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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의 문학

  • 작성일 2020-02-01
  • 조회수 2,691

[문학더하기(+)]



우리 이웃의 문학

– 장류진, 이주란, 윤이형의 소설을 통해 본 한국 소설의 인간학



한영인




1. 내 '시민'인 이웃들?


이웃은 누구인가. 한때 한국 문학 비평 담론을 주도했던 '타자와 환대의 윤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 물음은 사실 많은 종교들이 초창기부터 붙잡고 씨름하던 화두이기도 했다. 사랑의 종교로 일컬어지는 기독교에서 사랑의 소여 대상으로 다름 아닌 이웃을 지목한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 역시 희로애락에 긴박된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이웃을 가리킨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종교들이 지녔던 시대적 혁명성은 정복 전쟁 과정에서 경쟁과 제거의 대상이었던 이방인/타자를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주어 끌어안아 마땅한 '이웃'이라는 범주로 도약시킬 것을 요청한 데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쉽게 내뱉을 일이 아니다. 아니, 바로 그 점에서 이웃은 즉자적인 타인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웃은 차라리 지옥 속에 빠져 있는 타인을 '목숨을 건 도약' 끝에 끌어올려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울 때 간신히 탄생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종교와 문학은 (그리고 이따금 철학은) 그 도약의 과정에 어떤 시적인 순간이 내재해 있음을 안다.
카렌 암스트롱이 야스퍼스의 말을 빌려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명명했던 고대 종교의 창세기에 나타났던 평등주의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지향은 전쟁과 폭력에 맞서 인류가 이루어낸 담대한 도약임에 틀림없지만1) 이내 실정성(Positivität)에 스스로를 구속하면서 해방의 잠재력을 잃고 차갑고 형식적인 교리로 물화되어 갔다.2) 알다시피 이후의 역사는 실정화 된 종교의 허위성과 형식성을 극복하고 본래의 가르침에 깃든 해방의 역량을 회복하려는 투쟁의 역사였다. 멀게는 루터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족적이 뚜렷하고 비근하게는 1980년대 남한 민중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해방 신학의 꿈이 선연하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휩쓴 뒤에도 '이웃을 향한 열망'은 잔존했다. 그 잔존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사르트르가 "본질상 영구 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 칭했던 문학이었다.3) 이렇게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근거로 삼은 것 역시 사르트르의 저 문장이기 때문이다. 고진은 문학이 모든 굳어진 사회질서를 해체하는 부정성의 힘을 담지하며 그 부정성의 동력을 통해 영원한 혁명성을 담보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뒤, 작금의 문학에는 부정성과 혁명성 대신 단지 오락성만 남게 되었기 때문에 근대문학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혐오가 점증해 가는 현실 속에서 타자의 이웃됨의 (불)가능성을 서사와 재현의 윤리를 경유해 치열하게 사유해 온 우리 문학을 부정성(혁명성)과 오락성이라는 부당 전제된 이분법 하에서 오락성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정리해 내기란 고의적인 과소 진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지금 한국 문학이 얼마나 대단한 부정성/혁명성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지를 설득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부정성/혁명성은 그런 부류의 자화자찬마저도 영구 혁명의 대상으로 삼아 다시 부정하고 혁명하는 영속적 운동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 글을 열며 던졌던 물음에 겸허히 답하는 것이 이 글의 진짜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 물음에 천착하게 된 것은 '조국 사태' 때문이다. 조국 사태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국 사태에 임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내게 촛불 혁명이 실정화 되는 불길한 국면으로 다가왔다. 촛불 혁명이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고정된 목적을 향해 가는 단선적 운동이 아니라 차라리 그 본질이 문학과 같은 영구 혁명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4)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시민'으로 정체화 했다. 그들의 얼굴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탄핵의 차가운 계절에 그들은 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마음으로 서 있었던 이웃이었다. 하지만 서초동에 모여 백만이니 이백만이니 셈을 하는 그들은 어느새 내게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언캐니(uncanny)'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나의 이웃일 수 없었으며 나 역시 더 이상 어떤 사람의 이웃으로 안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주말마다 모여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쳤던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분명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염원과 열망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나를 그들과 이웃한 '시민'으로 나란히 세울 수는 없었다. 고백컨대 그 과정에서 나는 적지 않은 무력감과 우울감을 경험해야 했다. 그 감정의 갈래는 여러 가지였다. 촛불의 에너지를 고작 제 가족의 영달을 위해 각종 편법을 무람없이 구가해 온 조국 일가를 결사 옹위 하는 데 소모하게 만든 정권에 대해 느끼는 참담함의 반대편에 검찰의 몰상식한 발악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다. 양극 분열된 감정들을 왕복하는 동안 나는 수시로 내가 부적절한 논문 저자 자격이나 표창장 위조 같은 '사소한' 문제를 꼬투리 잡아 검찰 개혁이라는 엄정한 대의를 거스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김수영이 노래했듯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했다.
내 '시민'인 이웃들과 그 '시민'을 조롱하는 이웃들과 그 '시민'을 조롱하는 이웃들을 경멸하는 이웃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는 백낙청의 「시민문학론」(1969)을 다시 읽었다.5) 프랑스와 독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시민사회의 발전과 그에 조응하여 전개된 서구문학의 성취와 한계를 냉철하게 짚고 한국이라는 '후진' 개발도상국에서 서구 시민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민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 웅숭깊은 글을 제한된 지면에서 요령 있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 대목 앞에 유독 오래 멈춰 섰다는 사실만큼은 적어 두고 싶다.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축의 시대』, 교양인, 2010.
2) 기독교의 실정화 과정에 대해서는 헤겔의 「기독교의 실정성」(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정대성 옮김,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그린비, 2018) 참조.
3)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13면.
4)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선고되기 직전에 서사를 멈춰 세우는 황정은의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는 문학이 영구 혁명을 수행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촛불집회 당시 나온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비판적 고발은 물론이거니와 황정은이 하필 그 순간에 멈춰 서는 것은(아니 우리를 멈춰 세우는 것은) 촛불 혁명의 성취 앞에서 내보이는 소극적인 머뭇거림이 아니라 촛불 혁명이 언제나 다시 시작돼야 하는 영도(零度)의 순간을 마련해 내고자 하는 의식적인 고투에 가깝다. 황정은의 이 소설은 그 영도의 순간을 망각하고 외치는 전진의 구호는 텅 비어 있어 공허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거듭 알게 한다.
5) 백낙청, 「시민문학론」,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그러나 소시민은 다 죽어야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참다운 시민의식과 가장 거리가 먼 생각이다. 우선 자신이 소시민인 경우에 그것은 부질없는 자기혐오일 따름이요, 자기가 소시민이 아닌 경우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동료시민과의 유대를 상실한 사이비 시민의 거만한 태도이며, 오늘의 소시민이 결국 어제의 시민의 후예이고 어제의 시민은 또 아득한 옛적부터의 무수한 원시인과 야만인과 귀족과 농민과 천민의 자손이고 내일의 새로운 세계시민의 씨가 바로 오늘의 소시민의 피와 살을 받아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류 자체에 대한 외경심과 희망과 동물학적 상식을 스스로 버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민다운 시민은 무엇보다도 소시민의 존재와 의식이 그것 나름으로 역사의 산물이며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6)

6) 위의 책, 23쪽.


물론 백낙청의 진의는 당대 유행처럼 퍼지던 '소시민(의식)'을 추인하는 데 있지 않다. 「시민문학론」을 대표하는 문장이 바로 이 대목에 뒤이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상으로 내걸려는 '시민'이란, (중략) 우리가 쟁취하고 창조하여야 할 미지(未知), 미완(未完)의 인간상(人間像)인 것이다."인 데에서도 알 수 있듯 백낙청의 시야는 '소시민'은 물론이고 기존 서구 시민사회의 '시민'조차 뛰어넘는 새로운 주체에 가닿고 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주체가 니체의 '초인'처럼 세인(世人)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롱, 경멸, 비난을 수반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도래할 시민들'은 "오늘의 소시민의 피와 살을 받아서 나올 수도 있"는, 지나간 역사와 오늘의 현실과 잇닿은 한에서 출현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세인(世人)을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희망의 산물에 가깝다.
문학 작품을 경유해 우리 이웃의 존재론을 묻는 일은 여기서 중요한 사려 깊음의 덕목을 체현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 곁에 서 있는 "동료시민"들의 존재와 의식을 살피는 작업인 동시에 그 존재와 의식을 함부로 비난하고 기각하지 않는 신중함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서 살펴보려는 장류진과 이주란, 윤이형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민성은커녕 인간성조차 위협받는 존재들이거나 시민성의 덕목에 무감하고 때로는 거기에 몹시 회의적이다. 하지만 '시민다운 시민'이 단지 광장에 서서 정치적인 구호를 주워섬긴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듯 일견 정치적 주체와 무관하거나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도래할 미래의 시민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냉혹하고 모순된 오늘의 현실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힘겹고 치열하게 통과하고 있는 이 인물들이야말로 우리가 "동료시민"으로서 "유대"를 건네야 할 '이웃'의 형상이며 앞으로 도래할 시민의 현실적 근거인지도 모른다.



2. 자아연출의 서사학7) : 장류진 소설의 인물들


박인성은 김봉곤과 박상영, 장류진의 소설을 분석하는 (동시에 재현과 반재현을 둘러싼 오랜 대립과 갈등을 생산적으로 사유하는데도 적지 않은 참조를 제공하는) 글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7) 이 제목은 어빙 고프먼의 『자아연출의 사회학』(현암사, 2016)을 차용한 것이다.


문학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이라는 생각과 달리, 이제 공통의 지평을 스스로 소외시키고서 얻어낼 수 있는 문학적 영토란 없다는 사실만이 우리가 요 근래 명확하게 알게 된 사실이다. 문학이 그토록 경원시하던 '얄팍하고 한갓된 것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이제는 좀 더 넓은 공통 감각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어떤 현실적 자율성을 획득하는 셈이다. 다시 문학은 표면적이고 얄팍한 세계로, 허영심과 속물들 주변의 세계로, 그리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소확행' 사이에서 방황하는 너무나도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삶들에게로 향해 가는 중이다.8)

8) 박인성, 「얄팍하고 한갓된 세계로의 귀환」, 『문학과사회 하이픈』, 43~44면.


나는 최근 발표한 글에서 '소확행'이 단지 얄팍하고 한갓된 세계의 자조적 레토릭을 넘어 대안적 삶의 가능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고9) 후장사실주의가 자기 과시적 엘리트주의라는 그의 평가에도 절반 정도만 동의하는 편이지만, "공통의 지평"과 "좀 더 넓은 공통 감각"이라는 개념으로 거론한 작가들이 체현한 리얼리티의 성질을 포착한 것은 탁견이라 생각된다. 박인성의 주장대로 지금 한국 문학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개별성과 고유성은 보다 넓고 보편적인 공통 감각의 지반 위에서 감각되고 있으며 인물을 포함한 그 재현의 양상은 더욱 폭넓고 치밀하게 탐구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장류진 소설에 대해서라면 공통성 혹은 공통 감각은 분석의 온당한 시작점에 해당할 뿐 최종적인 결론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필연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관절 어떤 공통 감각이란 말인가? 장류진의 소설이 독자들과의 관계에서 구축하는 공통 감각은 어떤 요소의 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관련해 비교적 일상에 가까운 소재의 선택과 가독성 있는 문장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일상적 소재의 채택은 장류진 고유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가독성 역시 공통성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어반복에 가깝다.(가독성을 문장의 세공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가독성은 문장의 매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 문장이 지시하고 구축하는 세계가 독자에게 얼마나 친숙한 것으로 감지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류진 소설이 지니는 대중적 소구력의 핵심은 소재와 문장이 아닌 인물에, 더 정확히는 그 인물이 대면적 상호작용 하에서 스스로를 연출하는 '연극적 자아'로 실감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견 위선적이고 형식적으로 보이는 '연극적 자아'의 도입이 어떻게 독자들과의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주요 기제로 작동하는가? 그건 (장류진의 독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그와 같은 '연극적 자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그 점에서 장류진의 인물은 자율적이고 반성적인 내면을 지닌 고전적인 문학의 인물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결론을 앞질러 말하자면 장류진 소설에 독자들이 보내는 공감은 개별적 인물의 내면에 대한 공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과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주체가 착용하는 가면(페르소나)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 비롯하며, 장류진은 이러한 페르소나적 자아에 내재한 비극과 희극은 물론이고 나아가 활력까지도 포착해 낸다.
'자아연출'과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작용하는 관계의 동역학을 세밀하게 묘파해 낸 어빙 고프먼의 작업은 장류진 소설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 어빙 고프먼은 인간을 거의 모든 사회적 시공간에서 ― 그러니까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개인의 입장을 보여주는 순간적인 표정과 같은 가장 작은 단위부터 한 주간 남짓 계속되는 큰 회의처럼 사회적 행사라 불릴 상호작용 단위까지" 포함하는10)) ― 스스로를 연극무대에 선 배우처럼 연출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고프먼에게 개인은 '공연자(performer)'이며 늘 어떤 '배역(part)'을 맡아 '배역 연기(routine)'를 수행하는 존재이다. 이 연출은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직장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11)
세계는 무대이며 개인은 배역을 연기하는 공연자라는 고프먼적 관점은 장류진의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의 도입부에서부터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아마 고프먼이라면 소설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애자일(Agile)'과 영어 이름 사용을 스타트업 회사가 혁신적이고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스스로를 연출하는 대표적인 기법의 예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작품에서 "견고한 인스타 자아"를12)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회장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는 이미 대표적인 자아연출의 뉴미디어로 자리 잡지 않았던가. 이렇게 이 작품은 도입부에서부터 자아연출이 일상화된 사회적 삶의 무대를 우리 앞에 세워 보인다. 그리고 안나라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 그와 같은 자아연출에 어린 우스꽝스러운 피로를 냉소적으로 조감한다. 안나는 일종의 배역명인 영어 이름(Anna)과 실제 이름(김안나)이 중층적으로 겹쳐 있는 인물인 데에서 드러나듯 'Anna'로써 그 연출에 참여하는 동시에 '안나'로서 무대 위의 부조리를 관람하는, 공연자이자 관객인 이중적 존재이다.
이 경계에 선 이중적 시선이 포착하는 것은, 말하자면 '데이빗'과 '박대식' 사이에 놓인 간극이며 연출하려는 이상과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낙차이다. 이 간극과 낙차는 주체로 하여금 다양한 분열을 맛보게 한다. 가령 거북이알이 재벌 회장의 노여움을 사 포인트로 월급을 받고 다시 그것을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화폐로 교환하는 장면은 첨단 테크놀로지와 봉건적 위계질서가 기괴하게 혼종 된 한국의 현실을 '웃프게' 재현하지만, 이 기이한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분열의 강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편 독자들은 여기서 장류진의 인물들과 그 분열을 나누어 갖는다. 자기가 맡은 배역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스스로의 행동이 연출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우리 또한 '데이빗'과 '박대식' 사이에 놓인 간극을 날마다 힘겹게 마주해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업이 곧 천직이자 본분이었던 과거에는 개인의 고유한 자아와 직업을 매개로 한 사회적 자아가 곧잘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간극은 큰 문제로 감지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Anna'와 '안나' 사이의 분열과 중첩 속에서 미묘한 불안감과 불편함을 느끼며 사회적 페르소나 뒤에 존재하는 '나'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작업의 긴급성을 의식한다.
안나가 케빈에게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13)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여기서 '코드(code)'는 일단 프로그램 언어의 조합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범이자 연출된 자아가 따라야 하는 사회적 행위의 관습으로 확장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성패가 '코드(code)'를 얼마나 잘 인지하고 맞춰 가는지에 달려 있었다면 장류진은 그 '코드'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성이 있으며 그걸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일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일과 삶이 분열된 일상에서 늘 좌절과 낙담, 그리고 작은 성취에 따르는 기쁨을 교차적으로 왕복하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이 연출된 무대의 세계에 맞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마련해 내고자 하는 이 소설에 열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장류진의 소설이 단지 '연출된 자아'와 '고유한 자아'를 구분 짓고 '고유한 자아'의 손을 들어주는 것에 그쳤다면 낡은 개인주의적 진정성의 가치를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류진은 「잘 살겠습니다」와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도움의 손길」 같은 작품들을 통해 자아연출을 근본적인 삶의 조건으로 수락한 상황 하에 발생하는 타인과의 갈등을 흥미롭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층위의 공감대를 형성해 내는 데 성공한다.
위에 언급한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소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미시적 측면에서 보면 모두 대면적 상호작용의 실패가 서사의 긴장을 주조해 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먼저 「잘 살겠습니다」의 빛나 언니에게 '나'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의 일차적인 원인은 빛나 언니가 도무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자아연출에 무능력(무관심)하다는 데 있다.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사람들과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남자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 있으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해 보일지, 한번쯤 생각을 해볼 텐데."14) 자아연출의 목적이 타인에게 이상화 된 인상을 보여주는 데 있다는 고프먼의 말을 떠올려 보면 빛나 언니가 그와 같은 이상적인 자아연출에 미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자아연출에 미숙한 사람은 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상대방에게 말할 수 없는 불편을 안겨 주는가? 그건 무엇보다도 자아연출이 단지 위선적인 가면에 불과한 게 아니라 적절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근본 요소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자아연출에 무능력한 사람이 사회적 상호작용에 능숙할 리 없다. "'이 사람이 결혼한다면 내가 기꺼이 결혼식에 갈 것인가?'"의 기준으로 청첩장을 나눠줄 만큼 철저한 상호성에 입각해 있는 '나'의 관점에서 빛나 언니는 도무지 신호수용 성향을 파악할 수 없는 형편없는 공연자이다. 형편없는 공연자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지탱하는 신호를 교란시킴으로써 다른 사람이 행하려는 일관된 자아연출마저 방해한다는 점에서 터부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도로 위에서 신호등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변경하는 미숙한 초보 운전자와 같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언제나 새롭게 마주하는 삶의 무대에 처음 서야 하는 초연자(初演子)이며 완벽한 자아 이상을 구축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15) 빛나 언니 대신 '나'가 전체회신녀로 등극할 수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아연출의 능력은 개인이 얼마나 눈치가 빠르고 똑 부러진 여부에 달린 것이라기보다 통제할 수 없는 운에 달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나'와 빛나 언니의 공통점은 남성 중심적 기업 조직에서 주변부에 할당된 여성 노동자라는 데 있지만 독자들은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뿐만 아니라 그 실패와 취약점에 대해 인식하게 됨으로써 빛나 언니를 향했던 대상화 된 시선이 거울에 반사된 듯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이 어떻게 여성의 신호를 그릇된 방식으로 오인하게 만드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가끔 명시적이고 대부분 암시적인 타인의 신호를 해석하는 문제는 대면 상호작용에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다. 고프먼은 관련해 인간은 타인의 신호를 민감하게 수용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전달하는 암시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무의미한 몸짓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할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16) 물론 이러한 지적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오해가 철저하게 젠더적 양상을 띤다는 데 있다. 고프먼은 많은 여자들이 남자보다 낮은 지위에 함축된 이상적 가치를 연기한다고 말하면서 "여학생들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남자 친구가 지루하게 설명해도 참고 들어주며, 수학에 젬병인 상대 앞에서는 자기의 수학적 재능을 감추고, 탁구 게임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상대에게 져준다."는 관찰을 제시한다.17) 남녀 관계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그녀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면모를 연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송지유와 대화가 잘 통한 이유가 송지유의 사회적 연기 덕분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18) 그건 '나'가 남들보다 유난히 무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대개의 남자들처럼 여성이 발신하는 신호의 기저에 다양한 사회적 위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나'를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짐승 같은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분명 그의 마음에는 송지유를 향한 애정과 진심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 독자들이 그의 실패에 통쾌한 공감을 보내는 건 '남자의 진심' 같은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까지 남자들이 여성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신의 진심을 구성하고 드러내는 과정에 얽혀 있는 젠더적 위계의 양상을 반성적으로 돌아본 경험이 거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움의 손길」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시장화 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과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 놓인 간극이 문제가 된다.19)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가사도우미 서비스와 그 서비스를 수행하는 사람을 구분하고자 한다.("우리 그러지 말자. 식기세척기를 사는 게 아니잖아. 사람이 오는 거라고.")20) 이와 같은 구분은 일견 자연스러운 도덕관념에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민주주의적 평등의 산물에 가깝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을 자본주의적 교환 논리와 민주주의적 평등 논리 사이의 갈등이 '나'의 새 아파트라는 무대 위에서 미묘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으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화해할 수 없는 현실의 두 무대 사이를 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나'의 실패담으로도 읽을 수 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 인간적 송구함과 소비자적 합리성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가는 '나'에 비해 도우미 아주머니는 철저하게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페르소나에 충실하다. 이때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 능력은 서비스 거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유지하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고객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서비스 제공자는 자기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공격성을 띠곤 한다는 고프먼의 관찰은 작품 속 아주머니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21) 대뜸 요즘은 다 아기 옷 코스로 세탁을 한다거나 아직 애는 없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그러므로 단지 눈치가 없거나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다. 아주머니의 무례함은 외려 신중하게 계산된 것이며 ― 아마도 그녀는 다년간의 도우미 경험을 통해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세팅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뻔뻔하고 공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을 것이다. ― 소설 속에 나오는 '프로'라는 말은 공격적인 무례함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소비자로서 응당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과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한 명의 인격으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내적 명령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그것은 '사용자'라는 배역을 한 번도 맡아 보지 않은 초연 배우가 범할 수밖에 없는 실수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자본주의적 교환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기존에 상품으로 거래되지 않았던 다양한 부문이 상품 거래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다양한 서비스 분야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며 과거에 스스로 처리해야 했던 일들이 돈만 건네면 외주화 할 수 있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 '나'처럼 타인의 노동을 구매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노동자로만 살아도 충분했던 과거의 삶과 달리 이제 우리 모두는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사용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모럴'과 '테크놀로지'를 새롭게 익혀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무대는 목하 새롭게 재편성되는 중이며 이는 우리가 맡아야 할 새로운 배역이 계속해서 늘어 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에 서투른 것은 단지 '초년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맥도널드 자동주문기 앞에서 당황하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 모두를 점점 무대 위의 초연자처럼 만들어버린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장류진의 소설은 다양한 자아연출과 대면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삶에 내재한 위험과 실패의 지점을 포착하여 서사화하는 데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고자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기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섬세한 주의를 기울인다. 노동자라면 조직과 동료에게 인정받는 노동자이길 원하고 사용자일 때는 노동자의 인격과 권리를 기쁘게 인정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선하고 효율적인 사용자이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상황과 배역에 맞춰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거기에는 언제든 오해되고 미끄러져 당혹스러운 실패의 막다른 국면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아마도 그 실패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의 자아와 사회화된 우리의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불일치"22) 때문일 텐데, 이러한 분열을 장류진만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는 분명 흔치 않다.23)

9) 한영인, 「'뉴노멀'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10)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 의례』, 아카넷, 2013, 13~14면.
11)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현암사, 2016, 27면.
12)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49면.
13)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위의 책, 60면.
14)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 앞의 책, 25면.
15) 장류진의 근작 「연수」에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삶의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해 왔지만 운전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 인물이 등장한다. 거기서 '나'는 운전 연수 선생님에 의해 "갓 태어난 갓난아기"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삶이 끝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단계(stage)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무리 그전에 성공적으로 그 단계를 넘어섰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미숙하고 무력한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단계들이 포진해 있다는 작가의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장류진, 「연수」,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16)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71면.
17) 어빙 고프먼, 위의 책, 56면. 물론 우리는 고프먼의 관찰이 195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널리 유통되는 지금, 여성들은 그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남자들 앞에서 연기하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있어 여성에게 기대되는 규범이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18) 장류진,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앞의 책 98면.
19) 이 소설을 자본주의 재생산 노동을 키워드로 독해한 최근의 논의로는 이지은의 「재생산노동력의 상품화와 여성 연대의 곤경 – 장류진, 「도움의 손길」에 부치는 주석」(『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을 참조.
20) 장류진, 「도움의 손길」, 위의 책, 132면.
21)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 22면.
22) 어빙 고프먼, 위의 책, 77면.
23) 그녀의 첫 소설집에 등장하는 유일하게 성공적인 상호작용의 예를 우리는 「탐페레 공항」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 나타나는 '나'와 '노인' 사이의 관계가 비대면적이라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노인은 마치 신화의 공간 같은 북유럽 핀란드에서 기억과 텍스트의 조합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앞서 거론했던 근작 「연수」에서는 「도움의 손길」에서와 달리 두 여성 인물들 사이에 이해와 연대의 순간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3. 인간의 영도(零度), 자연인의 이념 : 이주란 소설의 인물들


엄마는 우리에게 예고되어 있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 마치 대본에 따라 실생활과는 너무 다른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굴었다.24)


나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연기력은 날로 향상되어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25)


힘들 때 잠깐씩 나는 배우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어,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는데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납니다. 연기였다면 저는 아마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러기가 싫었습니다. 제가 저같이 살아온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게 진짜 제 삶이었으니까요.26)

24)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 96면
25) 이주란, 「일상생활」, 위의 책, 127면.
26) 이주란, 「H에게」, 위의 책, 275면.


이주란의 소설에도 연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인물들은 장류진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를 타인에게 이상적인 존재로 내보이고자 하는 적극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서 수행되는 연기는 자아의 이상화와 거의 무관하며 단지 객관적인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일시적인 도피극에 가깝다.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 서 있는 장류진의 인물과 달리 빈곤에 허덕이는 이주란의 인물들은 사회적으로도 매우 불안하고 희미한 관계만을 허락받고 있으며 이러한 계급적 차이는 인물들이 수행하는 자아연출의 성격 또한 상이하게 만든다.
이주란 소설의 무대가 "문명과 편리에 뒤처질 뿐만 아니라 주민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낙후된 지역"으로 "대도시의 변두리 동네나 서울 인근 지역 중 군 단위 정도의 작고 오래된 동네"라는 점은 첫 소설집에서부터 지적되었거니와27) 낙후하고 빈곤한 무대는 개인의 행동을 그 무대의 초라함에 걸맞게 제한하는 힘을 발휘한다. 배우가 무대를 초월해 연기할 수 없듯 사람 역시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롭게 달아날 수 없다. 이주란의 낙후하고 빈곤한 세계에서 자아의 과시적 연출은 불가능한 기획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화자의 일인칭 독백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소설에서 SNS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필요한 것만 사지 갖고 싶은 걸 살 수는 없는 사람"28)이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그럴 듯한 것으로 꾸며 제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리라.
이주란의 인물들은 「선물」에 등장하는 자매처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그 존재가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경우가 많다. 이주란이 쓰는 대부분의 소설처럼 거기서도 아버지는 부재하며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언니는 불붙은 집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으며, 화자 역시 집에 처박힌 채 유의미한 사회적 교류 없이 술을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27) 백지은, 「작품해설 : 차갑고 치열한 심정으로」, 『모두 다른 아버지』, 민음사, 2017, 263~264면.
28)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한 사람을 위한 마음』, 90면.


우리는 점점 말라 가서 지금은 둘 다 몸무게가 4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는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텔레비전이 있어 가끔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원을 마지막으로 켰던 것이 언제인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예능 프로를 보면서 웃는다거나 뉴스를 보면서 대통령과 집권당을 저주하는 것은 일반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29)

29) 이주란, 「선물」, 『모두 다른 아버지』, 147면.


이주란의 인물들이 희미하게 존재한다는 건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자매는 실제 세계에서 그 자신이 점유하는 비중을 계속해서 줄여 나가고 있으며 타인과의 접촉을 끊고 ― 휴대폰과 컴퓨터는 사회적 접촉을 매개하는 미디어이다. ― 스스로를 유폐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은 이주란의 인물들이 삶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내리는 처방이기도 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에서 해직된 뒤 외딴 시골의 컨테이너에 칩거하는 아버지가 등장하는 「우리가 이렇게 함께」도 그렇거니와 「누나에 따르면」의 경우엔 아예 육지로부터 고립된 외딴 섬이 소설의 무대로 등장한다. 그 고립된 삶의 무대에서 인물들은 자주 죽고 싶다고 독백하거나 실제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윤희의 휴일」, 「선물」 등) 그 처연한 죽음은 이주란의 인물들이 항상 삶과 죽음 및 인간과 비인간(주검)의 경계에 서 있으며 자주 인간의 영도(零度)까지 내려앉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주란의 인물들이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적으로 희미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삶에 대한 애착이 적거나 태생적으로 비관적인 성격을 타고났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원장으로부터 "씨발년아 당장 나가"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30) "미안해. 시간이 없어" 같은 말을 달고 살 정도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기도 한다.31) 하지만 그런 모멸을 감당하고 일상을 모조리 잠식당할 만큼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도 돌아오는 것은 게으르다는 편견 섞인 힐난뿐이다. "그러면서 대출을 끼고 샀던 집이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는 동안 주변으로부터 게으르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고 쫓겨났는지 어디가 아파서 얼마를 썼는지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얼마의 빚을 졌는지는 몰랐지만 회사에서 겪었을 일은 참아야 했고 아프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고 대학 같은 것은 포기했어야 했다고 말했다."32)
더 나은 삶을 위해 몸부림칠수록 빈곤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차갑고 모순된 도시에 맞서 어떤 인물들은 자신을 격리시켜 보호하려는 '자아의 테크놀로지'를 구가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화자 '나'는 서울에서 받은 모종의 상처로 인해 고향으로 되돌아온 뒤 "아무 생각이 없"이 "낮에는 보통 집안일을 하고 해가 지면 책을 읽거나 집 근처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며, 「넌 쉽게 말했지만」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속악한 도시로부터 받은 상처를 품고 고향에 내려앉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김승옥의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를 다시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김승옥의 작품에서 누이의 형상이 남성 화자를 경유해서 제시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여성 화자의 독백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30)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한 사람을 위한 마음』, 13면.
31)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위의 책, 48면.
32)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위의 책, 105~106면.


조금 자고 일어나 일기를 몇 줄 쓰다가 서울에 살 때를 떠올려 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일을 한 뒤 돌아와 씻고 밥을 먹고 나면 하루가 지나 있었고 말하자면 일기에 쓸 일도 일기에 쓸 말도 일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기껏해야 남의 욕이라든가 나 자신이 싫다는 그런 말들을 썼다. 정말 싫다, 정말정말 싫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부턴 막무가내로 싫어하기만 했다. 일과 하루와 다른 방법을 모르는 나를. 나는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33)

33)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위의 책, 63면.


고향을 내려오기 전의 '나'는 과도한 노동과 떨쳐낼 수 없는 지독한 자아혐오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던 인물이다. 여기서 반복되는 자아혐오의 원인은 '나'를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죽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 같은 것을 신경 쓰면서 초조해"34)하며 살아야 하는 타인 지향적 관계로부터 비롯한다. '나'가 살던 서울은 타인의 알 수 없는 마음처럼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공간인 동시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으로부터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의 공간으로 제시되며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체념하듯 고향으로 내려온다.('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낙후된 지역'이었던 '변두리'가 여기서는 서울에서 받은 상처를 피해 숨어드는 안식처로 기능한다.)
거기서 '나'는 도시의 인공성과 대비되는 자연(스러움)에 매혹된다. 가령 흐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제 몫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몸의 소리, 자유로운 새들의 지저귐, 멀리서 들리는 염소 울음소리, 동물의 젖을 짜는 소리,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남자 아이의 휘파람 소리, 그리고 공기소리" 같은 것들에 오래 귀를 기울이는 식이다.35) 여기서 몽골과 흐미로 대변되는 자연은 잠시 멈춰 스스로를 돌(아)볼 작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서울에서의 삶과 달리 자유로움 그 자체로 체험된다. 앞서 영도(零度)의 경계에 내몰렸던 인간은 이제 무위의 실천 속에서 비로소 회복의 기미를 보인다.
고향에서 펼쳐지는 '나'의 무료한 일상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비유하는 건 어쩐지 계급적 실감을 거스른다. 그건 차라리 한 종편 방송사에서 히트를 친 〈나는 자연인이다〉와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인물은 "〈나는 자연인이다〉 세 편을 연이어 보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36)고 말할 정도로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며 그래서 조카로부터 "자연인 이모"37)라고 불린다. 그 인물은 "아주 작은…… 매출로만 보면 없어지는 게 맞을지도 모를 곳"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38)내며 "내가 남들처럼 괴롭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은 아닌가"39) 생각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그 빈곤이 곧바로 실존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넌 쉽게 말했지만」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그녀는 고향에서 고작 천 원짜리 행운에 기뻐하고 엄마와 미나리를 뜯으며 소소한 삶이 주는 만족을 천천히 음미한다.
자연인은 속세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자연에 고립시킴으로써 회복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자연인이 행하는 자발적인 고립에는 속세로부터 받은 상처와 환멸, 피로 등이 진하게 배어 있으며, 자연인의 이념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한 최저의 수준으로 유지하며 소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남으로써 물질문명이 강제하는 더 많은 축적에의 명령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주란의 인물들을 그대로 자연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삶이 정말 TV 프로그램에서처럼 모든 걸 훌훌 털고 산속에 들어가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거기엔 분명 '자연인의 이념'이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인정과 끌림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인의 이념을 동경하는 듯 보이는 이주란의 인물들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역시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타인들과 주체를 소외시키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갖은 모욕과 모멸을 겪으면서 겨우 한 달에 200만 원쯤을 벌고 또 겨우 200만 원 정도밖에 벌지 못한다며 '이백충'이라는 모욕과 모멸에 시달린다. 유의미하고 진실 된 관계를 맺는 데엔 자꾸 실패하기만 할 뿐이며 차가운 도시가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약속하는 풍요로운 삶의 미래는 좀처럼 체감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인에 대한 동경에는 엄연한 도피 심리가 내재해 있지 않나 하는 반문도 제기될 법하다. 소파에 늘어져 사타구니를 긁으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는 (나 같은) 아저씨들을 볼 때마다 아내들의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도 거기에 게재된 도피 심리가 빤히 읽히는 탓일 테다. 누군가는 이주란의 인물들 역시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으려는 비겁하고 도피적인 태도가 읽힌다며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고향에 내려앉아 생산적인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이주란의 인물들은 기존 소설에 등장하는 행동하는 인물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 보이기도 한다.(게다가 그녀들이 무슨 '지하생활자'처럼 정념에 찬 내면을 토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과거와 다르게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 "나는 이제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40) ― 그들의 선택에는 도피보다 치유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고향에 내려앉아 조용히 자신의 마음과 주변의 일상을 다독이는 그 인물들의 생활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쨌거나 그들이 영도(零度)의 지점까지 내려앉았던 스스로를 추슬러 조금은 삶 쪽으로 기울어진 오늘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작고 희미한 긍정의 힘이 앞으로 어떻게 다른 일상을 조직해 낼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독자들은 그녀들이 마주할 이후의 삶이 보다 행복하고 따뜻한 것이길 바라겠지만 그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투명한 삶의 가능성을 조금씩 또렷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세계를 좀 더 낫게 만드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주란의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문학이 지니고 있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34)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위의 책, 53면.
35)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위의 책, 60면.
36)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위의 책, 10면.
37)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위의 책, 11면.
38)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위의 책, 12면.
39)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위의 책, 25면.
40)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위의 책, 73면.



4. 소심인(小心人) 문학론 : 윤이형 소설의 인물들41)


우리는 소심하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듣고 쓰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 구체적인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 남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오래 상처받는 사람을 소심하다 하기도 하고 낯을 많이 가려서 여럿이 있는 모임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소심하다 이르기도 하며, 때로는 그냥 타인을 잘 견디지 못하는 예민함을 소심함으로 퉁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로 다른 듯 보여도 여기에는 소심함을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개인의 심리적 특성으로 치부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소심함을 그냥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단지 개인의 심리적 결점 정도로 이해해도 좋은 것일까?
윤이형의 「작은마음동호회」는 '소심함'이라는 단어를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맥락에 접합시키려는 독특한 시도이다. 여기서 소심함은 개인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심리적 결점이 아니라 모종의 사회적 관계가 개인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결과로 제시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에서 '작은마음동호회'를 결성하는 사람들은 유달리 소심한 사람들이 아니다.(정말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모임을 만들거나 가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동화를 쓰는 사람도 있고, 번역을 하는 사람도, 외주 편집자도, 프리랜스 웹 디자이너도, 패션지 자유기고가도 있"으며, 비록 "유명인은 없지만 다들 쓰는 일에선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며 때로는 "독설 넘치는 비평가들"이다.42)
마르크스는 어디선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존재에 선행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을 상정하는 것을 비판하며 형이상학적 본질보다 존재에 관여하는 사회적 관계의 힘의 우선성을 강조한 이 말을 여기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정 내에 묶일 때 우리는 소심한 사람이 된다.'쯤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 문제는 그 재능 있고 자기주장 활발했던 여성들이 지금은 '어머니'로서 가정에 묶인 존재로 살아갈 뿐 공화국의 적극적인 시민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아니, 그녀들은 이러한 분열을 마주하면서 공화국의 시민 됨 자체를 의문에 부친다.

41) 이 장에 등장하는 윤이형의 「버킷」에 대한 논의에는 한영인, 「긍정할 수 없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다는 것」(웹진 『과자당』 2nd)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2)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 9~10면.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토요일마다 빈집에서 아이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중략)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유아차라도 끌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러면 '맘충' 취급을 받지 않겠느냐고 볼멘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인파 속에서 밀리고 밟히다 아이가 혹시 다칠까 겁내는 마음이,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아이의 볼을 꽁꽁 얼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나약한 핑계이고 열등감이 아닐까, 나는 실은 전혀 정치적 존재가 못 되는 게 아닐까, 자기검열을 하다 마음을 다친 채 새벽 두 시에 책상 앞에서 맥주 캔을 따는 사람들이다.43)

43)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앞의 책, 10~11면.


작품의 배경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집회이며 여기서 '나'를 비롯해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광장에 나가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집에 남는다. 해방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광장에서 그녀들은 소외되어 있다. 물론 이 소외는 전적으로 강제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추운 겨울 밤 도심의 광장에 나가는 일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걸 핑계 삼는 나의 안일한 소시민성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나는 실은 전혀 정치적 존재가 못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열등감은 그래서 찾아든다. 그녀들은 '폴리스'로부터 소외되어 '오이코스'에 머무르길 강요받은 존재들이며 시민으로 우뚝 서지 못한 자신의 소시민성을 부끄러워하며 속수무책으로 자기혐오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런데 이 대목은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받아 온 어떤 문학(인)의 내밀한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있어 쉽게 선명한 정치의 편에 서지 못하는 문학(인)이 느끼는 복잡한 심경 같은 것 말이다. 주지하듯 '문학과 정치'의 관계는 근대문학의 오랜 난제에 속하며 최근 '시와 정치' 논의도 그렇듯이 한국 문학은 오랫동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 왔다.44) 거기서 커다랗고 선명한 목소리를 냈던 건 대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 이념, 정의, 당위 등으로 무장했고 그 어휘들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반대편 사람들은 조용히 개인주의의 미덕이나 문학의 자율성을 벽돌 삼아 고답적인 성을 쌓곤 했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엔 언제나 이렇듯 선명한 목소리들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거기에는 누구보다 정치적 존재로 우뚝 서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의 불안과 자기혐오 또한 아로새겨져 있다. 하지만 양극단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 되는 건 문학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여서 뚜렷한 지향과 선명한 목소리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소심한 갈등은 거의 시야에 포착되지 못하거나 혹 드러난다 해도 곧잘 쓸데없는 감상성으로 폄훼되곤 했다. 그러니 이 작품에 나타나는 '나'의 부끄러움과 자기혐오가 우리 문학에서 상당히 희귀한 것이란 사실을 먼저 짚어 두지 않을 수 없다.
『작은마음』 vol.1은 거국적인 항쟁의 국면에서 집에만 있을 수 없었던 '작은마음동호회' 회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 탄핵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아마도 '오이코스'에 할당된 여성의 삶이 어떻게 '시민'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소외되는지를 고발하는 목소리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 특히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가사노동의 주 담당자이자 아이의 주 양육자로서 그녀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 역시 담겨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자는 '나'와 서빈의 재회를 이어 주는 매개가 되어 준다.
이 작품은 광장-폴리스의 시민성과 가정-오이코스의 소시민성을 대립시키는 듯 보이지만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명백히 소시민성에 기울어져 있다고 볼 여지도 없지는 않다. 가령 '나'는 『작은마음』 vol.1을 들고 광장에 서지만 그건 단지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를 똑같이 따라 외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광장에 서서 "정말로 대통령을 퇴진시키러 이 자리에 나온 것일까." 의심하고서 곧바로 "나는 이제 내가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한 사람과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거기 있는 것만 같았다."고 말한다.45) 자신의 삶에 소중했던 한 사람이, 그렇지만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되었기에 멀어졌다가 이제 다시 만나게 된 그 한 사람이 광장에 울려 퍼지는 '대의'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광장의 대의보다 친밀했던 관계의 회복에 더 많은 마음을 쓰는 '나'의 태도를 소시민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시민의식과 소시민성을 매우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일 테다. 윤이형이 이 작품에서 정립하려는 것은 차라리 그런 도식적인 시민성/소시민성을 넘어 새롭게 요청되는 '소심인(小心人)'의 윤리가 아닐까. '소심인'의 윤리는 광장-폴리스는 언제나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배제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우애와 연대의 가치를 공적인 것이 아닌 그저 사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지는 않았는지 의심하며 남성화 된 광장-폴리스에 당당하게 기입될 수 없었던 망설임과 머뭇거림에 우리의 눈길을 닿게 한다. 그 점에서 '소심인'은 비록 부끄러움과 자기혐오에 빠질 때에도 "극도로 무책임한 개인주의와 극도로 감정적인 집단주의 사이를 무정견하게 방황하면서 해소할 길 없는 원한과 허무함과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는"46) '소시민'과 다르다. '소심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 막연히 침윤되어 있지 않으며 자신을 거듭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세계의 구조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그 구조를 미약하게나마 바꿔 가기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 그 투쟁은 광장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외롭고 어렵고 힘든 싸움이다.
윤이형의 「버킷」에서도 류미와 태정이라는 '소심인'이 등장한다. 대학교에서 포크 음악 창작 동아리 활동을 했던 류미는 12년 전인 4학년 때 학교 공연에 온 태정을 처음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태정은 다른 친구들처럼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없다는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기타를 팔고 음악은 그만둔 상태였는데 그녀의 부끄러움 뒤에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집에서 학비를 지원받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자기가 동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이유로 '자책'과 '부끄러움'에 빠지는 류미는 「작은마음동호회」의 '나'처럼 소심한 인물이다. 그런 류미에게 "전설적인 선배이자 현직 뮤지션"인 태정은 "형체 없는 거대한 적에 맞서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나비 같은 의연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자신을 자주 부끄러움에 빠뜨리는 '자기부정'에 침몰되지 않고 그에 맞서 의연하게 싸우고 있는 듯 보이는 태정에게 류미는 강한 끌림과 매혹을 느낀다.
졸업 이후 음악 웹진을 내는 회사에 취업한 이후 류미는 이혼과 이직을 차례로 겪으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원한에 가득 찬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태정은 이때도 홀로 남은 류미에게 조언과 희망을 건네는 의젓한 선배가 되어 준다. 태정은 류미에게 작은 양철 버킷을 선물하며 "너를 힘들게 하는 그 말들과 너 자신을 분리해야 해. 분리해야 살 수 있어. 류미야, 너의 분노는 정당해. 하지만 그 말들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는 마. 그게 너 자신을 향하게 하지는 마."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넨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는 마음이 자신을 부정하는 힘으로 활개 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태정의 조언에 따라 류미는 양철 버킷에 혼잣말들을 쏟아내며 힘든 시간을 버텼고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 설 무렵 양철 버킷에 배양토를 눌러 담고 당근 씨앗을 키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근 싹이 흙을 밀어내고 얼굴을 내밀었을 때, 류미는 고통으로 가득 찼던 삶의 한 계절이 비로소 끝났음을 예감하고 다시 세상에 나갈 작은 용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절 류미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로가 되어 주었던 태정은 지금 음악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가 칩거 중인 상태이다. 태정이 그녀에게 내색하거나 속을 털어놓지 않았기에 류미는 왜 태정이 일순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려야 했는지 알 수 없다. 류미는 태정에게 그 이유를 묻기 위해 대전행 열차에 올라탔고 이후의 그녀는 태정을 만나 태정이 왜 그토록 사랑하는 음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탓인데 그 시달림의 내용이 간단치는 않다.

45)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앞의 책, 22면.
46) 백낙청, 「시민문학론」, 앞의 책, 23면.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다고, 무언가를 바라고 접근해 그것을 요구하고는, 태정이 그 무언가를 줄 능력이 없거나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당신은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특권의식에 젖어 있다고 욕을 퍼붓고 사과하라고 요구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중략) 유독 당신에게 애정을 품어 주었는데, 당신이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고 그들은 말했다고 했다."47)

47) 윤이형, 「버킷」, 『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문학과지성사, 88~89면.


문제는 태정이 보기에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들이 "다들 너무 힘든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힘들고 괴롭고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가 태정으로 하여금 그 사람들의 말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태정의 고백에 이번에는 류미가 단호한 어투로 태정을 위로한다.


"그런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어요. 심리 조종자. 자신이 가진 약자성 하나를 무기로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들죠. 전혀 관계없는 일로 극도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남들을 나쁜 사람들로 만들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요. 그들이 약자라는 생각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방어를 할 수가 없어요. (중략) 그런 거, 선을 그어야 돼요. 방어를 하고 도망쳐야 한다고요. 안 그러면 영원히 끌려 다니면서 살게 돼요."48)

48) 윤이형, 「버킷」, 90~91면.


하지만 태정은 류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실제로 사람들은 고통을 근거로 가치판단을 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정말 극심한 고통이나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객관화라는 건 단순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 것을 요구하는 일이 맞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태정의 이런 말을 세상물정 모르는 나약한 말로 치부하는 류미는 이제 확실히 '자기부정'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 비해 "약자 중에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나쁜 줄 알고 끙끙 앓다가" 노래를 그만두어 버린 태정은 예전의 류미가 그랬듯 '자기부정'의 덫에 빠져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류미와 태정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주체의 형상과도 같다. '자기부정'을 극복한 듯 보이는 류미의 경우 타인을 신뢰하고 싶은 인간의 본연적인 마음을 '위선'으로 치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점에서 온전히 '자기부정' 상태에서 빠져나왔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자신의 태도가 옮음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발로임을 깨닫게 된 태정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기부정'의 질곡을 벗어날 하나의 계기를 배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연 '자기부정'의 심정에서 완벽하게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할까.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계기로서 '자기부정'이 요청되는 수많은 순간들이 존재하며 무엇보다 인간은 그 자신을 주체화하는 구조적인 힘에 속박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회의적이다. 대타자는 어디에나 있다. 과거에 그것은 이념이었고 오늘날 연대하려는 사람에게는 고통 받는 약자일 수도 있으며 그와 무관하려는 사람에게는 궁극의 쾌락일 수도 있다. 문제는 도저히 긍정할 수 없는 나를 서둘러 긍정하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49)

49) 윤이형, 「버킷」, 97면.


결말 부분에 나오는 태정의 말이 대책 없는 막막함이 아닌 실마리처럼 가벼운 희망으로 읽히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일러주는 삶의 지침보다 이제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작은 결단이 오히려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답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리라. 많은 경우 '자기부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혹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주체들로 인해 발생한다. 이때 중요한 건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순종의 경험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로부터 선을 긋고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만 살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결단의 순간에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주체의 결단에 맡겨 놓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테다. 그 주체의 고뇌와 번민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한 그들 주변에 서 있는 우리들의 책무 또한 무거워진다. "강하지도 못한데 못되지도 못한 태정 같은 사람들을 위선이나 허영 같은 말로 비난"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자기부정'의 심정에 정당하게 이끌리는 그들의 섬세한 윤리적 충동을 존중하면서, 긍정할 수 없는 스스로를 손쉽게 부정하지 않도록 자신의 옆을 내어주는 것. 나의 모자람을 당신의 모자람이 기댈 수 있는 처소로 내어주는 것. 긍정할 수 없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곁에 선 타인 역시 부정하지 않는 것.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들이 지닐 수 있는 관계의 윤리의 한 단면은 그런 게 아닐까. 윤이형이 다양한 '소심인(小心人)'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발신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4. 나가며

최근 작품들에 재현된 인물들을 통해 우리 이웃의 형상을 그려 보려는 이 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서 다룬 작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개성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는 한국 소설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며 여기서는 그 풍요로운 현실의 극히 일부만을 포착했을 따름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작품들을 통해 나는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 무엇이며 그 현실 속에서 인물들은 어떤 존재론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비록 작품과 현실을 투명하게 일치시키긴 어렵다 하더라도 작품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삶의 곤경과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 인물들이 개별적인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여러 대처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류진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적절한 자아연출의 과제를 부여받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조건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존재론적 분열은 언제든 오해되고 미끄러져 당혹스러운 실패의 막다른 국면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삶의 함정과도 맞닿아 있다. 한편 이주란의 인물들은 임계점에 도달한 생의 피로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그 한계 상황에서 작은 안식처로 도피해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사소하고 잔잔한 일상을 회복하는 일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이주란의 인물들이 가지는 단자성과 장류진의 인물이 지니는 페르소나적 사회성 사이에 윤이형이 제시하는 독특한 '소심인(小心人)'의 형상이 존재한다. '소심인'은 자주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에 시달리지만 그 부정과 혐오의 메커니즘은 오로지 자아에게 귀속된 것이 아님을, 어떤 자기부정과 자기혐오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적 기제에 의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윤이형의 소설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당당한 시민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때론 비겁하고 자주 나약하고 늘 소심한 주체로 살아간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을 조금씩 나은 것으로 바꿔 가는 힘은 '소심인'들의 섬세하고 예민한 의식과 실천으로부터 더욱 많은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대만에서 '소심(小心)'은 조심하고 유의하라는 경계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이제 더 많이 조심하고 더 세심하게 유의하려는 마음 없이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한영인

작가소개 / 한영인

문학평론가.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문장웹진 202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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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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