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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작성일 2020-07-01
  • 조회수 3,387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독립 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여로




1
독립 출판의 특이함은 공공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문자 '문학'의 특이함은, 그것이 프로그램화된 문법성을 드러낸다는 내적 형식에 따라, 누구든 깃들 수 있는 공적 언술이 되지만 동시에, 그 게임에 참여하는 개별 주체의 특이성 또한 그 공공성에의 참여 정도에 따라서만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 출판은, 내가 보기에 이런 대문자 영역의 공공성을 그냥 무시하고 개별 주체의 특이성을 주장한다. 독립 출판에 대하여 지적하기를, 새로운 장(platform)이 활성화된 것은 좋지만 그것이 과잉 생산되며 수준이 낮아졌다고들 말한다. 나 역시 독립 출판 워크숍 따위를 도둑질이라 생각하며 힐난했다. 내 의식이 바뀐 계기는, 직접 출판사를 등록하고 책을 만들고 유통한 경험에 기댄 정서적 연대라기보다 그 비판이 범주오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립 출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 기대해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독립 출판을 수행하며 기성(예술장)의 공공성에 기입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걸 뒤집어서 비판하는 것도 이상하다. 독립 출판은 한편으로 예술장을 초과해 있고, 그 벗어남까지 포괄하여 긍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공공성을 인식해야 한다. '걸작'이라는 개념을 향한 일방통행이 아니라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과정에서 평등한 무언가.
그러나 과연, 내가 주장하고 원하는 바대로 모두가 경험 가능한 가치가 독립 출판이라는 만듦과 유통의 과정을 통해 각자에게서 발현되고 경험되는지, 사실은 그것이 관습에 기댄 또 다른 동일성만을 드러내지 않느냐, 묻는 것도 정당하다. 조금 욕심을 부려 보자면, 나는 이것이 단순히 품이 좀 많이 드는 기념품은 아니었으면 한다(기념품이 나쁜 건 아니지만……). 가령 독립 출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장르인 수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곧장 지나치게 표준적인 교훈이나 아름다움으로 교환하고, 그것을 '경험화'하기보다 그것으로 경험을 '확인하는 데' 그치기 쉽다. '독립'이라는 말이 다른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장을 연다면, 그 자체의 담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상황마저 긍정해야 할까? 타인의 일기장을 뒤져 보고서 논평을 한다면 그건 미친 짓이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의 일기를 공유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내놓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 논할 수 있고 논해야 한다. 그때부터 그것은, 누군가의 인격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최소한, 규범이 아닌 비판은 보존해야 한다. 내가 문학이라는 말을 여전히 쓴다면, 타인과의 상호개입이 인정되는 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이하게 아름답고 이유 없이 옳은 등가물을 '위해' 비판이 무너진다면, 그렇게 성립된 등가성은 무엇을 '위할' 것인가? 이러한 동질성 속에서, 역설적으로 각자가 보존하고자 하는 주관성은, 사실 스스로에 대하여,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무관심한 상태가 아닐까. "당신도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하세요".
그러나 개별 출판물에 대한 부정(의 가능성)으로 그것이 속한, 혹은 속하게 될 범주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내용으로 매체를 판단하는 것은 대개 섣부른 후건 긍정의 오류이기 때문이며, 그런 식의 접근은 제도라는 층위에서 사고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다지 신경 쓸 말이 아니다. [주1] 단지 나는 독립 출판이 기업 출판사와 문학-아카데믹에서 누락된 대안성을 상징적으로 분담하며(대안을 위한 대안), ‘하나의 문학’의 구성적 일부 혹은 구성적 외부로 머물지 않는, 별개의 생산성을 가정했으면 한다. 독립 출판의 경험이, 자신의 커리어를 창조적으로 쌓아 기성 출판사의 출간 제안을 희망하는 대기실로 이해되거나(기성을 거부하자는 선언은 기성의 무엇과도 물리적 접점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시적 문화 현상이라는 관조적이고 보수적 인식으로 마무리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2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오늘날의 예술은 우리가 개인적 책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예술에서 유일한 것인지, 또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도입하는 것에 조심스럽지만, 사람들의 욕망을 온건하게 수용하며 그것을 보존하는 방식이 또 하나 생겼다고 최소한으로 말해 볼 수는 있겠다.
가령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말의 허망함은, 내 생각에 그것이 예술가라는 단어를 감각적으로 인용하거나 내용을 휘발시키는 전칭판단의 지나친 범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떤 사람도 예술가가 될 생각이 없는데 누군가 대신 그것을 발화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지위와 기능에 관한 지난한 논의들 대다수가 여전히 독자를 종속시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항 중의 하나로 독자를 취급하고, 작품 자체의 일부라고 그들의 몫을 챙겨 주어도, 독자는 여전히 (더 똑똑하고 더 능동적인) 읽기-기계로 남으라는 은밀한 명령에 처해 있다. 독자는 없고 스피커만 넘쳐난다는 투정들은 쓰는 자들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그렇다면 독자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작가'라는 자들의 책을 읽어 주어야 하며, 국가 독서율 향상에 이바지해야 하며, 전업 작가들이 글쓰기만으로 먹고살 수 있게 생계까지 책임져 주어야 하는가? 미술에서 참여나 관계, 공공이라는 말에 기반한 작업들 다수가 제스처로 끝나버린 것은 왜인가? 여기서 말했던 적극적 관객이란 작품의 일부로 초대받아 '적극적 관객'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에 불과했다. [주2] 그것이 더 정밀하고 더 진실할수록, 더 거짓이다. 당신의 작업은 누구도 대리해 주지 못한다. 당신이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당신은 한 명이고 독자는 무수하다. 그 무수함의 자리에 독자가 들어서지 않는다면 예술사를 지탱하는 "도살장의 논리"는 예술장 바깥에까지, 인정투쟁이라는 덫을 통해 각각의 실존에까지 월권을 행사할 것이다. 나는 창작자로의 전환을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가 책을 쓰고 영화를 찍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 주제는 다른 곳에서 더 말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자. '문학'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과정이다. [주3] 물론 당신의 활동은 문학장의 레이어(layer)와 겹칠 수도 있고 겹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판단의 단일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독립 출판에 여전히 겹쳐 있을 '문학'에 관해 말해 보자. 과거 모 소설가의 비열한 말처럼, 필요한 것은 과연 개개인의 작가 선언일까? 그 욕망이 제도로부터 기인한 것인데, 그 욕망으로 구성된 주체성이 순수한 선언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점에서 망상이다. 그러한 선언을 부추긴다면, 사건의 인과를 뒤바꾸거나 은폐한다는 점에서 비록 선한 의도일지라도 이데올로기적이다. 만약 독립이 그런 것이라면 애초에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독립 출판이 됐건 메일링이 됐건 블로그가 됐건, 문학성이라는 이름을(혹은 어떤 다른 이름을) 시뮬레이트(simulate)할 수 있는 다종의 장치가 필요하며, 우리가 예술성이라는 제도 바깥을 떠돌면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인정의 형태로 그것을 되돌려 받으려 애쓰기보다 그냥 체리피킹(cherry picking) 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장치들을 이용해야 한다. 혹은, 그것을 통과해 보면 자기 욕망의 형태에 '문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 기꺼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판적 활동 중의 다만 한 가지로, 또 글쓰기-언어만이 유일한 언어활동이 아님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예술이나 문학이라는 이름은, 그러다 필요하면 당신에게 쓰일 것이다. 아님 말고.



주1: SF(Science Fiction) 작가 스터전(Sturgeon)의 폭로를 잊지 말자. "SF의 90%가 쓰레기, 똥으로 취급된다는 기준을 다른 곳에도 적용한다면, 영화, 문학, 치즈, 헤어스타일, 사람 무엇이든 90%는 쓰레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까, SF 중 90%는 쓰레기라는 주장(혹은 사실)은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말이다."


주2: "그러니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이중적으로 살아남거나 진정하게 죽거나.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길이다. 예술과 경제를 둘러싼 폐쇄회로에서 탈출하는 것. 모두가 잘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말이다."
정지돈이 창비 주간논평에 게재한 <(진정한) 작가 되기>에서 언급했듯, 필요한 것은 이중의 폐쇄회로를 벗어나는 것이지, 장을 지탱하기 위해 끝없이 폐쇄회로들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단일회로들이 정당한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과거 합리성의 동의어였다면 이제는 곧장 윤리나 기쁨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들과 동일시된 채 손쉽게 활용된다. 그리고 그것을 선언할 때, 그 회로가 차폐해서 죽이는 것은 대개 거기에 동의해 주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무슨 입장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다. 가령 근래 노동과 계약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는 대형 문예지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론에 정보를 출하하는 기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주 단순한 물적 토대에 관한 문제의식, 공유하고 싶지 않지만 공유해야 하는 사실관계들을 선택적으로 가리고, 그것을 가림으로써 이익을 챙겨 가는 것이 문학장 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옳은 말들은 왜 항상 사후에만 나오는지도 분명하다. 항상 자신의 습작생 시절을 회고하고, 등단 직후를 회고하고, 주니어 비평가 시절을 회고하며 "이제는……"이라고 시작하는 말들. 끝나지 않는 "이제는".


주3: 이런 말들이 부정을 통한 보색대비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며 이익을 얻으려는 것, 혹은 적대적 공존이 아니길 바란다. 나에게는 이해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이해관심이 있다. '어떤 것'도 목적이 아닐 수 있는 인식 체계, 혹은 강보원의 표현을 빌려,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 없이 작동하는 세계.


Thanks to
Hal Poster, 「Against Pluralism」, 『Recodings』, The New Press, 1985.
Boris Groys, 「The Truth of Art」, e-flux Journal #71, 2016.
지랄나무(@ziralbaum), Twitter, 2020.















이여로

작가소개 / 이여로

블로그와 웹상에 문화와 관련된 글들을 번역하고 썼다. 비평적 태도의 아마추어로 남기를 바란다. 19년 제작한 소설 「긴 끈」의 스포큰 워드 음반 <긴 끈을 위한 읽기> 발매 예정.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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