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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2,930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 정유정의 소설을 경유하여



서영인



1. 베스트셀러 목록이 말해주지 않는 것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한국 소설의 판매 호조를 보도하는 최근 신문의 헤드라인이다.1)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물론 베스트 셀러 목록을 기준으로 시장의 현상을 보도하기 위한 표현이겠지만, 어떤가. 한국 소설의 부활을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은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에 이름을 올린 배경은 물론 다르다. 2007년 출간된 『채식주의자』가 새삼스럽게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장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작품이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면서 여기에 화제와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문학적 가치가 여기서 굳이 재론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 가치나 의미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이 맥락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맥락’이 문제이다. 2007년에 출간된 『채식주의자』와 2016년에 재출간된 『채식주의자』 사이에는 ‘맨부커상’이라는 사건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한 작품 읽기의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국제적 인지도 상승과 소설의 판매부수 격증에 흡족해 할 일은 아니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출간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금융그룹이 후원하는 이 상에 서구중심적, 자본중심적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의 수상은 이러한 상의 성격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영어권, 서구권의 시선에서 평가받은 『채식주의자』의 가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될 수 있는가. 그 차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재의 한국사회는 이미 국제적인가. 수상을 이유로 작품이 출간된 2007년과 지금의 격차는 고려되지 않아도 좋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작품을 정전화시키고 현재성의 의미에 무심해지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2016년에 『채식주의자』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평적 질문이 필요하다.2)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외부적 권위에 『채식주의자』의 문학성을 편승시키는 일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유정의 소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 청소년 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정유정은 문학상 수상 등의 후광없이 『7년의 밤』 이후 세 권의 장편소설을 한국소설의 독보적 베스트셀러로 등재시킨 바 있다. 올해 5월 『종의 기원』을 출간한 후 거의 모든 언론이 정유정의 인터뷰와 책 소개로 도배되고 있을 만큼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는 작가다. 물론 공교롭게도 출간일이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발표일과 겹치는 바람에 언론 보도의 대부분에 한강의 이름이 같이 등장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지만.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주류문단의 비평담론 영역에서 정유정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가을호 계간지가 나와 보아야 알겠지만 『종의 기원』이 전문적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3) 그러니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한국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나란히 세워 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미제(未濟)’의 분석이 남아 있다. 한강이 문학상의 권위로 시장을 견인한 예에 해당한다면, 정유정은 독자에 의해 선택되고 확장된 문학시장의 한 예라 할 수 있을까. 2016년 한국문학이라는 맥락에서의 한강과 정유정에 대한 분석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에서 우연히 출발했으나 이런 구도가 지금의 한국문학을 해명하는 데 유용한 단서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 일단은 자발적으로 정유정의 문학을 선택한 수십만의 독자가 증명하고 있는 정유정 문학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1)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서울신문> 2016.7.19.
2)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는 한강의 문학세계 전반을 논하는 문학비평(신샛별,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이 실렸고, 여기에는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계기가 작용했겠지만, 수상을 둘러싼 독해의 ‘맥락’은 포함되지 않았다.
3) 비평적 언급 자체도 많지 않지만(『자음과 모음』 2011년 겨울호의 작가특집,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의 작가특집, 『자음과 모음』 2013년 겨울호의 『28』 작품론(복도훈, 「‘인간없는 세상’을 꿈꾸는 소설」) 정도가 대표적이다.) 언급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한국문학의 지형 내에서 읽어 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주류비평의 관심 부족은 이런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2. 영화 <감기>, 혹은 소설 『28』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장르소설의 문법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장편 『28』을 장르적 공통성의 견지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시점을 통해 『28』이 지닌 문제성을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유정에 대한 비평에는 한편으로 정유정의 소설이 본격소설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시선, 그리고 그런 비평적 경시에 반발하여 정유정의 소설이 지닌 문학성을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시선이 공존한다. 즉 장르소설이기에 본격적 비평의 논외가 되거나, 혹은 장르소설적 외피가 아니라 그 안의 문학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4).
그러나 문학성 논란의 강박만 없다면, ‘장르소설’의 문법을 따라 정유정의 소설을 읽어서 안될 이유란 없다. ‘장르’가 일종의 ‘누적과정’의 결과라면, 즉 어떤 전통예술 형식보다 직접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예술형식으로서의 대중적 내러티브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다면5), 『28』을 장르적으로 읽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다. 오히려 이런 독법이 100만 명에 육박하는 누적독자를 가진 작가의 작품이 함축하는 현재적 영향력을 제대로 읽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수십만의 독자들이 정유정의 소설을 선택한 이유, 혹은 그의 소설을 읽은 수십만의 독자들이 공유하는 인식의 공통성, 행동의 방향성은 시대적 관습, 동시대 문화와의 겹쳐 읽기를 통해 더 능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4) 정유정의 소설에 대한 한국 문학 비평장의 담론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오혜진의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자음과 모음』 2013년 겨울) 참조. 오혜진은 정유정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꾼’이라는 명명에 한국문학 비평장의 ‘배제의 수사학’이 잠재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5) 강정석, 「종말의 풍경들:종말을 재현하는 영화들」, 『문화과학』 2012년 겨울, 235쪽.


출발점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감기>와 『28』의 유사성이다. 갑자기 닥친 감기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그리고 있는 영화 <감기>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플롯을 취한다. 그리고 이 재난 영화의 설정,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28』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영화의 감독과 소설의 작가는 공통적으로 구제역 파동 때의 돼지 살처분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이 둘의 유사성은 텍스트 밖의 사건들이 전해 준 감정적, 인식적 충격에서 발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르영화나 장르소설이 ‘누적된 관습’이며 그로 인해 유사한 플롯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시대에 따라 그 관습은 변주되며 거기에는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구제역 파동에서 영화와 소설은 공히 생명의 윤리라는 문제의식, 감염과 격리·처분의 생명정치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유사성은 일정한 동시대성을 함축한다. 어떤 동시대성인가.
첫째로 바이러스의 발생. <감기>의 감기든, 『28』의 인수공통전염병이든 그 바이러스의 발생지점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인간성 자체’에서 온다. <감기>의 바이러스는 외국인 노동자가 감금된 컨테이너에서 발생하고 『28』의 바이러스는 철창에 갇힌 개들이 절규하는 아파트에서 발생한다. 두 공간 모두 질척하고 끈끈한 어둠과 피투성이의 시신으로 참혹하다. 이 참혹함은 마침내 치명적으로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잔혹함에 다름 아니다. 짐승처럼 컨테이너에 감금되어 옮겨지고 매매되는 외국인 노동자들, 개장수에게 납치되고 포획되고 도륙당하는 개들, 매매의 효율과 이윤의 원리 이외에는 모든 것이 무시되는 이 지옥이 우리를 가두어 죽일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안전. 바이러스가 우리로부터 발생했으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공통의 위험과 재난 앞에서 공공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윤리는 여지없이 파탄난다. 국가라는 관리 체계는 희생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며, 남은 생명들을 보호하는 일에 철저하게 무능하다. 할 수 있는 일은 감염된 도시를 폐쇄하고 시민들을 격리하고 그 와중에서도 통제와 규율을 강요하는 일 뿐이다. 영화는 ‘분당’이라는 실제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소설은 ‘화양’이라는 가상도시를 설정하고 있지만, 두 배경 모두 서울에 인접한 수도권 도시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는 격리되고 나아가 영화에서는 전 인류를 위해(사실은 미국을 위해) 도시를 폐쇄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모두 바리케이트를 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바리케이트는 죽어도 좋은 사람들과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경계이다.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은 무시당한다. 살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넘고, 그리하여 바리케이트의 저편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군대는 총구를 겨누고, 실제로 발포한다.
이 지옥도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자, 살리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에 개재된 가족주의와 모성애를 일단 별도로 한다면, 살아남고 살리는 일을 한 사람들은 결국 간호사 혹은 의사, 그리고 구급대원이다. 그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성을 지키는 자로 남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직업윤리’이다. 공동체적 안전망도, 공공적 윤리와 인간애도 사라진 곳에 개별적 직분만이 감염되지 않고 남았다. 각자도생의 경쟁논리와 위계화된 생명관리 체계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직분을 지키는 개인에게 부여된 소명의식은, 결국 주어진 세계에 대한 자발적 복무를 정당화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강렬하게 호소하는 휴머니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와 소설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시선이 이 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의미망들을 지워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소설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적 구도에는 끼어들 수 없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형상화, 재난이라는 설정 아래서 탐구되는 인간성의 이면들, 그리고 이러한 디테일을 떠받치는 생생한 묘사와 서사적 장악력 등은 쉽게 단순화될 수 없는 이 소설의 강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서사라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공유되는 공통성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공통성이 창의성을 의심하거나 상투성을 지적하는 빌미가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동시대적 삶의 구조에 밀착한 현재성의 이름으로 이 서사는 더 분석되어 마땅하다.


나 아닌 타자들을 잔혹하게 억압하는 인간들, 이윤을 위해 그 잔혹을 정당화하는 인간들로부터 재난은 온다. 인간성의 윤리나 공동체적 결속감이 개입될 여지없이 모두 함부로 다루어져도 좋은 물건이 되어 버린 시대에 각자의 생명은 각자 지켜야 하는 냉혹한 각자도생의 세계,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의 불안과 감염의 공포, 이 재난서사의 공통성 속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잔혹한 참상이 함축되어 있다. 정유정 소설의 대중성은 동시대 영화의 공통성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구체적인 해석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더 끔찍한 것이 왔다.


3. 사이코패스의 사회학
『7년의 밤』에 ‘오영제’가 있었고, 『28』에 ‘박동해’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악마성은 ‘서원’(『7년의 밤』)이나 ‘재형’(『28』)들에 의해 다소간 중화되거나 저지되었다면,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오영제’와 ‘박동해’를 어떤 위안이나 중화도 없이 직시해야만 한다. 『종의 기원』의 ‘유진’을 통해서. ‘오영제’는 체포되었고, ‘박동해’는 개에 물려 처참하게 죽었지만 ‘유진’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가족과 친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도. 이 징벌 받지 않는 절대 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범벅으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우리는 이미 유진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범인이 이미 밝혀진 소설의 긴장감은 사건의 발견과 유진의 기억 사이에 있는 시차, 그리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의 과정에 의해 유지된다. 부분적이거나 왜곡된 기억, 과거의 사건에 대한 뒤늦은 기록들은 반전의 역할을 하는데, 거듭된 반전 끝에 알려진 진상은 유진이 자신의 가족과 이모, 친구까지 죽이고도 살아남는다는 사실, 그리고 유진의 살인은 그가 날 때부터 그런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살인의 유전자를 지닌, 선천적 사이코패스였다.
하나뿐인 친구 해진을 수장시키고, 그에게 살인의 누명까지 씌우고 사라진 유진이 새우잡이 배에서 내리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기이한 공포는 이 절대악의 존재가 전달하는 무력감에서 온다. 이미 발생한 사건과 유진의 기억이 계속 엇갈리는 동안, 한 템포 늦게 사실을 알리는 기록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리하여 유진의 살인 혐의에 오해가 있었거나, 혹은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그 단서가 다른 진실을 밝혀 주기를 바랐다. 유진을 연민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살인과 악행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면, 가령 부모의 편애나, 유진의 본성을 과장한 이모의 처방이 일으킨 부작용이 이유라면 그 이유를 찾는 것으로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정상치에서 벗어난 존재를 억압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인정한다면, 공감의 감수성과 사회적 연대의 의미를 더 신장시킨다면, 상황은 좋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사이코패스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희망의 동력을 상실한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들을 너무 안일하게 해석하였다는, 휴머니즘적 시민윤리를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력감이 여기에는 있다.
그러나 사실 사이코패스가 더욱 공포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다. 타고난 사이코패스라는 유진으로부터 발견하는 기시감, 어쩐지 그가 소설을 위해 등장한 예외적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어머니의 목을 난자하지 않았을 뿐, 유진과 같은 인물형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한다. 타인의 죽음에 공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슬픔을 조롱하는 자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성공한 지위에서 저지르는 갖은 악행을 성공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매일 사이코패스 인간형을 만나고 있다. 심리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우리의 정체성 형성이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 하에 사이코패스를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라고 규정6)한다. 사이코패스와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의 상동성을 저자가 들고 있는 예를 통해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만남이 피상적이긴 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자신의 행동에도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면 항상 남 탓이다. 심지어 남 탓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믿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효과가 입증된 도구적 폭력을 사용한다. 여기서 ‘도구적’이란 ‘합리적’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감성 같은 통속적인 것에 흔들리지 말고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다. 감정 따윈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이 있는 척 꾸미는 것도 성공의 고정 레퍼토리이다.7)


어느 칼럼니스트가 요약한 출세를 원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요건인데 이 내용은 ‘사이코패스 핸드북’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칼럼니스트가 활용한 핸드북의 원제는 ‘수트를 입은 뱀(Snakes in Suits)’이다.
공동체의 윤리 대신 계약서만 남은 세계, 성공이 만물의 척도이며 경쟁에 승리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 사이코패스가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세계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하건대, 유전자는 고정불변의 원천이 아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한 종만 생존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따라 종은 유지되고 변이의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니 사이코패스적 인간형은 신자유주의시대에 가장 잘 적응한 ‘적자(適者)’가 될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대중의 매혹과 공포는 살아남기의 욕망,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반영한다. 유전자를 바꾸는 일은 살아남기의 조건 자체를 바꾸는 일과 연관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괴물과 동거하거나, 혹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성공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는 우리들 삶의 조건과 연관되면서 대중적 흡입력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절대 악의 근원을 묻는’ 식의 추상적 표현을 넘어서는 현실감으로 읽혀야 한다.


6) 파울 페르하에허(장혜경 역),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반비, 2015.
7) 앞의 책에서 189-190쪽에서 부분 인용.


4. 무한히 확장되는 ‘문학적인 것’들
정유정의 소설이 한국문학의 대중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그 대중성이라는 것이 한두 가지의 테마로 간단히 정리될 수도 없다. 이 글에서 읽어낸 정유정 소설의 대중적, 사회적 함의는 과장된 것이거나 혹은 일면적인 것일 수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대중성을 키워드로 정유정을 읽고자 한 것은, 소설이 발표되고 독자와 만나고, 그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의 맥락과 효과를 생략한 채 텍스트 자체에만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경향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28』에서 ‘메르스 사태’를, 『종의 기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떠올린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본의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무차별 살해한 살인자의 웃는 얼굴이 화제가 되고 있다. 타인의 생명에 무감각한 인격,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위해를 정당화하는 인격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우리들 삶의 안정성과 윤리감각의 기반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유정 소설이 포착하는 테마가, 그리고 그 서사의 진행이 함축하는 대중성의 공유감각이 이러한 현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설정한 재난과 범죄의 현장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통적 휴머니티로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불안한 조건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변화의 불가능성, 현실의 수용과 적응이라는 공통적 이데올로기가 이 소설들의 배경에는 깔려 있다. 그리하여 안일한 기대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수용하거나 적응해야 하는 삶의 절박한 호흡이 소설읽기의 시간을 긴장시킨다.
그러니 다시 묻자.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국제적 권위의 문학상이 소설의 판매부수를 올리고 독자들을 견인한다면 그에 대한 해석은 ‘순’문학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절대다수의 대중이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왔다면 그 대중성은 오늘의 한국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한국문학 담론은 혹시 베스트셀러 순위로 뭉뚱그려질 수 없는 이 맥락들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했던 것은 아닌가. ‘문학성’이라는 것이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고 시대적 변화와 당대의 문화환경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다. 베스트셀러 순위로 계량화되거나, 텍스트 내부로 환원된 ‘문학성’의 의미를 대중적, 사회적 소통의 방향으로 돌려놓는 일. 문학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펼쳐진 맥락들을 우리들 삶의 환경과 조건 위에서 한껏 팽팽하게 당겨 읽으며 그 안에서 ‘문학적인 것’의 소통을 확장시키는 일.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이상한 한국문학은 이 과정에서 제대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





문학평론가 서영인

작가소개 / 서영인

-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문학의 불안』이 있음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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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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