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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과 시점

  • 작성일 2019-05-01
  • 조회수 2,860

[문학더하기+(소설)]




증언과 시점

-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현대문학, 2018)에 대하여




김형중





1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을 읽다 보면 이른바 '정신증'에 관한 흥미로운 임상 사례 하나를 만나게 된다.


"로제는 그의 첫 분석가와 2년 동안이나, 거의 기계적으로 분석에 참여했다. 그는 분석가에게 산더미 같은 글을 가져왔다. 그는 자기가 꾼 꿈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타이프로 쳤으며, 그것들을 암기해서 분석 때마다 외워댔다(이런 식의 '문학적인' 다산은 정신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분석가는 로제의 글들에 관심을 가졌고 로제에게 오랫동안 그 꿈들을 외워 보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제가 자신이 '장미로 뒤덮여 있는' 금빛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꿈을 외우자 분석가는 이것이 현재의 삶을 보여주는 이미지일 거라고 암시했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문제 삼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그것이 불러일으킨 효과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것은 로제에게 정신병의 발작을 가져왔다. 분석가는 해석을 통해서 로제에게 그가 모르고 있던 꿈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이때까지 로제는 꿈이 단지 즐겁고 멋진 이미지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분석가는 이 개입을 통해, 환자가 자기 생각과 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증인의 위치가 아니라 타자의 위치, 다시 말해 의미가 결정되는 장소에 자리 잡으려 했다."(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민음사, 2002, pp.182~183. 강조는 인용자)


로제는 언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항상 '쓰기'를 좋아했던 대학생 청년이었다. 그는 말을 하려는 매 순간 '단어들이 사물을 비켜 가는 듯한 느낌'에 시달렸는데, 오로지 글을 쓸 때만 언어(기표)와 사물(기의)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고정되는 듯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분석가는 몰랐겠지만, 꿈을 기록하고 외우는 자, 말과 사물의 일상적인 관계를 파기하고 다른 '기의/기표'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문학적 다산증'에 빠진 자, 말하자면 그는 시인이었다. 그를 담당했던 분석가가 한 일은 그러므로 시를 죽이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증인"의 위치에서 그의 말들을 들어주고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의미가 결정되는 장소" 곧 "타자의 위치"에서 그의 발화에 개입함으로써 말이다. 로제는 발작을 일으켰고, 그렇게 그의 '말'도 목숨을 잃었다.



2


증언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작가가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점도 그와 유사한 상황일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길원옥 여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후기에서, 작가는 "할머니께서는 저를 소설가가 아닌 선생님으로 알고 계십니다."라고 쓴다. 흔히 취재 혹은 인터뷰를 통해 생산되기 마련인 증언 소설의 경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일종의 '전이'가 일어나는 일은 다반사다. 많이 배우지 못했고, 이른바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고통을 겪고도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살아온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주러 온 작가는 '선생님'이다. 즉 흔히 분석가가 차지하곤(해야) 한다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자'의 위치가 작가의 위치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김숨은 후기에 이런 문장들도 남겼다. "방금 당신이 드신 과일도 기억 못 하시는 할머니와의 대화는 그런데 처음부터 제게 특별한 즐거움과 문학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영혼과 영혼이 야생의 들판에서 만나 이중창을 부르는 것 같은 황홀함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작가가 길원옥 할머니의 말들에 '의미를 결정하는 장소'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할머니는 부단히 말했다. 그 결과물이 시 같기도 하고, 독백 같기도 하고, 증언 녹취록 같기도 하고, 잠언록 같기도 한, 유례없는 증언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3


타인의 압도적인 고통은 흔히 '재현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전되곤 한다(임철우와 김숨 이전에 한국 문학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전은 감히 상상해 볼 수 없는 고통 앞에서의 미학적 망설임, 혹은 게으름의 다른 말이다.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오윤성 옮김, 레베카, 2017) 2장에서 위베르만이 격렬하게 질타하는 것도 바로 그런 태도다. 그는 말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대적 표현들 ― 대체로 호의적인, 언뜻 보아 철학적인, 실제로는 게으른 ― 로 아우슈비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의 그 불안정한 자료총체에, 즉 그 '이미지들의 잔여'에 시선을 한 번 두는 것으로도 충분하다"(p.43). 아마도 증언과 재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참담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아우슈비츠, 광주, 세월호). 그러나 그것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불가결하다. 따라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다시 말해서 결함적으로) 가능하다."(p.63)



4


모든 것을 무릅쓴 결함적 재현, 불가능해 보이지만 불가결하기도 한 재현, 그러나 그러한 재현에도 '부주의'의 위험은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발견된 네 장의 사진이 이후에 변형되는 과정을 통해 위베르만이 경고하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 부주의다. '공포의 성상 만들기'와 '이미지를 재배치하기'.


그림 1. 미상(아우슈비츠 존더코만도의 일원)



'그림 1'은 1944년 8월경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유대인 시체처리반)의 일원이 찍은 '가스실로 몰이당하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촬영자가 숨어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찍은 사진'이다. 그러다 보니 앵글은 사각이고 형체는 불분명하다. '그림 2'는 2001년에 발간된 한 책자에서 이 사진이 어떤 방식으로 보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2 . '그림 1'의 세부와 그 수정 : <캠프의 기억> 2001.



"첫 번째 쇼트에서의 두 여성의 몸과 얼굴은 수정되었고 얼굴 하나가 발명되었고 젖가슴은 더 높이 올려지기까지 했다"(위베르만, p.58). 희생자의 성상을 만들기 위해 증언에 가해진 조작의 사례라 하겠다. '그림 3' 역시 같은 날 찍힌 시체들의 화장 장면이다. 목숨을 건 위험 속에서 어딘가 건물의 어둠 속에 자리를 잡고 급하게 셔터를 누른 흔적이 역력하다. 말하자면 찍는 순간 촬영자의 '모든 것을 무릅씀'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3 . 미상(아우슈비츠 존더코만도의 일원)



'그림 4'는 1993년에 발간된 한 책자에서 '그림 3'의 정보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배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유효한 정보를 위해 당시 촬영 상황 중 불필요한 부분을 배제하고, 프레임을 절단한 후 비극적 장면만 극대화하는 식으로 보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을 재배치함으로써, 동시에 형식적이고 역사적이고 윤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조작이 범해진다"(위베르만, p.61).




5


소설과 사진이 아무리 다른 매체를 다루는 상이한 장르의 예술이라 하더라도, 증언을 기록하는 일에 관한 한 저와 같은 '부주의'를 피해 가는 것은 공히 핵심적이다. 말하자면 로제의 말을 죽여 버린 분석가의 위치에 서지 않는 것 말이다. 김숨은 저와 같은 부주의를 어떻게 피해 갔을까? 희생자의 성상을 만들지도 않고, 기억 자료를 재배치해 스펙터클을 고안해 내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우선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 그것도 '화자 없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 그 답인 듯하다. 증언에 있어 삼인칭 전지적 태도는 사태의 총체적 재현(리얼리즘! 그러나 어떻게?)을 요구하고 또 강요한다. 작가는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자' 곧 분석가가 된다. 삼인칭 제한전지적 태도는 타인, 곧 증언자의 고통에 대해 오만하다(누가 있어 삼인칭으로 표상된 한 무젤만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레비나스나 데리다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오만이다. 삼인칭 관찰자의 태도는 타인의 고통의 표면을 더듬을 뿐이다. 고통은 묘사되지만 여전히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서만 묘사된다. 이인칭의 태도도 있겠으나, 그것은 일인칭 제한전지적 태도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너(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화자(나!)는 실은 타인을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나르시시스트일 경우가 허다하다. 상상계에는 윤리가 없다. 일인칭 주인공의 태도가 증언에 적합한 경우는 증언자 자신이 화자일 경우(가령 프리모 레비)다. 그러나 그럴 때 증언은 일종의 고백록이나 자서전 형식이 된다. 결국 일인칭 관찰자의 태도. 그것도 화자가 증언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말하자면 부재로서만 등장하는 시점이 위베르만이 말한 증언의 부주의를 피할 수 있는 소설적 장치라고 김숨은 판단한 듯하다. 그런 시점이 여기 있다.


(벽을 등지고 침대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엄마······.
엄마······ 나 좀 도와줘······.
(머리맡 둥근 손거울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주황색 빗, 성경책, 휴대전화, 분홍색 천으로 만든 동전지갑, 플라스틱 물통이 있다)
엄마······ 엄마······ 나 힘들어······.(pp.38~39)


지금 시간이 열시 35분.
가지 마······.
가지 마······.
그냥 내 등에 붙어서 자······.
뼈아픈 일······.
하고 싶은 말이 안 나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하려니까 안 나와······ 왜 그런지 모르겠어.(p.116)


화자(인터뷰어, 작가)가 증언자(인터뷰이, 인물)의 등에 붙어 잔다. 화자는 증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히(그러나 분석적인 눈이 아니라 한없는 애정의 눈으로) 들여다보되 소설 끝까지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카메라(invisible camera), 그것도 전 장면을 핸드헬드로 근접 촬영한 카메라의 시점. 그러자 그 부재의 자리에서, 증언자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말한다. 물론 그 부재의 자리에 초대받는 것은 독자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길원옥 할머니가 겪은 말 못 할 고통은 그 자체로 재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재현될 수 없는 고통을 우리는 화자가 마련해 놓은 부재의 자리에서 '느낀다'. 그 고통을 지켜보고 그 고통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무엇보다 그 고통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결국 '말'을 함으로써 한 장엄한 삶을 완성한 이의 자부를 목격한다. 로제의 발작과 정확히 반대되는 극에서 발화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들은 이렇다.


말을 하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어.(p.128)


"원옥아, 그 고통 속에서 잘 넘어왔다."
"원옥아, 고맙다."(p.132)














작가소개 / 김형중

문학평론가·조선대학교 교수.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당선.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산문집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등. 2008년 소천비평문학상·2017년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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