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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

  • 작성일 2018-11-01
  • 조회수 2,268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21세기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

- 2018년을 통해 본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




전영규





1. 21세기의 변종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숙고할까요? 소비에트적 세기, 전체주의적 세기, 자유주의적 세기의 교차에 대하여 개념에 의거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한 유형의 단위(공산주의적 영웅 행위, 근원적 악, 승리를 거둔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일은 세기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숙고하려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실제로 우리 철학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기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기 속에서 사유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사유의 단순한 전개가 아닌 이 세기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사유하는 걸까요? 전달된 사유가 아닌 사유란 무엇일까요?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과 더불어서, 더 나아가 이 세기 속에는 과연 무엇이 사유되었던 걸까요?


-알랭 바디우, 『세기』 중에서1)

1) 알랭 바디우, 박정태 옮김, 『세기』, 이학사, 2014, 14-15쪽.



그렇다면 21세기를 맞이한 한국문학에서는 과연 무엇이 사유되고 있는 것일까? 새천년이 된지도 18년이 흐른 지금, 한국문학은 무엇을 사유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을 들여다보는 일. 바로 이것이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을 역사적 단위는 세기라는 범주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 바디우는 세기와 관련한 인간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세기라는 구句가, 경험적인 단순한 연대기적 순서 매기기를 넘어서, 과연 세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위해 어떤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2) 사유는 곧 의문이다. 그의 말은 세기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주체화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여기서 '세기 속에서 일어났던 것'들을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이미 우리는 최근까지 "공산주의적 영웅행위, 근원적 악, 승리를 거둔 민주주의"를 연상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다. 이제 인간은 비극적인 전쟁이나 사고의 형태처럼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벌어진 이후에서야만 이곳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동물적 인본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근원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에서 세기를 향한 의문이 시작된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을 도래하게 만드는 사유에 대해. 그러나 '그 무엇'은 단지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어쩌면 세기를 향한 인간의 사유(의문)는 도래할 미래의 희망과도 같은 '불확실한 가능성의 가치'를 찾아내는 건지도 모른다. 그 사유의 시작이 인간이 더 이상 겪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사고나 사건이 계기가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도래할, 혹은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한 가능성의 가치를 믿는 일.
세상의 종말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사태가 지속되는 풍경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세기에 관한 인간의 의문이 시작된다. 바디우는 브레히트의 말을 빌려 새로운 것이 도래하게 되는 순간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은 "모든 사유에 대하여 가장 참혹한 검열이 지배하게 될 때. 그러나 더 이상 사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검열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될 때"3)다. 후자의경우가 종말의 풍경에 가까워 보인다. 다행히 우리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을 연상하게 하는 첫 번째의 경우를 인지함으로써 최악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새로운 것이 도래하는 것, 그것은 과연 언제일까?" 에 대한 의문에서 만들어진 <세기에 관한 전형적 물음>은 종말에 임박한 세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더 이상 역사가 지속되지 않는, 무기력한 풍경이기에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계기가 되는 순간들.
"단어와 개념이 자기들이 가리키는 사물, 행위, 관계와 더 이상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단어와 개념을 바꾸지 않아도 사물, 행위, 관계를 바꿀 수 있게 되거나, 또는 사물, 행위, 관계를 변화 없이 그대로 두고서도 단어를 바꿀 수 있게 될 때.4)" 브레히트의 위와 같은 구절을 보고 바디우는 종말 직전에 다다른 예술의 징후를 감지해낸다. 그는 단어의 명명하는 능력이 타격을 입었으며, 단어와 사물의 관계가 끊기는 사태를 언어의 와해라는 해체의 징후라고 진단했고, 그 원인 중 하나로 저널리즘 언어의 지배를 예로 들었다. 이는 오늘날의, 인간을 교묘하게 지배하는 빅데이터의 폐해를 떠올리게 한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명명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일. 언어가 지닌 고유의 힘마저도 믿지 못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는 일. 문학의 종언은 언어가 지닌 고유의 힘마저도 잃게 되는 사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지닌 힘을 믿는 일. 그와 함께 보이지 않는 대상을 명명하는 행위를 지속하는 일. 이것이 문학의 종언에 대처하는 시인들의 의무이자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이다.
문학은 세기와 관련한 사유를 형상화하는 가장 매력적인 도구 중 하나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문학은 당대의 세기 속에서 사유되었던, 혹은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부터 등장할 그들은 2010년대와 앞으로의 2020년대라는 한국시단이 주무대가 될 자들이다. 그들은 이전에는 가능할 수 없던 역사의 사건이나, 혹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적인 사고들을 목격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2010년대 이후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사고들은, 한편으로는 축복이거나 저주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 그들의 사유가 어떤 방식으로 시화(詩化)되었는지에 관해 살펴보는 일. 2020년대에 가까워지는 2018년의 한국 시단은 소위 조용한 과도기의 상태에 들어서고 있다. 거칠게 나누어본다면, 2018년의 시단은 1980년산産(들이 주를 이루는) 2010년대와 1990년산産(들이 주를 이루는) 2020년 사이에서 혼종되어 있다. 1970년산 2000년대 시단에서 흥미롭게 등장했던 신종은 소위 미래파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이후 2010년대와 다가올 2020년대에 등장하게 될 그들의 종(種)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지금부터 그들의 시를 통해 21세기 문학에서 발견되는 변종들의 탄생을 확인해본다.

2) 알랭 바디우, 위의 책, 19쪽.
3) 알랭 바디우, 앞의 책, 90쪽.
4) 알랭 바디우, 앞의 책, 89쪽.



2. 명랑한 세기말적 상상력의 구현: 문보영과 배수연5)


레베카 소울닛은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언제나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곧잘 상상하는데, 그런 종말을 그려보는 것은 종말이 없는 세상에서 이어지는 변화의 기이한 곁감을 그려보는 것보다 휠씬 쉽다.6)" 종말을 상상하는 건 쉽다. 그러나 종말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어럽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차라리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종말이 나을 만큼 '종말이 없는 세상'을 대변하는 현실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너무 참혹하거나. 아니면 더 나아지리라는 미래를 향한 기약 없는 희망고문에 지쳐있거나. 그렇다면 종말이 없는 세상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아무리 위악을 가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곳. "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는,"(「오리털파카신」) 무력한 낙원 같은 곳. 어디서 시작하는지도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는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 있는 곳. 그곳에서 삶에도 죽음에도 이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
시인은 종말이 없는 무력한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자들이다. "오늘따라 자신이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고 느껴진다면, 원래부터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하세요." 오늘도 쓸데없이 슬픈 존재들이 어김없이 슬퍼지려 하는 순간, 시인은 이런 말로 위로하지 않을까. "웃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웃는 법을 가르칠 때 '끝'이라는 발음을 알려주는 일."(「끝」) 자신이 쓸모없이 슬픈 존재라는 분명한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쓸모없이 슬픈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비관주의로 무장해야지만이 버틸 수 있는 세상을 향해 긍정적인 비관론자가 되는 일.
문보영이 지닌 감성을 여기서 시작한다. 시인이 지닌 명랑한 기운이 세상을 밝힌다. 신이 사라진 스산하고 암울한 세상을 사는 자들이라고 해서 마냥 우울할 필요는 없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경험하는 즐거운 기분마저 빼앗아 갈 권리는 없다. 애초부터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들의 유일한 유희마저 빼앗아간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쓸모없이 슬퍼서 웃픈 존재라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문보영의 세계에서 '긍정적인 비관론자'는 모순어법이 아니다. 시인의 명랑한 기운이 한낱 유희에만 그치지 않는 건 이점 때문이다. 비관조차 즐겁게 긍정하는 자처럼, 시인이 구현하는 세상의 풍경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 안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존재의 슬픔도 존재가 감당할 만큼 주어진다.
"운 적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뚝 그친 모자다(중략) 모자를 쓴다 나타난다 어둡고 큰 땅 그것은 모자가 아는 만큼의 세계다 모자의 슬픔은 테두리가 있으므로 더 커지지 못한다 모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은 채 슬퍼하고 있다"(「모자」 일부) 모자의 슬픔이 더 커지지 못하게 모자의 테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을 부여하는 시인의 방식이다. "초현실주의는 불가능하며/ 현실이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프로타주」) 쓸모없는 존재가 살아남으려면 쓸모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세계가 바라는 존재의 쓸모를 무력화시키는 일. 신이 사라진 암울한 세상을 황홀한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한다. 그것이 세계가 바라는 쓸모의 기준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자 쓸모없는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방식이다.

5) 여기에서 다룰 문보영과 배수연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7) 배수연, 『조이와의 키스』. (민음사, 2018) 본문에서 시를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제목만 표기한다. 이 중 문보영의 글은 졸고, 「신이 사라진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 신철규, 문보영, 김연아의 시」(『서정시학』, 2018년 봄호) 중 「쓸모없이 슬픈 존재들의 유쾌한 생존전략: 문보영의 시」의 부분과 맥을 같이 한다.
6) 리베커 소울닛, 설준규 옮김, 『어둠 속의 희망』, 2006, 63쪽.


지구는 우주를 믿을 수 없었다


우주를 보려면 우주보다 커지거나
우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화장실에서 X가 본 낙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왜 한 달에 한 번씩 엘리베이터에 갇히죠? 갇히는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이죠?>


우주의 입장에서 지구는
맞추어지지 못한 채
침대 아래 굴러다니는
잃어버린 큐브였고


지구는 돌았다
열심히
열심히
제 몸뚱어리를
돌렸다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아야 했다


-문보영, 「역사와 전쟁」 전문



언어로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는 일. 시인이 유일하게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이것이다. 시인은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파리의 가능한 여름」)을 택한다. 시인이 조달받는 언어 속에 세계의 비밀이 담겨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마치 마트로시카 인형을 닮아 있다. "하나의 벽은 다른 벽을 해명하는 데 일생을 걸지만. 벽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아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은 벽. 벽은 의도가 없고. 벽은 간이 붓고 싶고. 벽은 늘 위독해. 벽은 믿을 수 있을 만큼 아프고 믿을 수 있을 만큼 헤어진다. 벽은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다. 벽이 벽을 실토하는 사이 벽은 어디로 갔나? 벽은 벽을 벗어도 벽이 되었다."(「벽」 일부)
끝없이 반으로 갈라져 나오는 똑같은 모양의 무수한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존재는 이곳에 살지만 이곳이 이곳인 줄 모르는 이곳 안의 자들이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벗어나도 세계에 속한 나처럼, 우리를 벗어난 세계라 할지라도 세계는 여전히 세계다. 이곳의 비밀을 알게 된 시인은 또 다시 참으로 쓸모 있는 시쓰기를 이어나간다. 어느 날 지구가 마침표가 되었을 때, 시인은 얼른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이어 쓸 것이다. "우산 대신 세계를 접었네/ 그게 좋아서 우리는/ 계속 계속 접네."(「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 중에서)
쓸모없이 슬픈 존재들의 생존전략을 유쾌하게 구현하는 것이 문보영의 방식이었다면, 배수연은 삭막한 세기말을 사는 존재들의 풍경을 예민하고 우아한 몽상으로 구현한다. "밤마다/ 우주 끝에서 보내온 답장을 해독하러/ 침대 주머니 안으로 잘라 넣은 너의/ 예민하고 우아한 잠."(「주머니 없는 외투」) 우주로부터 끊임없이 현실을 조달받는 첫 번째 시인처럼, 두 번째 시인 배수연도 밤마다 우주 끝에서 보내온 답장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독한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이전에,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쓸모없는 존재라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조이라고 부르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시인은 말한다. "너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쓰다 밤새 흰 뿔이 생겼다./이 예쁜 봉우리 좀 봐!/ 너는 길고 뾰족하게 입을 맞춘다."(「시인의 말」 중에서) '나'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너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은 반대로 '꼭 주고 싶은 것들'일 것이다. 너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들은,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과 비례한다. 너에게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많아질수록,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다.그와 동시에, 당신에게 그것마저도 주지 못한다는 나의 무력감을 실감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스스로의 무력감에 휩싸이는 절망의 지점에서, 시인은 그 절망을 환한 기쁨(joy)으로 길러낸다. 사랑하는 너를 향한 나의 절망은 어느 순간 "예쁜 봉오리"로 탄생한다. 그러자 너는 마치 사랑스럽게 내가 발생해 낸 그 예쁜 봉오리에 입을 맞춘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아직 잊지 않았다면/ 매일매일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청혼」) 사랑하는 너를 향해 시인이 주고 싶은 선물은 시집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환한 기쁨(joy)이 아니었을까.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당신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무한한 기쁨의 시(詩)를 매일매일 헌사할 것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너를 향한 나의 절망은 기쁨의 언어가 되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삭막하고 우울한 이곳을 환하게 비춰줄 것이다. 시인에게 시는 매번 성의를 다해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다.7) 너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라는 존재를 모두에게 알리는 일. 나의 언어로 인해 너라는 존재의 가치가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나는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줘도, 나를 아무리 비워도 허전하지 않을 것이다.

7) 「사랑스럽고 강하다! 배수연 시인 편」, 『문학선』, 2018년 여름호, 280쪽.



여름의 집, 여름의 집
대문을 열면
코끼리 울음을 길게 우는 푸른 경첩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식탁의 초들이 흰 여우처럼 목을 길게 빼는
아아
여름의 밤, 여름의 밤


아브라함의 별처럼 미래의 편지들은 모두
너를 위해 쓰이고
우리는 자손이 없어도 행복하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줄게
아무리 비워도 허전하지 않고
나를 다 받고도 너는
나를 닮진 않지
너는 결국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를 숨겨 놓았지만
우우우우


원숭이들은
밤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을 알까
원숭이들은 서로의 목덜미에
불을 가져다 대는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


여름밤의 폭죽을 봐
울음이 결국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을
별들은 폭죽에 눈이 멀어
검은 화약 덩어리가 되었어
너의 목에 떨어진 불덩이를
장마는 처마에서 기다리고


나는 밤새 장마를 받아 적어
아무리 크게 읽어도
너는 너는 빗소리밖에 듣질 못하고


그래도 상관없지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줄게
여름의 더위와 부패 속에서
나뭇잎들은 잎맥을 열어
초록을 흘리는
여름의 집, 여름의 집


-배수연, 「여름의 집」 전문



나를 모두 비워 너에게 주는 시인의 언어는 "여름의 더위와 부패 속에서" "잎맥을 열어/ 초록을 흘리는"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된다. 싱그러운 초록, "코끼리 울음을 길게 우는 푸른 경첩," "여름밤의 폭죽"처럼 시인의 시에서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감들은 여기서 비롯한다. 시인의 언어는 마치 꿈을 꾸듯 예민하고 우아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을 구현한다. 그것이 막연한 몽상으로만 그치지 않는 건, "나를 다 받고도/너는 나를 닮진 않지"와 같은 구절처럼 나와 너를 구분하는 시인의 분명한 자의식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 당신을 위해, 언젠가 사라지게 될 이곳과 함께 몇 번이고 우아하게 소진되는 것을 반복하는 일. 이것이 시인이 해독한 무한한 기쁨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다.
시인은 자손이 없어도 행복한 우리가 사는 이곳을 아낌없이 사랑할 줄 아는 자다. "우리에게 슬픔이 있다면/ 짖지도 못해 모가지를 꺾고 죽는 일은 없을 거야."(「비숑큘러스」) 인간이 있기에 슬픔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슬픔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 사라지는 대상을 향한 명랑한 감수성이 존재를 구원한다. 오늘도 시인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지구라는 밤에 긴 성호를 그으며 시를 남긴다.



3. 투쟁하는 몰리나: 김현8)


마누엘 푸익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두 남자가 감옥 안에 갇혀 있다. 한 남자는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검거된 정치범 발렌틴이고, 다른 남자는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수감된 동성애자 몰리나다. 무료한 감옥 생활을 잊기 위해 몰리나는 자신이 본 영화 이야기들을 발렌틴에게 들려준다. 삶이 내게 준 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투쟁뿐이라고 주장하는 발렌틴은,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몰리나를 무책임한 몽상가라고 비난한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그들은 감옥이라는 공간 안에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현재의 순간만을 즐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극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 발렌틴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 몰리나. 그들은 범법자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하는 질서나 관습에 순응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을 일삼는 발렌틴이나, 단지 성(性)이 같을 뿐 '그'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 몰리나. 사는 동안 이유 없는 차별과 부당한 대가를 받아야 했던 그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의 가혹함과 삶의 무력감을 실감하며 그들은 알게 된다.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로가 닮아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2014년 첫 시집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을 시작으로 2018년 두 번째 시집 『입술을 열면』(창비)에 이르기까지. 김현의 시는 연인 발렌틴을 대신해 혁명에 가담하는 몰리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가 만약 죽지 않고 연인 발렌틴을 대신해 그의 혁명에 가담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앞의 두 시인들처럼 김현의 시에서도 세기말적 풍경을 소재로 하는 몇몇의 시편들이 등장한다. 세계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지구에 남아 연인을 기억하는 기계인간 이야기.(「최후의 얼룩얼룩」) 인간적인 오류가 감지되면 자동 폭파장치가 작동되도록 만들어진 미래의 로봇인간.(「어딘가의 시리우스」) 유효기간이 지난 안드로이드(기계인간)들을 폐기하기 위한 대형 화장로가 되어버린 미래의 지구.(「은하철도 구구구」) 앞의 두 시인들과는 달리 김현이 상상하는 세기말의 풍경은 명랑하거나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영화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 그림이나 사진 같은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기도 하고, 가독이 힘들만큼 무수한 각주가 나온다. 노골적인 포르노의 한 장면이 등장하거나, 멸망 직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기계인간들의 모습까지. 이처럼 그의 시는 시와 소설, 그림과 사진, SF와 포르노를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형식이나 내용을 파괴한 이전의 시들 중에서도 유독 김현의 시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남들과는 다른 시인의 성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게이들의 은어로 쓰이는 '글로리홀'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이미 시인의 시는 강력한 성적 상징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공중화장실 칸막이마다 뚫린 작은 구멍(글로리홀)처럼 몰래 이루어져야 하고, 금기시된 것들로 취급받는다. 시인의 언어는 "도망치듯 사라진 글로리홀의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늙은 베이비 호모」)에서부터 시작한다. 죄인처럼 쫓기듯 사랑하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그들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는 시인은 다짐한다.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이다. 나를 포함한 그들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 이는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포함해, 젠더에 구분을 두지 않는 양성성(혹은 무성성)에서 시작된 다양한 주체성의 형태들이 한국 시단에서 예전보다 많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한다. 몰리나를 상징하는 시인의 투쟁은 젠더와 신체, 나이나 지위, 인종이나 국적으로 이유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인권」) 이제 시인의 언어는 우리의 미래를 향한다. "여자는 생생하던 가슴을 자른다/ 가슴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다."(「가슴에 손을 얹고」)처럼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통념을 벗어나야지만이 인간이란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가 되고 싶은 사람과 여자가 되어서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열여섯 번째 날」)들처럼 선천적인 성(性)을 부정해야지만이 살 수 있는 '그들'이 있다. 그들을 향해 시인은 연대를 이루고자 한다. 인권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과 연대를 이루고자 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어느덧 "저 크고 무거운 시대의 정신"(「마르가리따」)을 외치는 것으로 나아간다.

8) 여기서 다룰 김현의 시집들은 다음과 같다.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본문에서 시를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제목만 표기한다. 이와 관련해 졸고, 「21세기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이야기: 김언과 김언의 시」 (『리토피아』, 2018년 여름호) 중 김현의 시편들을 다룬 글을 수정 및 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픈
시를 쓴다


모르긴 몰라도
빛이 묻는다


네 시의 정권은
나를 만나면서도
왜 영원히 어둡니?


나는 동성애자의 손목을 본다
사랑이 연약한 뼈라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빛에게 새끼처럼 매달린다
머리 쓰다듬어줘


끼 부리지 마
빛은 머리카락을 골고루 만져주고
밤이 되고 새들도
벌써 확정이라고 뜨는구나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으로 날아가 이름 없는 국가를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진실의 열쇠는 둘만이 아는 어둠에 있다

(중략)

잠 속에서도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고
역사의 힘일 수 있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민족해방과 조국통일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모든 거짓은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김현, 「빛은 사실이다」 일부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 몽상가 몰리나는, 언제부턴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 "입술은 행동할 수 있다."(「열여섯 번째 날」) "맞서라/ 전위여// 죽고 싶다고 말하지 말고/ 죽어라."(「빛의 교회」) "투쟁은 사회적인 동물이다."(「가슴에 손을 얹고」) 같은 구절처럼, 이전과는 다른 날카로워진 전언을 외칠 수 있는 시인의 용기는 그들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입술을 찾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같다."(「생명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사랑을 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인간이 외치는 구호(언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시인은 젠더와 신체, 나이나 지위, 인종이나 국적의 구분 없이도 나와 무관한 모든 이들과 연대를 이루며 살아갈 줄 아는 자다.
첫 시집의 첫머리에서 "이 세계는 죽음에 가까이 있다. 나에게 사랑은 가까운 것이다"라고 시인이 쓴 구절을 기억한다. 이제 시인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사건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 된다. 끝까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남는다.9) 이제 김현의 언어는 이름 없는 것들로 남겨질 당신과 그들, 그리고 이곳을 기록한다.

9) 김현 산문집, 『질문 있습니다』(서랍의날씨, 2018년), 191쪽의 한 구절 '문학의 언어는 가장 늦게 쓰이는 거구나. 문학을 한다는 사람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사건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끝까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구나.'에서 변용.



4. 사라질 미래를 향해 (역)진화하는 자의식: 양안다와 안희연10)


앞에서 세기 속에 무엇이 사유되었는지를 알아본다는 건, 세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주체화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세기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주체화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세계를 실감하는 나와 관련한다. 내가 인식하는 지금 이곳이라는 세계에 관해. 그것은 세계 속에 있는 나를 의식하는 일이다. 자아는 예전보다 더 다양해진 주체성의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그 말의 의미는 나라는 주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감지한다는 것과도 같다. 결국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세계를 이룬다. 이미 너무 많은 자아의 자유가 주어진 이곳에서 나(세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완벽하게 조율되지 않는 자아의 불완전한 속성처럼 세계도 마찬가지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내가 존재하기는 방식 혹은 내가 감지하는 수많은 세계에 관해. 내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나, 수많은 나에서 단 하나의 나를 의식하기를 반복하는 일.
세계와 나 사이를 조율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자의식은 변모한다. 시인의 언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를 의식하는 순간의 지점을 환기한다. 그 지점은 아름답다는 단어가 무의미할 정도로 쓸모없는 지점일 것이다. 시인에게 아름다움이란 인간에게 다가올 끔찍한 일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다. 여기서 끔찍한 일은 인간이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최후를 실감하는 일이다. 그 순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마치 "무엇도 판단하지 않고 새의 시체를 해부했을 때" 느끼는 "갑작스러운 공포"(「아주 조금 다정하게 혹은 이기적이게」, 『시와 사상』, 2017년 봄호 부분)처럼, 경악이나 죄의식, 절망이나 슬픔, 또는 사랑과 같은 감정들로 말이다. 아름다움이란 기존의 상태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데에서 오는 존재의 혼란이나 동요, 고통 같은 것이다.
양안다의 시는 아름다운 최후의 지점을 환기한다. 시인이 환기하는 지점은 "인간이 겨우 견딜 수 있는 끔찍한 것에 시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릴케의 아름다움과 닮아 있다. 시인은 아름다워지고 싶다. "미미(微微)한 것에서 미미(美美)한 것을 쓰"(「미미하거나 미미한: 당선소감」, 『현대문학』, 2014년 6월호)고자 하는 시인의 미어(美語)를 살펴본다. 그 지점으로 다가가는 시인의 동선이 긴 호흡의 문장들로 화려하게 늘어진다. 시인은 미지의 그 지점이 주는 불가항력을 향해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러자 시인의 언어는 "떨어지기 직전의 열대어와 마주치"며 끊임없이 "추락"(「물고기 비늘이 사실은 흉터였다면」)하고, 배고픔도, 현기증도 모른 채 "몇 번을 죽고 몇 개의 분노를 갖고 육체는 어디까지 한계를 겪었는지 의문이 멈추지 않는"(「미래학자의 방」) 사태를 겪는다. 그 지점이 주는 불가항력은 시인에게 고립과 단절의 사태를 안겨다주었다.고립과 단절을 통해 그곳을 향한 의문과 부정을 반복하는 시인은 미어(美語)를 지닌 미아(迷兒)가 된다.
근사치로만 짐작할 수 있는 그 지점에 대해 시인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갖기엔 이 행성은 너무 작다는 것"(「아주 조금 다정하게 혹은 이기적이게」)과,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하나의 장르로 서로를 구속하는 일"(「이해력」, 『현대문학』, 2014년 6월호)이라는 것. 바로 이 이해력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실감하는 방식이자, 과잉된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인의 언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를 이해하기엔 세계는 너무 넓었고, 하지만 나의 세계는 좁았고, 좁은 나의 세계로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나의 취향」, 『시와 사상』, 2017년 봄호) 세계를 이해하되 그것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 하는 시인의 조심스러움이 그를 또 한 번 아름다운 미아로 만든다.

10) 여기서 다룰 양안다와 안희연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양안다,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본문에서 시를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제목만 표기한다. 이 중 양안다의 글은 졸고, 「세계를 구원하는 우아한 재앙의 미학: 임솔아, 양안다, 전문영의 시」(『문학들』, 2017년 여름호) 중 「아름답고 쓸모없는 최후의 장면을 그대에게: 양안다의 시」의 부분을 수정 및 보완한 것임을 알린다.



영원을 믿지 않는 두 남녀는
사랑도 우정도 믿지 않아서
영원이 타인이 되었다는 아이러니

(중략)

이곳과 저곳이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지? 몬데가 창문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어디선가 부는 찬바람을 뺨으로 느꼈고
교실 냄새를 맡았다, 쟝은 예전에 이 냄새를 좋아했었다 넌 어땠어?
몬데, 나는 말이야
창문도 냄새도
학원 쪽을 더 좋아했으니까
그곳엔 선생과
배우고 싶은 게 있고
나는 선생에게, 선생은 나에게
말해야 할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이 가득 쌓여 있었다


때로 선생은
입김을 불어넣은 창문에 여러 수식을 그리며
전위서정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것은 미래이면서 사랑이고
우주이면서
우리라고


나는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난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어졌어. 고요히 떨리는 선생의 손 떨림을 감추려는 또 나는 침묵 속에서 선생을 바라봤다 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나 역시 자신을 이해한 척을 했다고, 연기를 하고 있었다고, 그러나


정말로 나와 선생이 같은 마음인지 알 수 없어서 같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양안다,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상)」 부분



학생의 세계에 "개입"한 선생은 "말하고 싶은 것"을, 학생은 선생에게 "말해야 할 것"을 말한다. "미래이면서 사랑이고 우주이면서 우리"에 대해 말하는 동안 그들은 알게 된다. "나는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너(선생 혹은 학생)를 만나고 난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어졌"다는 것. 너로 인해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 할 수 없다는 것 이라는 아이러니를 깨닫는 순간, 나는 너가 내 세계로 개입한 사태에 관해 골몰한다. 그것은 존재의 현존을 뒤흔들만할 큰 사건이다. 그제서야 "미래와 사랑, 우주이면서 우리"라는 이곳의 풍경이 보인다.
시인이 말하는 구속(이해)은 서로의 세계에 잠깐 동안 개입하는 일이다. 그 개입이 서로의 삶에 균열을 내며 존재의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11) 이와 같은 사건은 나라는 자아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내가 파괴되는 순간, 존재는 나에 의해 가려졌던 세계를 실감한다.
안희연의 시도 아름다운 최후의 그 지점이 주는 고립과 불가항력의 사태를 환기한다. 안희연이 감지하는 세계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끔찍한 것의 시초마저 한참을 초과하는, 끔찍한 것조차 무의미하게 되는 세계의 지점에서 시작한다. "바다 밑바닥은 생각보다 아늑해. 이곳엔 두 눈을 멀게 하는 태양도 늑대들의 울부짖음도 없고/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물의 감촉, 꿈인 듯 꿈 아닌 듯. 이렇게 가지런히 누워 흔들리고 있으면 구원을 기다리는 일 따윈 하지 않게 돼."(「슬리핑백」) 빛의 점멸 구간이 시작되는 어둔 심연의 지점처럼, 애초부터 심해에 살고 있기에 어둠마저 무의미해지는 심해어의 삶처럼. 어둠에 익숙해져 무의미해진 세계를 감지하는 존재처럼 말이다. "소리란 애초에 삼켜질 운명을 지닌 것"(「피아노의 병」)임을 아는 자는 언제부턴가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긴 호흡의 문장들로 화려하게 늘어지는 양안다의 언어와는 달리, 안희연의 언어는 분명한 호흡으로 무겁게 침잠한다. 미지의 그 지점이 주는 불가항력의 사태를 향해 자유롭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양안다의 시라면, 안희연의 시는 한층 정돈된 자세를 취한다. 가령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 그가 노트에/ 종말이라 적고/ 그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 같은"(「프랙털」)이란 구절처럼. 빛마저 점멸하는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안희연의 언어는 더욱 또렷해진다.
애초부터 구원이 없었기에 구원을 기다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고, "이곳이/ 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백색 공간」) 알게 된 자. 시인이 감지하는 세계는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인 공간을 연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에 무심한 자가 아니다. 그 어둠이 지닌 고독을 온전히 실감하고, 어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자다. "세계의 소멸과 존재의 몰락이 진행되는 가장 어두운 세계," "사회 역사적 차원의 부정성을 초과하는 더 근원적인 부정성에 휩싸인 세계의 흐릿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12)의 '통증'은, 구원을 기다리는 일이 불가능한 세계의 어둠에 면역되는 것을 거부하기에 발생한다. 나라는 주체가 과잉되거나 결핍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 세계의 무력감이나 절망에 내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시인은 살아있는 한, 매일같이 다가오는 존재의 고독이라는 불가항력의 사태에 사로잡힌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알게 된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온 적도 없고, 서로를 버린 적도 없다"(「탁묘」)는 것을.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인간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환하게 물들이며 살 수 있다.

11) 한병철, 이재영 옮김,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지성사, 2016, 66쪽.
12) 수이, 「해설: '옆'의 존재론, 의미없는 실패라도 좋은」, 안희연, 앞의 시집, 143-144쪽.



염색공은 골몰한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
당신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툭하면 허물어지는 성벽을 가진 것은
그 때문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
플라스틱 병정들처럼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풀리지 않는 숙제
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먼 훗날 염색공은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꺼낼 것이다
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
빛을 머금은 노래를


-안희연, 「기타는 총, 노래를 총알」 전문



어느 좌담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불행과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13)고. 시인이 말하는 불행이나 불안은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사는 존재의 삶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으며/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다. 존재가 감당해야 할 세계'는 없다. 결국엔 '지금-여기'의 삶만이 유일한 것인데, 그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14) 결국엔 가장 근원적인 의문으로 돌아온다.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매일같이 고민하는 일. 시인이 말하는 불행이나 불안으로 도망치지 않는 자세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왜 항상/ 산사태를 동반하고 마는지."(안희연, 「나의 겨자씨」, 『현대시』, 2018년 9월호) "우리가 사라져도 세상은 이런 위트와 패러독스를 멈추지 않겠지만/ 끝나지 못한 연작이 있습니다 미완성의 정서가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끝을 내는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지요 아직 우리는 완성되는 중인데."(양안다, 「레몬 향을 쫓는 자들의 밀회」) 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불온한 속성과 닮아 있다. 그들은 인간이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지점 그 너머를 향한다. 그곳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이 지닌 감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지점처럼, 인간이 지닌 감각마저 무용(無用)해질 만큼 불가능한 사태에 대해 환기하는 일. 이는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거나 파괴해야지만이 존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그 지점에 다가갈 수 있다. 내정된 실패의 세계를 향해, 그들의 자의식은 사라지거나 복원되는 (역)진화의 사태를 경험한다. 존재의 현존을 실감하게 되는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아름다운 불가항력이 주는 마력을 말이다.

13) 「실감과 고립감, 그 불가항력: 방인석(진행), 이수명, 안희연 대담」, 『시로 여는 세상』, 2015년 가을호, 40쪽.
14) 「실감과 고립감, 그 불가항력: 방인석(진행), 이수명, 안희연 대담」, 위의 글, 54쪽.



5. 이 시대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


세기는 사르트와 푸코의 커다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실존 아래 또는 사유 아래 오고 있으며 또 와야 할 인간은 초인간적 혹은 비인간적 형상일까요?


-바디우, 『세기』중에서(312쪽)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세기의 순간들을 살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인간의 삶은 과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와 관련해 특정 시대라는 범주에서 그들의 세대론을 논한다는 건 자칫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겠다. 다양한 시세계를 지닌 그들을 함부로 도식화하는 경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들은 2010년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고, 다가올 2020년대라는 한국 시단을 이끌어갈 가능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의 시를 논한 건 이전에는 사유되지 않은 것들이 2010년대라는 특정 시기와 함께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문보영, 배수연, 김현, 양안다, 안희연은 2010년대를 기점으로 등장한 젊은 시인들이다. 그들은 2020년에 가까운 2010년대의 후반기라는 동시대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통과해나가고 있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건 미래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찾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을 도래하게 만드는 사유를 하는 자들. 그리고 '그 무엇'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이곳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가능성)이 되도록 만드는 자들. 그 사유의 시작이 인간이 더 이상 겪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사고나 사건이 계기가 되지 않고서도 끊임없는 사유하는 자들. 세상의 끝. 자손이 없어도 행복한 우리. 죽음에 가까이 있는 세계. 우리가 사라져도 위트와 패러독스를 멈추지 않는 세계. 종말이라 적고 그 안에 들어가는 나. 그들의 구절에서 유독 세기말이 두드러진다는 느낌을 받는 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가치를 아무도 묻지 않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명랑한 세기말적 상상력을 통해 무력한 낙원과도 같은 이곳을,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의 가능성들로 구현하는 문보영과 배수연. 젠더에 구분을 두지 않는 다양한 주체성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들과 연대를 선언하는 김현. 사라질 미래를 향해 세계와 나 사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역)진화하는 자의식의 사태를 구현하는 양안다와 안희연. 그들은 불온하기에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눈앞에 없는 것,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언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을 사유하게 하고 불확실한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증명하며 도래할 미래를 꿈꾸게 한다.
앞으로 도래할 21세기 인간의 형상은 (사르트르의) 초인간적 형상과 (푸코의) 비인간적 형상이 혼종되어 있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디우가 사르트르와 푸코의 목소리를 빌려 "실존 아래 또는 사유 아래 오고 있으며 또 와야 할 인간은 초인간적 혹은 비인간적 형상일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초인간적 형상을 의미하는 사르트르의 근원적 인본주의와, 비인간적 형상을 의미하는 푸코의 반(反)근원적 인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방향의 충돌을 요구하는 일. 신이 없는 자리에 '신이 없는 인간'이 도래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근원적 인본주의란, 인간적인 것의 복원, 실천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반대로 사라진 인간의 빈자리에서만 사유할 수 있다고 보는 푸코의 반근원적 인본주의란, 의미의 연속체가 아닌 새로운 시작의 연속들로 인간의 사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지닌 그들의 논리는 세기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주체화되고 있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세기 속에서 '끝내기'와 '시작하기'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처럼, 인간 고유의 본질을 복원하려는 의지와, 이전의 인간을 극복하고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사유의 충돌 속에서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 충돌로 인해 탄생한 시대의 불온한 변종들이다. 초인적 형상과 비인간적 형상이 혼종되어 있는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변종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에게 어울리는 명명(命名)들을 나열해 본다. 그 어느 것에도 순응하지 않고, 다만 부조리함을 원하는 이단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힘을 믿는 자들. 과잉 혹은 결핍, 혼돈과 질서 사이에 놓여 있는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대들.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거나 지워지는 명랑한 백치들. 바람직한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고트호브주의자들. 불온한 아름다움을 지닌 21세기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 문학의 속성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와 푸코처럼 초인과 비인간, 끝과 시작, 복원과 창조, 이상과 현실, 불가능과 불가피, 무한과 유한이 충돌하는 사유의 사태를 구현하는 일. 그들의 불온한 언어가 충돌을 일으키며 세기를 이어나간다. 불온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들이기에, 그들을 이 시대의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로 부르고 싶다. 그들의 불온한 언어가 불가능한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미미(美美)한 가능성이 된다. 그들과 함께 현재의 한국시단도 보이지 않게 진화하는 중이다. 그들을 포함해, 그들의 뒤를 이어 앞으로 도래할 불온하고 아름다운 변종들의 출현을 기대하며. 이곳을 향한 새롭고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아름다운 충돌이 현현하는 그들의 시(詩)를 위해. 세기를 구현할 뷰티풀 엑스라는 변종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일. 그것이 한국문학이라는 시류 속에서 그들을 사유하는 비평가의 몫이자 그들을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일 것이다.












작가소개 / 전영규

1986년생.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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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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