는 반면 한국인인 ‘은’에게는 그와 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 ‘은’은 스스로를 “고속도로 위에 내던져진 고아”12)로 여긴다. 이 차이는 한국 우익 이념의 형성과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온 것 같다. 신성한 통합의 거점이 존재하는 사회에서의 ‘우익 됨’과 그런 것 없이 모든 것이 세속적인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사회에서의 ‘우익 됨’은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은’의 고등학교 시절 국사 선생님이 일본 여행을 다녀온 뒤 한국의 씨름과 일본의 스모 경기를 비교하며 한국의 씨름은 “세속적이고 상업적이며 볼거리 위주의 오락성이 지배”하는 데 반해 일본의 “스모 경기는 종교의례처럼 엄숙”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국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은’은 갑자기 한국의 대통령 취임식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긴다. “대통령 취임식이 신성한 의례와 초인적인 주재자의 축복 없이 진행된다는 것은 두루 불행한 일이다. 꼭 대통령 취임식만 아니라, 어떤 국가적인 의례에서건 국교가 없는 나라는 세속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어서 국민 투표를 해서 국교부터 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13)

   “세속을 피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가치와 이념을 둘러싼 다툼이 극단화되기 쉽다. 세속의 다툼을 초월적으로 심판할 준거가 존재하지 않기에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힘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은’의 인식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과 달리 세속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공동체를 결속시켜 줄 여하한 초월적 상징을 갖지 못한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보수’이자 ‘우익’의 정체성을 수호하며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양태를 띠게 된다. 절단된 국토의 절반을 지배해 온 정치 지도자를 페티시즘적으로 숭배하거나 비합리적인 대중과 구별되는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작은 신’으로 모시며 살아가거나. 전자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이 곧 옳은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인식으로, 후자는 진보와 좌익을 설익은 ‘감성팔이’로 치부하며 자신들은 그런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팩트’만 신봉한다는 물신주의적 태도로 나타난다. 이 두 양태는 서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오늘날 보다 지배적인 정동은 후자에 입각한 태도다. 

   『구월의 이틀』이 배경으로 삼은 2003년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지형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 작품은 노무현 정권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뉴라이트 운동’을 새로운 보수 우익 정치세력화의 출발로 삼고 있다. 이 운동은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창출에 기여하며 세를 불려 나갔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기세가 한풀 꺾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장정일이 기대했던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 비슷한 것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장정일이 젊고 순수한 우익의 요건으로 삼은 ‘냉철한 사상 투쟁’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사상 투쟁’의 내용이 더는 기존의 정치문법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보다 훨씬 탈정치화 된 오늘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우익’과 ‘보수’가 포괄하는 의미망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가령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정부를 지지했던 20대 남성들의 수는 60대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이 결과가 20대 남성들이 보수 우익적 정치 이념을 표출했다는 주장과 합치하지는 않는다. 여러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20대 남성들의 정념과 행태는 진보와 보수를 분할하는 기존의 정치적 잣대를 교란하는 측면이 있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권위적 배분의 기준으로서의 공정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장정일은 “우익 청년 일대기”를 쓰겠다고 했지만 『구월의 이틀』은 ‘일대기’라기보다는 ‘입문기’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사회적 지형은 이 작품이 다루는 진보와 보수의 구획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개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또한 대면적 결사보다 인터넷 공간을 기반으로 한 비대면적 상호작용에 더욱 크게 빚지고 있다. 「세븐틴」의 소년이 투신했던 우익 조직이나 『구월의 이틀』의 ‘은’이 몸담았던 ‘자유의 나무’ 같은 단체는 이제 ‘우익 청년’을 조직하거나 그들의 맞춤한 활동무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이유다. 개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파편적이고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면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정치적 정념을 발산한다. 하지만 그 정념은 과거 우익 보수주의자들이 지녔던, ‘은’의 표현에 따르면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14)라는 우승열패적 힘의 논리와 조금 다르다. 오늘날에는 우익 보수주의자들조차 <강한 것은 폭력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나쁘며, 나는 그와 같은 폭력의 희생자다.>라는 신조에 젖어 있는 듯 보인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와 같은 “우파의 피해망상증”15)은 과거에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주변부로 밀려났지만 오늘날에는 보수 우익들이 그와 같은 ‘희생자 의식’을 표 나게 내세운다. 이는 기존 ‘우익 헤게모니’가 해체되어 예전만큼의 강고함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헤게모니 다툼의 전선이 누가 ‘선량한 피해자’의 지위를 획득하는지에 그어져 있음을 방증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우익 성장소설을 과대망상자의 시대착오적 모험담이 아니라 근대 세계를 지배해 온 보편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의 임계를 드러내는 서사 양식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오에와 장정일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현대 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키는 모종의 불만을 겨냥한다. 「세븐틴」에서 미국식 자유주의는 “더 넓은 국가적 목적 없이 단지 평화롭게 다양성을 조율하는 메커니즘”16)으로, 지극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자기 삶에 개입해 실천적 지침과 고양된 목표를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힘의 존재를 갈구하는 소년은 무기력한 자유주의에 실망하고 그와 같은 지침과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우익 선동가의 외침에 투항한다. 『구월의 이틀』의 ‘은’은 자유주의 전통의 핵심 원칙인 ‘평등’을 위악적으로 비난한다.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그들 간의 도덕적 가치 차이를 법적 혹은 정치적 질서와 연관 짓”17)기를 거부하지만, ‘은’은 “함께 진화하며 성장하고 함께 적자생존의 단맛을 나누지 못할 낙오자들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나 인류 문명을 위해서나 빨라 사라져야 한다.”며 분개한다.18)

   이와 같은 자유주의 보편 이념에 대한 불만을 단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 그 불만이 더욱 극단화되어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가 지향하는 목표를 낮추고자 시도”하면서 “정치는 종교에 의해서 정의된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보전, 즉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방식”19)으로 스스로를 제한한 자유주의의 내재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요컨대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 사회는 그 공백을 기만적으로 채우려는 극단적 행동주의에의 매혹을 불씨처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악화되는 계급적 격차 역시 다양한 ‘우익 성장담’이 자라날 토대가 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니, 계급적 격차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문화적·성적·인종적 격차가 경제적 계급화와 연관되면서 다채로운 ‘열등감’을 구성해 내기 때문이다. 양자오는 “인간의 타락은 무지와 가난이 아니라 열등감”에서 나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20) 하지만 양자오는 곧바로 무지와 가난이 곧바로 인간의 타락을 가져오는 건 아니라고 덧붙인다. 북미 인디언의 경우 무지하고 가난했지만 결코 타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평등한 사회에 살아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봐도 자신과 닮은 부족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양자오가 말한 ‘타락’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자면 ‘흑화’쯤 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세븐틴」을 ‘스쿨 카스트’ 문학의 일종으로 파악한 바 있다.(‘스쿨 카스트’란 학생들 사이에 발생되는 학급 내의 위계도를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에 비유한 일본의 조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 소년의 ‘흑화’는 ‘격차’와 무관하지 않은 셈이며, 『구월의 이틀』의 ‘은’ 역시 자기모멸과 열등감을 해소할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흑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이 나라에서 지금 나오는 말들은 ‘승자의 언어’와 ‘패자의 언어’로 구분되어 있고, 우리는 ‘패자의 언어’에 의한 고발에 귀를 닫고 있다.”21)고 말한다. 그의 관찰처럼 “사람들이 ‘수평적 차이’에서 안심을 얻지 못하고 히에라르키라는 ‘수직적 차이’를 통해 안심하게 되는”22)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면 수직적 위계의 아랫부분에 놓인, 그 ‘패자의 언어’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하나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번에 살펴본 두 작품은 ‘우익 성장담’이라는 형식으로 그 ‘패자의 언어’에 접근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 ‘열등감’과 ‘흑화’를 둘러싼 첨예한 쟁점들은 여전히 이야기되기를 기다리며 남아 있다. 

1) 이 소제목은 『구월의 이틀』(장정일,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제10장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2) 장정일, 「작가 후기」, 위의 책, 334.
3)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단편선 :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 민음사, 2009, 14면.
4) 토마스 만, 위의 책, 13면.
5) 토마스 만, 위의 책, 44면.
6) 장정일, 앞의 책, 192면.
7) 장정일, 위의 책, 97면.
8) 장정일, 위의 책, 151면.
9) 토마스 만, 앞의 책, 38면.
10) 장정일, 앞의 책, 243면.
11) 장정일, 위의 책, 164면.
12) 장정일, 앞의 책, 330면.
13) 장정일, 위의 책, 74면.
14) 장정일, 앞의 책, 243면.
15)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상원 옮김, 『자유주의와 그 불만』, 아르테, 2023, 161면.
16) 프랜시스 후쿠야마, 위의 책, 198면.
17) 프랜시스 후쿠야마, 앞의 책, 19면.
18) 장정일, 앞의 책, 244면.
19) 프랜시스 후쿠야마, 위의 책, 25면.
20) 양자오 지음, 조필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유유, 2018, 132면.
21)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리시올, 2020, 123면.
22) 오쓰카 에이지, 위의 책, 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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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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