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문학상 : 비평 기구

  • 작성일 2021-03-01
  • 조회수 3,862

[특별기획_문학상 리뷰]

특별기획 〈문학상 리뷰〉는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문학상 중 주요 문학상의 최근 10년간(2011-2020)의 공개된 자료(수상작, 심사위원 등)를 취합 정리하였으며, 이 자료를 토대로 4명의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을 다루는 주요 문학상들의 경향에 대한 리뷰를 2021년 2월호와 3월호에 순차적으로 발표합니다.

- 홍성희,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 김요섭, 「문학상에 대해 말해야 할 것과 문학상이 말해주는 것」
- 노태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 김정빈, 「문학상 - 비평 기구」





문학상 : 비평 기구



김정빈




문학신문 《뉴스페이퍼》는 지난 2020년 11월 4일, 포털사이트와의 제휴 해지 통보를 받았다. 포털사이트에서 뉴스페이퍼의 모든 문학 기사들이 검색되지 않게 된 것이다. 뉴스페이퍼는 네이버 뉴스제휴평가위원회 사무국에 사유를 밝혀 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하였고, ‘기사 저널리즘 제고 필요’, ‘매체 활동성이 미약함’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뉴스페이퍼는 제휴 해지 통보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 운동을 시작하며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뉴스페이퍼 입장문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뉴스페이퍼는 뉴스제휴평가위원회가 말하는 저널리즘 제고 필요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저널리즘을 제고해야 할 “문제적 기사”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친일문인기념상을 비판 기사를 떠올렸습니다.


그동안 지속적인 압박이 있었다는 점. 저희가 벌점을 받고 재평가를 받게 된 날이 친일문인문학상을 비판 기사를 쓴 날이라는 것. 그리고 몇 안 되는 상대의 반론이 안 실려 있는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지만 뉴스페이퍼는 기사를 작성할 당시 해당 문학상 당선자 및 주최 측에 취재 요청을 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고, 어렵게 취재에 응한 당선자도 인터뷰하지 않은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현재 네이버에는 친일문학상문제와 문학권력을 비판한 기사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친일문인기념상에 대한 비판은 이미 사회 상식적으로 합의가 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위원회에서 심사를 담당하는 위원 중 일부가 이 친일문학상을 운영하는 언론사의 기자입니다.1)

1) 문학신문 뉴스페이퍼 성명서,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BS-r6XDoK45oL-tLbcdGJsBVHSdKfrTD7c9-r4OpQd7b9qQ/viewform



뉴스페이퍼측은 친일문학상 비판 기사로 인해 포털사이트와의 제휴 해지를 통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뉴스제휴평가위원회에서 제휴 해지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떠나서, 이 입장문에서 짚어 보고 싶은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친일문학상을 비판하여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심이 가능했다는 지점이다. 이러한 의심은 비단 친일문학상이라서가 아니라, 문학상이 문학계에서 가지는 어떤 위상에 대한 폐해가 적지 않게 드러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한 해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목격할 수 있었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 말 윤이형 소설가는 ‘이상문학상’의 부당함과 불공정함을 주장하며 절필을 선언했으며, ‘시인동네 신인문학상’과 관련해서는 본선 진출자 사전 검증 과정에서 심사와 상관없는 사적인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문예지를 폐간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높은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젊은작가상마저 예심 심사위원으로서 초빙되는 평론가들의 투입 노동력에 비해 보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사적대화 무단인용 사건으로 인하여 수상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문학상에서 무상으로 심사 후보작 추천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크고 작게 지적된 해였다.


상(賞)에는 당연히 명예와 영광이 뒤따를 것이다. 수상자는 자랑스러워야 마땅하며, 시상자는 수상자의 공로에 감사하거나, 미래 행보를 지지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분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으로서는 문학상에 관한 논란의 여파가 오히려 지난 수상자에게 불명예를 안기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에서는 상(賞)이라는 근원적인 취지에 초점을 맞춰 문학상이 품어야 할 이상(理想)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_448개의 문학상


2018년 문학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문학 관련 상은 총 448개로, 상당수의 문학상이 창설·운영되고 있다. 신인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상도,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으며,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발표된 단행본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다. 공모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일정 기준을 통과한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상도 있으나, 심사위원들의 추천을 통해 운영되기도 한다.


이처럼 중구난방 행해지고 있는 모든 행사들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평균 독서량은 줄어 가고, 문학과 대중이 괴리되는 시대에 이토록 많은 문학상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도 의아스럽지만, 우선 문학상이라는 이름 아래 마땅히 통일된 체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기성 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은 공모보다는 추천 형태로 운영되는데, 이 경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문학상 심사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수상이 결정되면 통보받는 꼴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문학상의 비평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발표한 순간 일종의 공공재로서, 해당 작품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기도 하며 작가는 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작품에 대한 논의의 결과물로서 문학상이 운영된다면, 문학상은 비평 의식을 가지고 있는, 더불어 그 기능을 행하고 있는 거대한 비평 기구일 테다.
‘문학상’이란 문학성을 기리고 치하한다는 명목 아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회성으로 특별한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1회 2회 3회 횟수를 매겨 가면서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카이빙이자 큐레이션이다. ○○문학상 수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을 선정하여 기록하므로, 한 작품을 어떤 시대와 문학상 이념 아래 포섭하는 일이다.
큐레이션이란 콘텐츠를 분류하고 배포하는 것을 말하니, 문학상 운영을 위해서는 각 상마다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문학성 즉, 문학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들을 살펴보면 뾰족한 지향성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학적 지향성보다는 문학과의 연관성이 문학상의 더 중요한 성질로 자리 잡은 듯하다. 실질적으로 문학상 현황을 보면 문학상들은 비평 기구보다는 단지 ‘문학 관련 시상 행사’에 지나지 않는 쪽이 대다수다.
예를 들어 지역 문인사회 활성화라는 목적을 가진 지자체 주관 문학상이나 동문 치하 및 학교 홍보 목적을 가진 대학 문학상 등의 경우, 문학(작품, 작가) 자체보다는 상을 주관하는 단체의 목적을 위해 운영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문학과 관련된 사람/작품’을 선정한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상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문학상보다는 공로상, 명예상이라는 명칭이 더 적합하겠다.


물론 문학상이 꼭 문학계 전반의 발전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공공의 목적만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연말마다 열리는 연기대상을 떠올려 보자. 그해의 대상 수상자는 뛰어난 연기력을 증명한 배우가 받는 것도 맞지만, 한 해 동안 그 방송사에 시청률과 화제성으로서 공로를 세운 배우가 받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문학상 또한 주최자의 목적이 다소 반영될 수밖에 없다.
다만 경제적 공로에 치우쳐 연기력 논란이 있는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한다면 시청자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기상’ 또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수상했을 때는 수상자(작)의 소위 연기력, 문학성이라 불리는 것들, 그러니까 예술적 가치에 대한 보증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상에 대한 기대 또는 반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예술적 가치, 연기력, 작품성, 문학성과 같은 누구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고 모호한 개념을 수상작 선택의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수상작을 가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고정적인 우열은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만 정해진다. 따라서 상을 공표할 때는 응당 이 제한된 조건 즉 심사 기준을 함께 밝혀야 한다. 또는 심사 기준을 밝히지 않는 일은 밝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선정된 상들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문학상이 허울뿐인 그들만의 축제가 아닌 사회적 공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권위 있는 심사위원을 초빙하여 그들의 논의에 따라 결정하였다면, 그 세심한 논의를 모두 공개하기보다 심사위원의 권위에 기대어 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 그러나 매년 다른 심사위원을 초빙한다면 매년 심사 기준이 달라지는 셈인데, 매년 같은 이름으로 상을 수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문학상이 몇 없는 것도 아니고, 400여 가지나 되는 시점에서 그 문학상이 존속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라도 문학상이란 응당 자신의 지향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신인문학상


신인의 작품을 선정하는 문학상은 등단 절차의 기능을 담당한다. 문학상에 대한 신뢰도로 기꺼이 심사 대상을 자처하며 투고된 원고들로 운영되기 때문에, 또한 현실적으로 등단 여부에 따라 작품의 청탁, 발표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공정성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최근 김민정 소설가의 소설 「뿌리」를 무단으로 도용하여 문학상을 수상한 일이 밝혀졌다. 작품을 도용하여 문학상에 접수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누군가가 소설의 제목까지 베껴 본문 전체를 도용하였는데도 다섯 개의 문학상에서 모두 적발하지 못했다는 점도 충격이다. 소설 「뿌리」는 온라인상에 게시되었기 때문에 첫 문장만 검색해도 본문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표절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작품 표절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 절차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문학상은 어쩔 수 없이 심사 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이다. 뚜렷한 절차와 체계가 없다면 신뢰를 잃게 되며, 당선자도 낙선자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특히 신인문학상의 경우, 수상자의 이전 이력도 알 수 없고, 경쟁했던 후보작도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공정성에 대한 증명이 더욱 절실하다.
사실상 등단 절차나 다름없다는 특징 때문에 작품 자체만 평가하는 백일장과는 다르게 신인문학상은 작가의 역량도 함께 평가하여 작가에게 시상한다. 이때 후보작이 공개되지 않고, 작가의 작품 이력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수상의 정당성은 오롯이 심사위원의 권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신인문학상 수상(등단)이야말로 권위 있는 심사위원이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체계인 것이다. 유독 신인문학상에서 공정성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선자가 심사위원의 제자였거나 지인일 경우, 낙선자는 경위를 알 수 없으니 공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심사위원으로서는 공정성을 증명할 방법을 고심해야 할 것이다.


문학상이 심사위원 개인의 취향이나 판단이 아닌 하나의 비평 기구로서 존재한다면, 합리적인 체계와 기준을 보여주고 증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단체에 소속된 몇몇 개인의 능력은 기관의 능력으로 치환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회사나 단체, 기관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로지 절차와 체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우후죽순 문학상이 생성되었다가 폐지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문학상 통합 운영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공개한다면 신생 문학상들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학상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도가 보증될 수 있을 테고, 이러한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문학상의 대거 생성·운영을 문학 활동의 긍정적인 사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_문학상의 정치성


신인문학상은 분명 등단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해 등단 희망자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투명한 운영과 공정성 증명이 필요하다. 신인문학상과 응모자의 관계에서 신인문학상의 위계가 더 높은 편이라면, 지금부터는 신인문학상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상에 응모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느 문학상에 응모할 것인지 고르는 과정에서 이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이왕이면 등단 후 주목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왕이면 활동의 기회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응모해야지.’ 상상의 나래를 더 펼쳐 보자면 유명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학상이라면 우선 유명 문예지에 공개되고, 더 나아가 해당 출판사와 단행본 계약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등단 시점에 더 유리한 문학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장차 섣부른 확신이 되면, 학벌이나 기업 순위를 매기듯이 문학상마다 등급을 매겨 메이저, 마이너를 나누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인맥 문학과 정치의 시작이다.


조선에서 문학상은 예부터 정치적이었다. 신승모2)는 문학상 제도가 조선에 이식된 것이 “일본의 문학상이 식민지의 문단을 재편하고 제국의 문학장으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3)이라 주장했다. 1939년에 설립된 조선예술상의 제정이 일본의 문예춘추사를 주관한 기쿠치 간의 자금 제공과 관여가 있었으며, 제1회 조선예술상 수상자인 이광수가 이후 조선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직을 맡은 후 ‘국어’=일본어 문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조선예술상의 인적 네트워크로 일본에서 다른 문학상을 수상하는 일도 있으며, 당대 조선 문인들에게 일본어 문학 창작을 강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을 수는 없다. 각 문학상이 각자 추구하는 문학성에 따라 작품을 심사하고 선정하는 것이라면, 어느 문학상 수상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할 수도 있는 것이며,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문학상을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추구하는 문학성이 명확하다. 대학생이라는 한정을 두어, 심사 경위에서도 주로 대학생에게 기대되는 도전정신이나 참신함을 고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수상자들끼리 친밀감,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작품 활동을 통해 본인이 생각하는 문학성을 널리 퍼트린다면, 이는 넓은 의미의 정치겠지만 전혀 비판받을 수 없다.

2)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일본학연구소 연구원, 일본근현대문학.
3) 신승모, 「문학상 제도의 조선 이식과 전개과정」, 『일본학 제41집』, 2015.


그러나 등단을 원하는 신인의 경우, 인적 네트워크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단순한 취미, 동호회가 아니고 업계 정보를 교환하고, 일거리를 소개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등단을 염두에 둔,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적 네트워크는 사실상 권력 자체다.
그러나 신인을 뽑는 문학상에서 한번 이런 위계가 생성된다면, 그 위계는 해체되는 일 없이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인은 활동 이력이 없고, 신인을 평가할 만한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학상이 메이저라는 인식이 생기면, 응모율이 높아지고, 높은 경쟁률로 높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단지 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면, 높은 주목도로 당연히 더 많은 기회를 받을 것이고, 좋은 성과를 낼 확률이 높아진다. 자연스럽게 문학상에 대한 메이저 인식은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사실상 몇몇 문학상이 신인 등단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등단제도를 통과해야만 작품을 발표할 수 있고, 이 중에서도 특정 문학상을 거쳐야만 활발히 활동할 수 있다면 문학은 이미 닫힌 공간이다.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탄생할 것을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독점을 막는 방법은 분명하다. 생태계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면 된다. 만약 문학상마다 각자 다른 지향점이 뚜렷했다면, 응모자는 문학상을 고르는 것이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나와 문학에 대한 생각의 결이 맞는 곳에 지원하면 된다. 나아가 문학 작품의 색채가 다양해질 것이니, 특정 단체에 중심이 쏠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문학상이란 결국 문학상을 운영하는 주체가, 자신의 지향점을 고수하고 내세워 찬(讚)하며 이를 매년 모아 하나의 지향점을 내세우는 비평 기구다. 비평가가 각자 다른 생각, 다른 시선을 내세워 논의를 풍부하게 하듯이 문학상 또한 각자 다양한 지향성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따라야 할 것이다. 448개의 문학상이 있다면 448개의 문학적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토대 위에서만이 괴짜 같은 작품, 새로운 작가가 등장해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다.











[부록]

아래는 ‘창비 신인문학상’, ‘문학동네 신인상’,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의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확인한 결과에 대한 단순 통계자료다.



지난 10년간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으며, 그다음이 문학과사회 신인상, 그다음이 대산대학문학상이었다.(창비문학상은 응모편수 미공개로 산출하지 못하였다.)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의 시 부문 평균 경쟁률은 무려 799대 1을 기록하였다. 지난 10년간 대산대학문학상보다 평균적으로 3배 이상 많은 이들이 응모했다. 문학동네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의 경우 평균 경쟁률이 667대 1로, 대산대학문학상의 평균 경쟁률인 326대 1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이는 대산대학문학상은 대학 재학생으로만 한정하여 응모를 받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보인다.
반면, 문학과사회의 경우 10년간 당선자가 단 4번밖에 선출되지 않았으므로 집계된 경쟁률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금이 높을수록 경쟁률이 높아질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해당 4건의 문학상 사이에서 상금의 격차가 크지 않았고,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응모 제한이 있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신인문학상 여성 심사위원 구성원의 비율은 문학과사회만 40%대를 미치지 못하였다. 창비와 문학동네, 대산대학문학상의 경우 최근 5년 동안은 여성 심사위원이 남성 심사위원보다 더 많았으며, 10년 평균 심사위원 비율이 50%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빈
작가소개 / 김정빈

202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추천 콘텐츠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