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무렵
- 작성일 2024-06-0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634
백로 무렵
전영관
카페 화단의 칸나가 뭉그러지고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꽃이 꽃을 지우는구나
삼복 지나 완경(完經)을 겪은 칸나는 검붉었다
걸그룹처럼
허리를 흔드는 코스모스들을 힐끗거렸다
꽃은 천년 고목에서 피어도 어린 요괴다
철지난 능소화가
망하고 컴백한 가수인 양 어린 척했다
천수국이 교복 차림의 여고생으로 모여 있었다
교실은 크고 긴 플라스틱 화분이다
골목 끝 공원으로 가을 마중 나갔다
손사래치고 버둥거려도 올 것은 오더라
검버섯 피어서
눌은밥 같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마음도 눌은밥처럼 흥건해졌다
노인정 앞에
푸르게 힘찬 잣나무를 심어 드리고 싶었다
청설모도 재롱 피울 것이다
목련 만발했던 봄날에
“내가 몇 번 못 본다고 쟤가 저렇게 애쓰나 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 넣는 습성도 줄이기로 했다
자폐를 느끼기 때문이다
올가을엔 갈색 재킷이 어떨까 하며 들춰 보니
태반이 검은색이고 빨강이 몇몇이었다
감정의 극단을 왕복했던 것이다
오늘 처음 가을 옷을 골랐는지
지나는 사람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이의 외출이 즐겁기를
고민 끝에 고른 옷일 테니 만족했기를 바랐다
그 집 드레스 룸에서는 옷이 옷을 지웠겠다
추천 콘텐츠
편지 - 비문증 신혜정 눈, 코, 입을 지우고 얼굴을 떠올립니다 막대기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주변을 없애는 모래놀이 바다를 하얗게 떠 놓은 달 국자 한가운데가 텅 비었습니다 빈 곳을 그리기 위해 가장자리를 떠올립니다 그것은 일테면 사건의 지평선 배경을 그리면 부재가 완성되는 복숭아가 있던 정물 달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 시간을 하얗게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 관리자
- 2024-11-01
편지 - 에필로그 신혜정 서쪽으로만 뜨는 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져서 서쪽으로만 뜨는 당신의 반대 방향으로만 눕고 반대 방향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이 지고 뜬눈으로 당신이 떠오르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이드미러의 붉은 신호등처럼 지나치는 의미 없는 시그널들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림자가 해 쪽으로 조금 기울었고 나는 눈이 조금 멀었습니다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도는 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 관리자
- 2024-11-01
불쑥 맹재범 냉장고 깊숙이 마음이 있다면 남은 반찬을 다 먹고 나서야 꺼낼 수 있을까 오늘은 그냥 봄쑥을 캐러 간다 문밖에 오래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척하는 계절이 봄쑥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너무 좋으면 울어버리는 버릇이 있고 내가 사랑한 것들은 울음 앞에서 돌아서는 버릇이 있다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가끔 봄처럼 금방 녹아버리는 4월의 눈처럼 더 깊숙이 넣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잘 버무려서 쪄낸 쑥 한 줌을 접시에 담아두고 너에겐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오는 버릇이 있었지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할 저녁을 차리며 냉장고를 열면 완전히 익어버린 마음 하나가 쑤욱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 관리자
- 2024-1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