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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 작성일 2018-10-01
  • 조회수 3,179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문학이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진경





1.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템페스트』의 말미에는 마법을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미약한 힘만 남은 주인공 푸로스퍼로의 최후가 담겨 있다. 아감벤에 의하면, "완전히 모든 마법을 잃어"버린 '푸로스퍼로-늙은 예술가'는 신비가 사라진 삶의 "고갈되고 중지된 시간"을 관조한다. "갑작스러운 어슴푸레함"은 신비가 떠남으로써 작동하는 "충족된(구원된) 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법과도 같은 돌출-과잉된 역량이 사라진 뒤에 출현하는 '관조'의 시간은 현재 우리 문학이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거대 이데올로기의 소멸 이후 왜소해지고 빈곤해져 남은 것이라곤 '저 자신의 힘 뿐'인, 오늘날의 한국 문학 말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반성을 통해 '탈신비화'를 모색해 왔다. 90년대 이후 소설에서는 전통적 패러다임의 '해체'와 '탈주'를 통해 개인이라는 주체를 구체화시키고자 했으며, 2000년대에는 역사의 인력으로부터 해방된 '무중력의 공간'에서 환상, 파국의 상상력을 통해 '혼종적 글쓰기'를 추구하며 새로운 미학적 비전을 발견했다. 시의 경우, 새로운 이론의 확산 속에서도 '서정시의 복권'과 미학적, 내용적 다양성 탐구에 골몰했다. 새로운 세기로의 전환과 더불어 시는 시대의 균열과 모순을 목격하며 왜소해진 개인이 거칠고 낯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파편화된, 날것 그대로의 실험적인 언어는 미학적 전위의 극단을 달리며 기존에 보지 못한 낯선 육체(성)를 표출했다. 소위 '미래파'라고 불리던 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미래파' 논쟁이라는 비평적 담론을 이끌며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지만, 동시에 낯선 (쓰기와) 읽기의 어려움에서 오는 피로와 부작용을 동반했다.
이후 언어의 재현과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미학적 실험으로만 치닫는 시적 경향을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시와 정치' 논쟁을 촉발시켰다. 200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치시' 담론 투쟁의 배경에는 시대적 현실에 따른 문학의 사회참여 요청, 다시 말해 시(문학)와 일상(정치·사회)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이는 고립된 시적 영토에 갇힌 주체의 끝없는 침잠 속에서도 실존적 가능성의 응시와 소통 가능성을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좀 더 정밀하게 고민하려는 시도였다. 2000년대 민주주의가 스스로 불완전함을 증명했던 '현실의 역설' 가운데서 자폐적 언어 이외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에 어떤 절실함이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2000년대 후반의 문제의식은 삶과 연관된 시적 언어의 새로운 형식에 대하여 재고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 세계에 당도하여 재생되는, 정치적 통념과 도식들 및 이분법을 넘어서는 가치를 사유할 불가능한 여정의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다는 진지한 전망"1)에 대한 탐구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문학을 둘러싼 '삶과 정치의 실험'은 2010년대 이후에도 변형을 거듭하며 지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놓치고 있는 '어둠'은 없는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눈멀게 한 그 '어둠'인지 살피는 작업은 (가능하다면) 옷에 붙은 마지막 '신비'의 올까지 털어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1) 조재룡, 「2000년대의, 시, 그리고 비평-주체-정치-리듬」, 《문학과 사회》, 2018.



2.


작년 즈음부터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문학의 존재 방식과 달라진 시대 요청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 가운데 이은지2)의 글은 최근 문단의 현실을 "우아한 나르시시스트"인 "채식주의자"의 태도에 비유하며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회의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가 말하는 "채식주의자"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식습관"이 "상찬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밥상머리에서 스스로를 남들과 도덕적으로 구별" 짓는 자에 가깝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의 덕목을 "달고 다니면서" 주변인을 죄의식에 빠뜨리거나, 자신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협소한 자기기만적 세계를 가꾸는 것"에만 만족하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세월호', '퀴어', '페미니즘' 등의 소수(자) 문학의 요청에 응답하며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를 자처하는" 오늘날의 문단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련의 '문학 스캔들'을 겪은 후 한국 문학은 달라진 사정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학과 삶의 연관성이라는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만 했다. 문학장 안에서만 통용되는 지배적 규율의 '낡음', 시대착오적 인식으로 인한 재현장치로서의 '무능',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중-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퇴행' 등, 조롱 섞인 비난과 진심 어린 염려 속에서 '변혁'과 '쇄신'을 목표로 당대 사회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약 2년이 지난 지금 한국 문학/문단은 2015년 '표절 사태'와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미투' 운동을 지나오며, 문학계의 본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통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시간 동안 한국 문학은 장르의 다양성 확대와 제도적 모순의 극복을 통해 인간과 삶에 한층 더 밀착할 수 있는 신생 문예지를 창간하거나 새로운 플랫폼 형태로의 변모를 꾀하거나, 공개토론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등 문학의 현장성 강화와 저변 확대를 위한 변혁과 쇄신을 단행했고, 해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문학이, 그저 규율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한다는 구시대적 관념에 경도된 채 다수를 배제하고 소수의 목소리만을 경청하기 위해, 보여주기식의 일시적 태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문학장 안에서 소수/다수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목소리가 얽히고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독자-대중의 불신을 초래한 '문학의 무능'을 무력화할 수 있는 표준적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문학/문단이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재구축을 도모하는 것을 일시적이라 판단하기에 지금은 다소 이른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일시적'인 것이 지속되어 남은 것을 우리가 추구한 '이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문학/문단이 하고 있는 현재의 작업을 먼저 온 '미래'라고 부를 수 있는 판단중지 또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더불어 문학이 현실을 재현할 때 (의도적으로) 누락되는 내용이 많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문학적 재현이 실현될 때 배경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강박적이고 신화적인 신념을 깨뜨려야 생산적인 극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연유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문단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감성을 수용하는 방식의 변화와 자기 재규정이라는 화두에 골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소영현3)은 "문화예술계에서 의미가 확장·변형되는 과정에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 또한 실제와 재현의 관계로,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로 전치되면서 유비적으로 양상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세심한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최근 페미니즘 담론에서 지속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폭력의 재현과 재현의 폭력'의 문제들은 오랜 시간 비평적 의제로 다루어지며 더욱 세부적인 대안의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2) 이은지, 「문학은 올발라야 하는가」, 《문학3》, 2017년 3월.
3) 소영현, 「페미니즘이라는 문학」,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3.


위에 언급된 소영현의 논의는 페미니즘을 중심 화두로 진행된 것이지만, '폭력의 재현과 재현의 폭력'에 관한 문제는 큰 맥락에서 요즘 논의되고 있는 논쟁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현실이 낱낱이 재현되었을 때 발생하게 될 부작용 즉 폭력의 재현이 곧 재현의 폭력을 초래한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폭력의 재현이 곧 창작자/피해자로 등치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 인식이며, 폭력의 재현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폭력의 재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프레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전자의 논리에는 문학의 자율성이 옹호되는 현상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반면 양재훈4)의 말은 후자에 가깝다. '요즘비평포럼'에서 그는 오늘날의 문학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과정이 보다 강박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폭력의 재현 그 자체가 재현의 폭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며, '폭력의 재현과 재현의 폭력이 등치되는 흐름에 대해 근심했다.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선험적으로 재단하는 행위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이상한 일'이 될 수밖에 없으며, '폭력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재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한 논의가 더 필요한 시점임을 지적했다. '폭력의 재현만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최후에는 폭력청정지대 같은 것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논의는 '폭력의 재현' 논쟁이 갖는 한계성을 명확히 지적한다.
문학/문단에서 비롯된 추문을 경험한 독자들이 폭력을 재현한 문학의 미학적 가치를 의심하는 목소리의 출현은,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시대의 불의와 참상을 함께 목도한 혹은 경험한 동시대인으로서 독자-대중의 시선과 관점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변화한 사정을 예민하게 응시하는 차원에서 문학은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와 좌절, 고통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에 노골적으로 현실을 기입해야만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문학이 현실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차원과 결부된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현실에서 소수자, 사회적 약자, 여성을 대하는 편견과 혐오, 무시, 차별, 강간 등을 있는 그대로 기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기입하는 것은 세심한 고려가 필요한 일이며 현실을 노골적으로 재현한 작업은 이차적 가해를 초래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첨예하게 오가는 논쟁 속에서 폭력의 체현을 미학적 가치로 삼은 작품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이유 없이 위협받는 이 곤란한 세계 속에서 얼마나 용인되고 지지될 수 있을지, 회의적"5)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시선을 두루 살피고 그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아감벤이 말했듯, '시인(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인 까닭이다. 아감벤의 이러한 생각은 문학이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할 것은 '폭력'이 행사된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제 문학은 어떤 관계와 형식이 폭력을 비롯하게 하고, 한 사회가 그것을 폭력이라고 자각하는 것조차 막는지에 대한 '재현'이 필요하다. 어둠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어둠보다 깊고 섬세한 접근이 요구되듯, 부정한 현실(형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내재된 폭력적 외피를 경계해야 한다.

4) '제4차 요즘비평포럼, "폭력의 재현 그 자체는 문제 아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담론 살펴', 〈뉴스페이퍼〉, 2018. 9. 25.
5)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 문학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문장 웹진》, 2017년 8월호.



4.


새를 연구하는 교수는 새를 사랑하는 학생과 새를 사랑하지 않는 학생으로 우리를 구분한다. 새를 사랑하면 새 교수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어제 그 교수가 강의 도중 조류 관찰용 녹음기를 틀었다.
거기서 문득 흘러나온 새 교수의 흐느낌으로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철새 도래지 해질녘의 눈물 나게 아름다운 장관을 묘사해 보지만… 한번 터진 우리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날 새 교수는 모래 목욕하는 새를 보여주었다.
땅 위에 지은 둥지를 보여주었다. 가장자리 효과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하지만 도마뱀이 물로 세수를 하든 코끼리가 진흙으로 도포를 하든 그런 것에 누가 관심이나 있단 말인가?


다 큰 어른이 새 떼를 관찰하다 질질 짜는 소리만큼 우리 흥미를 끌 만한 것은 그 수업에 없었으므로, 새 교수, '사람은… 새를 본받아야 합니다!'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냔 말이지.


새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교수의 강의는 새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새를 사랑하면 새 교수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도 새 교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 김상혁, 「새 교수」 전문



최근 문학계에서는 여성의 입장에서 고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이는 '폭력의 재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존의 물음을 넘어, 그동안 남성 중심의 주류 문학사에서 무의식적으로 이어져 왔던 혹은 규정되어 왔던 재현방식에 대한 믿음을 깨부수고, 폐허에서 문학적 재현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폭력에 대한 재현이 여성비하와 혐오의 감수성으로 포착되는 달라진 현실 속에서, 예술(작업)을 명분으로 폭력(의 순수한 내용 재현)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서는 곤란하다는 낯선 목소리의 출현은, 문학/문단에 대한 섬세한 간파이자 문학의 오랜 위기를 한 꺼풀 벗겨낼 대안이 될 수 있다.
새롭고 낯선 재현방식에 대한 치열한 고찰은 소설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이어져 왔다. 그중에서 김상혁의 시 「새 교수」는 오래전에 발표되었던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를 알레고리적으로 변용하여, 발화주체가 처한 시대적 환경이 교수와 제자에게 가하는 폭력적 상황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기존 권위의 추락을 위상과 상황의 전복을 통해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 글이 내세운 '문학이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은 가치가 있다.
오래전, 오규원은 '메뉴판' 형식을 차용하여 철학자, 작가의 사상과 가치마저도 화폐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풍자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는 시를 쓰는 대학교수인 시적 화자를 내세워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인문학이 경시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고, 시를 쓴다는 것의 무용함에 대해 자조했다. 이 시는 약 삼십 년의 시간을 뒤로 한 채 김상혁 시인에 의해 다시 쓰인다. 이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 관계의 위치와 방식을 뒤집어 보며, 오늘날의 '폭력'이 차려입은 옷을 벗기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오규원의 시에서 폭력을 가하는 것은 인문학의 퇴조를 초래한 시대상황이었고, 그러한 상황의 피해자는 교수와 제자였다. 반면 김상혁의 시에서 폭력의 주체는 "새를 연구하는 교수"이며 폭력의 대상은 그의 수업을 듣는 "제자"로 치환된다.
김상혁의 시에서 "새 교수"는 학생을 '사물'로서 대면한다. 새의 아름다움 따위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시대상황은 외면한 채 자신의 전공 분야에만 열정적인, 기만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환경(아무런 걱정없이 오직 새만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의 제자들만 기억한다. 오래전 오규원의 시에서 자본주의가 인간 일반에게 가했던 폭력은, 시간이 흘러 교수가 제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 인간관계로 침투한다. 폭력의 위계가 재규정되며 이들은 교수-제자가 아니라 갑/을, 가진 자/없는 자의 일그러진 관계로 변형된다. 놀랍게도 둘 모두에게 작동하는 폭력의 생산 형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재규정된 폭력의 위계 아래에서 학생들은 "새를 사랑하면" 그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새 교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적 재현 속에서 현존하는 폭력의 (한 가지) 양상은 교수의 '흐느낌'으로, 학생들의 '웃음'으로 울려퍼진다.
시대가 변해도 삶-인간은 늘 어딘가에 걸리고, 넘어진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이것을 작품에 기입하는 방식에 대한 처절한 모색 또한 계속 시도해야 한다. 벌어진 상처와 피의 유혹을 피해, '오직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만,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작품 안에서 폭력의 노골적 재현이 없다고 하더라도 (실은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은폐된 현실의 부정태를 응시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작가소개 / 이진경

문학평론가.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나선의 숲'에서 부유하는 시어들-이제니론」을 발표하며 등단.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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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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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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