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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곁

  • 작성일 2009-05-27
  • 조회수 1,874

구름의 곁

김중일


1. 오답 노트

갸륵하게도 여전히 지구는 구름에 얽매여 있습니다. 지구는 얼마나 더 오랫동안이나 구름에 붙들려 있어야 할까요?

얼마나 더 아교풀 같은 구름에 들러붙어 우주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걸까요?

검은 시험지에 인쇄된 지문 옆에는 푸른 눈물처럼 지구가 그려져 있고

시험지가 나붙어 있는 어둑한 교실 뒤에는 둥근 압정처럼 낮달이 떠 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기운 햇볕이 오려 놓는 처마 아래 기우뚱한 툇마루에 앉아, 지난 기말고사 시험지에 머리를 파묻고 틀린 문제 풀이에 몰입하고 있다.

소년은 어두워져도 아빠를 기다리며, 틀린 문제를 마저 풀고, 내일까지 오답 노트에 정답을 백 번씩 써 가야 한다.

소년은 대문 밖 키 작은 나무 길게 자란 우듬지 그림자를 발끝으로 툭툭 걷어차며 저녁이 가까웠음을 알아챈다.

 

2. 세 번째 수수께끼

유진― 아직 듣고 있나, 달나라 불법 노점상 루나 프로스펙터에서 구입한 구름무늬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이 촌 동네 최초로 구름의 곁에 묻힌 사람. 당신이 깊이 잠든 구름의 곁으로 푸른 눈알 같은 두 개의 운석이 낙하한다. 구름은 아무리 여러 번 몸을 뒤척여도 불편해 보이는 특유의 자세로 누워 있다. 코앞에서 본 당신의 얼굴에는 커다랗게 부릅뜬 두 개의 크레이터가 있고, 당신의 텅 빈 눈 속에는 구름의 파고가 높다. 우리는 이제 고철이 된 니어 슈메이커(NEAR Shoemaker)호를 당신의 눈 속으로 밀어 보지만 당신의 눈 속은 요즘 무척 거칠고, 유진, 그래도 우리는 민다. 다시, 우리는 오늘 밤 일생일대로 구름의 가장 가까운 곁으로 근접할 예정에 있다. 날씨는 좀 어떤가. 구름을 폐종양처럼 키우며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세상 모든 저녁 허공의 자세. 우리는 다 늘어진 북을 찢듯, 그 허공을 찢었고, 유진― 아직도 구름에 얽매여 둥글게 자전만 반복하는 네 눈물 속의 서울에서 난 전혀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결국 아들에게 수수께끼에 가까운 숙제만을 남겨 주고 말았다. 대상 없는 절망, 구름에 대한 막연한 증오 따위들, 오늘 밤은 땀복 같이 척척한 중력을 벗어 버리고, 진공의 링을 빠른 스텝으로 떠돌고 있을 마지막 세 번째 수수께끼처럼, 누구도 내 기분을 풀지 못한다.

 

3. 진공

하얀 천에 둘러싸인 채 들것에 실려 나오는 구름의 잔해들

우주의 진공 속으로 썩지 않고 영원히 부유하는 정답

 

4. 청동 레테를 돌리는 밤

쉼 없이 북쪽으로 걷는다고 해서 구름에 가까이 이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녹청이 잔뜩 낀 아스트롤라베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서울 한가운데의 폐건물 옥상 위로 점거 농성 중인 불길들, 열기구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한 꽃송이 검은 구름도 보인다.

물대포처럼 커다란 구렁이가 사람들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휘감고, 탈출을 위해 그들은 열기구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 속에는 소년의 아버지도 있다.

헌신적인 아버지는 소년의 시험 문제를 온몸으로 풀고 있는 중이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열기구가 서서히 이륙한다.

폐건물 옥상은 불길에 휩싸인 함선

그들이 항해할 방향을 지시해 주는 아스트롤라베의 레테는 긴박하게 돌고, 적도의 자표선과 특정 위도의 지평선, 회귀선 등이 공중의 전깃줄처럼 뒤엉킨 채 표기되어 있다.

지상도 천상도 아닌 옥상은 끊는 피죽처럼 뜨겁게 용솟음치고, 소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태운 열기구가 구름의 가장 근접한 곁으로 멀어져 갈 시각,

다 늦게 엄마도 황급히 어딜 가고 없는 빈집, 소년은 아직 비정형의 고독과 싸우며 틀린 정답을 아흔아홉 번 썼고, 한 번을 마저 쓰다가 잠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면 바야흐로 점성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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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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