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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 작성일 2019-12-01
  • 조회수 2,715

[문학더하기(+)]



우리의 '살아 있음'에 대하여

― 에곤 실레의 자화상, 그리고 윤이형의 『작은마음동호회』 읽기



박신영




어느 날 문득 다가와 마음을 낚아채는 음악이 있다. 가슴 속의 무엇이 있어 저 낯선 선율에 이리 호응하는가. 〈빗방울 전주곡〉. 쇼팽 프렐류드 15번에 따라다니는 이 부제는 음이 일깨우는 내면의 울림을 언어로 형상화하려 애쓴 누군가의 흔적이다. 그러나 언어는 심연의 대상에 가닿지 못하고 겉돌 뿐이다.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엇, 그 미지(未知)의 얼굴을 찾아 어둠 속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
메를리-퐁티는 심연의 그 보이지 않는 얼굴을 향한 화가들의 지각행위, '봄(vision)'에 대해 이야기한다. 표면을 넘어 존재의 심층을 보고자 하는 화가의 열망이 절박해지면 그의 신들린(fascination) 응시는 마침내 존재의 속살에 가닿는다. 이때 화가의 손은 화폭 위에 그 존재를 '있게' 한다.1) 에곤 실레는 존재를 향한 집요한 시선을 거울에 비친 자기 형상에 던진다. 자기 내부의,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은 그의 평생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28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하며 그는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실레가 거울 속에서 이끌어내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자화상〉 속의 그는 앙상한 몸에 창백한 피부를 덮어쓴 채 어깨와 팔을 기형적으로 꺾고 있다. 근육과 관절의 부자연스러운 비틀림 속에 존재를 둘러싼 표면과 불화한 이, 외피를 뚫고 나오려는 이가 있다. 그리하여 실레의 자화상에는 옷을 벗고, 육체의 살을 벗고, 스스로 존경해 마지않던 클림트의 화법마저 걷어내어 저를 덮고 있는 그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존재의 열망이 분출한다.

1) 예전에 좋아했던 아이돌을 일컫는다.(···) 메를로-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293~303쪽.



에곤 실레, <벌거벗은 자화상(Self-Portrait Standing)>, 1910, 55.8×36.9㎝, 알베르티나, 빈(좌) 에곤 실레, <에로스(Self-Portrait masturbating>, 1911, 55.9×45.7㎝, 개인소장(우)

에곤 실레, <벌거벗은 자화상(Self-Portrait Standing)>, 1910, 55.8×36.9㎝, 알베르티나, 빈(좌)
에곤 실레, <에로스(Self-Portrait masturbating>, 1911, 55.9×45.7㎝, 개인소장(우)



한 점 한 점 자화상이 완성될 때마다 거울에 비친 형상, 그 내부의 존재들이 선과 색의 형상을 입고 드러난다. 실레가 화폭에 이끌어낸 그 존재는 다시금 자기 존재의 밑바닥까지 가닿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겁다. 성기를 드러낸 채 자위를 하며 화면 밖을 응시하는 〈에로스〉의 실레가 그렇다. 위반의 포즈로 원초적 육체를 드러낸 이 자의 시선은 금기를 향한다. 인간의 혼을, 예술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계를 넘어서 시선은 제 존재의 근원을 향한다. 무채색의 화폭 위에 홀로 발기된 성기는 사회의 시간을 거스르고, 언어습득 이전의 기억을 거슬러 제 잉태를 낳은 교접의 순간까지 치받고 올라간다. 그곳에 제 존재의 근원이자 금기의 원형인 부모가 있다. 그리하여 실레의 자화상은 어둠 속에 파묻힌 자기 존재를 낳고자 하는 충동, 존재론적 발기로 충만하다.
존재를 향한 화가의 열기는 극점을 치달아 자아를 집어삼키는 타나토스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자기 존재의 드러냄이 이토록 절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자입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자입니다."2) 그에게 그림은 자기를 '있게' 하는 행위이다. 자화상은 제 안의 수많은 존재들, 무(無)로 존재했던 그들의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존재를 화폭 위로 이끌어내는 행위, 그 집요한 삶의 자세는 예술가 실레의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2) 에곤 실레, 「아르투어 뢰슬러에게 보낸 답장」, 1911년, 장루이 가유맹, 『에곤 실레』, 박은영 역, ㈜시공사, 2010. 137쪽.


*
윤이형의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2019)는 실레가 그토록 매달렸던 살아 있음에 대한 열망을 이어 가고 있다. 소설은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 존재에게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가 묻는다. 인물들은 그들 언어로써, 삶으로써 답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윤이형의 소설은 실레가 수면 위로 이끌어내었던 존재, 세상의 언어가 기입되기 이전의 그 존재가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서는 모습을 완성해 낸다.
마지막 수록작, 「역사」에 이르러 주체는 마침내 최종 발화를 내뱉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352) 살아 있음에 대한 이 선언은 소설집이 품고 있는 열한 개 서사의 궤적들을 요약한다. 그 말에는 발화 주체의 죽음의 시간이 녹아 있고, 끝내 죽어지지 않는 존재의 비명을 견디던 순간이 있으며, 그 죽음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온 역사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서사의 출발점은 자기 존재의 죽음을 자각하는 자로부터 시작된다.
소설은 먼저 우리가 살기 위해 애써 온 순간들이 살아 있는 시간이 맞는지 묻는다. 물음을 품고 「작은마음동호회」의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로 형성된 가족집단 속에서의 자신을 응시하고 「승혜와 미오」의 승혜는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 모성 충동을 느끼는 자신을 응시한다.


나는, 이 세상에 내가 없는 느낌이야. 진짜 내 몸이 없고, 몸 없이…… 시커먼 석유 같은 데 푹 절여진 무겁고 이상한 껍데기를 쓰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 같고, 그게 매일이고, 그렇게 산 지 삼십 년이 넘었어. 삼십칠 년이야.3)

3) 윤이형, 「마흔셋」, 『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 65쪽.


그들이 목격하는 것은 무(無)이기를 요구받는 자기 존재이다. 저 어둠 속에서 그 존재는 끝내 죽어지지 않고, 세상의 소리에 감응하는 떨림으로 저의 있음을 알려 왔다. 남성 정체성을 숨기며 평생을 살아왔던 「마흔셋」의 재윤은 이제 제 속의 존재와 마주 선다. 세상의 언어 아래 억압된 채 형상으로 드러나지 못했던 느낌들, 스스로에게조차 죽음을 강요받았던 뒤척임이 살아 있는 존재의 몸부림으로 조명된다. 이제 깊숙한 심연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그들은 비정상과 미성숙의 증거라는 이름을 벗고 어떤 해명도 필요치 않은 자기 존재로 부름 받는다.
윤이형의 인물들은 가려졌던 존재의 현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죽음으로 명명하고, 이제 '살기'를 결심한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세계 위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 윤이형의 인물들에게는 이것이 진정 살아 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12) 살아 있음으로 살기 위해 그들은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작은마음동호회 여성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책을 쓰고, 재윤은 "나는 남자로 살아야겠"(64)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언어로 자기 존재를 세상에 일으켜 세운다.
세계를 향한 존재의 선포,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들이 선언한 존재 양태는 이제 그들 삶의 서사에서 지배적 플롯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그들 생에 일어날 사건과 행위를 선별한다.4) 그리하여 「작은마음동호회」 여성들은 미루었던 집회에 나감으로써 정치적 인간으로 살아가고, 「마흔셋」의 재윤은 FTM(female-to-male) 전환 시술 절차를 진행하며 실존적 육체를 거머쥔다. 이제 그들 앞에는 이전과 다른 삶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지금 그들은 그들 삶의 주인공이며 창조자이다.

4) 심리치유의 분과인 이야기치유 담론에서는 삶을 이야기 창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주체가 선택한 가치관은 그 삶의 핵심 플롯으로 작동하여 인물과 사건을 선별하여 삶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구성해 간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를 앓는 이, 자기 삶의 가치관을 수정함으로써 자기 삶을 창조할 수 있다. - 앨리스 모건, 『이야기치료란 무엇인가?』, 고미영 역, 청목출판, 2004. 24~32쪽 참고.


*
리쾨르는 삶의 창조로서 텍스트 읽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예술을 낳는다면, 예술에 대한 독자의 해석은 독자의 세계를 구축한다.5) 세계를 읽어내는 자에 의해 삶은 문학이 되고, 문학은 다시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작은모임동호회』의 연작소설, 「의심하는 용-하줄라프1」과 「용기사의 자격-하줄라프2」는 자기 실존을 탐구하는 자의 세계 읽기를 그려 간다. 읽기 행위 속에서 세계는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가 되고, 해석된 세계는 다시 창조의 토대가 된다.
하줄라프 시리즈의 소설적 현실에는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 있다. 그들은 전쟁의 도시 하줄라프를 상상함으로써 고통을 치유하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의심하는 용-하줄라프1」은 허구적 세계인 하줄라프의 등장인물, 갈과 이파의 실존적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5) 폴 리쾨르, 『폴 리쾨르, 비판과 혁신』, 변광배, 전종윤 역, 그린비, 2013. 319쪽.


용들의 전쟁이 인간들의 창작품이라 한들, 그들 자신의 전쟁보다 어떤 면에선가 나아지기 위해 벌인 일이라 한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죽는 생명들이, 아무런 존중 없이 바스러지는 존재들이 있었다.6)

6) 윤이형, 앞의 책, 「의심하는 용-하줄라프1」, 225쪽.


고민의 핵심은 타자의 목적을 위해 만든 서사 속에서 피조물인 자신은 허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세계 질서를 섭리로 받아들여 삶의 전투에 투신하는 삶, 이것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가. 세계를 의심하는 "반사회적 생각"(203)이라는 내부 검열자의 비난은 되레 그들 내부에 깨어 있는 의식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소설은 세계의 절대성을 의심하고 자기존재의 의미를 묻는 용, 갈과 이파에게 실존의 자격을 부여한다.
실존적 인물에게 세계는 절대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다. 갈에게 해석되는 하줄라프는 현실의 전쟁을 모방한 거울이다. 무한반복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울과 "다른 방식"(203)의 재현이 필요하다. 하줄라프의 전쟁을 약한 인간들의 고통이 낳은 세계로 해석하는 이파가 그것을 해낸다. 타인의 고통을 읽어내는 그는 하줄라프로부터 평화의 도시, 팔루자를 재형상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타자의 눈이 아닌, 스스로의 시선으로 세계를 읽어내자 피조물이었던 존재는 한 세계의 창조자가 된다.
이야기는 전승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두 번째 연작소설, 「용기사의 자격-하줄라프2」는 이파가 구상한 팔루자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와 삶으로 창조되는 과정을 그린다.


전쟁이 없는 팔루자를 상상하고 설계한 것은 이파였고, 소녀들을 그곳으로 넘어오게 해주고 진짜 사람이 되어 700살 넘게 살도록 해준 것은 친구였던 갈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그것을 기억하며 그녀들이 했던 후회였지요.7)

7) 윤이형, 앞의 책, 「용기사의 자격-하줄라프2」, 254쪽.


다시 전승되는 이야기 속의 팔루자는 우월한 이가 혼자 창조한 도시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이전 세계 속에서 실존을 찾기 위해 번민하던 갈의 고통과 그 고통을 나누던 이들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자기 본래의 존재를 찾아 나서는 삶의 자세와 고통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꾼의 재해석이자 그의 신념이다. 원본 이야기의 청자였던 그는 해석을 통해 이야기의 창조자가 된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253) 이야기꾼은 제 존재 의미를 이야기 전달에 둔다. 이때 이야기 전달이라 함은 원본 이야기의 재해석과 새 이야기의 창조와 다름 아니다. 그것은 윤이형 소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적 현실에서 하줄라프 서사를, 그리고 다시 팔루자 서사를 이끌어낸 소설의 시선은 이야기를 이어받을 다음 청(독)자를 향한다. 이 모든 서사는 소설 내부의 청자들을 넘어 소설 바깥에 선 독자에게로 흘러든다.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해석되고, 어떻게 창조될 것인가.


*
이야기는 고통에서 시작된다. 심연 어딘가에 있는 고통을 지각하는 자, 그 고통을 오롯이 앓는 자의 가슴 속에서 이야기가 잉태된다. 그의 시선 속에서 불가항력적 세계는 바꾸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낸다. 창조된 이야기가 완벽하지 않다 해도 괜찮다. 그 미완의 이야기는 다시 해석되어 새 삶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 이야기가 가로막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수록작, 「역사」의 화자는 그의 '살아 있음'을 용인하지 않는 이에 의해 침묵의 강에 빠져 있다. 강요된 침묵이 숨통을 막아 올 때에 노래가 울려 퍼진다.


햐아-햐아-헤롬-
우레 같은 노랫소리가 하늘과 강물을 두들기며 섞어놓는다. 노래. 우리의 노래다.8)

8) 위의 책 「역사」, 351쪽.


침묵의 어둠 속에서 그의 무수한 존재들이 부르는 노래, 저의 '살아 있음'을 일깨우는 선율이다. 어둠 속에서 가만한 떨림을 전하는 존재. 세상의 언어가 기입되기 이전의 시간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가 거기 있다.
















최선영

작가소개 / 박신영

2019년 《세계일보》 문학비평 신춘문예 당선.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문장웹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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