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칠판이 될 때
- 작성일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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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칠판이 될 때
박형준
비 오는 밤에
고가도로 난간에 기대어
차들이 남기는 불빛을 바라본다
도로의 빗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나는 차들이 달리며 빗물에
휘갈겨 쓴 불빛들을 읽으려고 하지만
도로에 흐르는 빗물은
빠른 속도로 불빛들을 싣고
고가도로 아래로 쏟아진다
빗물받이 홈통 주변에
흙더미가 가득하고
간신히 피어난 풀꽃 하나가
그 아래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틴다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에 올라서서
가장 낮은 자리에 버려진 칠판을 떠올린다
번져서 하나도 읽지 못하더라도
빗물에 쓰여진 글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차들이 남긴 불빛들과 함께
저 아래 빗물받이 홈통으로 떨어질지라도
꿋꿋하게 버티는 풀꽃의 결의를 생각한다
고가도로 밑
물이 불어나는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강물에 팔딱이며 쓰고 있을 글자들을
마음 어딘가에 품고서
나는 비 내리는 고가도로(생략해주세요) 난간에 기대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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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4-11-01
편지 - 에필로그 신혜정 서쪽으로만 뜨는 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져서 서쪽으로만 뜨는 당신의 반대 방향으로만 눕고 반대 방향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이 지고 뜬눈으로 당신이 떠오르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이드미러의 붉은 신호등처럼 지나치는 의미 없는 시그널들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림자가 해 쪽으로 조금 기울었고 나는 눈이 조금 멀었습니다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도는 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 관리자
- 2024-11-01
불쑥 맹재범 냉장고 깊숙이 마음이 있다면 남은 반찬을 다 먹고 나서야 꺼낼 수 있을까 오늘은 그냥 봄쑥을 캐러 간다 문밖에 오래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척하는 계절이 봄쑥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너무 좋으면 울어버리는 버릇이 있고 내가 사랑한 것들은 울음 앞에서 돌아서는 버릇이 있다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가끔 봄처럼 금방 녹아버리는 4월의 눈처럼 더 깊숙이 넣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잘 버무려서 쪄낸 쑥 한 줌을 접시에 담아두고 너에겐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오는 버릇이 있었지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할 저녁을 차리며 냉장고를 열면 완전히 익어버린 마음 하나가 쑤욱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 관리자
- 2024-1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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