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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공동체’라는 문제틀의 전환에 대한 단상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2,393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취향 공동체’라는 문제틀의 전환에 대한 단상

- 대항력, 구성력으로서의 ‘취향=문학’을 바라며



김미정



1. ‘한국 문학에 불만있다’에 대한 두 개의 난감함 혹은 늦은 응답


이 글은 ‘한국 문학에 불만있다’라는 제목의 기획 하에 배치될 글이다. 2015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지는 한국 문학 안의 자기응시와 성찰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수락했으나, 글을 시작하기까지 개인적 난감함이 적지 않았음을 먼저 밝혀 두고 싶다. 그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한국 문학’이라는 카테고리를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들의 어떤 체질과 성격”을 이야기해 달라는 기획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설득되었음에도, 한편으로는 이 말에 전제된 ‘문학’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라는 구분이 얼마나 유의미한가라는 개인적 회의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실상은 이 충돌 지점, 즉 특정 장르(시, 소설)의 개별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할수록 합당한 문학적 논의로 여겨지는 듯한 제약(관습)과, 그것에서 이탈하는 원심력들 및 그 이유를 점검하는 글을 우선 써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둘째, 기획하신 분들이 요구한 한국 문학에의 ‘불만’이 곧 ‘성찰’에 대한 주문이기도 함을 알 수 있었지만, 불만이라는 네거티브 방식이 하나의 ‘구조’처럼 주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불만은 개인적 정서나 태도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비판과 성찰의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콘셉트로 주어진 불만이, 그 자체로 소모·제도화되지 않을 방법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즉, 비판과 성찰 이후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재구축하려고 할 때, 네거티브 태도에 각별한 전략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더구나 정작 싸워야 할, 더 큰 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가령 오랫동안 문학마다의 각 입장을 불문하고 함께 고민해 온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 국가 권력의 문제, 삶에 편재한 부조리와 폭력 등등) 이 불만은 하나의 통과할 지점이지 목적 자체가 될 수 없음도 당연하다.
또한 사람마다 생각하는 문학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또는 이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문학이 어떻게든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문학 안의 불만과 갈등과 적대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연대하고 함께 싸워야 할 때도 많다. 문학을 둘러싼 세계, 문학을 조건 짓는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네거티브 콘셉트란 그 점에서 생각할 것이 많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글은 다소 우회적인 글이 될 것 같다(미리 밝혀두자면, 기획의도에 가장 충실한 대목은 5, 6챕터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 문학에의 불만’이라기보다 ‘한국 문학에의 바람’으로 바꿔 읽혀도 무방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문학의 조건을 생각하며 한국 문학에 바라는 바’에 대한 글일 것이다. 불만이 여럿이라면 바람의 수도 그에 상응한다. 그리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위한 어떤 갱신과 타파”를 도모한다는 ‘기획의 말’처럼, 모든 불만과 자성은 궁극적으로 어떤 이행, 무언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과 함께, 이 글은 최근 논의들 속에서 지엽적으로 충돌한 바 있던 ‘취향’, ‘취향 공동체’라는 말1)을 생각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은 그 논의와 무관하게 읽혀도 무방하다. 취향을 둘러싼 이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기능과 역할’을 중심으로 충돌한 측면이 크다면, 이 글은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로부터 제기된 취향의 문제가 어떤 맥락을 함의하며 지금에 이르렀고, 장차 어떻게 기능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2) 이것은 한국 문학의 개인적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이 어떻게 재조정되는지 귀납하는 작업이고, ‘한국 문학에의 불만=바람’은 이 과정에서 완곡할지언정 충분히 드러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오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문화/과학』, 2016 봄호)과 정홍수, 「당신은 왜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문학동네』, 2016 여름호) 참조.
2)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졸고,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대한 상상-2015년, 한국문학, 인간의 조건에 대한 9개의 노트」(『내일을여는작가』, 2015년 하반기호)의 6챕터 <문학은 그저 취향 공동체로 자족할 것인가>에 대한 <보론>이 되기도 할 것이다.



2. ‘90년대적인 것’과 ‘나’의 취향 - ‘개인’을 전경화하다


1990년대 한국 소설에서 ‘취향’은 1980년대적인 것을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대두된 가치의 하나이다. 주지하듯 1990년대는 한국(문학)에서 ‘개인’이라는 단위의 주체가, 이전 시대의 집단적 주체(성)에 대한 안티테제로 출현한 시기이다. ‘90년대적인 것’이라 할 만한 것들은 ‘개인’을 구심력으로 주장된 것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80년대의 개인에게는 자기를 증명하고 추동할 근거가 자기 바깥에 있었다. 그런데 90년대의 개인은 그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개인들은 각자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국면을 맞았고, ‘내면’, ‘차이’, ‘취향’, ‘윤리’ 등의 말과 그 가치를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확보해 간다. 이때 집단적 주체(성)와 개별 주체·개인이 결코 대타적 관계가 아님에도, 한국에서의 1980/1990년대는 이 둘이 테제/안티테제의 형식으로, 자리만 바뀌며 적대적으로 재배치된 양상도 잠시 기억해 두자.
본래 취향은, 그 이론적 설명 없이도 언제나 개인적인 것, 개인의 호오(好惡)와 일차적으로 관련된 문제이다. 하지만 특별히 90년대 한국에서의 취향은 ‘나’ ‘개인’을, 존재론적이고 미학적으로 구별시켜 주는 데 각별히 기여했다. ‘취향’은 외부의 규준 없이 자기를 정초해야 했던 ‘미학적’ 준거로서 등장했다. 이때의 개인이란, 말 그대로 더 이상 나뉘지 않는(in-divi-dual) 독보적·배타적 ‘나’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개인’은 ‘차이의 정치학’이 구현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훗날 명확해지듯) 자본주의가 글로벌한 규모와 구조로 버전업되면서 기능하는 데 기본 단위가 되기도 했다. 특히 후자의 의미에서 개인은, 어떤 연대나 공통감의 가치가 지워지는 과정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 점을 잠시 김영하의 「전태일과 쇼걸」(1996)과 함께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은 1980년대와 90년대의 기묘한 공존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전태일’ 계열의 80년대적인 것(브레히트, 광주, 임수경, 로자 룩셈부르크, 문학, 파르티잔 등등)은, 90년대적인 것과 습합하거나 등가적으로 배치됨으로써 본래 부여받은 의미를 배반당한다. ‘쇼걸’과 나란히 전시된 ‘전태일’, ‘광주’와 ‘비엔날레’의 결합, ‘술집’ 이름이 된 ‘파르티잔’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 제목의 배중률을 서사적으로 전개시키는 서술자가 ‘그’를 서술하는 방법이다. ‘그’는 ‘엘지 죽염치약, 아이보리 비누, 존슨즈 베이비로션, 한겨레신문, 조선일보, 빨간색 베네통 시계, 질레트 이중날 면도기, 올드스파이스 로션, 트루젠, 쏘나타Ⅱ, 캐논 EOS5, 오마샤리프, 한영애’ 등등의 상표나 고유명을 통해 일종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는 묘사되거나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호(嗜好)나 자본주의적 기호(記號)를 통해 환유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즉 나열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상표와 고유명들은, 소설 속에서 단지 풍속 스케치를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80년대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그리고 90년대는 균형을 맞춘 시대라는 서술자-작가의 인식을 의미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한 개체가 어떻게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지를 보여주는 배타적인 기호로서 기능한다. 이런 방식의 구별 짓기가 당시 소설 속 ‘나’ 개인들을 존재론적·미학적으로 증거하는 익숙한 방식이자 당시 소설쓰기의 어떤 파토스를 낳기도 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소설 속 서술자의 방식 혹은 ‘그’의 선택의 목록에서 과감히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렇다. 첫째, 90년대적인 ‘나’란, 진공의 자유 속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실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조립되기 쉬운 것이었다. 둘째, 취향은 남과 다른 ‘나’를 독보적으로 구별해 내는 미학적 장치로 소용되었다.
이것은 소설의 사회적 상상력이나 정치적 감수성의 표현과 내용이 ‘개인’을 중심으로 재조정되는 메커니즘을 부분적이나마 보여준다. 나아가 ‘90년대적인 것’의 가치들이 형성되거나 주장되는 과정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취향은 그저 ‘좋아하는 것’, ‘개인의 기호(嗜好)’를 드러내는 지표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남과 다른 ‘나’를 주장하는 장면들은 분명 90년대 한국 소설의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보이지 않게 된 ‘타자’ 혹은 ‘관계’에의 감각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다시 질문에 부쳐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윤이형의 「큰 늑대 파랑」에서 잠시 생각해 본다.



3. 작은 방에서 다시 바깥으로 나온 개인 혹은 취향


윤이형의 「큰늑대 파랑」(2007)에서의 90년대도, 「전태일과 쇼걸」에서처럼 기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에서 회고되는 90년대 한국이란, 한쪽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엽기적 살육이 상영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거리의 과잉진압과 실제 죽음이 실연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이 90년대 중반 학번 주인공들의 혼란은, 영화가 끝나면서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뉴스를 읽는 것으로 일단 해소된다. 이들은, 무리에서 이탈하여 영화관, 자기만의 방으로 향한 세대의 전형성을 부여받고 있다. 이들은 거리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매개로 “작은 방”에 모인 첫 세대, 즉 애초에 ‘개인’으로 호명되며 세계에 던져진 이들이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 혹은 작가가 주력한 것은 “우리가 뭘 잘못한 것일까”라는 정희의 반문인 것처럼 보인다. 정희는 이렇게 절규한다.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창피하게 이게 뭐냐고?”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세계가 망해 가고 죽어가는 순간에야 스스로들이 지나온 시절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앞서 말했듯, 90년대적인 것으로서 주장된 ‘개인’의 가치들은, 집단, 공동체의 가치를 의식적으로 지우며 성립했다. 그렇지만 집단,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워진 ‘나’가 사실은 더 큰 시스템(가령 90년대 이후의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과 직접 파이팅해야 할(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의 일개 부속이 되어 간) 상황이었음을 이들은 죽어가면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정희의 절규-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했다!-는 일단은 맞다.
하지만 뒤늦게 이들이 재미 삼아 만들었던 ‘늑대 파랑’이 가상을 뚫고 현실로 나왔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난 ‘아영’과 함께 세계의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자. 그렇다면 정희의 말은 틀렸다. 재미있는 것은 뒤늦게나마 세계의 파국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한 셈이기 때문이다.
즉 ‘아영’은 세 명의 인물과 달리 부모의 구속력에 단단하게 매어 있고 가장 덜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정희’가 자조와 절규로 죽어갈 때, ‘아영’은 자발적으로 도끼를 사고, 좀비가 된 어머니에게 그것을 휘두르고 살아남는다. 가장 90년대적인 덕목(개인, 나, 취향 등등)에서 비껴서 있던 ‘아영’은 세계의 구속력을 내파하며 처음으로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시절 작은 방에서 재미 삼아 만들었던 ‘파랑’과, 가장 덜 90년대적 존재였던 ‘아영’이 콜라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90년대 이후 ‘취향’의 맥락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장면이다. ‘작은 방에 모인 개인들의 취향’은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졌다. 그리고 종종 ‘나’를 증명하기 위해 소용될 뿐이었던 ‘취향’의 문제는 자기증명의 도구 이상의 문제로 전환된다.
즉 ‘재미있는 것을 찾아 작은 방에 모인 이들’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취향의 산물(늑대)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점에서 「큰 늑대 파랑」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취향’의 문제에 다시 사회적 상상력, 정치적 감수성의 가능성을 재도입한 소설로 기억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적 상상력, 정치적 감수성이 소설과 맺는 관계가 1980/90년대와 다르게 재설정되는 점도 중요하다.
이 개인적 ‘취향’의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 본다. 다음은 계속 윤이형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야기한 것에 비할 때 ‘취향’이 더욱 급진적인 장소가 된 소설도 있고, 혹은 다시 작은 방 공동체로 돌아간 것에 대한 소설도 있다. 이 소설들이 발표된 순서는 잠시 접어 둔다. 이 글은 작가론이나 작품론이 아니라, 향후 한국 문학의 선택지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4. 취향, 어떤 장소가 될 것인가 (1) - 정치적 장소


윤이형의 「루카」(2014)는 동성애자 딸기와 루카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별로 주목받지 못한 캐릭터이지만) 루카 아버지의 고뇌가 서사의 얼개를 이루고 있다. 종종 ‘성적 취향’이라는 말로 사용되는 일상적 어법에서도 엿볼 수 있듯, 동성애라는 문제는 ‘개인적 취향’으로 협소화되거나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될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며 이 소설에 ‘취향’이라는 관점을 다시 도입해 본다. 앞서 읽은 「큰 늑대 파랑」이 ‘개인적 취향’을 작은 방 바깥으로 나올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면, 「루카」는 감추어지거나 보이지 않아야 했던 동성애라는 쟁점을 아예 서사의 축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정치적 장소가 되게끔 만들었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은 일이 있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학생들이(특히 남학생) 이 이야기에 대해 ‘남자들 간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같아서 좋았다’고 반응했고, 간혹 ‘아들의 특별한 성정체성으로 인해, 자기 인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고심한 부성애를 주목하고 싶었다’ 등의 반응도 있었다.
후자의 반응은, 한국 사회 전반의 LGBT 감수성에 덧붙여 완강한 가족주의의 흔적까지 반영된 독법인 데다가, 소설 읽기에 낯선 학생들의 감각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하므로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전자의 반응(‘남자들 간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같아서 좋았다’)은 이보다는 조금 명쾌한 담론적 사정을 갖는 것이기에 좀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오혜진은 이 소설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사랑과 이별의 방식, 그 난관과 딜레마를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라고 말해야 한다.”면서 ‘동성애 없는 동성애 서사’로 읽는 보편적 독법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3) ‘남자들 간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같아서 좋았다’는 강의실의 반응은 정확히 이 지적에 상응할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소설 속 사랑 감정의 내용과 밀도는, 동서고금 전해지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만남과 헤어짐과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이성애 중심 사회의 문법이 소설 속에서 가장 막강한 안타고니스트로 상정되어 있음도 보아야 한다. 이 점을 보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문학을 통해 자꾸 ‘보편’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관성일지 모른다.
앞서 말한 강의실 학생들은 이 소설의 감동을 말하기 위해 동성애를 지웠거나, 동성애를 지우기 위해 이 소설의 감동을 말했다. 많은 이들은,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것, 다수의 편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안심이 되고 안전하다고 느낀다. 우리가 상상하는 타자는 ‘나’의 정체성과 그 근거를 위협하지 않는, 되도록 ‘나’와 유사함을 많이 나눠 가진 ‘누군가’일 가능성이 많다. 타자가 보편적인 누군가로 상상, 재현될수록 더 많은 이들이 안심하고 공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우리’를 말할 때조차, 누구까지/어디까지를 우리로 상상하는지의 어떤 범주화는 은연중에 늘 이루어지고 있다. 나 스스로도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읽고 조금의 공감이라도 가져 줄 누군가를 무의식적 ‘우리’로 상정하고 있듯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 그런 관성을 저격한다. 정체성 정치의 시절 이후 분명 일정한 의미를 확보했지만 여전히 대중의 인지부조화의 대상의 하나인 동성애를, 개인의 성적 취향으로 한정, 협소화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딸기와 루카의 정체성의 문제, 삶의 양식의 문제, 견고한 이성애 문법의 세계가 서로 충돌하는 구체적인 양상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미학적·문학적 의제로 부친 윤이형의 시도, 그리고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협소화되기 쉬운 동성애의 서사화를 정치적인 장소로 견인한 오혜진의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 이것은 사실 문학 자체를 질문에 부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문학에서 특수는 종종 보편으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었다. 사랑, 인간, 휴머니즘 등등은 문학 내에서 종종 보편적 가치로 수렴하는 회로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루카」의 사례는 개인의 취향이냐 사회적 의제냐의 문제와 별개로, 근대 문학의 성격을 질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자면 “파편적인 원자들로 분산된 개인들의 ‘큰 것’에 환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떻게 다시 결집시킬 것인가?”라며 근대 이후의 문학을 질문하는 최진석의 문제제기4)도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최진석은, 근대 문학이 ‘큰 것’을 향해 모이는 감정의 회로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그것이 “파손되는 지점”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즉, 오늘날 문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부분, 그리고 작동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는 이제 명확하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자면 「루카」는, 개인적 취향을 사회적·정치적·미학적인 질문의 장소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문학(특히 소설)의 미래를 사유할 때 참고해야 할 각별한 소설이 되었다.



5. 취향, 어떤 장소가 될 것인가 (2) - 작은 방 공동체


그런데 이런 사정을 생각할 때 역시 윤이형의 「스카이워커」나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은 다시 취향을 작은 방으로 퇴각시킨 듯한 소설이다.5) 우선 「스카이워커」는 가상미래 설정 소설로서, 스포츠-종교의식인 트램펄린의 전문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벽 너머의 탕탕”(역시 트램펄린의 일종이다)의 존재를 접하면서 겪는 (자기 일과 관련된) 갈등과 고민을 경쾌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트램펄린’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스포츠이자 종교의식이며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은 거의 사라지고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역사와 전통만큼 룰의 보수성도 완강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벽 너머의 탕탕”은 새로운 중력에 속하는, 순수한 즐거움과 자유로움의 영역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은 트램펄린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탕탕을 동경하면서 자연스레 자기 일과 관련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혼란과 고민은 “이곳의 중력을 바꾸려면 먼저 내 질량을 바꿔야 한다. 이 세계를 마스터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라며 해소된다. 트램펄린 세계의 현실성을 벗어나지 않으며 마무리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것’이 서사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큰 늑대 파랑」에서처럼 ‘재미있는 것’, 즉 개인의 취향에 투신한 이들의 또 다른 버전이다. “좋아하는 것”, “즐거운 것” 등의 말들이 맥락을 달리하며 소설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 이 점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취향’(즐거운 것, 좋아하는 것)의 문제는 「큰 늑대 파랑」을 기준으로 볼 때, 「전태일과 쇼걸」 쪽으로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자기를 증명하고 추동하는 것에 관련될 뿐, 서사적으로 그 이상의 이야기를 진척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항간의 콘텍스트를 과장되게 개입시켜서 이 소설을 세속적인 알레고리로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간단히 말해 ‘트램펄린’의 자리에 소위 ‘순문학(본격문학)’을 넣고, ‘벽 너머 탕탕’의 자리에 ‘장르문학’을 넣어 보자(동의여부는 차치하고 편의상 이렇게 지칭한다). 주인공은 순문학 쪽 포지션을 지닌 작가인데, 장르문학 쪽 세계에 대한 동경도 갖고 있다. 그들의 자유로움과 현란한 기술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여러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래도 자신은 순문학의 필드에서 순문학의 정체성을 통해 그 필드를 갱신코자 한다.
이처럼 소설쓰기에 대한 메타소설, 혹은 익숙한 ‘소설가 소설’의 범주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더없이 정합적이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취향’이 어떤 서사적 기능을 하며, 어떤 문학적 의의를 지니는지의 질문과 함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즐거움, 기호 이외에 왜 기존의 ‘트램펄린’의 세계가 지지되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불충분하다. ‘나’가 단지 트램펄린의 세계에 제도적으로 속해 있다는 사실, 혹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즐거운 것)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즉 「큰 늑대 파랑」, 「루카」와 달리 「스카이워커」 속의 개인적 기호(嗜好)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재귀적 지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의 진정성과 소중함’을 상대적으로 폄훼하는 것처럼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개인적 취향에 자족할 것인가, 그 바깥과 소통할 창구를 가질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 역시 그러하다. 이 소설은 아예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 즉 소설쓰기에 대한 자기반영 소설을 표방한다. 이 소설에도 ‘제도와 웰메이드 글쓰기의 압박’ vs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글쓰기’ 사이의 갈등이 있다. 그리고 그 결론 역시 「스카이워커」에서와 대동소이하다.
그러하기에 「큰 늑대 파랑」(2007)이나 「루카」(2014)의 의미와 가치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2016년 문학장 바깥에서 한국 문학을 향해 ‘자기애 문학’이라든지 ‘문학 사랑 문학’ 같은 무신경한 폄훼가 오갈 때, 그것을 단지 문학장 바깥에서의 악의적 소문이라고 괄호치고 들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도 되는 것일까. 그 폄훼를, 현재의 한국 소설에 대한 어떤 기대,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축적된 한국 소설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김영하의 「전태일과 쇼걸」에서 취향(혹은 문학의 문제)은 1990년대 한국에서의 시대정합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모든 새로움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극복되어야 할 또 다른 옛것이 되어 간다. 그것은 「큰 늑대 파랑」이나 「루카」가 될 수도 있고, 「스카이워커」나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물론 작가들의 의도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떤 시공간의 좌표 속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작품의 운명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3) 오혜진, 「‘순정한’ 퀴어서사를 읽는 방법-윤이형의 「루카」」, 『제6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5.
4) 최진석, 「문학과 공감의 미래-감응의 감성교육을 위한 시론」, 『내일을여는작가』, 2016 상반기호.
5) 사실 시기적으로 이 두 소설은 「루카」(2014)보다 훨씬 이른 시기, 즉 「스카이워커」는 2008년,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는 미발표 소설로서 모두 『큰늑대 파랑』(창비, 2011)에 수록되었다. 그렇기에 통상적이라면 분석의 순서가 바뀌었어야할 테지만, 지금 이 논의가 윤이형이라는 작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6. 문학이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것에 자족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글의 취향에의 관심은, 18세기의 에든버러도 아니고 18세기의 쾨니히스부르크도 아니고, 20세기 파리도 아닌 ‘2016년’ ‘한국’ 문학에 놓여 있었다. 취향은 단순히 taste도 Geschmack도 Gout도 아닌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헬조선, 퇴행과 반동의 시대 속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취향’은 지극히 1990년대 한국적 사정 속에서 등장한 가치이다. 당시 주장된 ‘개인’의 가치와 습합한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취향에 대한 보편적 잣대란 있을 리 만무하다. 취향에는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좋았던 것’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취향은 겨루어야 할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취향 자체가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각 시대 속의 개인이 각자의 맥락에서 다양한 지점을 거치면서 형성해 간 것이고, 타자와의 긴장 혹은 시대와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미적 태도이자 지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취향은 우열을 가릴 대상이 아니다.
한편 취향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 개인의 취향이 어떤 무리를 이룰 수도 있다. 그것을 이른바 ‘취향 공동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공동체란 언제나 안과 밖을 은연중에, 암묵적으로 상정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의, 무엇을 위한 공동체인가가 늘 질문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취향(공동체)이 텍스트 바깥과 소통할 창구, 혹은 세계에 대한 미학적 응전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욱 문제적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취향’의 자리에 ‘문학’을 넣어 보자. 이때 내게 우선 떠오르는 것은 김현의 유명한 말, 다음과 같은 문학의 역설이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6)
이것은 여전히 원리적으로 중요하게 사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의 형태이기 때문에, 여기에 게재된 무목적의 미학·문학에 무게 중심이 실릴수록 문학의 역설적 소용이 일개 수사가 되어버린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취향=문학 공동체’는 이 역설이 무너진 자리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윤이형 「루카」의 예에서 보았듯, 문학은 보편에 대한 지향(공감)을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그 안의 특수한 것들의 발견을 놓쳐서도 안 된다. 윤이형 소설이 다루는 거식증 환자, 성소수자, 미래의 타자(AI. 로봇) 등의 제재는 통상대로라면 보편적 인간의 범주 내로 회수되지 못해 왔다. 오래 전부터 이를 극복하는 이론, 담론이 풍요롭게 전개되어 왔지만, 한편으로 대중적 감각 차원에서는 여전히 요원하다. 심지어 문학 밖에서 진행되는 반동의 양상은 최근 빈번하게 목도하는 바이다. 이때 문학이 가지는 감성적·인식론적 기능과 잠재성이 왜 강조되지 않고 있는가.
문학은 그 보편으로 ‘회수되지 않는’ ‘특수함들의 특별함’을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공통적인 것(commons)’에 대한 관심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공통적인 것’은 ‘보편적’이라는 말의 술어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보편’이라는 말로 회수되지 않는다. 또한 ‘공통적인 것’은, 이미 공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장차 공유할 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 노력과 관련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시대의 반동, 퇴행의 강력한 징후들 속에서 구체적인 삶들과 세계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공통적인 것의 미학적 응전력은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물론 문학장 안의 특정 주체만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시대의 소설, 이 시대의 문학이 더 이상 거창한 무엇은 아니어도, 적어도 희망 없음과 무기력이 만연한 이 시대, 마치 공멸을 향해 질주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에, 적어도 그 공멸을 유보시키는 데 어떤 식으로건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근대의 기획으로서의 문학이 보편의 앎과 보편의 정서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면, 지금의 문학은 분명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면 문학 자체가 여러 취향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단 한 명의 취향으로서의 문학이라고 해도, 이것이 우리가 지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건 역할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6)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김현문학전집1)』, 문학과지성사, 1995.


소박하게 말해, 문학이 자기를 증명하고 추동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늑대 ‘파랑’이 되거나 ‘루카’가 되면 좋겠다. 그 파랑과 루카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또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미 공유하는지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장차 공유할 것들을 더 많이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익숙한 사유와 감각을 불편하게 하고 반복, 갈등을 빚게 할수록 좋다. 다른 세계의 열림은 늘 그 낯섦의 지점,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삶 및 그 삶의 조건과 소통하는 취향=문학, 나아가 나날이 안 좋아지는 듯 보이는 세계에 대한 미학적 대항력, 구성력으로서의 취향=문학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이 글이, 문학을 둘러싼 오래전의 이분법 논의틀로 회수될 리는 없으리라 믿는다. ■





평론가 김미정3

작가소개 / 김미정 (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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