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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절멸의 상상력과 페미니즘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853

[비평 / 2022년 문학비평활동지원사업 선정작]



디스토피아, 절멸의 상상력과 페미니즘



이정현




“두려움이 그들을 오히려 수다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국에서 벌어졌던
재앙과 절망을 묘사하며, 치유 방법이 없다는
그 질병의 공포를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 메리 셸리, 『최후의 인간』




1. 인류세와 기후변화,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의 부상


통제 불능의 전염병이 번지면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몰린다. 위기를 수습하려는 노력은 또 다른 갈등을 낳고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재난을 다룬 숱한 영화와 문학 텍스트에서 재현되었던 풍경이다. 코로나19 펜데믹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견고하다고 여기던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있다. 오히려 상상이 현실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다는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다. 하지만 과연 코로나19 팬데믹이 결정적인 요인일까. 세계가 감당못할 파국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자원고갈, 기후변화, 핵전쟁과 방사능 누출 등 인류를 파국에 이르게 할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인류는 파국의 요인들을 애써 외면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도래할 재난으로부터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지질학자 파울 요제프 크뤼천(Paul Jozef Crutzen)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1) 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인간이 지구 시스템을 전체를 흔드는 새로운 연령대에 접어들었음을 주장했다. 인류세를 논의하는 과학자들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잔해, 핵물질, 살충제, 비료 반응성 질소, 온실가스 농축 등을 거론하면서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을 역설했고, 이는 지질학을 넘어 생태주의, 포스트 휴머니즘, 과학기술, 경제학, 예술론, 페미니즘의 영역과 연결되었다. 과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연료가 얼마 남지 않은 비행기에 탑승한 지구인’이라는 상징적인 비유로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요약했다.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인류가 신봉했던 ‘물질적 풍요의 지속’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가 멸망한 이후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근래 우리가 겪은 각종 바이러스 질환들은 절멸의 상상력이 구체적인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조류독감, 돼지 인플루엔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지카 바이러스 등 2000년대 이래 발생한 바이러스 질환들은 기후변동으로 서식지가 파괴되어 기존에는 접촉 가능성이 극히 낮았던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늘어난 결과였다. 아직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을 소재로 다룬 최초의 종말 소설인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1826)도 1815년 발생한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대폭발로 발생한 화산재가 유럽을 비롯한 북반구를 뒤덮어버린 충격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최후의 인간』은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1784)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산업혁명 초기에 나온 역설적인 텍스트였다. 과학과 이성의 힘을 무한히 신뢰했던 인간 중심의 시기에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절멸의 상상력’에 감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인류세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메리 셸리의 소설을 비롯한 종말 문학 텍스트들이 다시 조명을 받았고, 생태 위기와 기후 재난을 다룬 텍스트들이 늘어났다.
국내 문학에서 아포칼립스 서사를 다룬 파국 서사는 오랜 기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생태 위기와 기후 재난이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면서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작품성이 뛰어나고 독자들이 선호하는 텍스트가 창작되면서 파국을 다룬 서사는 한국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 문학에서는 파국 서사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으로 페미니즘이 대중화한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온라인 미디어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의제가 빠른 속도로 환산되었고,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정책을 비판하면서 일상에서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을 폭로하고 피해자들이 연대하는 광범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처럼 한국 여성이 마주한 불평등을 사실적으로 조명한 작품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와 함께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지닌 SF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었다.
페미니즘과 SF의 결합은 한국에서만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다. 세계가 멸망하는 재난 상황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는 장치다. SF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과학소설연구》의 편집장이자 포스트 휴머니즘 이론가 셰릴 빈트(Sherryl Vint)는 SF의 특성 중 하나를 “신념의 문학”으로 정의하고, “SF의 비판적 독서를 통해 텍스트가 현실 사회 구축에 특정한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을 다시 생각”2) 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SF가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나 문화를 상상력을 통해 낯설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현실을 응시하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페미니즘과 SF, 더 좁게는 페미니즘이 파국 서사에 효과적으로 틈입한 해외의 텍스트들을 이미 알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James Tiptree Jr.)의 「체체파리의 비법」(1977)은 전 세계에 치명적인 질병이 퍼지는 상황을 다룬 고전적인 작품이다. 생물학자인 주인공은 인간에게 수면병을 감염시키는 체체파리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수컷이 암컷에 무심하게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는 아내와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멀리 남미 콜롬비아에서 연구 중이다. 아내와는 전화와 편지로 소통을 이어간다. 어느 날 아내는 편지에 ‘아담의 후손들’이라는 신흥종교단체 여성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적는다. 신의 명령으로 여성을 악으로 규정한 신도들은 여성들을 계속 살해하고,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인이 벌어진다. 가족을 보호하려고 귀국한 주인공은 공항과 시내에 널린 시체들을 보면서 의문의 괴질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주인공도 감염되어 여성 살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괴로워하던 그는 아내 몰래 자신을 찾아온 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이어지는 아내의 편지에서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다. 아내는 여자를 살해하는 남자들이 보았다는 ‘천사’를 목격하는데, 그 천사는 정체는 바로 외계인이었다. 체체파리의 교미를 조정하여 박멸하려고 했던 주인공과 비슷한 실험을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과 출산의 문제, 인간이라는 종(種)의 한계에 관한 사유를 팬데믹 상황과 결합한다. 팬데믹 상황에 집중하던 독자들은, 인간은 단지 지구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한계와 마주한다.
특히 페미니스트 SF가 붐을 이루었던 1970~80년대 서구의 작가들은 성,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의식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조애나 러스(Joanna Russ)는 남자가 사라진 가상의 세계(「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를 다루었고,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시녀 이야기』(1985)에서 출산 능력을 기준으로 여성들을 격리 수용하는 극단적인 통제사회를 그려 충격을 주었다. 샐리 밀러 기어하트(Sally Miler Gearheart)는 『배회의 땅』(1978)에서 도시에서 갇혀 죽어가는 남성과 숲에서 자유롭게 사는 여성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 남성 중심사회의 폭력성을 풍자했다. 인간과 달리 26일마다 특정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외계 종족 ‘게센’이 등장하는 기념비적인 소설 『어둠의 왼손』(1974)를 쓴 작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은 자신의 문학적 실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 1922년 구소련 지질학자 알렉세이 파블로프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인류세는 인류를 의미하는 ‘안트로포스(anthopos)’와 시대를 의미하는 ‘세(-cene, epoch)가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이어진 ’홀로세(holocene)’에 이어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지질학 시대를 새롭게 명명해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용어다.
2) 셰빌 빈트, 정소연 역, 『에스에프 에스프리: SF를 읽을 때 우리가 생각할 것들』, 아르테, 2019, 197쪽.



당시 내 실험 주제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는 평생 겪는 사회적 조건화 때문에, 순수하게 생리적인 형태와 기능 외에 남자와 여자를 정말로 구분 짓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보기가 어렵다. (……) 상상으로 만든, 그러나 인습에 충실하고 평범한, 아니 고루하기까지 한 젊은 지구인을 생리적인 성 구별이 전혀 없기에 성 역할이 없는 상상 속의 문화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나는 무엇이 남는지 알아보기 위해 젠더(사회적 성)을 제거했다. 아마 그저 인간이 남을 터였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영역을 알 수 있을 터였다.3)


3) 어슐리 K. 르 귄, 이수현 역, 『세상 끝에서 춤추다: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황금가지, 2021, 27쪽.



그렇다면 기후변동과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국내 파국 서사의 상상력은 어떠한가. 르 귄의 말처럼 SF가 일종의 문학적 실험이라면 국내 파국 서사의 문학적 실험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이 글에서는 파국 서사를 다룬 국내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절멸의 상상력과 파국 서사가 페미니즘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SF 서사는 주로 ‘언젠가-저기’라는 가상의 세계를 다루지만, 그것이 환기하는 것은 ‘지금-여기’의 현실이다. SF 연구자 다코 수빈(Darko Suvin)의 지적처럼, SF는 현실의 반영일 뿐 아니라 현실에 관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선 분석할 작품들은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민음사, 2017), 장은진의 『날짜 없음』(민음사, 2016),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민음사, 2021)다. 이 작품들은 모두 비슷한 패턴을 공유하고 있다. ①기후변화로 발생한 재난과 파국, ②여성 생존자들, ③생존자들의 연대다. 이 세 작품은 공교롭게도 같은 출판사(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의 결과일까. 먼저 비슷한 파국 서사를 다룬 세 작품의 의미와 한계를 분석한 다음 천선란의 『무너진 다리』(그래비티, 2019)와 『랑과 나의 사막』(현대문학, 2022)을 살펴볼 것이다. 천선란은 멸망한 세계에서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와 인간, 동물의 공존을 묘사한다. 천선란의 소설들은 여성과 기술의 결합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 창출과 정치적 변화로 확장될 수 있는가를 묻는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1985)의 문학적 형상화로 읽힌다.



2. 소비되는 재난, 절멸과 ‘실제 역사’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이하 쪽수만 표시)는 전염병으로 인류의 시스템이 붕괴한 이후를 다룬 파국 서사다. “먼 나라에서 기괴한 바이러스가”(10쪽) 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2019년 겨울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미리 예견한 것 같은 도입부다. 그래서 이 소설은 팬데믹을 겪으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은행과 기업의 파산은 질병을 넘어선 재앙을 불러왔다. 강도와 밀수와 방화와 인신매매와 살인과 폭력과 종교의 범람. 남성 치사율이 훨씬 높으며 어린아이 간을 먹으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정부는 사라지고 질서는 무너졌다.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던 날들. (11~12쪽)


고전적이면서 인상적인 도입부다. 그렇지만 인류의 시스템을 마비시킬 정도의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설정을 했는데 재난에 관련된 언급은 단지 이 정도에 머문다. 주인공 류, 도리, 지나, 건지는 한국을 떠나 러시아의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여정에 나선다. 국경마다 버티고 있는 무장한 갱단은 피난민들을 약탈하고 겁탈한다. 도리와 미소 자매는 지나의 도움으로 지나 가족의 트럭을 얻어타고 러시아로 피난을 떠난다. 지나의 아버지는 국경 너머에 안전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가족’은 재난의 세계에서 그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집단이다. 피난 생활이 이어지면서 도리와 미소는 점차 지나 가족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 급기야 지나의 친척은 도리를 강간한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차에 태워줬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지나는 가족들의 횡포에 치를 떨면서 도리를 보살핀다. 작가는 시종일관 도리와 지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파국에 이른 세계에서 사랑이야말로 유일한 가치임을 강조한다. 두 사람의 독백은 계속 교차하면서 반복된다.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는 엄마의 죽음도 나의 삶도 견뎌 낼 수 없다. (37쪽)


그런 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55쪽)


세계는 망해 가고 있으며 우리는 만났다. 그러니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을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64쪽)


생존 자체가 목적인 세상에서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지나의 의지는 각별하다. 그녀의 의지는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타자를 배제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동성애에 빠진 두 사람의 발언은 더욱 간절하다. 두 사람의 동성애는 재난-남성-폭력으로 구축된 질서와 이질적이다. 동성애는 장악하고, 지배하고, 빼앗긴 남성적인 질서가 통용되는 재난 상황에 여성적인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18쪽)라는 결연한 선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재난에 휩쓸린 세계를 견디는 힘으로 사랑을 호명하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문법이다. 한 연구자는 이 소설을 “제도와 관계 등을 뛰어넘어 가족, 혈연 및 성별 등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혁명적 사랑 담론이 재난으로 파괴된 세계에 꼭 필요한 것임을 설명한다”4) 고 상찬했다. 하지만 과연 이 사랑은 혁명적인 것일까.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서사는 근대적인 세계가 붕괴한 이후를 다루면서 기존의 가치로는 세계를 복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적인 것이 무너진 세계를 통해 인간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시한다. 그런데 여전히 사랑, 희망, 도덕 등 인간적인 가치를 얘기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는 근대적 가치가 붕괴한 지점에서 다시 근대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의 회복을 주장한다. 재난 자체가 인간의 실패를 증명함에도 여전히 ‘인간적인 것’의 회복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중심의 사고가 한계에 봉창하여 파국을 맞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 중심의 사고로 파국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레베카 솔닛은 20세기의 재난을 분석하면서 재난은 위기인 동시에 “잠재적 낙원”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레베카 솔닛의 주장은 도덕적이며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인류의 시스템을 무너뜨릴 정도의 팬데믹 앞에서도 이런 방식의 연대가 여전히 유효한가. 팬데믹 상황에서 타인은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잠정적인 매개체가 되지 않는가.
소설은 불신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 타인 중 ‘우리’에 속하는 소수를 구분하고 연대하는 방식이 여전히 가능한가를 묻지 않는다. 재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언급은 빈약하고, 사랑을 외치는 결연한 목소리만 남는다. 작가는 “온갖 나쁜 것 속에서도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165쪽)을 줄곧 강조한다. 20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다짐’과 ‘선언’이 주축이 된다. 기후변화로 파국에 이른 세계를 다룬 서사임에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성찰하는 시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바이러스가 퍼졌는데, 그 바이러스에는 이름조차 없다. 그냥 ‘치명적인 질병’으로 명명될 뿐이다. 이미 망가진 세계에서 지나는 익숙한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용기, 정의, 여성, 고귀, 인간적인 것, 사랑, 새로운 세대가 한 축을 구성하고 폭력, 남성, 범죄, 더러움, 소유욕, 악행, 기성세대가 다른 한 축을 구성한다. 지나의 아버지, 삼촌, 건지의 아버지, 류의 남편 등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 중 유일하게 선한 인물은 (어린) 건지 뿐이다. 이 남자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된 이유는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는다. 재난 이후의 혼란과 무질서를 이유로 꼽을 수 있겠지만, 그런 설정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남성과 여성,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 어른과 아이. 소설은 이런 이분법 위에 익숙한 휴머니즘을 덧씌운다. 재난(팬데믹)은 소설의 허술한 설정과 구조를 덮어버린다. 재난이 소설의 배경으로 차용된 것에 불과할 때 파국 서사의 근원적인 질문은 설 곳을 잃는다.
장은진의 소설 『날짜 없음』(이하 쪽수만 표시)은 기후변화로 폭설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그린다. “이상기후로 1년째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멈추지 않고 눈이 쏟아지”(7쪽)고, 폭설은 국가 시스템마저 마비시킨다. 회색 눈이 내리기 전에는 빨간 눈과 비가 내렸다. 그러다가 회색 눈에서 숯눈을 거쳐 빨간 눈이 다시 시작되고, 광풍과 추위가 몰아친다. 회색과 빨간 눈이 내리는 풍경은 종말의 배경에 잘 어울린다. 이 소설에서도 재난의 원인이 된 회색과 빨간 눈에 대해서는 서두의 언급에 머문다. 다가오는 종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소설의 장(場)은 179번에서 0번의 순으로 전개된다. 의사인 해인과 구두수선공인 ‘그’는 연인이다. 종말을 앞둔 세계에서 해인과 ‘그’의 사랑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욱 애틋해진다. 도시에는 종말을 의미하는 “그것”이 다가온다는 유언비어가 무성하게 퍼지고,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난다. 떠나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돌아온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회색 눈을 맞으면서 떠나는 사람들을 ‘회색인’이라고 부른다.
가족들이 모두 떠났지만, 해인은 ‘그’의 곁에 남는다. 시간이 무의미해진 도시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회색인’의 물결은 커다란 대열을 이루어 도시를 빠져나간다.


4) 서세림, 「재난 서사와 사랑 담론:201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사이』 제29집,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0, 355쪽.



하늘에 시커먼 양말과 양 떼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지구의 체온은 매일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지구는 제자리에 꽁꽁 얼어붙어서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마저 멈춘 듯했다. 그래서 겨울이 아닌데도 겨울이 계속됐고, 밤이 아님에도 밤이 줄곧 이어졌다. 온도 유지 장치가 고장난 기계처럼 눈은 녹아야 하는 계절이 왔음에도 자꾸 쌓였다. 컬러 사진 같은 화려한 봄꽂 대신 흑백 사진 같은 축축한 회색 눈만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졌다. (8~9쪽)


소설의 설정과 전개는 데이빗 맥켄지(David Mackenzie) 감독의 영화 《퍼펙트 센스》(2011)와 연상시킨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종말의 소재는 ‘감각의 상실’이다.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과학자 수잔(에바 그린 분)과 요리사 마이클(이완 맥그리거 분)은 연인이다. 두 사람은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냉소를 던지고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감각을 하나씩 상실한다. 처음에는 후각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후각이 사라진 공허함을 극복하려고 미각에 탐닉한다. 식당은 요리의 양념을 자극적으로 바꾼다. 곧 바이러스가 변이되고, 미각이 사라진다. 그러자 먹는 즐거움을 잃자 사람들은 청각을 자극하려고 클럽에 모여든다. 요리사인 마이클은 일자리를 잃고 만다. 곧 청각마저 사라지자 세상은 지옥으로 바뀐다. 자동차 경적과 순찰자와 엠블런스의 사이렌이 무용지물이 된다. 교통사고가 속출하고, 총을 든 범법자들이 활개를 친다. 도시에는 TV 뉴스와 라디오마저 끊기고 두 연인은 고립된다. 화면은 점차 어두워지고, 시각마저 마비되었음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둠 속에서 수잔은 선언한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촉감이 남아 있다.”
『날짜 없음』의 전개는 영화 《퍼펙트 센스》와 매우 흡사하다. 다만 감각의 상실이 폭설로 변주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온다는 발언이 중첩되면서 두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날짜 없음』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다가오는 종말에도 여전히 일상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종말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그’는 세상을 바꾸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컨테이너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늙은 반려견 ‘반’에게 마지막으로 닭을 삶아 주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종말을 특별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나날 중 하나로 여기면서 주어진 하루를 담담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끝을 경험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는지도요. 우리가 상상하는 거랑 달리 지금 이 순간과 상황이 그것인지도요.” (146쪽)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을 계속 묘사하면서 주인공 지나와 도리의 선함을 부각하는 『해가 지는 곳으로』와는 달리 『날짜 없음』에는 주인공의 동선에 큰 변화가 없다. 오히려 그래서 종말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담고 있다. 문제는 클리셰(Cliché)다. 이미 비슷한 상황을 다룬 텍스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두운 가운데 누군가를 굳세게 부둥켜안고 붙잡을 대상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일까”(259쪽)라고 독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퍼펙트 센스》의 오마주처럼 읽힌다. 기후변화가 낳은 파국의 상황을 다루면서도 재난의 원인과 진행, 사람들의 대응과 결과 등을 대부분 생략한 채 연인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재난’은 그저 배경으로만 놓인다.
조예은의 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이하 쪽수만 표시)는 『해가 지는 곳으로』와 『날짜 없음』과는 달리 코로나19을 통과하는 중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녹지 않은 눈’이 내리는 세계가 그린다. 방부제처럼 수분을 빨아들이는 성질을 가진 눈이 계속 내리면서 도시는 마비된다. 눈은 녹지 않을 뿐 아니라 피부에 닿거나 흡입하면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한다.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눈 내리는 풍경이 선사하는 낭만은 자취를 감추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피부를 가리고 실내로 도피하기 바쁘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재난은 호황산업을 낳았다. 눈을 치우는 소각장(매립 센터)이 들어서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고 방역회사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소각장이 들어선 도시의 집값은 폭락한다. 국가는 그들의 희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재난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다수의 고통에 침묵한다. 공포가 만연한 세계에서 애도는 사치가 된다.


사람들은 눈송이가 스며들 일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 눈을 퍼냈다. (……) 몇 개월에 걸친 복구 작업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또 다시 눈이 내렸다. 진짜 눈과 가짜 눈이 마구 섞인 채로 내렸다. (35쪽)


언뜻 파국 서사의 전형적인 설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은 ‘파국 이후’를 다루지는 않는다. 녹지 않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 학생들은 여전히 학교에 나가고, 공장이 돌아가고, 소방서와 경찰서의 기능이 유지되는 상황이다. 앞선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재난은 단순한 배경에 불과하다. 소설의 핵심은 모루와 이월이라는 두 소녀의 동지애다. 녹지 않는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 모루와 이월은 백영 중학교에서 처음 만난다. 두 학생은 졸업식 때 같이 사진을 찍은 것 말고는 겹치는 기억이 별로 없다. 엄마와 이모와 함께 가난하게 성장한 모루와 이사장 어머니와 대기업 CEO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란 이월의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7년이 지난 후 이월은 자신의 새엄마를 스노볼 더미와 함께 묻어주려고 트럭운전사인 모루의 이모 유진을 부른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이모는 실종된다. ‘녹지 않는 눈’을 처리하는 폐기물 매립 센터에서 일하던 모루는 이모를 찾아나서려 한다. 유진이 모루의 이모임을 알게 된 이월은 사고 직후 모루가 일하는 매립 센터에 취직한다. 두 사람은 중학교 시절 서로에게 끌림을 느꼈었다. 7년 만에 매립 센터에서 만난 모루와 이월은 변함없이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두 사람은 이월의 아빠 차를 훔쳐 이모 유진을 찾아 함께 떠난다.


나는 손을 들어 버석하게 부르튼 이월의 입술을 매만졌다. 거칠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틈에서 나오는 숨은 아직 따뜻하다. 다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환풍기 구멍 너머로 눈이 스며드는 소리는 포근했고, 그 이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너무 조용해서,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 나는 이월과 설원을 질주하는 장면을 보았다. (212쪽)


간략한 줄거리 요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루와 이월이 7년 만에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떠나는 서사에서 재난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재난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방역업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시스템 등이 언급되고 있지만, 서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녹지 않는 눈’은 두 사람의 ‘변하지 않는 마음’을 대변하는 코드에 가깝다. “최악을 상상하는 건 너무 쉽고 매력적이다”(25쪽) 라는 모루의 대사처럼 소설에서 재난은 묘사하기 쉬운 배경에 불과하다. 한 출판사에서 같은 시리즈로 출간된 세 소설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비슷한 설정을 지니고 있다. 세 소설에서 재난은 배경의 소재로 가볍게 소비된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여성 독자의 증가와 그들의 선호도를 거론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재를 다룬 소설에 관심이 증가한 탓도 있으리라. 출판사는 길이가 짧고(독자가 읽기 부담스럽지 않고), 기후변화라는 현실의 위기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여성 화자의 목소리가 담긴 소설이 독서 시장에서 통하리라는 사실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책에는 소설을 상찬하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와 주요 문예지 편집위원인 평론가의 추천사까지 실려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성 생존자’라는 소재를 다룬 해외의 파국 서사5)와 비교할 때 한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출판사의 상업적 계산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기후변화라는 위기가 이렇게 쉽게 다루어져도 되는 것일까.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가능케 하는 사고실험의 본질은 ‘현질서의 몰락’을 가정함으로써 역으로 독자들이 현질서를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6) 현대 아포칼립스 텍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의 발명과 실제 사용은 인류 문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고전으로 꼽히는 네빌 슈트(Nevil Shute)의 소설 『해변에서』(1957)는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수소폭탄 실험(1954)이 자아낸 공포를 바탕으로 창작된 텍스트다. 1968년에 나온 최초의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조지 A. 로메로)은 참혹한 베트남 전쟁과 68혁명의 혼란과 저항정신이 저변에 놓인 텍스트였다. 이후 경제 호황 속에 비인기 장르로 전락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다시 활발하게 창작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가 등장한 배경에는 ‘실제 역사’가 있다. 인류세 시대 포스트 아포칼리스 텍스트의 저변에 깔린 ‘실제 역사’는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그리고 가공할 펜데믹이다. 인류는 예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한 위기에 내몰릴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다룬 한국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에서 재난은 연애의 배경으로 쉽게 소비될 뿐이다. 이 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평론가나 연구자는 거의 없다. 대형 출판사의 상품(책)을 홍보하며 구매를 권유하는 추천사에 동참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재난은 빠르게 ‘스펙터클’7) 로 전락한다.


5) ‘여성 생존자’ 소재를 다룬 해외의 파국서사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으로는 도리스 레싱의 『생존자의 회고록』(황금가지, 2007), 이창래의 『만조의 바다 위에서』(알에이치코리아, 2014), 마거릿 애트우드의 『홍수의 해』(민음사, 2019)를 꼽을 수 있다.
6) 문형준, 「왜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은 인간을 살려두는가?—인류세 시대 서사로서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 『안과 밖』 43, 영미문학연구회, 2017, 64쪽.
7) “테제 158: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고 역사를 유기하는 현재의 사회조직이다. 스펙타클은 역사적 시간의 토대 위에 건립되는 시간의 허위의식이다." (기 보드로, 『스펙터클의 사회』, 이경숙 역, 현실문화연구, 1996, 159쪽)




3. ‘사이보그 선언’, 로봇과의 공존


“힘이 된다면,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면 진실 따위 다 무슨 소용이겠어?
배도 부르지 않고 목도 축일 수 없는 그까짓 거.
여러 의미로 대단하지 않나?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자신의 희곡 『로봇(R.U.R)』(1920)에서 ‘로봇’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후 ‘로봇’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로봇’은 줄곧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로봇(R.U.R)』에서 인간이 되려는 로봇들은 결국 인간처럼 살육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다. 지능을 가진 로봇을 이용하여 인류가 노동에서 벗어난다는 작품의 설정은 1920년대에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과학자 ‘로섬’이 발명한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육체노동과 사무 활동까지 대신하고, 군대의 병사들도 곧 로봇으로 채워진다. 로봇 제조회사는 크게 번성하고, 인간들은 로봇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점차 지능이 발달한 로봇은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로봇 제작과정이 담긴 설계도가 불타버리고, 손으로 일하는 인간 ‘알퀴스트’만 살아남는다. 로봇들은 알퀴스트에게 로봇을 수리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는 해체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자 로봇들도 절멸의 위기에 빠진다. 알퀴스트는 우연히 한 쌍의 젊은 로봇이 희생정신과 사랑의 감정을 습득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기계문명의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명명한다.
카렐 차페크가 『로봇(R.U.R)』을 창작한 저변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존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차, 폭격기, 기관총 등 ‘기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전쟁이었다. 인류는 기계를 이용한 효율적인 학살에 경악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더욱 많은 기계를 만들었고, 의존도는 점차 높아졌다. 기계는 남성적인 폭력과 등가적으로 인식되었다. 남성 신체의 금속화 또는 로봇화를 묘사한 《터미네이터》(1984), 《로보캅》(1987), 《매트릭스》(1999) 등 20세기 영화에서 기계-로봇의 육체는 줄곧 두드러진 공격성을 상징했다.
2016년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 패한 사건 이후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무수한 논쟁과 기대가 교차했다. ‘딥 러닝(deep learning)이 가능한 로봇은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로봇이 적대감과 증오를 학습한다면 인류를 공격하지 않을까. 로봇도 사랑의 감정을 배울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작가를 호명하게 된다. 인공지능 로봇을 둘러싼 논쟁 이후에 데뷔한 천선란은 현재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에 가장 많은 로봇을 등장시킨 작가다. 데뷔작인 『무너진 다리』(그래비티 북스, 2019, 이하 쪽수만 표시)부터 최근작 『랑과 나의 사막』(현대문학, 2022, 이하 쪽수만 표시)에 이르기까지 천선란의 소설에서 로봇은 마치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천선란의 소설에 등장하는 로봇은 20세기 내내 각인된 로봇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을 잘 이해하고 돕는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할까.’ 이 질문은 천선란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다.


기존의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깨는 것이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었지. 이성적 사고에는 형태가 분명히 존재해. 바보 같이 우리는 그걸 몇 천 년 동안, 인류가 생각난 이후로 계속 바라보고 언급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거야. 몸. 이 지구 상에 동식물을 포함해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이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형태’였지. 두 다리, 두 팔, 그 둘을 연결시키는 허리. 발가락의 관절과 심장과 폐를 감싸는 갈비뼈 하나하나 전부가 이성의 실체였어. 모든 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인간은 은하야. 구성된 물질은 서로 떨어져 있는 듯 하지만 결국 다 하나의 항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거지. (『무너진 다리』, 259쪽)


『무너진 다리』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다. 2087년, 우주비행사 ‘아인’과 두 개의 안드로이드 ‘위투’, ‘사라’는 우주선 ‘펄서’를 타고 제2의 지구 ‘가이아’로 향한다. 3년 뒤 우주선은 유성과 충돌하여 파괴된다. ‘아인’은 구조 비행선에 태워져 겨우 목숨을 건진다. 12년 후. 아인은 뇌만 그대로 간직한 채 안드로이드의 신체를 갖고 지구에서 눈을 뜬다. ‘아인’이 눈을 뜰 무렵 중국과 러시아는 가이아로 향하는 두 번째 우주선을 이륙시킨다. 그러나 핵엔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추락한다. 아메리카 대륙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만다. 인류는 800대의 안드로이드를 초기화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파견한다. 안드로이드들의 임무는 폐허가 된 아메리카 대륙을 청소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 대륙의 안드로이드로부터 통신이 끊기고 알 수 없는 신호가 계속 타전된다. 정부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이해가 높은 ‘아인’을 아메리카로 파견한다. ‘아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스로 진화한 안드로이드 ‘휴론’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보면서 ‘아인’은 멸망한 것은 자신이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폐허 속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생명은 새롭게 진화했고, 휴론은 새로운 종족이 되었다.
『무너진 다리』는 페미니즘 SF의 고전인 조애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1973)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1976)의 설정을 살짝 비튼다. 두 소설은 모두 여성들만 사는 세계에 던져진 남자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8) 천선란은 이 코드를 남성과 여성 어느 한 성(性)이 절멸한 세계가 아니라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된 세상’으로 변주한다. 천선란의 소설에서 성(性)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천선란의 소설에 나타나는 인공지공 로봇-기계의 묘사는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문」(1985)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여성 정체성의 기본인 모성을 주장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기술을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모성은 자연적인 것이며 생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술과는 대립적이라고 여겼다. 특히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자연의 일치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술발전에 대한 저항 운동의 일환으로 녹색 운동을 전개했다.9) 반면 해러웨이는 서구 전통 이성 중심주의에 따른 여러 이분법적 경계들이 무너지는 시대를 분석하면서, 여성을 인간과 동물과 기계와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사이보그라는 은유로 코드화한다. 여성학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도나 해러웨이가 “신체의 물질성에 대한 노선을 페미니즘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면서도 “포스트형이상학적 철학의 언어보다 과학과 기술의 언어를 사용한다”10) 고 지적한다.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도라 해러웨이는 이렇게 선언한다.


8) 특정한 성의 절멸이라는 소재는 샬럿 퍼킨스 길먼의 『내가 깨어났을 때』(1911), 『허랜드』(1915) 이후 페미니즘 SF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졌다. 한국 최초의 SF 소설인 문윤성의 『완전 사회』(1967)도 161년간 타임캠슐에서 잠을 자다 깨어난 남자가 여성들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서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이 소재를 다룬 가장 최근의 작품은 천선란과 동갑인 영국 작가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의 『엔드 오브 맨』(2022)이다. 『엔드 오브 맨』은 남성만을 공격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미래 사회를 다룬다. 천선란은 남성과 여성 중 하나의 성이 절멸하는 소재를 특정한 성(性)의 절멸이 아닌 ‘기계’로 대체된다.
9) 이지언, 「과학기술에서 젠더와 몸 정치의 문제-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제17권, 한국여성철학회, 2012, 108쪽 참고.
10) 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변신』, 꿈꾼문고, 2020, 452쪽.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 세계의 피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 오이디푸스 이전의 공생,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비롯하여 부분들을 상위에서 통합해 그 전체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전유하여 얻어지는 유기적 총체성을 향한 유혹과 거래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어떤 면에서 서구적 의미의 기원 설화가 없다. 이것이 사이보그 “최후”의 아이러니다.11)


11)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20쪽.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육체적 유물론의 남성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선언문에서 남성적 공격성이라는 이미지에 갇힌 사이보그-기계가 여성 친화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 “사이보그는 인간의 둘레에 장벽을 쳐서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서로 격리하는 것을 나타내기는커녕, 거북하고 짜릿할 만큼 단단한 결합을 암시한다”12) 고 주장한다. 여성을 비효율적인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킨 것은 남성들의 호의나 배려보다 세탁기와 청소기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러웨이는 몸과 육체, 남성과 여성,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이보그는 평등한 세계를 구성하기에 유용하다고 말한다. 천선란의 소설에 묘사된 인공지능 로봇은 해러웨이가 정의한 ‘사이보그’의 구현에 가깝다. 대표작 『천 개의 파랑』(허블, 2020)에 등장하는 ‘콜리’는 용도 폐기된 기수 로봇이다. ‘콜리’는 빠르게 말을 몰아야 하는 기수의 임무를 스스로 거역하고 달리는 말의 고통을 덜어주려다가 용도 폐기된다. 뇌(프로그램)만 살아 있고, 몸체가 망가진 ‘콜리’를 얻은 여고생 ‘연재’는 재료를 모아 몸체를 만들어준다. 자영업을 하는 어머니, 걷지 못하는 언니와 함께 살아가던 ‘연재’의 삶은 ‘콜리’와 함께 하면서 달라진다. ‘콜리’는 연재의 얘기를 들어주고, 누구보다 빨리 연재의 고민을 파악한다. 그리고 ‘콜리’는 자신처럼 용도를 잃고서 안락사 위기에 처한 경주마 ‘투데이’를 연재와 함께 구출한다. ‘콜리’는 인간을 분석하고 이해하지만,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얽매인 혈연도 없고, 원한을 품지도 않는다. 아직 인간의 양가감정까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콜리’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고 학습한다.13)
차렐 차페크 이후 파국 서사에 등장하는 로봇은 줄곧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괴물’로 등장했다. 서구의 상상력에서 괴물들은 늘 공동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의 켄타우로스와 아마존은, 남성 인간의 공동체 폴리스의 한계를 방증한다. 산업혁명 시기 ‘프랑켄슈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숱한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함에도 천선란의 소설들은 대다수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가 아니다. 소설에는 인간과 로봇, 동물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해러웨이가 주목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의사소통과 네트워크의 방식이다.


적이 아닌 사이보그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여러 결과가 생겨난다. 우리의 몸들, 즉 우리 자신인 몸들은 권력과 정체성의 지도다. 사이보그도 예외는 아니다. 사이보그 신체는 순수하지 않다. 에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신체는 통합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기에 종말 없는(또는 세계가 끝날 때까지) 적대적 이원론들을 발생시키며, 아이러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다.14)


12) 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24쪽.
13) 『천 개의 파랑』과 비슷한 소재를 지닌 소설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민음사, 2021)을 거론할 수 있다. 두 소설은 매우 비슷한 설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면, 『천 개의 파랑』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 여성 인물들의 연대 등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다. 『클라라와 태양』의 국내 출간이 2021년 3월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천 개의 파랑』은 『클라라의 태양』 영향에서 자유롭다.
14) 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82~83쪽.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 해당하는 최근작 『랑과 나의 사막』에서 인공지능 로봇은 ‘그리움’과 ‘애도’를 학습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랑과 나의 사막』의 배경은 수천 년 후 전지역이 사막화된 지구다. 아주 오래 전에 제작되었으나 기능을 잃고 사막에 파묻혔던 로봇 ‘고고’는 어느 날 소년 ‘랑’에게 발견된다. 랑은 엄마 ‘조’와 함께 고고에게 새로운 기억과 단어를 가르쳐 주면서 동거한다. 세월이 흘러 엄마 조가 죽고, 랑마저 고고의 곁을 떠난다. 고고와 함께 랑의 시신를 묻어준 랑의 친구 ‘지카’는 고고에게 함께 바다로 가자고 제안하지만 고고는 이를 거절하고 깊은 사막으로 홀로 떠난다. 고고는 인간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없게 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반복 학습하지만, 마땅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너는 모든 날들을 사진처럼 다 떠올리는 거지? 어떤 왜곡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건 정말 부러워.”
“인간은 어떤 식으로 떠올리지?”
“슬픈 거부터.”
한 글자씩 혀로 뭉개는 듯한 느린 말투.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지카는 나를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 이 말은 모순적이지만 인간은 가끔 사물 너머의 무언가를 본다. 지카를 따라 겉대중을 해보자면 지카는 지금, 나를 보며 자신의 기억이 왜곡시킨 슬픈 랑을 떠올리고 있다. (29~30쪽)


랑에게 발견되기 이전의 모든 기억이 삭제된 고고는 자신의 과거가 궁금하지만 자신이 인간을 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두려워한다. 고고는 랑과의 기억을 복습하면서 랑을 애도하는 법을 학습한다. 고고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인간, 로봇, 외계인을 차례로 만난다. 고고는 외계인 ‘살리’ 덕분에 자신이 랑에게 발견되기 전의 과거(제작 목적)를 알게 된다. 인류가 거의 절멸하고 지구가 사막화된 지경에 이른 것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주저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고고는 전쟁에 참가한 로봇 중 하나였다. 다만 부상병을 돌보는 의무병 로봇이었기에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프로그램에 입력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는 기후변화가 우리를 위협하는 시대에서 인간만이 예외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물질과 비물질, 유형과 무형 존재를 구분하지 않고 현존하는 모든 존재자를 ‘기계’라고 명명한다. 포스트휴머니즘 매체생태론을 다룬 저서 『존재의 지도』에서 기계가 ‘행위주체’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거론한다. 어떤 기계가 자신의 내부에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 기계는 행위주체다. 그 다음으로 어떤 행위주체가 행위주체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행동을 개시하거나 자극에 대응하면서 행위를 실행할 때 몇 가지 다른 행위 중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15) 어떤 기계가 주변 환경에서 수용할 수 있는 입력물은 한정되어 있기에 이런 특성을 그 기계의 ‘구조적 접속의 선택성’이라고 일컫는데, 그 기계의 감성으로 여길 수 있는 또 다른 역능이다. 기계는 ‘구조적 접속의 선택성’과 ‘조작적 폐쇄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역능으로 개체화된다. 이런 ‘선택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기계들의 소통은 어김없이 어긋나게 되므로 브라이언트는 세계가 다른 기계에 어떠한지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브라이언트의 논의는 천선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무너진 다리』에서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재탄생한 ‘이안’은 자신의 의지로 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종족 휴론과 인간의 세계를 비교하면서 휴론의 존재를 긍정한다. 『천 개의 파랑』의 로봇 ‘콜리’는 경주마를 가능한 빠르게 달리게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입력되었지만, 파란 하늘을 보고 경주마가 트랙을 벗어나도록 한다. 그리고 동물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안락사를 기다리는 경주마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구출한다. 『랑과 나의 사막』의 로봇 ‘고고’는 자신을 구해준 랑이 죽은 후에도 ‘그리움’을 능동적으로 학습한다. 함께 떠나자는 지타의 제안을 거부한 것도 스스로의 의지다. 외계인 살리는 랑을 그리워하는 고고에게 시간을 하나의 제안을 한다. 사막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게 했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고고의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만들고 ‘점차 망가지는’(마모되는) 길을 알려준다. 인간으로 치면 ‘늙어감’과 ‘죽음’에 해당하는 제안을 고고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랑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15) 레비 R.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 갈무리, 2020, 335~337쪽.



“내 힘으로 네 몸의 시간을 느리게 하는 거야. 그럼 망가져도 그 속도가 느릴 거야, 인간이 느끼기에는 무한으로 느낄 만큼. 하지만 분명한 건 멈췄다거나 나은 게 아니야. 너는 계속, 계속 망가지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붙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 번. (141쪽)


앞서 언급했듯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의 기능은 현질서의 몰락을 보여줌으로써 현질서를 낯설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천선란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계’, ‘ 학습하고 성장하는 기계’는 견고한 인간 중심주의가 만들어 놓은 경계를 낮추고, 인간이 만든 세계가 지속되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와 인간적인 삶의 의미를 다시 성찰하게 한다. 비인간인 로봇은 인간을 향해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당신은 과연 자기 삶의 행위주체인가. 타성에 젖은 선택을 반복하면서 타인과 세계를 학습할 의지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4. 패러다임의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


“세계는 이미 영화화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변형시키는 게 문제다.”
– 기 드보르


굳이 인류세를 논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세계가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 파괴, 팬데믹은 인류 전체를 겪은 적이 없는 위기로 몰아가는 중이다. 냉전 시대 이래로 계속된 전쟁과 핵무기의 공포도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텍스트는 현질서를 낯설게 만들고, 미래를 상상하면서 우리가 겪을 위기를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도록 만든다. 2장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역량과 열정에 회의를 품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근래 한국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표방한 소설들은 다가올 위기의 심각성과는 달리 재난을 쉽게 소비하고 있다. 한편 텍스트 안에 로봇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천선란의 소설들은 인간 중심주의의 경계를 허문다. 천선란의 소설에서 20세기 남성적 폭력의 상징이었던 로봇-기계들은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한다. 로봇은 인간의 젠더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은 기술 친화적이고 융합을 강조한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상상한 풍경이기도 하다.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을 역설한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는 인간 중심주의가 형성한 경계를 비판하면서 현존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명명한다. 수동적인 프로그램 실행에서 능동적인 행위주체로 나아가는 로봇-기계는 카렐 차페크 이후 인간에게 절멸의 공포를 안겼던 기계의 이미지를 해체한다.


다른 모든 유형의 지배를 포함하는 억압, 결백한 피해자라는 순수성, 자연에 더 가깝게 뿌리내린 자들의 지반 같은 “우리의” 특권적 위치에서 정치의 근거를 마련할 필요에서 벗어난 사이보그의 시점에서, 우리는 강력한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억압들의 위계, 그리고/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순수하며 자연과 더 닮은 잠재적 위치에서 혁명 주체를 구성하라는 서구의 인식론적 정언명령에서 좌초해왔다.17)(강조는 인용자)


과학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치부했던 많은 것들을 현실에 구현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류가 감당할 위험 역시 커졌다. 인간이 계속 존재해야 하는 당위를 충족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한 2020년대에 인간은 이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멸망 이후의 서사는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지점에서 새로운 잉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기후변동의 시대는 문학의 패러다임마저 달라지게 할 것이다. 이 과도기의 고민을 문학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남성과 여성, 선과 악, 능동과 수동, 전체와 부분, 문명과 원시, 진실과 환상, 신과 인간, 인간과 생태/기계를 나누는 이분법은 명백한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16) 도나 해러웨이, 같은 책 75쪽.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















이정현
작가소개 / 이정현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한국전쟁과 타자의 텍스트』(2021, 삶창), 공저 『인간 신해철과 넥스트 시티』(2015, 문화다북스).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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