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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4-03-23
  • 조회수 1,030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한 남자를 보았었다. 지하철 선로 위로 떨어진 생판 모르는 취객을 몸을 날려 구한 남자. 달려오는 지하철 앞에서도 그의 모습은 용감무쌍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지만 그는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었다. 누군가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오면 주저 않고 달려들 마음을 평생 변하지 않고 지켜왔다. 달려들어 구한 적도 있었고,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난, 어머니가 되었다.

 

 

* * *

 

 

“성훈아. 엄마는 우리 아들이 소방관이 되었으면 좋겠어. 얼마나 멋진 일이니. 위험해서 걱정이 많이 되지만, 엄마의 꿈을 아들이 이뤄줬으면 해. 물론 성훈이가 원하는 꿈을 이루는 게 엄마의 가장 큰 기쁨일 테지만……. 아무튼 사람을 구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내 아들이 어렸을 때, 이런 말을 종종 해 준 기억이 있다. 내가 살아온 정의로운 세상을 고스란히 주려 했다. 그 인터뷰가 내게 준 것을 아들에게도 주고 싶었다. 아들에게도 내 신념이 평생의 스승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주는 아들을 보며, 더없이 흐뭇했더랬다. 만족스러웠다. 아이는 밝고 정의로운 소년이 되었다. 유쾌하고 당찬 아들을 두었다며 부러워하는 시선을 여유 있게 즐기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라고 부모와 불화가 있을 거라는 말도, 우리 집에서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분명 그랬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는 곳에서 1m 가량 떨어진 곳에,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앉아 있는 성훈이가 그렇게 낯설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10시 20분.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꼭 한 번 안아주고는 과일을 깎아줬어야 할 시간.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먼저 눈물이 흘렀다.

 

 

* * *

 

 

저녁 9시 42분이었다. 불현듯 마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너무 늦지 않았어? 마트도 문 다 닫았지.”

남편이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성훈이가 과자 먹고 싶다고 했잖아. 힘들게 공부하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까 안 까먹고 사왔으면 됐잖아. 남편의 혀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 얼른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빠르게 걸었다. 성훈이가 오기 전에 얼른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거리는 어두웠다. 가로등이 켜진 길 조차도 어둠이 짙었다. 을씨년스러운 거리 풍경에, 남편에게 같이 나오자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난 거의 뛰듯이 걸어, 큰 길로 접어들었다.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번화가에는 성훈이네 학교 교복도 꽤 보였다. 혹시 성훈이도 있나 줄곧 두리번거리다 보니 걸음이 더뎌졌다. 그래서인지 마트에 도착한 것은 예상한 시간보다도 몇 분이나 더 걸린 55분 이었다. 진열장 사이를 휙휙 돌며 초콜릿 칩과 감자 칩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지갑을 다급히 꺼냈다.

“2050원입니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다 멈칫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50원이 뭐람. 50원이. 게다가 분명 저번에 샀을 때에는 2000원에 샀던 것 같은데.

크흠. 판매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멈칫해있던 시간이 별로 길지도 않은데 저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감 시간의 손님이 귀찮은 모양이었다. 석연치 않지만 거스름돈인 동전 한 움큼과 과자가 담긴 검은 봉지를 얼른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50원. 50원……. 아무리 생각해도 왜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그 새 가격이 올랐나. 경황이 없어 영수증 확인도 안 했다. 주머니를 뒤져 950원과 함께 주머니에 쑤셔 넣은 영수증을 꺼냈다. 꼬깃꼬깃해진 걸 펴고 휴대전화를 꺼내 불빛을 비추었다. 휴대전화 화면 위로 'PM 10:00'라는 글자가 비춰졌다. 영수증의 품목 글씨도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초콜릿 칩’, ‘감자 칩 - 매운 양념 맛’

 

아뿔싸. 성훈이가 좋아하는 건 고소한 맛인데. 50원 더 비싼 매운 양념 맛을 사온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마트는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것 같고, 어쩔 줄 모르다가 이내 난 체념했다. 여전히 켜진 채인 휴대전화 시계가 10시 2분임을 알려주었다. 성훈이가 집에 왔을 것 같았다. 배고플 텐데.

집에 한 시라도 더 빨리 돌아가기 위해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지름길을 택했다. 으스스한 분위기도 풍겨왔지만, 아까 오다가 본 경찰관이 애써 마음을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름길과 번화가가 나뉘는 길에서 음주 단속을 하는 경찰관에게 뭐라도 건네지 못한 게 유독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지름길에서 그나마 가장 밝은 구멍가게 근처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가게 안쪽에 진열된 고소한 맛 감자 칩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성훈이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은 글씨로 된 ‘10:04’가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신호는 길지 않았다.

“응 엄마.”

“엄마는 밖인데, 넌 집에 왔지?”

“아뇨, 사실 오늘 좀 늦게 끝나서 집에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문자하려던 참이에요.”

아, 그래도 얼른 가면 너를 집에서 맞아줄 수 있겠구나. 다행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본론을 꺼냈다. 성훈이는 웃으며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말해주었다.

“매운 양념도 맛있어. 얼른 집에 가요. 나도 금방 갈게. 좀 이따가 집에서 봐.”

“그러자. 어둡더라. 조심하고.”

전화를 끊고, 구멍가게 앞에 멈춰선 발을 다시 움직였다. 역시 기특한 우리 아들, 이란 조금은 으쓱한 생각을 하면서.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고, 길에는 내 터벅거리는 발소리와 자꾸만 무릎에 사각사각 부딪히는 과자 봉지 소리뿐이었다. 몇 분만 더 걸으면 돼,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심은 더욱 커졌다.

그 때였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 귀를 예민하게 자극하는 퍽- 소리는 분명 구타였다. 어디지. 난 다시 갈급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에 청각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이전보다 더 어두운 쪽의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좁은 건물 사이 벽이었지만, 학생 서넛과 주저앉아 있는 아이가 있을 정도의 공간은 확보되어 있는 위치였다. 이런 시간에, 이런 야심한 곳까지 와서 이러는 걸 보니 확실히 걸릴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이런 일을 가만 두고 보지 말라고 가르친 아들의 얼굴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야. 우리 이러는 거 한 두 번이냐? 돈 있으면 얼른 얼른 쳐 뱉으라고.”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바지통 줄인 게 예사롭지 않은 불량한 남학생이 쓰러져 있는 아이를 찼다. 난 미간을 찌푸려 좋지 않은 시력으로 쓰러진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몰래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만 숨을 헙 하고 들이마셨다.

쓰러져 있던 학생도, 서 있는 몇몇 학생도 모두 같은 교복을, 내게 너무 익숙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난 다급히 쓰러진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를 썼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성훈이는 저렇게 무력하게 쓰러져 있을 리 없는 아이야. 아까만 해도 나와 멀쩡하게 전화를 했는걸. 아니야. 아니야…….

“이주영. 더 맞고 싶어? 너 오늘 용돈 받는 날이잖아. 어?”

미안하게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세히 보니 또래보다 작고 여린 체구의 남자 아이였다. 설마 하던 마음이 사라지니 가뜩이나 괘씸했던 마음이 이제는 더더욱 화가 났다. 약자를 괴롭히다니. 만화 속 정의의 사도들이나 할 법한 말들이었어도 내게는 인생의 신념이었다. 더구나 내 아이의 학교였다. 저 쓰러진 아이가 성훈이었다면, 상상의 나래가 내 머릿속을 아찔하게 강타했다. 짓밟힌 교복 셔츠가 더러워보였다. 누군가 다시 그 아이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어떻게든 해야 했다.

달려들 뻔한 내 자신을 진정하고, 신속하게 뒤를 돌아서 오던 길 쪽으로 뛰었다. 여기처럼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했다가는 들키기 십상이고, 도망칠 우려가 컸다. 난 몇 분 전 마주친 경찰관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야, 조금만 참아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언제 마지막으로 했나 싶은 전력질주를 했다.

숨 가쁘고 긴박하게 상황이 돌아갔다. 순식간에 경찰관이 있는 곳으로 왔고, 그는 여전히 단속 중이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연락을 취하고는 나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다시금 달리는 그 길이 아까와는 달랐다. 뛰는 내내 밤공기가 날카롭게 얼굴을 스쳐갔다. 흙투성이인 학생의 형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렴. 거의 다 왔단다.

다행히도 그 학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서너 명이 번갈아가면서 시비를 걸었고, 꼼짝 못한 채 앉아 있는 아이는 기진맥진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어둠이 철저히 가려주고 있었다.

경찰관은 아까 내가 숨어있던 곳에 몸을 웅크렸고, 곧 지원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난 부득불 지켜보겠다고 우겨서 그의 지시에 따라 조금 더 먼 곳에 서 있었다. 내가 발견한 일이니, 결과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 학생이 무사히 구해지는 걸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물론, 학교 폭력을 한 그 개 같은 녀석들이 제대로 걸리는 지도 봐야 했다.

경찰의 배려라는 건 알았지만, 멀어도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먼 거리에서도, 유난히 잘 들리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조그만 학생을 깔보고 서있던 한 학생의 목소리였다.

“지랄맞게 여기서 뭐하는 건지. 가뜩이나 늦는다고 말해놨는데 더 늦게 생겼잖아. 야, 다 닥쳐 봐. 전화해야 돼.”

그 학생은 전화를 거는 듯 했다.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 전화 액정 위로 아들과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집에 이미 도착했죠? 나 좀 더 늦을 것…….”

“야! 너네 다 동작 멈춰!”

이런 식으로 내가 사람을 구하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전화기 너머의 소란스러움이 귀를 후벼 팠다. 얼마나 멍하니 있었는지, 상황이 모두 정리되고 경찰관이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다 끊긴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 * *

 

 

학생 여럿이 가만히 앉아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들. 그리고 서 있는 목격자인 나.

한참을 말없이 있던 아이들을 경찰은 어지간히 답답해하는 듯했다. 난 그 오랜 시간동안 쭉 가해자를 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해자. 가해자를. 가해자를 쳐다보고 있었나.

난 그저 내 아들을 보고 있었다. 지구대 안에 들어온 이후로 나와 눈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쭉 그런 생각만 들었다.

조그만 학생이 조사를 마쳤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창백한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구해주셔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난 그 말에 대해 말로도, 표정으로도 아무 응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고 있는데, 성훈이가 고개를 느릿느릿 들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비어있던 눈동자에 점점 무언가가 들어찼다.

난 성훈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니까.

‘당연한 거라고, 구하지 않는 게 인간도 아닌 거라고 말해요. 늘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 아이의 눈에 가득한 증오가 너무 낯설었다. 그 눈 속의 감정들은 내가 너를 보는 눈동자에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우습게도 엄마인 내가 봐왔던 것 중 가장 진실해 보이는, 생기 넘치는 눈이었다. 이런 눈동자를 본적이 없다. 이미 오래 전에 내 눈동자 속에 억지로 가둬놓았던 아이의 진짜 눈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매섭게 노려보는 그 눈빛이 마치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같았다.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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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쿽!” 남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본인도 자신이 낸 괴성에 멋쩍은지 콧잔등을 긁었다. 옷에 찌든 술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거참, 뭔 놈의 꿈이…….” 남자는 혀를 차며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간밤에 꿨던 악몽이 끊긴 필름처럼 드문드문 재생되고 있었다. 잠에서 깨고 시간이 흐를수록 끊김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남자가 눈곱을 대충 떼고 만화책을 대여섯 권 훑어볼 즈음엔 핵심적인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꿈 따위가 어떻든 개의치 않고 책장을 넘기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이미 예전에 몇 번 봤던 것이어서 질려갈 때쯤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하단의 시계는 오후 3시임을 알려주었다. 게임에 접속하자 온통 피바다인 게임의 시작 화면을 보고 남자는 불현듯 간밤의, 이제는 흐릿해진 꿈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기억나는 게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었다는 ‘전체적인 느낌’뿐이고, 기억에 남는 광경은 딱 하나. 집 바닥 위에 피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그의 노모의 시신이었다. 바닥엔 남자의 죽은 어머니가 흘린 피로 가득했다. 다른 내용에 대한 기억은 백지가 되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유달리 생생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왜 그 장면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을까. 어머니라서? 아니면 피를 한가득 흘리는 시체에 대한 것이라서?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이도 저도 아닌 본인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술에 취해 들어오는 자신과 자신이 오는 날이면 언제든 집에 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남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뭐, 이번 달엔 세 번째인가. 어제 초저녁쯤에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여기 오겠다고 전화하고 난리를 피웠으니.’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남자는 게임 플레이 화면이 뜨자 바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손으로 옆을 더듬어 언제 땄는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냥 그저 그런 꿈일 뿐이야. 그래봤자 저 문 밖에서 자기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인데. 악몽을 꿨으니 로또라도 사볼까. 남자가 게임에 열중해 있는 동안, 바깥에서 제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안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스피커 소리 때문에 긴가민가한 거야. 들렸겠지. 남자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확신했다. 게임 하단에 ‘접속한지 4시간째’란 알림이 떴다. 눈도 뻐근하고, 배도 고프고 해서 남자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책상 위에는 빈 맥주 캔 두 개와 몇 번 떼어먹은 말라비틀어진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무심코 한 조각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여기가 심부름꾼 노릇하던 술집도 아니고 집인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순이 노인네에게 뭐라도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의자에서 몇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켰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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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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