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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의 ✕✕들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186

[비평/2022년 문학비평활동지원사업 선정작]




당신 곁의 ✕✕들



성현아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는 노서진씨는 여성이지만, 게임 속에선 ‘조덕춘’ ‘곽두팔’ 같은 별명을 쓰며 남성인 척한다.1) 여성임이 드러날 경우 쏟아지는 욕설과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서다. 필자 또한 온라인 게임 ‘오버워치’를 할 때, 음성채팅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버워치는 팀 대항전이므로 팀원들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작전을 지시하는 데 팀보이스(그룹 내 음성채팅) 기능을 활용하는 편이 유리하지만, 목소리를 통해 여성 게이머임이 밝혀지면 성희롱이나 이유 없는 비방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여성 유저가 등장했을 때(혹은 채팅이나 닉네임, 게임 플레이 스타일 등으로 여성 유저임이 유추될 때), 게이머들이 보이는 주된 반응은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여자치고 게임을 잘한다’, ‘여자와 함께 게임을 하게 되어 사기가 올라간다’는 등의 편견 섞인 칭찬을 늘어놓으며 여성 유저에게 과잉 반응하거나, 사적 만남을 요청하거나(주소나 연락처를 묻는 행위), 게임에서 지면 여자의 탓을 하거나(이겼을 때도 여성 유저를 데리고 승리하기 쉽지 않았다고 푸념하는 등), 성희롱 섞인 언어폭력을 가한다. 이 네 가지 반응은 모두 여성혐오적인 반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 여성을 향한 과도한 찬양의 경우 여성혐오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성혐오가 여성을 꺼리거나 증오하는 표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오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의 객체화를 아우른다.2) 따라서 여성 게이머 또한 자신과 같은 팀의 일원으로서 게임에 참여한다는 점을 간과한 채, 남성 게이머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격하하거나 여자라는 성별 조건이 게임 실력에 영향을 준다는 선입견을 내비치는 것은 여성혐오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임 산업은 e스포츠로 불리며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배틀그라운드 등의 게임이 다가오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게임에 대한 인식 또한 개선되는 추세이지만, 게임 내 여성혐오는 어느 분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심각한 상태다. 게임 내 여성혐오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익명성 문제로 편입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더군다나 여성 게이머들이 겪는 언어폭력은 소수 난폭한 게이머들의 이례적이고 비상식적인 소행 정도로 축소되어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게임상에서 만들어진 혐오 표현이 게임과 무관한 상황에서도 쓰이며, 그것이 다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키는 상황을 살피면 이는 더욱 세세히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보르시’는 오버워치의 여성 캐릭터인 ‘메르시’와 여성의 생식기를 일컫는 비속어가 합쳐진 단어다.3) 메르시를 주로 플레이하는 여성 게이머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힐러 역할을 선호하는 여성 게이머 전부를 포괄하는 말로 확장되었으며, 지금은 금지어가 되어 채팅창에 사용할 수 없다. 오버워치에는 다양한 게임 캐릭터가 존재하는데, 이는 크게 세 역할, ‘딜러(공격 영웅)’, ‘탱커(돌격 영웅)’, ‘힐러(지원 영웅)’로 나누어볼 수 있다. ‘딜러’의 경우 상대 팀을 공격하는 역할을, ‘탱커’의 경우 상대 팀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지켜내는 방어 역할을, ‘힐러’의 경우 팀이 입은 피해를 복구시켜주는 지원 역할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여성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힐러는 다른 캐릭터에 비해 승패에 끼치는 영향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이 점을 명분으로 삼아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을 잘하는 팀 내 남성 게이머들의 실력 덕을 본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보르시’와 같은 혐오 표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메르시가 여성 영웅이라는 점, 다른 지원 영웅에 비해 공격력이 높지 않다는 점, 메르시만 플레이하는(게임 용어로는 ‘메르시 원챔’) 여성 유저들이 많다는 점, 메르시의 주 기능인 ‘치유’가 주로 여성의 성 역할로 치부되는 점 등 또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희롱이자 욕설로만 사용되는 ‘보르시’보다 더 문제적인 표현은 사람 이름이기도 한 ‘혜지’다. ‘혜지’는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실력이 부족하면서, 게임을 잘하는 다른 (남성) 게이머의 덕을 보거나 지나치게 의존적인 플레이를 하는 (여성) 게이머’를 말하는 게임 내 여성혐오 표현이다.4) 이는 2017년,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한 게시글에서 ‘혜지’라는 이름의 여성 유저를 심한 욕설로 비난한 데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5) 이 표현은 서포터 역할을 담당하는 게임 캐릭터를 ‘혜지챔’으로 총칭하거나 이전의 실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프로게이머를 조롱할 때 활용되기도 하며 그 쓰임이 확장되었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게임의 특성상, 게이머의 성별을 명확히 식별할 수 없음에도 ‘여성 유저일 것’이라는 추측에 기대어 여성혐오적인 표현이 만들어진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성향과 성별의 실질적인 연관성에 의해 그러한 멸칭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표현들이 성별과 게임 플레이 방식이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편견을 재생산한다는 점이 가장 문제적이다.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현준, 박지훈은, 여성 차별이 우리 사회에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근거는 보려 하지 않고 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을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제도로 오인하며, 오히려 자신들이 역차별당하고 있음을 호소하여 피해자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남성들의 욕망이 ‘혜지’라는 용어 생성의 배경임을 살피고 있다.6) 게임 공간 내 남성 중심적인 문화, 여성 캐릭터의 대상화와 같은 게임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점 등을 비가시화한 채, 여성 게이머들이 남성들의 게임 실력에 편승한다는 편견을 양산하는 행위는 여성에 대한 반감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성혐오를 활용하는 전략이라고도 이해해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적극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기보다 자기 캐릭터를 살리는 데 급급한 여성 게이머가 실제로 많았으며 그런 경험에 기반한 귀납적 추론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보르시’나 ‘혜지’가 ‘NGUM(느그 어미)’과 같은 여성혐오적 표현의 변용임을 이해하면, 이러한 주장은 반박된다. ‘엄마’와 ‘게임’은 연령대별, 성별별 게이머들의 퍼센트를 살펴보자면 거리가 먼 편이다. 그러나 게임상에서 ‘엄마’가 욕설로 쓰이는 빈도를 보자면, 이들의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게임 실력이 떨어지는 플레이어에게 당사자가 아닌 그의 부모, 그중에서도 여성 양육자를 비난하는 행태, 그리고 그로 인해 ‘엄마’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가 전혀 아님에도 금지어가 되어버린 현 상황을 살피면 실제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방식과 무관하게 게임 공간에서는 늘 여성혐오가 난무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익명이 보장되며, 남성의 비중이 높은 게임 공간은 여성 차별적인 발언들을 서슴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기에 여성혐오가 극대화된 것뿐, 이는 성차별적인 현실과 연동된다.
이를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주는 박서련의 소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7) 을 살펴보자. 소설의 핵심 서사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려는 엄마가 게임을 못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들 ‘지승’을 위해 게임을 배우고 아들 대신 게임에서 승리한다. 이후 자신이 지승의 엄마임을 채팅창에 밝히려 하자, 게임상에서 금지어인 ‘엄마’는 ✕✕로 표시된다.

1) “여성들 “게임할때도 성희롱 시달려… 닉네임 ‘곽두팔’ ‘조덕춘’ 쓴다””, 〈조선일보〉, 2022.5.19.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5/19/IWWASZCUAFHZFMW2G4MXYF62YM/
2) 김수아는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를 경유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김수아, 〈온라인상의 여성 혐오 표현〉, 《페미니즘연구》 제15권 2호, 한국여성연구소, 2015.11, 283쪽)
3)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97쪽.
4) “여성 게이머 ‘혜지’라 부르는 기울어진 게임판… ‘여대생’들이 뒤집는다”, 〈여성신문〉, 2019.8.27.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2625
5) 조제행, “"아니 혜지야" 게임서 욕처럼 쓰인다?…용어의 실체는”, 〈SBS 뉴스〉, 2019.07.08.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343389&plink
6) 이현준, 박지훈, 〈‘혜지’가 구성하는 여성에 대한 특혜와 남성 역차별 : 공정성에 대한 남성 온라인 게임 이용자들의 열망은 어떻게 여성혐오로 이어지는가?〉,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22권 1호, 한국방송학회, 2021.3, 5~40쪽.
7)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이하 쪽수만 밝힌다.


나는 지승이 ✕✕거든
왜 이러지? ✕✕


당신은 분명히 ‘엄마’라고 쳤는데 화면에는 자꾸 그 단어가 지워져서 올라간다. / 이거 왜 이러지? / 당신의 말에 아이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대꾸한다. / 채팅창에 욕 치면 블라인드 처리되잖아. / 그건 엄마도 아는데, 엄마가 욕이니? / 욕으로 쓰이니까 블라인드 되지.
(중략) 당신은 계속해서 대화창에 엄마를 입력한다. ✕✕. ✕✕. ✕✕. ✕✕. 아이가 당신의 손목을 붙잡는다. / 엄마, 엄마라고 그만해. 계속 욕 쓰면 아이디 정지 먹어. / 엄마가 왜 욕이야? 내가 네 엄만데. / 당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적진으로 들어가 상대의 마지막 수호석을 파괴한다. 아이가 간신히 내뱉은 말이 당신의 귓전을 윙윙 돈다. ✕✕, 울어? ✕✕, 괜찮아? 모니터에는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뜨지만 당신은 더 이상 승자의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43~45쪽)


소설의 결말은, 게임의 승패와 무관하게 게임에서도, 게임 바깥의 현실에서도 엄마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을 부르는 호칭 자체가 비속어로 쓰이는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어떤 실력을 갖추든, 어떤 경쟁을 치르든 여성은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한다.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이용해 서술자는 중심인물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독자가 엄마의 감정을 좁고 깊은 시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그가 맞닥뜨리는 일들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당신’은 독자와 정서적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위치에 머물게 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당신’의 양육 태도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에 더해, 박서련이 이를 비판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당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을 때도, 그런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며, 오히려 ‘당신’이 가족 이기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시종일관 그것을 자식을 향한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합리화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두고 이승우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어머니가 이전의 희생적인 어머니와는 다른 모습으로, 훨씬 꼴사납게 등장”8) 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방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독자의 반감을 살만한 ‘극성 엄마’ 캐릭터와 그의 비뚤어진 모성이 발현되는 과정은 불쾌감을 자아낸다. 중요한 점은 그런 엄마의 극단적인 헌신과 노력이 보기 좋게 엇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성공했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극성 엄마’조차 비가시화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극성 엄마의 성공기’로도 ‘극성 엄마의 실패기’로도 정의할 수 없도록 모호해지는 소설의 결말은 찝찝함을 남기며, 그러한 엄마상이 언제부터, 어디에서, 왜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도록 한다.
‘당신’이 게임에서 이기고도 패배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엄마가 진입조차 할 수 없는, 혐오를 동력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연유한다.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신’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나름대로 실력을 갖추어 경쟁하려 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규칙 안에 이미 내재한 불평등을 수용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 게이머가 남성 게이머에 비해 게임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고정관념과도 맥을 같이한다. 게임을 잘하는 여자보다 게임을 잘하는 남자가 많다는 사실 자체는 통계로만 살핀다면 편견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PC게임의 경우 남성 플레이어가 많으며, 프로게이머 또한 남성의 비율이 높다. 그러나 과연 동등한 환경에서 여성과 남성이 게임문화를 즐길 수 있었는지 질문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성 게이머는 음성 채팅을 이용하는 것조차 어려우며, PC방에서든, 게임상에서든 언제나 성희롱과 욕설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견디며 하는 게임과, 애초에 그런 위험에 노출될 일 없이 하는 게임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현상 자체만 보아서는 시작점이 잘못 꿰어져 있음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따라서 드러난 문제만을 처리하는 ‘당신’의 해결방식은 언제나 미봉책이 되고 만다. ‘당신’은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문제를 발생시키는 구조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문제의 가시적인 원인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며, 이를 해결하려 할 뿐이다. 첫째로, 아이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을 때, ‘당신’은 “키 크는 한약을 지어 먹인 것이 원인”(10쪽)이라고 판단한다. 한약으로 인해 아이의 편식이 개선되었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이 찌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초등학생들의 집단 따돌림 문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표면적인 이유이자 핑곗거리에 불과한 아이의 ‘뚱뚱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방안 또한 칼로리가 낮은 재료들로 간식을 손수 만들어 먹이거나 운동을 시키는 등, 아이가 살을 빼게 하는 것이 된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외모 평가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8) 이승우, 「심사평」, 전하영 외,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403쪽.


어느 오후 아이가,
그런데 오늘 우리 반에서 어떤 애가 어떤 애한테 너네 엄마 돼지라고 해서 걔가 울었어.
라고 한 다음 날부터 당신은 피부과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 외모까지 평가한다는 걸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한국무용 전공을 지망하던 당신은 여전히 곧고 탄탄한 골격에 살이 별로 붙지 않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지만 머리숱이 남들보다 조금 적고 성인 아토피 증상이 있었다.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아.
언젠가 남편이 했던 평가와 아이가 그날 전해 준 이야기가 완벽하게 포개진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은 헤어 숍 원장이 추천한 오가닉 블랙빈 탈모 방지 제품을 라인별로 주문했다. 탈모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당신 때문에 놀림당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16쪽)


아이들끼리 엄마의 외모를 평가하고 그것을 조롱거리로 삼기도 한다는 문제 앞에서 ‘당신’은 엄마들의 자기 관리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이를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다는, 남편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칭찬 아닌 칭찬과 연결 짓는다. 남편의 말은 성적인 긴장감을 줄 수 있도록 이성적인 매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줌과 동시에 “긴장 푸는 여자들”을 좋지 않은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어 문제적이다. 이는 ‘김치녀’, ‘된장녀’의 반대편에 ‘개념녀’를 배치하여 개념녀가 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혐오 표현 사용을 합리화하고 그 안에 내재한 여성 차별을 계속 유지하려는 논리와 같다. 혐오스러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비난받고 낙인찍히는지를 보인 후, 이상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도록, 그렇지 못할 경우 자책하도록 덫을 놓는 방식이다.
‘당신’은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깨닫지 못한 채 좋은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해결 방안으로 삼는다.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 아닌 가시적인 원인만을 해결하려 들기에 언제나 그 노력의 방향이 엇나가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이들은 엄마의 어리석은 문제 해결 방식을 조소하게 되지만, 그것이 혐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과 썩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극성 엄마’의 맹목적인 헌신과 집착적인 태도가 주는 불쾌감만을 논하기 보다는 그런 엄마가 생겨난 본질적인 원인을 살필 필요가 있겠다. 소설의 도입에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투정을 부리는 지승을 보며, ‘당신’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에게 대단히 힘든 일이 있을까, 의구심을 갖다가도 이내 “이해심 많은 엄마는 이런 생각 하는 게 아니지”(10쪽)라며 자신을 질책한다. 억지를 부리는 아들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임에도 그러한 태도를 버리기 위해 자신을 옥죄고 이해심 많은 엄마가 돼야 한다고 스스로 되뇐다. 더불어 “당신은 아이가 원망스러워지려 할 때마다 아이 대신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10쪽)는 구절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돌봄의 의무를 떠맡는 여성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죄의식을 살필 수 있다. 엄마는 자녀를 올바르게 기를 책임을 홀로 떠안은 채, 그러지 못할 경우 힐난 받게 된다. 반대로 그 압박감에 아이 양육에 과도하게 몰입하게 되면, ‘극성 엄마’, ‘억척스러운 엄마’로 낙인찍힌다.
‘당신’은 ‘엄마’라는 칭호를 짐처럼 여기지만은 않으며 자신이 엄마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 또한 갖고 있다. ‘당신’은 달라진 시대를 잘 이해하고, 그 시대에서 아이가 겪게 되는 어려움에 공감해줄 수 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당신’이 과도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모에게 적절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을 위하는 길”(17쪽)로 느끼며, 불만족스러웠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아이와의 동일시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대목 또한 개인사에 가깝기 때문에 ‘당신’이라는 한 엄마, 개별자의 잘못만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엄마로서 가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은 결코 들어설 수 없었던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아들이라도 진입하여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를 소망하며 그를 돕는 일 이외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전업주부로 보이는 ‘당신’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외부에서 일하지 않는 주부를 향한 혐오적인 시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살펴보면,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해볼 수 있다. 집 바깥에서 노동하고, 집 안에서의 가정일과 양육까지 병행하는, 일명 ‘워킹맘’과 비교하여 전업주부는 다소 편안한 상태로 묘사되곤 한다. 전업주부는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니 이들에게 아이 양육에 더욱 힘쓰라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요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워킹맘이 전업주부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 또한 비교적 최근의 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10년대 이르러 워킹맘은 생산적이고 전업주부는 비생산적이라는 인식이 갑자기 대대적으로 나타나”9)게 되는데 이전에는 반대로 워킹맘이 자식을 돌보는 일에 소홀한 여성으로 내몰려 비판받았다. 여성들의 시장 진출이 성별분업 체제를 고수하는 데 걸림돌이 되던 시기에는 오히려 일하는 여성이 부정적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10) 남성의 벌이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워지면서,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생기자 이제는 전업주부를 게으르며 남편이 벌어온 돈에 기생하여 사치를 부리는 여성, 어디에서든 민폐를 끼치는 ‘맘충’ 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들이 그들의 행위로 비판받게 된다기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숱한 관점이 필요에 따라 선택되어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하는 행위가 쌓이며 그것이 경험되고, 이러한 감각을 일컬을 표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전략적으로 양산되는 혐오 표현이 도리어 여성들을 보는 시각을 제한하고 여성은 어떤 행동을 한다는, 여성을 향한 고정관념을 생산한다.
보조자 역할에서 벗어나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가져본 경험, 외모가 아닌 재능과 실력으로 성취해낸 결과에 대해 칭찬받으며 느꼈던 “고양감”(35쪽), 부당한 여성 차별의 현실을 직면하게 된 일 등은 ‘당신’이 실패한 것만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신’이 불평등한 구조 자체를 정확히 직시하게 되었으리라는 점만을 희망으로 낙관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자리도 몫도 없는 ‘당신’이 자신이 비가시화되어버리는 구조에서 무엇을 향해 노력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는, 다소 허탈한 서사는 실패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실패가 누구를 향해있는지를 주목하면 다르게 볼 수 있다. 소설이 지승이 엄마를 ‘당신’으로 부르던 것과는 다르게 소설의 제목은 ‘당신 엄마’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때의 ‘당신’은 소설 속의 아들인 지승이일 수도, 독자일 수도 있다.11)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가보다 호명 당한 ‘당신’에게는 이 부당한 게임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이런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은 사라지고 가려지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누구를 부를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도 함께 제시한다.
당신 곁에는 이름이 지워져 버린 ✕✕들이 있다. ✕✕로 비가시화된 누군가가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불릴 수조차 없게 되어 그 존재마저 삭제당하는 일이 게임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닐 것이다. 당신의 엄마, 당신의 애인, 당신의 동생, 당신의 동료, 당신의 친구, 그리고 어쩌면 당신 자신. 당신 곁의 ✕✕들은 오늘도 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접속한다.

9) 박찬효,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책과함께, 2020, 419쪽.
10) 위의 책, 418쪽 참조.
11) 김건형, 「당신도 잘 아는 그 게임의 룰」, 전하영 외,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243쪽.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

성현아
작가소개 / 성현아

202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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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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